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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야기- 신앙체험의 정리와 반성/성공회이야기

성공회 희망의 주체, 평신도

성공회 희망의 주체, 평신도 -임종호 신부(2005.4.17.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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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희망의 주체, 평신도

임종호 신부(프란시스.분당교회)

성공회사람들의 성공회 사랑은 참으로 지극합니다. 이제 그 지극한 사랑의 내용을 한편으로는 자랑하고 한편으로는 반성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희망으로 21세기를

우리 성공회는 희망으로 21세기를 맞이하였습니다. 한인주교시대이후 40년간을 돌이켜보면 정말 많은 성장과 변화가 있었습니다. 성직자도 많이 양성되었고 교회도 많이 개척되었습니다. 성공회대학교도 놀라운 발전을 거듭 하였고 나눔의집, 샬롬의집, 푸드뱅크 등 사회선교도 활발합니다. 알파코스, 113복음화운동, 제자훈련, 성령운동, 성공회영성센터 활동 등 여러 가지 새로운 신앙운동들이 교회 내에서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주교직은 권위적으로 다스리는 역할보다도 선교활동에서 구심점이 되는 일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성직자 청빙제도가 채택되어 본교회들이 나름대로 특성에 맞는 성장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서적인 교회, 성사적인 교회, 열린 교회, 치우침 없는 교회, 합리적이고 깨끗한 교회로서의 성공회의 특징은 앞으로 선교에 더욱 더 강점으로 발휘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한국교회 내에서만 아니라 한국사회전체에서 성공회의 인지도와 영향력이 날로 높아져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한가닥 불안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인적, 물적 교세로 보면 그다지 성장했다고 자부하기 어렵습니다. 인력이 부족하고 재정이 부족하여 감당하지 못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변화하는 사회에 비추어보면 그리고 다른 교단이나 교파의 발전에 비교해보면 우리의 자기만족은 좀 쑥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분명 예전의 모습보다는 대단히 나아진 모습들을 스스로 대견해 할 수 있기는 하지만, 정직하게 말해서 우리 성공회가 사회변화를 따라 잡으면서 선교에 매진할 수 있는 내적인 역량을 갖추고 있다고 하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성직자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참된 권위, 곧 복음과 교회에 관해 합의된 “성공회정신”을 공유할 수 있는가 하는 점

사회가 전반적으로 노령화되는 탓도 있겠지만 교회 공동체 안에서 젊은이들의 활발한 움직임을 보기가 어렵고 많은 교회학교가 쇠퇴하고 있다고 듣습니다. 교회개척도 점점 어려워지고, 이미 개척된 교회도 자립교회가 되기까지 성장하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성직자가 많아지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그로인해 성직자공동체가 하나 되기는 점점 어려워집니다. 서열중심의 권위의식이 점차 사라지는 것은 한편 좋은 일이고 막을 수도 없는 추세이지만 진짜 문제는 늘어나는 성직자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참된 권위, 곧 복음과 교회에 관해 합의된 “성공회정신”을 공유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성직자들 간에도 선의의 경쟁이 도입되는 것이 선교에 도움이 되리라는 의견도 있지만 성공회의 공교회성이 심각하게 위협받으리라는 의견이 더 많습니다. 교회성장을 위해서 성공회의 중요한 전통이나 신학 등의 “정체성”을 포기해야 한다면 그것이 어떤 의미일지도 생각해보게 됩니다. 다양한 신앙운동들도 매우 기뻐할 일이지만,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독단적인 운동이 되면 장차 교회공동체에 “쓴 뿌리”가 될 우려가 있습니다. 성직자 청빙제도가 교회성장의 동력이 되리라는 기대는 청빙제 이외의 여러 가지 조건들은 얼마만큼 성숙되어 있고 준비되어있는가를 묻는 물음 앞에 그 소박함을 드러냅니다. 우리 모두가 성공회에 대하여 강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과연 그 자부심을 자신 있게 전할 수 있을 만큼 그 내용을 정리하고 있고 공유하고 있고 실제로 전파하고 있는가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 전체가 성장이 둔화되고 있는 즈음에 우리가 교회성장을 기대할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일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부심인 사회선교는 어떤 방향으로 지속될지, 그리고 일반교회공동체와는 어떤 관계 속에서 발전할지도 아직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문제들이 억지로 지어낸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좀 더 정직하게 논의하고 대안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가장 깊이 통찰하시는 주교들께서 우리 교회의 사부이시며 책임자로서 불철주야로 애쓰시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성직자원에서도 이런 문제들을 깊이 공감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각자 담당하는 선교현장에서 소명에 최선을 다함은 물론이요, 공동으로 대안을 세우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연구하고 길을 찾고 있습니다. 평신도 교우들도 우리 성공회가 진정으로 교회다운 교회로서 성장 발전하기를 눈물로 기도하는 줄 압니다. 그러므로 분명 이 문제들은 우리 교회에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들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해볼 일이 있습니다. 수많은 교우들이 우리 성공회를 위하여 기도하실 때 혹시라도 그 기도의 주된 내용이 주교와 성직자가 각성하여 교회를 위해 무슨 일을 더 열심히 하도록 해주십사하는 것은 아닐까요? 주교와 성직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절대로 필요하고 유익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내용을 살펴볼 때 우리 교회의 현실을 타개해나가는 일이 주교나 성직자가 전담해야할 몫인 것처럼 여기고 있다면 이는 교회를 생각하는 진실한 충정에도 불구하고 바람직한 일은 아님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살아계신 하느님과 우리가 맺는 “올바른 관계”가 곧 신앙의 핵심

약간 현학적으로 말하자면, 이 세계의 실상은 존재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우리 존재 따로, 하느님의 존재 따로 살피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느님과 우리가 맺는 “올바른 관계”가 곧 신앙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완전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속에 있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 됩니다. 갑자기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이처럼 “관계”라는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어야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살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은 존재의 구분이 아니라 관계의 구분입니다. 성공회는 주교의 교회라고 흔히 말하지만 주교는 홀로 주교가 아닙니다. 성직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교우들과의 관계 속에서 주교의 역할이 의미를 갖게 있습니다. 성직자도 홀로 성직자일 수 없습니다. 주교와 교우들과의 관계 속에서 성직자입니다. 평신도도, “평(平)”신도란 말 자체가 나타내듯, 주교와 성직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상대적인 의미를 갖는 평신도입니다.

모든 관계의 근원은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은 이차적입니다. 일차적인 관계는 성직자, 평신도 모두 구분 없이 하느님의 자녀요 하느님나라의 백성이라는 점입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도 성직자, 평신도의 구분은 이차적입니다. 일차적으로는 모두가 함께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있는 제자요, 복음선포의 증인이요, 사도입니다. 예수께서 성령을 통하여 세우신 교회와의 관계 속에서도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은 이차적입니다. 일차적으로는 모두가 함께 하느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령의 공동체인 교회의 일원인 것입니다.

물론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의미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교회공동체가 주님의 이름으로 신자 가운데 지도자를 세우고 성직을 서품하였습니다. 그 권위는 교회의 이름으로, 나아가 주님의 이름으로 존중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구분은 존재론적인 구분이 아니라 관계의 구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성직자, 교우 우리 모두가 함께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있는 제자요, 복음선포의 증인이요, 사도로 교회의 모든 선교 사역에서 평신도는 성직자와 똑같이 주체적인 존재

그러므로 교회가 주교와 성직자(사제,부제)와 평신도로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은 부족한 이해입니다. 주님이 주인이신 교회 안에 주교와 성직자와 평신도가 서로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에 대한 관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그 관계의 근원이 되는 하느님과 세상에 대한 관계가 더 중요합니다.

모든 사람은 다 함께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있고,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할 소명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대 교회에서 “평신도 사제직(만인사제직)”, “평신도 사도직”, “평신도 사목직”이 중요하게 논의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선교 사역에서 평신도는 성직자와 똑같이 주체적인 존재가 되어야합니다.

사제직은 근원은 더 이상 구약제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사랑의 희생으로 바치신 구속의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곧 구원을 회복시켜주는 사제직은 서품 받은 사제를 통하여 “전례”에서 재현될 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가 “평신도 사제”로서 살아가는 세상의 삶 속에서 화해와 일치로 실현되는 것입니다.

사도직의 본질은 주교라는 개인이 독점적으로 물려받은 권리승계가 아닙니다. 복음의 증인으로서 땅 끝까지 그리스도의 사역, 하느님 나라의 일을 펼쳐야하는 사명은 모든 신자가 주님으로부터 이어받고 있는 사도직입니다. 주교가 계승하는 사도직은 모든 신자의 사도직을 포함하고 있고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직자만이 아니라 모든 교우들이 “평신도 사도”로서 세상에서 전도하고 선교할 사명이 있습니다.

사목직은 단순히 교회 구성원인 교우들을 성직자가 돌보는 일에 그치지 않습니다. 사목직의 본질은 모든 교우를 장성한 분량의 신자로 세워나가는데 있습니다. 어린 신앙은 자상한 보살핌이 필요하지만 장성한 신앙은 세상으로의 파송이 필요합니다. 모든 교우들은 “평신도 사목자”로서 서로를 세워가는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전례의 가치도 성직자가 교우들을 위해 행하는 종교적 서비스가 아니라, 교회공동체가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과 감사와 기도가 본질입니다. 집전자와 회중은 구별되지만, 분리되거나 차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교우가 전례에 있어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능동적이어야 합니다. 신학도 성직자나 신학자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모든 신자는 스스로의 신앙경험을 정리하고 반성하는 신학을 이미 하고 있습니다. 신앙인의 대화는 신앙적인 동시에 신학적입니다. 신자들을 신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로 여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태도입니다. 필요한대로 신학적인 교육기회를 자주 마련하고 대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소 딱딱한 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만, 우리 성공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해나가며 교회다운 교회로서 이 땅에서 성장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우리 전통과 거리가 있는 타 교단의 지엽적인 제도나 특정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비전은 우리 가운데서 생겨납니다. 바로 우리 평신도 교우들이 교회와 선교에서 스스로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인가를 깨닫고, 그에 걸맞는 신앙과 신학과 헌신과 교육과 훈련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성공회의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평신도의 중요성은 신학적으로나, 교회 전통 속에서나 이미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평신도는 성직자에게 단순히 전통적인 사목의 대상이 아닙니다. 성직자와 함께 보다 더 근원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사도직과 사목직을 나누어질 파트너입니다. 천주교처럼 일사불란한 교회조직에 의지하기도 어렵고, 개신교처럼 담임목회자의 개인적인 카리스마가 통하기도 어려운 우리 성공회로서는 평신도의 역할이 참되게 교회 안팎에서 가능하도록 의식의 변화, 제도의 개선, 교육의 강화를 꾀하는 길이 교회성장의 가장 중요한 길이라고 사료됩니다. 실제 현실로도 “성직자 청빙제도”가 이미 관구 법규에 규정이 된 것도 교회의 주체로서의 평신도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인식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교우들 모두가 신앙의 기본에 충실할 때 그 속에서 진실한 현실성, 참다운 성공회 교회의 비전이 생겨날 것

하지만 과연 우리의 평신도들은 우리 성공회의 비전을 세우고 이루어내는 주체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을까요? 자칫하면 모든 이야기가 현실성 없는 공허한 이야기가 되고 마는 것 아닐까요? 저는 확신합니다. 현실성은 어디서 생겨날까요? 우리 교우들 모두가 신앙의 기본에 충실할 때 그 속에서 진실한 현실성, 참다운 성공회 교회의 비전이 생겨날 것입니다.

“부제님, 렉시오 디비나(거룩한 독서, 성서묵상)를 하면서 이런 말씀이 와 닿았습니다.” “신부님, 관상기도를 삼년 째하고 있는데 살아계신 하느님과 함께 하는 기쁨이 놀랍습니다.” “주교님, 교구 행정을 위해서 이런 봉사를 하고 싶습니다.” “교회위원님, 이제 해도 되고 안하면 그만인 식으로 일하지 말고, 해서 좋고 해야 되는 일은 꼭 함께 힘 모아 실천해봅시다.” 교우들 가운데 자연스럽게 이런 말씀들이 나누어질 때, 바로 이 가운데 우리 교회의 희망은 숨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