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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과 소신

사제중창단 부산교구초청 공연소감 - 내가 '백마강'을 부르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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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중창단 부산교구초청 공연소감
- 내가 ‘백마강’을 부르는 까닭

지난 2007년 11월 8일(목) 오후7시 30분, 성공회 사제중창단의 부산교구초청 (정기)공연이 있었다. ‘가을음악회’란 이름으로 성공회 부산교구 성직자원이 공들여 마련한 자리였다. 대청동 주교좌성당에서 부산교구 성경원 신부님, 이사라 사모님, 이성호 신부님, 감리교 방영식 목사님이 함께 감동적인 노래를 들려주셨고 우리 중창단도 해체의 위기를 넘어 정기공연을 하게 된 기쁨으로 열심히 노래했다.

성공회 가족이라면 아는 이야기지만 부산교구의 선교 상황은 매우 어려운 편. 한자리에 모이기조차 힘든 상황에 기쁘고 행복한 웃음이 귀했던 부산교구의 성직자와 교우님들을 위한 귀한 자리였다. 처음 자리에 앉으신 교우들의 표정은 “아니, 저 분들이 지금 음악회를 오셨는가, 무슨 법정에 오셨는가” 생각될 정도로 대체로 굳어있었다. 음악의 힘은 그런 긴장을 풀고 편안한 기쁨과 하나됨을 가져다 준다. 앵콜을 청하시는 박수의 손길에는 이미 사랑과 행복이 가득 묻어서 전해진다. 멀고 고단한 연주 여행이었지만 중창단원 모두 큰 보람으로 기억되는 공연이었다.

윤종모 주교님, 황외달 (성우회장)신부님, 김동규 신부님 외 부산교구 신부님들과 교우님들의 초청과 환대에 감사드린다. 바쁘신 가운데도 함께 하시어 우리 중창단의 성공적인 공연을 이끌어주신 원학연 지휘자선생님과 이혜원반주자님의 노고는 그저 우리 주님께 보고드릴 뿐, 우리가 도저히 갚을 길이 없다.

공연 후 다른 단원들이 공연 분위기와 중창단 수준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노래로 사료됨으로 앞으로는 절대로 순서에 넣지 말자고 결의했다는 그 ‘백마강’을 또 부르게 되었다.





뭐, 들으시는 분이 흥겨운 것은 물론 감사한 일이지만, 사실 어떤 분은 무슨 사제중창단이 거룩한 성당에서 ‘뽕짝’을 부르는가고 불편해 하실지도 모르고, 사실 노래가 듣기 좋아서보다도 그저 사제가 부르는 ‘백마강’이어서 그 어울리지 않는 미묘한 느낌에 반응이 큰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백마강’을 애창하는 이유는 나름대로 변명의 여지가 있다. 대부분의 전통가요가 ‘쉬움’을 빙자하여 가사와 음률에 ‘말초적 감각’을 섞는데 반해 이 ‘백마강’은 비장한 역사의식으로 가득한 노래다. 정확히 작곡연대는 모르겠으나, 일제시대에 이 ‘백마강’을 부르고 듣는다고 가정해보자. 계백장군이 삼척 검을 뽑아 처자식을 베고 오천결사대와 더불어 황산벌에서 죽어간 그 충정을 노래하는데 어찌 망국의 설움과 함께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반성이 없겠는가?

성공회의 어려운 선교여건과 교세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계백과 오천결사대를 떠올린다. 나는 과연 기꺼이 님사랑 조차 끊고 결사의 각오로 성직을 수행하는가? 자못 퇴폐적인 느낌이 드는 ‘삼천궁녀’ 때문이 아니라, 오늘 부끄러운 나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는 ‘오천결사대’ 때문에 나는 기꺼이 ‘백마강’을 부른다고 하겠다.

“백마강에 서린 백제의 한” 이라는 제목의 좋은 글을 소개드린다.


http://blog.daum.net/son13601/8523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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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강”에 서린 백제의 한

반만년의 우리 역사 중에서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가슴에 한을 남기고 있는 나라의 멸망이 있다면 그것은 단연 백제일 것이다.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나라와 신라의 기습에 무너졌던 백제의 멸망은 우리에게 가장 뼈저린 슬픔을 전하고 있다.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를 중심으로 백제 멸망의 흔적은 한 많은 유적으로 남아 전하고 있는데, 우리들에게 널리 알려진 사비성과 낙화암, 정립사오층탑, 고란사, 자온대, 백마강, 조룡대, 황산벌, 기벌포, 등이 그것이다.

신라 천년의 고도인 경주가 화려했던 문화를 유적과 유물로 보여주고 있다면, 백제 멸망의 한을 간직하고 있는 부여의 유적들은 아직도 흐느껴 우는 당시 백제인들의 슬픔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제 멸망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지금까지도 슬픔을 간직한 것이 있다면 마땅히 백마강이 될 것이다. 백마강의 원래 이름은 백강(帛江)이었다. 급류가 없이 조용히 흐르는데다가 비단을 길게 펼쳐놓은 것처럼 흰색을 띠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런 백마강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서는 낙화암보다 성흥산성이 더 적합하다. 날씨가 아주 맑은 가을날 서해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 부여에서 서남쪽으로 10킬로 정도 떨어진 성흥산성에 올라서 동남쪽을 바라보면 강의 이름이 왜 백강인지를 실감할 수 있다.

부여에서 내려오는 강의 모습은 흰 비단을 굽이굽이 펼쳐놓은 것 같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을 정도다. 구불구불하게 흐르는 모습은 영낙없이 비단을 펴놓은 모양이다. 이 강의 이름이 지금처럼 백마강이 된 것은 조선후기 우암 송시열에 의해서라고 알려져 있다.

부여를 아끼고 사랑했던 그는 부여의 여러 유적에 새로운 이름을 많이 붙였는데, 자살바위라는 의미 간직했던 부소산성의 바위절벽인 타사암(墮死巖)은 예술적 아름다움이 깃든 낙화암으로 바꿨으며, 백강은 백마강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낙화암은 삼천궁녀가 몸을 던져 목숨을 버린 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며, 백마강은 소정방이 백마를 미끼로 하여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호국룡이 된 무왕을 낚았다는 전설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보인다.

평소에 흰말을 좋아했던 무왕의 성정에 비추어 만들어진 전설이기는 하지만 소정방이 백말을 미끼로 용을 낚았다는 바위가 지금도 조룡대(釣龍臺)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무왕과 관련된 전설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 이어져서 우리들에게 슬픔을 더해준다.

백말미끼에 낚여 올라온 강 속의 용은 소정방이 낚싯대를 채치는 바람에 조룡대에서 동쪽으로 2킬로 정도 떨어진 용전리라는 마을에 떨어진다. 용이 떨어진 곳이라고 하여 지금도 이곳의 지명이 용전(龍田)이다.

용전리에 떨어져서 죽은 용은 시간이 지날수록 썩는 냄새가 지독하게 났다. 그래서 사람들이 함께 힘을 모아 용의 시체를 들어서 북쪽으로 던졌다고 한다. 사람들에게 의해 던져진 용의 시체는 공주 구리내(계룡산 옆이다)에 떨어졌다고 한다.

구리내에 떨어진 용의 시체가 또다시 썩는 냄새를 풍기자 이번에는 공주 사람들이 용을 들어서 다시 부여로 던졌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부여로 온 용은 용전리 옆에 있는 물이 가득한 논실에 놀다가 또 그 옆에 있는 사근다리에서 삭았다고 한다.

그런 다음 사근다리 옆에 있는 거무내에서 검은 용으로 변하여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는 전설이지만 이것은 의자왕이 공주로 피난 갔다가 맹광이(혹은 만광이)라고 하는 못된 점쟁이에 의해 다시 잡혀오는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사근다리는 맹광이라고 하는 점쟁이가 살던 집터인데, 소정방의 꾀임에 넘어가서 의자왕의 행방을 알려주었던 사람의 집이다. 당나라 군대가 돌아간 후 백제 사람들은 맹광이를 때려죽이고, 그 집을 헐어버린 다음 연못을 팠다고 하는데, 지금은 세차장으로 쓰이고 있다.

서리서리 서린 백제 멸망의 한은 전설이나 시 등을 통해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구구절절이 전해지고 있는데, 특히 조선조의 사대부 시인들이 한시에서 노래하고 있는 백제에 대한 통한과 그리움은 정말 가슴을 찢는 듯하다.

우리 민족의 이러한 전통은 현대사회에 와서는 현대시와 더불어 유행가로 이어지는데, 여기서는 유행가를 살펴볼까 한다. 유행가 중에서 백제의 한을 정말 구구절절하게 노래한 유행가는 허 민이란 가수가 부른 “백마강”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에게는 “백마강달밤”이 더 잘 알려져 있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백마강”은 백제의 한을 표현한 노래로서는 최고가 아닌가 한다. 무거우면서도 한을 보여 주는듯한 가락과 가수의 애절한 목소리는 수중고혼이 된 삼천궁녀의 혼백이 일어날 것 같은 착각을 줄 정도다.

백마강에 고요한 달밤아 고란사의 종소리가 들리어오면
구곡간장 찢어지는 백제꿈이 그립구나
아 --아 달빛 서린 낙화암의 그늘 속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아주 짧은 가사지만 이 속에는 백제 멸망의 한을 간직한 것들이 총망라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마강의 고요한 달밤은 호국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했던 무왕의 죽음을 노래한 것으로 보인다.

고란사의 종소리는 백제의 전성기를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고란사에서 울리는 쇠북종소리를 듣기 위해 낙화암 건너편 강변에서는 10만 중생이 모였었다고 하는 역사적 사실을 이 속에 고스란히 담고 있다. 건너편에서라야 낙화암과 고란사를 제대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낙화암의 그늘 속이란 표현에서는 몸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자살바위였던 타사암(지금의 낙화암)으로 가서 꽃잎처럼 떨어졌던 궁녀들의 절개를 노래하면서 그들의 혼백을 위로하고 있으니 이야말로 최고의 절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노래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아픈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간다. 성충과 흥수 같은 충신들이 당나라 군대는 기벌포에서 막고, 신라의 군대는 탄현에서 막으라는 충고를 무시했던 의자왕은 결국 오천결사대로 황산벌을 지키지만 수적 열세로 패하여 몰살한 사연도 노래한다.

이러한 사연들을 담고 있는 가사가 바로 “백마강”노래의 2절이다.

황산벌에 말없는 달밤아 철갑옷에 맺은 이별 목메어 울면
계백장군 삼척검은 님 사랑도 끊었구나
아 --아 오천결사 피를 흘린 황산벌에서 불러보자 오천결사대

지금의 황산벌은 그냥 버려져 있는 상태다. 백제의 마지막 전쟁터임를 알리는 전적비 하나 세워져 있지 않은데다가, 계백장군의 사령부였던 마을과 군량미를 저장했던 황산성, 몰살한 오천결사대의 시신을 함께 장사지냈다는 시정골 등도 그냥 버려져 있다.

이와 같이 진정한 유적들은 버려두면서 부여의 궁남지 옆에는 오천결사의 기념탑이 버젓이 조성되어 있다. 오천결사대의 기념탑을 세우려면 당연히 황산벌에 세워야 할 것인데, 부여에 세운 이유를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알 수 없다.

노래에는 나오지 않지만 황산벌과 함께 대단히 중요한 유적지를 든다면 소정방이 들어온 기벌포를 꼽는다. 백마강의 하류인 이곳은 장암면에 속하는데, 장암이란 바위에 올라가면 서해바다에서 백마강으로 들어오는 것은 개미 한 마리도 그냥 지나갈 수 없는 요충지이다.

이 유적의 상태는 더욱 가관이다. 장암 꼭대기에는 모회사의 굴뚝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서 있어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다. 바위 자체도 높은데다가 그 위에 엄청난 크기와 높이를 가진 굴뚝을 세웠으니 문화재청의 유적관리가 어떤지를 한 눈에 알 수 있다.

필자가 보기에 부여의 백제 유적은 백마강을 중심으로 하여 여섯 개 정도의 작은 문화권으로 나누어서 각각의 지역을 집중적으로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렇게 한다면 부여의 백제 문화는 세계 어디에 내 놓아도 뒤지지 않을 문화유산이 될 것이다.

필자가 제시하려는 여섯 개의 문화권을 대략 살펴보면, 첫째, 당나라 군대를 막아야 했던 군산만 지역의 기벌포를 중심으로 장암, 장암산성, 장암가 등을 최대한으로 살려서 유적관광지로 개발한다.

둘째, 의자왕의 배를 머물게 했던 백마강변의 유왕정을 중심으로 불망비, 원당산(당나라를 원망한다는 의미, 최근에 유왕산으로 고쳤다), 망배산, 유왕정 등을 중심으로 유왕제 등의 축제문화를 활성화시킨다.

백마강변에 서 있는 유왕정, 강을 따라가면서 우는 백성들이 소리가 시끄러워서 소정방이 배를 세우고 마지막 이별을 하게 했던 곳이다. 강을 마주보고 있다.

셋째, 사비성과 낙화암, 정림사, 정사암 등을 중심으로 하는 부여 중심지의 유적관광지를 개발한다.

넷째, 부여 남쪽에 있는 서동유적지인 미륵사, 궁남지와 서동모집터, 서동이 선화공주를 데리고 놀았다는 왕포천 등을 개발한다.

다섯째, 황산벌과 계백장군 묘를 중심으로 소문화권을 형성하고 오천결사대의 기념비도 이곳으로 옮겨서 역사학습현장으로 만든다. 이와 함께 신라군을 막으라고 했던 식장산(食藏山)을 중심으로 한 탄현(炭峴)유적지 개발을 본격화 한다.

여섯째, 조룡대와 관련이 있는 유적지로 용전리, 호롱바위(백제의 서적을 숨긴 곳), 구리내, 논실, 사근다리, 거무내, 맹광이방죽(점쟁이가 살았다는 집터) 등을 설화유적 중심지로 개발함과 동시에 능산리 고분군과 연계하여 현장 학습지로 한다.

이렇게 한다면 부여의 유적과 역사는 새롭게 살아날 것이며, 더욱 많은 사람들이 찾는 우리나라 최고의 유적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글에서는 ‘백마강’이란 유행가를 중심으로 하여 백제 멸망의 유적의 보존과 개발 등에 대한 전망으로 써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