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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야기- 신앙체험의 정리와 반성/성공회이야기

[옮김] 서울역사문학기행 -6월 민주항쟁과 성공회성당

 

서울역사문학기행 -6월 민주항쟁과 성공회성당

http://cafe.daum.net/anglican-church/LSMw/585

 

6월 민주항쟁과 성공회성당

 

                                                                글/사진    김경식

 

 

가을의 끝자락에 성공회 서울대교구의 영역을 탐방하면 마음이 정결해진다. 건축학적인 미학과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이  평안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이 6.10항쟁의 진원지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더우기 일반인들은 경운궁(덕수궁)옆에  성공회 서울대교구가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 

 

세계 성공회는 170여 개국에 교회가 있으며, 신자는 약 1억명 정도다. 성공회는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6세기에 로마교회와 병합되어 발전을 거듭해 왔다.  1889년 11월 1일, 조선교구 설립을 목적으로 고요한 주교(Charles John Corfe)가 영국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켄터베리 대주교로부터 주교 서품을 받은 것이 대한성공회의 기원이다. 그는 주교서품을 받은 후에 한국 선교를 위하여 동역자들을 모집하여 영국을 출발하다. 1890년 9월 29일 인천항에 도착하여 서울과 경기도. 충청도 지방에 전도하기 시작했다. 한국 성공회의 역사다.

 

 성공회 서울교구 본당이 1987년 6,10항쟁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알고 나면 자유의 파동에 가슴이 흔들린다.

1970년대와 80년대는 독재와 민주의 싸움이 치열했다. 특히 1980년 5월18일 광주민주화 운동이후 숨죽여 지내던 민중들은 1987년 6월10일 일제히 독재의 칼날에 항거했다. 당시 6,10항쟁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중심이 되었다. 이날 대한성공회 대성당에서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 개최를 시작으로 오후6시에 전두환 독재정권에게 전면전을 선언한다.

이날 저녁 광화문을 비롯한 서울시 전역과 전국의 주요도시의 대부분의 차량들이 경적을 울려주었다.  참가자들은 흰 손수건을 흔들었다. 거리에는 많은 노래들이 등장했다. 특히 백기완 선생의 시 <님을 위한 행진곡>이 노랫말이 되어 많이 불러졌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이 한참 흐른 후인 2009년5월말 덕수궁 주변은 온통 노무현 대통령의 추모 행렬로 인산인해였다.

1987년 성공회 서울교구 마당에서 불러지던 노래 <그날이 오면>이 나직하게 불러지는 모습을 덕수궁 돌담길에서 다시 들었던 것도 이때였다.

 

한밤의 꿈은 아니리 오랜 고통 다한 후에 /내형제 빛나는 두 눈에 뜨거운 눈물들/

한줄기 강물로 흘러 고된 땀방울 함께 흘러 /드넓은 평화의 바다에 정의의 물결 넘치는 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내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

아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아 피맺힌 그 기다림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이 노래를 들으면 가슴이 울렁이며 무엇인지 모를 슬픔이 일렁인다. 민족의 수난사와 독재자들에게 스러져간 사람들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결국 덕수궁과 그 주변은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이기 이전에 우리 민족사의 큰 물줄기들이 출렁거리던 장소였다. 덕수궁 대한문 앞은 3.1운동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1987년 6월10일부터 6월29일까지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진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우리는 6월 민주항쟁이라 부른다. 

지금은 6월 민주항쟁, 6.10 민주항쟁, 6월 민주화운동, 6월 민중항쟁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진다.


1979년 10월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거사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유신정권은 종말을 고한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이 사건으로 사형을 당하고 전두환 장군이 주축이 된 군부는 1979년 12월12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고 정권을 잡는다. 이런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던 재야와 민주화 세력들은 이듬해 봄 모처럼 자유로운 봄을 맞이한다. 이른바 불안하던 서울의 봄이다.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심이 된 신군부세력에 최규하 과도정부는 무능했다. 신군부 세력은 국민들이 요구하는 민주주의를 향한 정치일정을 거부했다. 처음 군부를 향한 저항은 학생운동권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노동자들의 불만도 폭발했다. 이른바 사북사태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에서는 약 5만 명이 시위를 벌였다. 위협을 느낀 신군부 세력은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조치'를 발표한다.

 


국민들의 저항에  신군부 세력은 민주인사에 대한 대대적인 압수 수색과 투옥을 감행한다. 신군부의 강압 조치에 광주시민들은 저항한다. 전두환 군부는 1980년5월18일 광주에서 벌어진 평화시위에 군인들을 동원하여 유혈진압을 시작한다. 1979년 가을 부산과 마산에서 당했던 것을 만회하려는 듯 무자비한 진압을 감행한다.

그러나 광주시민들은 다른 곳과 달랐다. 강인한 단결력과 용기로 군부에 저항했다.

 


그러나 신군부세력들은 저항하던 광주시민들을 폭도로 매도하고 철저히 고립시킨다. 군부의 잔인한 학살이 자행되자 광주시민들은 급기야 무장투쟁을 감행한다. 10일 동안 외부와 고립된 상황에서 전개된 광주시민들의 투쟁은 헬기까지 동원한 신군부의 폭력진압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1984년 말까지 전두환 칼날 같은 독재는 침묵의 시대였다. 그 시대의 아픔을 달래기 위한 노래가 있다.

광야에서 희망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제목이 <광야에서>인데 이 노래를 부르면

언제나 가슴이 뭉클해 진다.  

 

찢기는 가슴안고 사라졌던
이땅의 피울음 있다
부둥킨 두팔에 솟아나는
하얀옷의 핏줄기 있다

해뜨는 동해에서 해지는 서해까지
뜨거운 남도에서 광활한 만주벌판
우리 어찌 가난하리오 우리 어찌 주저하리오
다시 서는 저 들판에서 움켜쥔 뜨거운 흙이여

 

 

침묵하던 민중들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 왔다. 총선이었다.

1985년 2월 12일 실시된 총선은 전두환 정권 심판을 향한 불씨였다.

1984년 11월 30일 3차 해금으로 풀려난 구신민당 출신 의원들은 1985년 1월 18일 신한민주당(약칭 신민당)을 창당한다. 신민당 창당은 가슴 조이면서 살아왔던 민주 세력의 결집을 촉진한다.

2월 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미국 망명 2년여 만에 귀국한다. 그의 귀국은 죽음을 각오한 결단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23일 간의 단식으로 민주화 세력을 결집한다.

 

선거 결과 신민당은 50명이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파란을 일으켰다. 민주화의 돌풍이 불기 시작한 결과였다.

신민당은 5월9일 민한당과 야권통합을 하여 103석으로 거대 야당이 되어 전두환 정권과의 일전을 불사할 태세였다. 국회에 교두보를 확보한 신민당은 직선제 개헌을 강력히 요구한다. 민주화 운동 세력도 그해 봄부터 군사독재 정권 타도와 이를 위한 직선제 개헌을 주장하며 거리로 나서기 시작한다.

 

이 무렵 성당과 대학교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의 전말이 담긴 비디오가 상영되면서 정국은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넘실거렸다. 그러나 전두환의 5공화국은 개헌을 요구하는 민주 집회를 전투경찰과 백골단을 동원하여 강력한 탄압으로 일관했다.

1986년 6월 부천경찰서에서 자행된 권인숙양 성고문 사건과 1987년1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은 민주화에 관심 없던 시민들도 거리로 나서게 만들었다.

그들을 추모하는 안치환 작사, 작곡의 <마른 잎 다시 살아나>를 들으면 슬픔이 몰려온다.

 

 

 

<마른 잎 다시 살아나>

 

서럽다 뉘 말하는가 흐르는 강물을 꿈이라 뉘 말하는가

되살아오는 세월을 가슴에 맺힌 한들이 일어나 하늘을 보네

빛나는 그 눈속에 순결한 눈물 흐르네

 

가네 가네 서러운 넋들이 가네

가네 가네 한 많은 세월이 가네

마른 잎 다시 살아나 푸르른 하늘을 보네

마른잎 다시 살아나 이 강산은 푸르러

 

 

80년 민주화의 봄을 처참하게 짓밟은 전두환의 제5공화국 국민들은 더 이상 정부로 인정하지 않기 시작했다. 이 무렵 국민들의 억눌린 감정은 한꺼번에 터지기 시작한다. 관련자 처벌 및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 시위가 들풀처럼 전국으로 번져갔다.


 

1987년 4월13일 전두환 정권은 “직선제 개헌을 하지 않겠다”는 '4.13 호헌(護憲)조치'를 선언한다. 재야 및 시민운동 단체들은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고 6.10일 국민대회를 대규모를 계획하며 6월5일 국민운동본부 국민대회 행동 요강을 다음처럼 발표한다.

 

1) 6.10일 오후 6시 전 국민은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애국가를 제창한다. 애국가가 끝난 후 자동차는 일제히 경적을 울린다. 전국 사찰, 성당, 교회는 타종을 한다. 국민들은 민주헌법 쟁취 만세, 민주주의 만세, 대한민국 만세를 삼창을 한다. 1분간 묵념을 하며 민주주의 쟁취의 결의를 다진다.

 


2) 경찰이 폭력으로 대회 진행을 막는 경우 전 국민은 비폭력으로 이에 저항한다. 연행을 거부하지만 연행되면 일체의 묵비권을 행사한다.

 


3) 전 국민은 오후 9시부터 10분간 소등을 하고 KBS, MBC 뉴스 시청을 거부한다.

 


4) 6.10 국민대회는 철저하게 평화적으로 참여해 주시기를 바라며 폭력을 사용하거나 기물 파손 등을 자행하는 사람은 국민대회를 오도하려는 외부세력으로 규정한다.

 


전두환 정권은 6.10대회를 불법 집회로 규정하고 경찰 병력을 총동원하여 이를 원천봉쇄 했다. 전국 경찰에 갑호 비상을 발령하는 한편 버스, 택시 회사에 경음기를 떼어내었다. 애국가 합창을 막기 위해 오후 6시에 시행하던 애국가 옥외 방송도 금지시켰다. 9일부터는 민주인사에 대한 가택 연금을 실시했으며 전국 110개 대학을 전격 수색하여 시위용품을 압수하기도 했다.


1987년 6월10일 덕수궁 옆 성공회서울대교구당 종탑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종탑꼭대기에 시전 스님과 소설가 유시춘 선생이 올라가 성명서를 낭독했다.

오후6시 성공회에서 시작된 이날의 대규모 시위의 구호는 '호헌 철폐', '독재타도'였다.


연세대생 이한열이 전날인 9일의 시위 도중 최루탄 파편에 맞아 중태에 빠졌다는 뉴스를 들은 시민들도 대거 도심으로 들어와 시위에 합류했다.

 


자동차들은 일제히 경적을 울렸다. 서울도심은 포연에 휩싸인 전쟁터였다. 6.10국민대회는 서울, 부산, 광주를 비롯한 전국 22개 지역에서 24만 여명이 참여하는 대규모였다.

경찰은 이날 하룻만에 전국에서 3831명을 연행했다고 발표한다. 이날 시위가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항쟁의 불꽃을 이어가기 위해 명동성당에서는 8백여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농성 투쟁을 하였기 때문이다.

6월 10일 밤부터 6월15일까지 5박 6일 동안 진행된 명동성당 농성 투쟁은 전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민주화를 염원하는 국민들의 희망이었다.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그 희망의 파문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시민들은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던 사람들에게 성금은 물론 빵, 음료수, 의약품 등을 전달하였다.,이 무렵 시위현장에서는 전두환이 군대를 동원할 것이란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만약 이 무렵 광주항쟁 때처럼 군대를 동원하였다면, 참혹한 내전으로 확산되었을지 모른다.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과 학생들의 분노는 결사대로 나가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무렵 덕수궁 옆을 휘돌아

성공회 성당 앞에서  부른 노래가 생각난다.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도 너를 잊은 지 너무도 오래

오직 하나 타는 가슴속 목마름에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살아온 저 푸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 나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치 떨리는 노여움에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도 너를 잊은 지 너무도 오래

오직 하나 타는 가슴속 목마름에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살아온 저푸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 나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치 떨리는 노여움에

서툰 백묵글씨로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시인의 시 <타는 목마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