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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글

(옮김) 조화와 일치가 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

최은식 신부(안중교회 관할사제/ 성공회정의평화사제단 회장)님의 설교를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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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위일체주일 설교 

                               조화와 일치가 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 

   얼마 전 다니엘 교우님께서 교회 화단에 장미를 심었습니다. 햇볕이 잘 드는 곳에 구덩이를 파고 물과 거름을 흠뻑 주었습니다.  장미가 잘 자라려면 거름과 물과 햇볕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내친 김에 옆에 있던 고추에도 물을 많이 흠뻑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신부님, 햇볕은 없는 데 물을 많이 주면 탄저병에 걸립니다.”  
저는 여기서 한 가지 진실을 알았습니다. 조화가 깨지면 죽게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어느 한편이 적고 어느 한편이 많으면 생명이 자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 질서는 조화와 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삼위일체 신앙도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신앙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삼위일체 신앙입니다. 이것을 거부하면 적그리스도요, 이단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믿음생활에 일치와 조화를 상실한다면 우리 믿음은 이단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란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하느님은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각기 다른 위격을 갖고 계시지만 이 세분은 서로 다른 분이 아니라 한 하느님이심을 믿고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믿기 어려운 설명하기 어려운 이 고백이 우리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진리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성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마태28:19) 이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으며, 그 외의 모든 성사도 성삼위의 이름으로 이루어집니다.  뿐만아니라 축복과 은총의 기원도 우리가 늘 고백하는 신앙고백도 모두가 성삼위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초대 교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삼위일체에 대한  고백은 신앙과 전례에 중심이며 정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 모든 동작, 모든 의식, 모든 삶은 언제나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고백이 그 중심에 서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왜 이토록 삼위일체를 강조하고 그것을 모든 전례와 삶에 중심에 두고 있습니까? 삼위일체는 하느님의 존재 방식이자 곧 우리의 삶의 방식이요 신앙의 근본이 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고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처럼 거룩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피조물인 우리가 하느님처럼 거룩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삼위일체적 거룩입니다. 그것은 일치와 조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거룩입니다.  

    먼저,  일치입니다. 
    지금 하느님이 말씀하시는 거룩함, 이것은 일치입니다.  하느님은 분명히  서로 다른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존재하십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분명히 다른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하느님이시라고 하면 이해하지 못하는 분이 계십니다.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분명히 아버지와 아들은 다른 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부분을 읽으면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분명히 다른데 이 세분은 한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서로 다른 삶의 모습들이 하나가 되어야합니다.   
     예수에게서 나타난 가장 독특한 점은 일치입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인성과 신성 일치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분리되었던 성과 속이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인카네이션, 성육신 신앙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리시키려 합니다. 예배와 삶을 분리시키고, 신앙과 삶을 분리시키려고 합니다. 그리고 말씀과 삶을 분리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모든 것을 일치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단은 딴 게 아닙니다. 서로 하나가 되지 못할 때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기도를 놓고 예수님은 위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루에 두 번씩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두 번이 단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이들을 위선자라고 하셨습니까?  기도와 삶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삶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기도를 열심히 하고 성경에는 박사였지만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 속에서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있습니까?  말씀이 내 삶속에서  일치하고 있습니까?  예배가 곧 나의 삶이 되고 있습니까?  만약에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삼위일체적 신앙이 아닙니다.    

     이처럼 삼위일체 신앙은 다른 게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서로 다른 위격인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하나가 되셨던 것처럼 우리의 서로 다른 삶이 서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말과 행동이 하나 되고, 예배와 삶이 하나가 돼야 합니다.  성직자와 신자가 하나가 되어야하고, 주교와 사제와 부제가 하나가 되어야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되 마음만으로 안 됩니다. 몸만으로도 안 됩니다.   몸과 마음과 뜻과 지식이 하나가 되어 사랑해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하느님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둘째, 조화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인격과 역사가 있었지만 서로 다르지 않고 조화를 이룹니다.  
     하루는 자하가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안회의 사람됨은 어떻습니까?” 
   “그 사람의 어진 행동은 나보다 훌륭하지”  
“자공의 사람됨은 어떻습니까?” 
   “그의 언변은 나보다 훌륭하지” 
“자로는 어떻습니까?”    “그의 용기는 나보다 낫지” 
“그렇다면 스승보다 훨씬 더 뛰어난 이 사람들이 왜 선생님을 스승으로 섬기고 있는 것입니까?” 
     공자가 말합니다.   “안회는 어질지만 융통성이 없고, 자공은 언변은 좋으나 말을 아끼지 않고, 자로는 용감하기는 하지만 겁낼 줄을 모르기 때문에 나를 섬기는 것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삶에 있어서 조화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친 말씀입니다.  뛰어남보다 더 귀한 것은 조화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조화가 필요합니다.   조화를 상실하면 병들거나 죽게 됩니다. 이는 교회도 마찬가지요,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체를 보십시오. 먹는 것과 배설하는 것이 조화를 이룹니다. 그리고 축적과 분배가 조화를 이룹니다.  우리가 먹은 음식은 양분으로 변화되지요. 그리고 그것을 적당히 분배하고 또 필요에 따라 쓸 수 있도록 적당한 양을 체내에 보관합니다.  이 때 사람은 병에도 걸리지 않고 건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조화가 깨져서 싸놓기만 하면 비만에 걸리고 온갖 병에 걸리게 됩니다.  혈압에 심장병에 당뇨에 온갖 질병에 시달리게 됩니다. 저는 여기서 한 가지 진실을 알았습니다. 조화가 깨지면 병들거나 죽게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어느 한편이 많으면 어느 한편이 적게 되면 생명이 자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성도의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은사와 체험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말씀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사랑의 실천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중에 어느 하나만 이 강조되면 이단이 되고 맙니다. 성령체험은 강조하는데 말씀과 사랑의 삶이 무시된다면, 그리고 말씀은 강조하는데  살아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활동하심을 무시하면 이것은 이단입니다. 

    이는 신자들의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생활만 열심히 하면 신앙생활 잘하는 것일까요?  아니지요. 교회에서 하는 봉사도 열심히 하고, 기도생활도 열심히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렇게 교회생활을 열심히 해도 결국 가정과 이웃과의 친교를 소흘히 하면 그것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이처럼  참된 신앙은 교회생활과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가정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가정에서 자녀 사랑, 남편 사랑, 부모 사랑이 조화를 이루어야지 어느 한편에 치우치면 건강한 크리스찬 가정이 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신앙이나 가정이나 사회생활이나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조화가 없는 신앙, 조화가 없는 삶이 없이는  삼위일체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이단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셋째,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어떻게 조화와 일치를 이루시는 것일까?  그 힘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없이는 일치도 조화도 무의미합니다.  요한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로부터 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1요한4:7)  왜 그럴까요?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4:8) 
    부부 일심동체란 말이 있습니다. 어떻게 서로 다른 사람이 한 몸이 될 수 있습니까? 서로 다른 인격, 서로 다른 삶을 살아왔던 사람을 하나로 묶어 줄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때문에 사랑이 없는 부부는 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마치 모레와 시멘트가 물에 의해 반죽이 될 때 바위처럼 단단해 지는 것처럼 우리의 삶을 조화와 일치를 이끌어주는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때문에 삼위일체 신앙은 오로지 사랑을 통해서만 느껴지고 이해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것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이는 삼위일체 신비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여러분은 자기의 믿음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 스스로 살피고 따져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살피고 따지라는 이 말은 사랑의 능력을 믿고 사랑 안에 살고 있는지를 살피고 따지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살피고 따지지 않으면 언제나 사탄의 올무에 걸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로의 말씀처럼 우리는 서로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거룩한 입맞춤이란 곧 사랑의 입맞춤을 의미합니다.  이 사랑의 입맞춤은 서로를 일치하게 합니다. 하느님과 나를 일치하게 하고, 또 서로를 일치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다시 십자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성체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참 사랑이 보입니다. 사랑하시기에 자신을 주셨던 하느님, 나를 사랑하셨기에 자기를 포기하신 하느님, 그리고 나를 사랑하셨기에 우리의 아픔을 보신 하느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주변을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많은 아픔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아이티의 지진, 그리고 4대강 개발로 인해 죽어가고 있는 생태계, 천안함 사건으로 더 냉각되고 있는 남북관계, 천안함 사건이 북측이 한 것으로 가닥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그 해법은 참으로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왜 이런 사태에 이르게 되었습니까? 결국 대북정책의 실패입니다. 이제 가죽채칙을 쇄채칙으로 만들 치겠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해서 분단되었고, 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나라의 현실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구제역으로 수많은 농가가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  이들의 아픔을 기억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해 보시기 바랍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삼위일체의 모습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처럼 거룩한 삶을 살아가려면 우리의 삶도 하느님처럼 사랑과 말씀 안에서 일치와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