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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야기- 신앙체험의 정리와 반성

성공회적 영성생활에 있어 성찬례와 절기의 이해 (이주엽신부)

성공회적 영성생활에 있어 성찬례와 절기의 이해 -이주엽 신부(2006.10.1.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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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적 영성생활에 있어 성찬례와 절기의 이해

이주엽 신부(프란시스/살림터)

최근 제 마음 한 귀퉁이에 이고 다니는 문제의식 두 가지를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 자신 그 일부인 우리 성공회의 소위 “사회선교” 현장이 어떤 점에서 정말 “선교”라 할 수 있는지? 또 다른 교파의 영성생활과는 구별되는 “성공회적 영성생활”이라는 것을 꼭 집어 말할 수 있는지? 오늘 제가 쓰는 글은 이 두 가지 질문이 그동안 제 안에서 서로 만나고 버무려진 결과의 일부를 나누는 셈입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지면을 할애 받았지만 첫 번째 질문에서 시작하긴 하되 두 번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을 중심으로(그것도 매우 부분적으로!) 얘기해보다 끝내야 할 것 같습니다.

(1) 문제의식 - ‘그리스도의 몸’이 없는 선교현장

긴 얘기 짧게 하려고 애쓰면서 첫 번째 문제의식을 요약하자면 한 마디로 이렇습니다: 우리 사회선교 현장에는 “하느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중심이 약해 보인다는 점입니다! 교회란 한 마디로 하느님의 ‘부르심’에서 출발한(이 신학적 출발점에 밑줄을 긋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이 존재의 일치에 역시 방점을 찍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 주체가 중심을 잡는 현장이라야 “교회의 선교”입니다. 아니라면 다른 무엇(사회복지, 시민단체운동 등등)의 선교일지는 몰라도 교회의 선교는 아닙니다.

이 첫 번째 문제의식에서 두 번째 문제의식으로 옮겨갈 논리의 징검다리는 이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선교(저는 개인적으로 “사회선교”니 “일반목회”니 하는 구분은 임의적인 것일 뿐 선교의 본질은 같은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현장 중심에 존재해야 할 “하느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은 어떻게 길러지고 양성(formation)되는가? 그것도 그리스도 교회의 많은 지체 중 “성공회”라는 지체가 양성한다고 할 때 거기에 그 지체 고유한 양식과 길이 있는가? 이렇게 질문의 꼬리를 밟아서 오늘 글의 주제 “성공회적 영성생활에 있어 성찬례와 절기의 이해”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글은 선교현장에서 제자의 단계를 빠뜨린 채 사도의 단계로 직행했다가, 자신도 남도 길을 잃게 하기 일쑤인 부실함에 부대낀 한 사제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성공회적 영성생활로 잘 양육하여 명실상부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사도직을 수행하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으로 ‘날린’ 글이라 읽어주십시오. (혹시 다른 상황, 다른 현장에 계신 분들에게도 건질 거리가 있다면 그것은 문자 그대로 보너스이겠습니다.)

(2) 베네딕트와 성공회

성공회 바깥에서 성공회를 연구하고 관찰한 사람들이 한 말 중에 제가 흥미롭게 기억하는 말이 있습니다. “성공회는 수도원적 모델을 일반신자생활에까지 확장시킨 교회”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공회는 수도원적 기도생활과 리듬을 교회 전체에 적용시킨 교파라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성공회는 교회 전체가 하나의 ‘재속수도회’ 같은 모델을 꿈꾼 교회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 대체 왜 그렇게 된 것인가 묻는다면 베네딕트 얘기를 좀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성공회 영성은 베네딕트 성인에게 빚진 바가 크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으셨을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 영국은 사실 베네딕트 전통이 아주 강한 땅이었습니다. 당연히 영국의 교회가 로마교회와 단절한 이후에도 베네딕트 전통은 성공회 영성 형성에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지금의 켄터베리 대성당은 원래 베네딕트 대수도원이었다지요). 베네딕트 성인은 극단을 피하고 중도의 길을 택했던 성인입니다. 그 덕분에 베네딕트 전통은 서방 일반에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베네딕트가 그러한 중용, 혹은 중도의 길을 선택하는데 있어 주요 신학적 이념이 바로 “성육신”이었습니다. 눈치 빠른 분들은 벌써 성공회 영성의 키워드가 다 나오고 있음을 알아차리셨을 것입니다. "중도"(비아메디아 via media)니 "성육신"이니 하는 단어들 말입니다.

우리 성공회 신자들은 다른 교파처럼 중요한 신학자(예컨대 칼빈이나 루터 같은)에 근거를 대거나 신앙고백(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같은)을 통해 일체감을 확인하질 않습니다. 예를 들어 장로교 같은 데서는 칼빈주의의 어떤 면을 위배했다 하면 “너희는 장로교가 아니다” 합니다. 그러나 성공회 신자는 이러한 일체감을 오로지 예배(혹은 전례)에서 찾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예배 중심의 영성이야말로 베네딕트 영성의 핵심입니다. 사실 베네딕트의 유명한 “규칙서”는 작은 책입니다. 그런데 그 작은 책에서 베네딕트는 성찬례와 성무일과를 설명하는데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예배의 순서가 어떻고 시편은 어떻게 하고 송가는 어떻게 하며 계응은 어떻게 하라는 등등을 말입니다. 베네딕트는 이러한 예배 혹은 기도를 하루에 여덟 번 배열해 놓고 이를 통해 그리스도를 따르는 영성의 길을 가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무일과와 성찬례를 빼고 성공회가 영성을 논하지 않는 까닭도 다 알고 보면 베네딕트에서 연원한 영향이겠습니다. 성공회는 예배와 영성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실 종교개혁 때 유럽의 개혁가들은 성무일과 같은 전례가 너무 “교황풍”이라면서 송두리째 내버렸습니다. 로마교회에 대한 반감이 크다 보니 목욕물 더럽다고 아이까지 같이 내버린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성공회의 개혁가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는 오히려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라는 성무일과를 성공회신자 매일생활의 기본으로 제시했습니다. 종교개혁의 한 핵심이 “일반 백성에게 다가가는 것”이었으므로 크랜머의 이 같은 조치는 오히려 수도원적 기도의 리듬을 보다 일반백성의 생활현실에 맞게 확장 적용한 조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낮 기도”와 “밤기도”-“종도”라고도 하는-도 요즘 우리 기도서에는 있지만 원래 크랜머와 초기 성공회 개혁가들이 제시한 기도서에는 없었고 20세기 들어와 전례영성운동의 덕분으로 회복된 전통입니다. 더욱 베네딕트적 영성생활의 리듬으로 돌아간 셈입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모여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것이 성공회적 영성생활의 스탠다드로 제시되게 된 데는 베네딕트 전통의 영향 때문입니다.

(3) 성공회식 “그리스도의 몸” 되기 - 성찬례

우리가 드리는 예배, 즉 성찬례의 구조는 외적으로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 둘로 나뉩니다.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세 부분으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입니다. 둘째 부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내어드리기”입니다. 셋째 부분은 이제 그리스도와 더불어 세상으로 “파송받기”가 되겠습니다. 성공회가 이해하는 예배는 단순히 그리스도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도 성공회 신학의 핵심인 “성육신”이 드러납니다. 즉 성공회 예배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리고 마침내 그분을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성변화되고 축성되어 세상에 파송 받는 성육신적 화살표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는 데에만 역점을 두는 말씀의 잔치만도 아니고, 자신을 내어드리는 헌신예배만도 아니고, 기어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성변화하여 세상에 파송 받는 데까지 이르겠다는 것이 성공회 예배에 깃들어 있는 자의식인 것입니다.

좀 다른 얘기지만, 저는 가끔 각 교파의 예배성격과 강조점이 그 교파 영성생활의 특징이 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볼 때가 있습니다. 개신교의 다른 교파들은 대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서 “모이고” 말씀을 “듣는” 것까지는 기차게 잘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모이는 교회”가 되는 것만큼은 우리 성공회가 따라가기 벅차리만큼 잘합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세상을 향하여 성육신하려는 방향이 부족해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세상에 대한 책임감이 엷어 보입니다. 반면 우리 성공회는 성찬을 나누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힘은 비교적 강해 보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 말로 “쥐뿔도 없으면서” 자꾸 세상을 향해 뭔가 하려고 듭니다. 그러다보니 제자가 되는 일은 소홀히 해도 사도 노릇은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사도직 활동에 뭔가 ‘부르심’과 ‘듣기’를 출발점이요 뿌리로 삼는 관상적 차원이 부족해 보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다른 교회들은 성속 이원론에 빠진 것 같고 우리 성공회는 성속 일원론 비슷하되 내용적으로는 성(聖)이 속(俗)에 휘둘리는 그런 형편이 되는 것만 같습니다. 성에서 출발해서 속을 품고(include) 마침내 넘어서는(transcend) 것이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여하튼 성공회 영성생활이란 이렇게 듣고(하느님은 말씀하시고)-내어드리고(하느님은 우릴 거룩하게 변화시키시고)-하나 되어 보냄 받는(그리스도를 머리로 해서 일치하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파송받는) 이 삼박자 성변화의 신비를 매주 반복되는 예배를 통해 거듭 체험하고 재확인하고 완성해 가려는 초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성찬례란 바로 십자가의 신비를 우리 안에서 구현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내에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는 존재변화의 신비를 앵무새처럼 입에만 붙는 머리 차원이 아니라 목에 칼이 들어와도 부인할 수 없는 가슴의 차원에서 완성해 가려는 것이 영성과 예배를 따로 떼어 구분하지 않는 성공회의 자의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사생활은 성공회적 영성생활에서 뗄 수 없는 핵심입니다. 성사로 그리스도와 일치한 연후에 세상에 대해 그리스도의 성사가 될 수 있다는 이해인 것입니다.

(4) 성공회식 “그리스도의 몸” 되기 - 교회력

그러면 이런 관점에서 교회의 절기를 살펴보면 어떻게 될까요? 듣고-내어드리고-보냄 받는 이 삼박자는 교회력에 그대로 펼쳐져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교회력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면 대림에서 시작해서 성탄-공현으로 이어지는 절기, 사순절에서 수난주일-부활로 이어지는 절기, 그리고 성령강림에서 연중으로 이어지는 절기가 됩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대림”이란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은 곧 귀 기울임이요 “듣기”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 또 나를 향하신 뜻을 알아들은 사람의 내면에 그리스도의 생명은 탄생합니다. 곧 “성탄”입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이다” 하신 마리아께 예수 그리스도는 성탄하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깊이 순명하는 대림의 영혼에 그리스도의 생명은 성탄한다는 이치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혹은 어떤 공동체가 “성탄”한 영혼들로 이루어져 있으면 그 사람과 공동체는 세상의 다른 사람들, 다른 속된 공동체들과 뚜렷이 구별되기 시작합니다. 즉 “세상이 알아보리만치” 다른 무엇을 드러낸다는 말이지요. 바로 그것이 “공현”입니다. 제대로 성탄했으면 필경 남이 알아보리만치 “공현”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뚜렷이 대조되는 정체성, 성탄과 공현의 공동체, 이것이 지금 우리 성공회 선교현장에 필요한 것 아닐까요?

그런데 성탄은 달콤하고 아름답긴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베드로가 고백하긴 했어도 아직은 그리스도가 머리가 아니고 자기가 머리입니다. 그래서 제 뜻과 계획을 포기할 수 없어서 주님이 가려는 수난과 십자가의 길을 가로막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사탄아, 내 뒤로 비켜라!” 일갈을 당하게 되는 수준이지요. 아직 예수님께서 남들에게 자신이 누군지 말하지 말라고, 즉 아직 복음 전파할 수준이 아니라고 제지당하는 단계입니다.

그래서 이제 교회력의 두 번째 리듬은 “사순과 부활” 시기입니다. 이 기간을 거치면서 사순절 광야와 수난주일의 수난, 마침내 십자가 위의 “내 영혼을 맡깁니다” 하는 단계에서 우리의 “내어드림”은 완성됩니다. 이 기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라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고 비우는” 수행을 합니다. 그런 절정에 “부활”이 오는데 사실 부활의 은총은 사람이 제 힘으로 스스로에게 마련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의 몫입니다. 그러므로 사람 편에서는 자신을 낮추고 비워서 완전히 내어드리는 봉헌만 생각하면 되는 것이고 부활의 거듭남은 하느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난과 부활을 둘로 보지 않는 요한복음의 신학에서 보자면 우리가 이렇듯 자신을 낮추고 비우며 내어드리는 봉헌생활 자체가 부활의 은총이 깃들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교회가 십자가의 자기비움을 실천해 가는 수행적(교회를 수도생활, 즉 수행을 핵심으로 하는 수도원적 모델로 본 것이 성공회라는 걸 기억하면서) 공동체일 때 그 공동체는 이미 거듭난 의식, 부활의 은총을 손의 못자국, 옆구리 상처로 세상에 내보일 수 있는 참된 “그리스도의 몸”이라 하겠습니다.

이제 교회력의 세 번째 리듬인 “연중”시기를 보지요. 녹색만 지겹게 보게 되는 것 같은 연중시기는 성령강림일을 고리로 해서 앞의 두 리듬, 즉 대림과 성탄, 수난과 부활 시기와 맞물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의 중간에는 “세례자 요한 축일”이 한 봉우리처럼 솟아 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교회력 중 가장 긴 연중시기는 성령강림일을 기준으로 세상으로 퍼져가는 사도행전적 활동과 세례자 요한으로 대비되는 “그리스도께서는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점점 더 작아져야 한다”는 자의식이 마치 동전의 앞뒤처럼 맞물리는 기간입니다. 저는 이것을 사람 편에서는 늘 기다려 “듣는” 대림의 자의식, 즉 관상적 수행과 하느님 편에서 우리 존재를 축성하시어 부활의 그리스도 몸으로 활동케 하시는 성령의 사도행전적 “파송” 은총이 수난-부활처럼 둘이 둘이 아닌 관계로 지속되고 무르익는 시기로 이해합니다.

베네딕트는 우리 성공회에 극단을 피하는 중용의 태도로써 너무 조급하지도 너무 느슨하지도 않게 매주 예배(성찬례)와 매일 기도(성무일과)를 교회력을 따라 묵묵히 걷는 수행의 길을 제시했습니다. 교회력을 홀수해, 짝수해, 그리고 가, 나, 다해로 나눈 것을 생각하면 6년이 큰 한 주기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리듬과 순환구조를 통해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고, 그 십자가의 신비를 자기 및 공동체 변화의 내용으로 완성해 가라는 것입니다. 서강대의 어느 외국인 예수회 신부님이 선불교와 그리스도교 수행을 비교한 끝에 “한국의 선불교가 단박에 깨치는 즉심시불의 경지를 강조하는 데 비해 그리스도교는 차라리 점진적 수행과정을 닮았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교 깨침의 내용은 뭐겠습니까? 결국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자녀”요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입니다. 하느님의 성육신이시고요. 그러므로 저는 그리스도교 수행의 내용물을 이렇게 정리해 보고 싶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깨치는 것이 그리스도교 수행의 목표고 “하느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성육신의 존재”로 사는 것이 그리스도교 활동의 목표다, 그런데 그 목표는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대로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고 비우는” 길을 따라감으로써 이룬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성공회는 이 십자가의 길을 매주 성찬례와 교회절기를 따라 점진적으로 완성해가려는 자의식을 품은 교회라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