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초록/2011년도설교초록

복되어라,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들! (연중 4주일/ 마태 5:1-12)

2011년 1월 30일 연중4주일 녹 성서말씀 /  하남성당 축복

미가 6:1-8

1 잘 들어라.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일어나 산악을 향해 변명해 보아라. 할 말이 있거든 언덕들에게 말해 보아라."

2 산악은 야훼의 논고를 들어라. 땅의 주춧돌들은 귀를 기울여라. 야훼께서 당신의 백성을 걸어 논고를 펴신다. 야훼께서 이스라엘의 죄상을 밝히신다.
3 "내 백성이라는 것들아, 대답해 보아라. 내가 너희를 어떻게 했으며, 너희에게 무슨 못할 일을 했느냐?  4 나는 너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냈다.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앞장세워 종살이하던 데서 너희를 해방시켰다. 5 내 백성이라는 것들아, 모압 왕 발락이 꾸민 계략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한 말, 시띰에서 길갈에 이르는 동안에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해 보아라. 그래도 이 야훼에겐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것을 모르겠느냐?"
6 "높이 계시는 하느님 야훼께 예배를 드리려면, 무엇을 가지고 나가면 됩니까? 번제를 가지고 나가야 합니까? 송아지를 가지고 나가야 합니까? 7 숫양 몇 천 마리 바치면 야훼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거역하기만 하던 죄를 벗으려면, 맏아들이라도 바쳐야 합니까? 이 죽을 죄를 벗으려면, 이 몸에서 난 자식이라도 바쳐야 합니까?"
8 이 사람아, 야훼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들어서 알지 않느냐? 정의를 실천하는 일, 기꺼이 은덕에 보답하는 일1) 조심스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 그 일밖에 무엇이 더 있겠느냐? 그의 이름을 어려워하는 자에게 앞길이 열린다. " 한결같은 사랑을 즐겨 행하는 일"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시편 15

1 주여! 당신 장막에서 살 자 /누구/이며, ∥ 당신의 거룩한 산에 머무를 자 /누구/입니/까?

2 허물없이 /정직· 하게 /살며 ∥ 마음으로부터 /진실·을/ 말하/고
3 남을 모함하지 /않으/며 ∥ 이웃을 해하거나, 친지를 /모욕·하지 /않는/ 사람,
4 주님 눈 밖에 난 자를 얕보되: 주님 두려워하는 이는 /높이는 /사람, ∥ 손해를 볼지라도 맹세한 /것을/ 지키/고,
5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주지 /않으/며,∥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지 /않는/사람,
 이렇게 사는 /사람/은 ∥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그리고 영|원히,|아-|멘


1고린 1:18-31

18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이치가 한낱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을 우리에게는 곧 하느님의 힘입니다. 19 성서에도 "나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를 없애버리고 똑똑하다는 자들의 식견을 물리치리라." 하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20 그러니 이제 지혜로운 자가 어디 있고 학자가 어디 있습니까? 또 이 세상의 이론가가 어디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가 어리석다는 것을 보여주시지 않았습니까?

21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지혜로운 경륜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전하는 소위 어리석다는 복음을 통해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22 유다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23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입니다.
24 그러나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할 것 없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가 곧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25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합니다.
26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속적인 견지에서 볼 때에 여러분 중에 지혜로운 사람, 유력한 사람, 또는 가문이 좋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었습니까? 27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있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택하셨으며, 강하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28 또 유력한 자를 무력하게 하시려고 세상에서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 곧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29 그러니 인간으로서는 아무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30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와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의 지혜이십니다. 그분 덕택으로 우리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고, 해방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다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31 그러므로 성서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십시오."


마태 5:1-12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자 제자들이 곁으로 다가왔다.
2 예수께서는 비로소 입을 열어 이렇게 가르치셨다.
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7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9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10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 옛 예언자들도 너희에 앞서 같은 박해를 받았다."

<본기도> 살아계신 하느님,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비옵나니, 우리의 연약한 본성을 주님의 은총으로 도우시어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시고, 주님의 크신 은총과 영광을 깨닫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1>
                                                        
참된 행복  (마태 5:1-12)

오늘 주님의 산상설교의 첫부분, 참된 행복에 관한 가르침을 들으면서 우리는 솔직한 마음으로 묻게 됩니다. “과연 나는 지금 행복한가? 정녕 무엇으로 행복한가?”


세상의 행복은 한마디로 건강, 안녕, 소원성취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삶이 안전하기를 원하고,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을 받기를 원하고, 세상이 내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이루어지면 우리는 행복하다고 합니다. 많이 가진 사람, 배부른 사람, 늘 기쁘고 즐거운 사람들이 복을 받은 것이라고 여기고, 못가지고 굶주리고 고통 받는 사람들은 자업자득이거나 불행한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통념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예수를 믿고, 하느님께 기도하는 까닭도 내용을 살펴보면 내 행복을 보장해 주십사고 청하기 위해서 입니다.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라는 말은 단순한 우스개가 아닙니다.  우리는 경쟁하며 행복을 쟁취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하시는 행복은 다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며, 하느님의 기준으로 살아갈 때, 참으로 복되다는 말씀입니다. 
건강과 안녕과 만사형통이 보장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 하느님이 함께 해주시는 삶, 하느님께 맡겨진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우리가 그려낸 환상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입니다. 육신이 쇠약하고 고달프며, 마음이 불안하고 불편하며, 세상만사가 내 뜻대로 되지 않음을 우리는 삶으로 경험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우리의 삶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느님께서 선하시고, 우리의 삶이 선한 것임을 신뢰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하고, 하느님께서 거두어 가시는 모든 것을 기꺼이 내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선한 삶을 위해 노력해야 하고 서로를 친절하고 관대하게 대해야 합니다.

주님의 행복선언은 머리로 탐구해야 그 뜻이 밝혀지는 이론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삶으로 체험해야하는 진실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행복합니까? 무엇 때문에 행복합니까? 하느님 그 알 수 없는 분의 현존으로 인해 정말 행복합니까? ✠


<강론초록2>    
                                  복되어라,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들! (마태 5:1-12)

예수님께서 “하느님나라”에 대하여 선포하시고 가르치신 내용이 무엇일까요? 바로 오늘 복음의 “산상설교”가 그 내용이 됩니다.
오늘 참된 행복선언은 매우 평범한 말씀이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으로 느껴집니다. 가난하고 슬프고 고난 받는 이들이 행복하다구요? 과연 그런가요? 어째서 그런가요? 정답은 “하느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남은 것은 우리들이 실제로 이 말씀을  체험하는 일입니다.

참된 행복 선언은 이 세상에서의 불행이나 억울한 일을 그저 참고 행복한 것으로 여기며 살라고 하는 억지나 강요의 말씀일 수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너 해피한 것야” 하는 수준의 마음가짐을 권면하는 게 아닙니다. 참된 행복 선언은 이 세상에서의 행복과 불행, 의로움과 불의함의 기준을 “하느님”의 차원에서 살피라는 말씀입니다. “너의 불행은 분명한 현실이다. 그러나 그 불행에도 불구하고, 아니 도리어 그 불행 때문에 하느님께서 함께 해주시는 네 삶은 참으로 복된 것이다.”는 축복의 선언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경제적인 가치” 즉 재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는 일입니다. 남보다 좋은 것을 더 많이 가진 사람이 더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은연중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의 정신세계, 내면의 풍요로움에는 관심이 없고 그 사람이 누리는 외면적인 부귀와 권세의 수준을 관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우리 교우들과 교회는 세상의 가치 기준을 따라 생각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고통과 불행 자체를 그저 하느님께 벌을 받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고통과 불행과 죽음의 상징인 예수님의 십자가가 결코 무슨 죄로 인해 하느님께 저주받은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나라를 위하여 일하시다가 그토록 무력하고 비참하게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그 순간에 바로 하느님께서는 깊은 침묵의 사랑으로 함께 하셨다는 것, 그래서 그 십자가가 바로 하느님의 영광이라는 것이 신약성경의 증언이고 우리들의 고백입니다.

우리의 고통과 불행은 그 자체로는 물론 힘겹고 피하고 싶은 일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함께 해주신다면 우리의 고통과 불행과 죽음은 그 차원이 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진실은 하느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길과 손길이 하느님께서 함께 해주시는 이 세상의 고통스런 현실에 돌려져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고통과 불행과 죽음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끼리 일으킨 잘못된 판단과 행동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놀랍게도 우리의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하시며 당신의 사랑과 진리를 드러내시고 은총과 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신비의 영원한 표상입니다. 

그 십자가의 주님 앞에서 우리는 여러가지 깊은 물음들을 묻게 됩니다. 이렇게 불행과 고통과 죽음을 겪는 이 분은 누구신가? 누가 왜 이 분을 못박아 죽이는가? 주님은 왜 십자가를 피하지 않고 받으셨는가? 이 세상을 살며 불행과 고통에 시달리고 죽음의 위협 앞에 두려워 떠는 나는 누구인가? 불행과 고통을 함께 겪는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의 믿음은 불행과 고통을 회피하게 해주는 부적 같은 것일까요? 우리의 믿음은 주님의 십자가에 우리의 십자가를 일치시키는 지혜와 용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실상 소박한 진실, 곧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탐욕을 버리고 가난해져서 서로에게 맑은 슬픔이 되고 따뜻한 위로가 되고 새로운 희망이 되어 갑니다. 남의 고통을 통해서 누리는 행복은 가짜이고 헛된 것이고 악한 것임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다른 이의 희생을 사랑으로 되갚기로 합니다. 감사하고 감사하고 감사하며 살기로 합니다. 이런 마음가짐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화려한 세상의 부귀와 영화와 권세가 인간의 행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니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것들을 바라보고 추구하라는 얘기가 바로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광야에서 받으셨던 유혹의 내용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로지 하느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이 세상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며 그 가운데서 하느님의 은총과 진리의 능력을 경험하고 드러내기를 택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말로만 우리에게 행복선언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온 삶으로 행복선언을 살아가신 것을 압니다.

세상이 보여주는 거짓 행복 말고 하느님께서 보장해주시는 참된 행복을 참으로 믿으십니까? 윤동주 시인의 표현대로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주님의 그 참된 행복을 따라 기꺼이 우리 생애의 슬픔과 고통과 죽음의 위협을 참아 견디어 낼 수 있겠습니까? 나아가 슬픔을 사랑의 힘으로 바꾸고, 고통스런 조건과 상황들을 바꾸어 내고, 죽임의 권세를 이기고 살림의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물론 우리 힘으로만 되는 일이 아니지요. 그러므로 그 일에 성령의 함께 하심과 도우심을 겸손히 구하는 것을 기도의 내용으로 할 수 있을까요? 성령이 도우심을 깊이 신뢰하여 참으로 담대히 세상을 향해 오늘 복음의 진복선언을 드러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