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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초록/2015년도 설교초록

구원의 현실에 귀와 입을 열어라 (연중23주일/ 마르 7:24-37)

 

2015년 9월 6일 (연중23주일/여성선교주일)

마르 7:24-37  

24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띠로 지방으로 가셨다. 거기서 어떤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계시려 했으나 결국 알려지고 말았다. 25 그래서 악령이 들린 어린 딸을 둔 어떤 여자가 곧 소문을 듣고 예수를 찾아와 그 앞에 엎드렸다. 26 그 여자는 시로페니키아 출생의 이방인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달라고 간청하였다.

27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는 빵을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8 그래도 그 여자는 "선생님, 그렇긴 합니다만 상 밑에 있는 강아지도 아이들이 먹다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얻어 먹지 않습니까?" 하고 사정하였다. 29 그제야 예수께서는 "옳은 말이다. 어서 돌아가 보아라. 마귀는 이미 네 딸에게서 떠나갔다." 하고 말씀하셨다. 30 그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보니 아이는 자리에 누워 있었고 과연 마귀는 떠나가고 없었다.

31 그 뒤 예수께서는 띠로 지방을 떠나 시돈에 들르셨다가 데카폴리스 지방을 거쳐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32 그 때에 사람들이 귀먹은 반벙어리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주시기를 청하였다. 33 예수께서는 그 사람을 군중 사이에서 따로 불러내어 손가락을 그의 귓속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시고 34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쉰 다음 "에파타." 하고 말씀하셨다. '열려라.'라는 뜻이었다. 35 그러자 그는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36 예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셨으나 그럴수록 사람들은 더욱 더 널리 소문을 퍼뜨렸다. 37 사람들은 "귀머거리를 듣게 하시고 벙어리도 말을 하게 하시니 그분이 하시는 일은 놀랍기만 하구나." 하며 경탄하여 마지않았다.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우리에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주시나이다. 비옵나니, 우리가 주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하늘나라의 소망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온전히 이루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  

                            구원의 현실에 귀와 입을 열어라 (마르7:24-37)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참된 신앙생활, 좋은 신앙생활이란 어떤 것일까요? 특별히 우리 성공회가 함께 하는 신앙생활, 안내하는 신앙생활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우리에게 허락된 삶을 잘 살고, 그 삶에 이어져있는 죽음, 어쩌면 안팎으로 잇대어 있어 실상은 삶의 일부요 또 전부인 죽음까지도 잘 죽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과 죽음을 하느님의 은총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일이 신앙생활입니다. 

성공회는 성육신 신앙을 중시한다고 표현하는데, 삶을 은총으로 허락된 것을 감사히 여기고 이 세상의 삶을 통해 그 은총을 드러내는 일이 하느님을 찬양하고 높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에 적용되기 어렵고 삶으로 경험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은 실은 신앙의 이야기로 좋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이 세상과 무관한 저 세상에 대한 신비한 정보를 전하고 있는 신령한 책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착각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살아계심을 삶과 죽음을 통해서 경험한, 그러니까 실존과 역사를 통해 하느님을 경험한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머리로 억지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책상에 앉아서 성찰을 하기로 말하면 이를테면 스토아학파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견해가 빼어날지 모릅니다.  

우리도 연약하고 부족하여서 당연히 신앙을 통해서 살아갈 힘을 얻고자 합니다. 그 힘에는 단순한 초자연적인 능력뿐 아니라, 의미와 목적과 가치에 대한 부분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어떤 경험이나 생각을 교리로 확정하고 확신하며 그 확신을 고집하고 내세우며 의지하여 살아가는 일은 그리스도교의 신앙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살아계신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일입니다. 

오늘 성경의 주제들은 은총을 누리는 삶에 대한 교훈입니다. 은총에 대하여 우리가 가지는 태도에 대한 반성입니다. 

우리는 좋은 의도로 구별한 일도 곧잘 차별의 장벽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렇다고 구별을 없애는 일이 최선일까요? 아니 그것이 가능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의 다른 이름은 식별입니다. 식별은 소중하고 불가피합니다. 다만 그러나 식별의 결과가 차별일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서는 그 식별과 차별의 차이를 우리에게 인상깊게 보여줍니다. 주인공은 예수님과 시로페니키아 여인입니다.  

시로페니키아 여인은 예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딸을 마귀에서 건져주시길, 딸을 구원해주시길 청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도움을 주셔야 할까요? 우리는 너무도 당연히 예수님이시니까, 모든 이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니까 도와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여러분도 이런저런 기도제목을 가지고 오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그 기도를 들어주셔야 하나요? 우리가 봉헌을 하기 때문인가요? 시간을 들여 성찬례를 드리기 때문인가요? 우리가 무엇을 내세울 수 있을까요? 

잠깐 멈추어봅시다.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관념으로 생각하고 우리의 관념을 통해서 만나면 안됩니다. 우리는 명분을 통해서 하느님을 생각하면 안됩니다. 가령, 정의와 평화와 사랑과 진리 모두 좋은 말이지만 이것이 너무 쉽고 간단하고 분명하게 명분으로 제시되면 곤란합니다. 구원은 하느님이 명분을 지켜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인간으로 사셨던 예수님께서 이 고통스런 세상, 당혹스런 세상 속에서 사람들과 함께 구하시고 얻으시고 누리시고 전하셨던 하느님의 은총이 실제 어떻게 구현되는가 하는 구체적인 삶의 이야기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천년 전에 이스라엘 사람, 곧 유대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분의 꿈은 먼저 야훼 하느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이루시려는 “하느님나라”를 회복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사야가 노래한 하느님 나라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무서워하지 마라. 너희의 하느님께서 원수 갚으러 오신다. 하느님께서 오시어 보복하시고 너희를 구원하신다." 그 때에 소경은 눈을 뜨고 귀머거리는 귀가 열리리라. 그 때에 절름발이는 사슴처럼 기뻐 뛰며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리라. 사막에 샘이 터지고 황무지에 냇물이 흐르리라.” 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세상입니다. 그 하느님나라에 모든 나라의 백성을 부르시는 일이 예수님이 깨달은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구원을 전지전능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 해치우시는 어떤 일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이 세상의 현실 가운데, 사람들의 인식과 실천을 전제로 하여, 근본적이고 중요한 변화를 이루어내는 일입니다.  

그것은 하루 아침에 뒤집어엎어서 이룰 수 있는 권력구조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쩌면 사탄은 예수님께 그런 방식의 성취를 유혹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확인한 것은 오로지 인간으로서, 인간의 태도와 능력을 가지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 이상의 것을 다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하느님나라의 꿈,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그 꿈이 마치 “농부가 땅을 가리지않고 씨를 뿌리는 일에”, “ 씨앗이 하루하루 보이지 않게 자라나 우거지는 일에,” “적은 누룩이 전체 밀가루를 변화시키는 일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끝없이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장면에서 예수님은 만남에 지쳐서 좀 쉬시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또 사람들을 만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반응은 좀 피곤해서 보이신 까칠한 반응인지도 모릅니다.^^) 

예수께서는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는 빵을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통상은 유대인들의 이방인 차별에 초점을 두고 “강아지”로 모욕당한 여인의 딸에 대한 사랑과 인내와 항변에 신앙적인 의미를 부여합니다. 예수님은 짐짓 여인을 시험하고 그를 통해서 제자들과 사람들의 통념을 고쳐주시려고 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은 다른 초점을 기억하셔도 좋습니다. 예수님은 현실 속에서 매우 현실적인 태도와 말씀으로 구원의 현실성을 안내하십니다. 예수님이 이루시려는 일은 당신의 능력으로 모든 이들의 요청을 다 들어주시는 시공을 초월한 해결사로서 명망을 얻고 권력을 얻는 일이 아닙니다. 그저 사람들의 필요를 동정하여 이루어주시는 일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신 하느님의 나라를 회복하는 일이 먼저입니다. 예수님은 냉정하게 담담하게 그 진실을 말씀하신 것은 아닐까요? 실제로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분노하거나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자칭 신앙인이요, 정의와 평화를 외치는 이들이 너무도 빨리 스스로의 기대와 다른 현실에 직면하면, 대단히 분노하고 좌절하고 자기 상처를 과장해서 확대하며 자기 연민과 위로에 빠져버리기 쉽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루어가시는 구원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고 욕망하는 구원이 중요하다고 착각하고, 현실을 분명히 이해하고 견디려는 의지는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나 이 이방인 여인은 예수님께서 당연히 자신의 요구를 해결해주어야 한다고 명분을 내세워 철없이 분별없이 믿고 있지는 않습니다.

도리어 여인은 현실을 분명히 이해합니다. 동화 같은 현실이 아닙니다. 좋은 의도로 구분된 식별이 이미 차별의 장벽이 되어, 누구도 쉽게 뚫기 어려움을 깊이 의식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현실 너머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차원의 진실을 확신합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인정하면서도 하느님 은총의 본질과 특성을 곧바로 지적하며 물러서지 않습니다.  "선생님, 그렇긴 합니다만 상 밑에 있는 강아지도 아이들이 먹다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얻어 먹지 않습니까?"

그 여인은 어쩌면 이런 마음을 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 선생님, 이스라엘과 이방인 사이에 구분을 두는 그 식별은 인정하겠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현실은 식별의 결과를 곧잘 차별로 만들지만, 하느님의 은총은 차별이 없는 것 아닙니까? 하느님의 은총은 나누어도 적어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욱 풍성해지는 것 아닙니까?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보이셨듯이 부스러기 같은 은총이라도 모으면 열두 광주리 이상으로 풍성한 것 아닌가요? 제게 부스러기의 은총이라도 베푸시는 일이 도대체 뭐가 문제가 된다는 말씀이세요?” 

예수님은 흔쾌히 동의하고 입장을 바꾸십니다. "옳은 말이다. 어서 돌아가 보아라. 마귀는 이미 네 딸에게서 떠나갔다."  

그래서 이제 인류의 신앙이 한 걸음이 더 앞으로 나갔습니다. 이 한 걸음이 작아보이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위대한 한 걸음입니다. 관념의 하느님께 관념의 명분을 요청해서 얻어낸 관념의 진보가 아닙니다. 철벽같은 현실에 부딪혀서 진정과 진심을 다하여 조르고 설득하고 함께 얻어낸 한 걸음의 진보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이런 작지만 용기있고 진실된 노력입니다. 여전히 선민으로서의 이스라엘이 중요하다는 사실이 다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선민의식이 이방인을 함부로 차별하고 무시하는 근거가 되지는 못하게 되었습니다. 현실을 초월한 명분이 예수님을 바꾸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현실 속에서 명분을 수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방인이 아니라 유대인 지역의 갈릴래아에서 반벙어리를 치유하시는 이야기로 옮아갑니다. 정작 강아지 같은 이방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인 유대인이 반벙어리 신세입니다. 

반벙어리를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방법은 묘한 구석이 있습니다. 말씀 한마디로 보이신 권능이 아닙니다. 반벙어리는 귀가 닫혀서 말하는 능력도 잃어버리고 어눌해진 것입니다. 반벙어리의 귀에 손가락을 넣으십니다. 그리고 침을 발라 그것을 그의 혀에 대시고 한숨을 쉬며 에파타!, 열려라고 외치십니다. 그리고 치유가 일어납니다.  

어쩌면 우리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요 제자인 우리들이 귀머거리 반벙어리는 아닐까요? 우리의 귀는 무슨 말씀을 듣고 있나요? 우리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요? 하느님의 백성이요 주님의 몸을 이룬 제자라면서, 정작 우리들 끼리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까? 무엇보다 세상을 향해서 어떤 말씀을 분명히 전하고 있습니까? 

제가 드리는 말씀이 우리들의 귀에 넣으신 주님의 손가락처럼 쓰이길 기대합니다. 예수님의 침이 뭍은 손가락으로 우리들의 혀에 대어지길 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삼위일체 하느님을 은총을 우리의 인격으로 만나고 누려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람들을 만나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들을 만나주십니다. 이 성찬례가 바로 그 자리입니다.  

주님의 선언을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기억합시다. “에파타! -열려라!”

우리들의 생각과 마음과 존재가 열리는 경험을 기대하고 오셨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몸에 모신다는 일이 우리가 열리지 않고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예수님을 몸에 모시고도 우리가 닫혀있는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우리를 위해 온전히 당신을 열어 모든 것을 내어주신 주님을 모셨는데도 우리 자신이 열리는 일이 불가능하겠습니까? 

우리는 이제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주님의 은총을 사랑과 진리로 누리고 증언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성체와 보혈을 먹고 마시면서 기꺼이 그 기쁨과 행복을 감사하고 찬양합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 아멘! (임종호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