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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초록/2015년도 설교초록

은총 안에 누리는 몸의 치유와 회복 (연중12주간 금/ 마태 8:1-4)

 

2015년 6월 26일 (연중12주간 금/ 녹) 성서말씀과 강론초록

 

마태 8:1-4  

[나병환자를 고치신 예수 (마르코 1:40-45; 루가 5:12-16)]
1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이 뒤따랐다.
2 그 때에 나병환자 하나가 예수께 와서 절하며 "주님, 주님은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고 간청하였다.
3 예수께서 그에게 손을 대시며 "그렇게 해주마. 깨끗하게 되어라." 하고 말씀하시자 대뜸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  4 예수께서는 그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정해 준 대로 예물을 드려 네 몸이 깨끗해진 것을 사람들에게 증명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본기도> 인자하신 하느님, 우리가 간구하는 것보다 항상 넘치게 들어 주시나이다. 비오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우리를 돌보시어, 우리가 감히 구하지 못할 은총을 내려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아멘!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교의 신앙입니다.

그런데 “어떤 내용을 주장할 때” 그것을 내가 확신한다고 내세우기 전에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다”고 보여주고 설득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무조건 믿으면 좋다고 주장하거나 강요할 수 있지만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처음에 박해받는 종교였던 것은 어쩌면 감사한 일입니다. 처음부터 권력을 가졌다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설득하기 보다, 그저 주장하고 강요하는 일에 힘을 썼을  터이고 그 결과 수준이 한참 떨어지는 성경과 교리를 가지게 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정통 교회, 특히 우리 성공회는 성경과 전통과 이성에 의지하여 그 설득과 합의를 이루어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로 고백되는가?” 를 전합니다. 이미 신앙을 가진 이들이 독자인 것을 전제로 하여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어떤 가르침과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밝힙니다. 그래서 신앙이 없는 이에게 성경의 내용은 설득력이 부족한 엉뚱한 내용으로 읽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신앙인은 모든 성경에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까닭을 묵상합니다. 그리고 그 까닭이 오늘 날 나의 삶 속에서 나의 진정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고백하고, 삶으로 나타낼 수 있는 지를 성찰합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마태오복음 5장에서 7장까지 이른바, 산상설교를 마치시고, 첫번째로 나병환자를 치유하신 일을 전합니다. 가르친 일 다음으로 하신 일, 그 가르침을 행동으로 보이신 일에 해당하는 일이 바로 병자를 고치신 일입니다.

산상설교는 신앙인은 물론  마하트마 간디 같은 비그리스도인 조차도 감동 감화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현대인은 성경이 전하는 치유의 기적에서 그 진정한 의미를 깨닫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늘날 질병을 다루는 일은 과학과 기술과 결합된 의학분야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비용의 문제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문제입니다.

오늘 복음서는 나병환자를 고치신 이야기를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치유의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시다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산상설교의 아름다운 내용을 설교하기보다 솔직히 난감한 느낌입니다.

예수님이 오늘날 피부과 전문의 의사의 역할을 하신 것일까요? 아니, 핵심은 예수님의 치유가 의학기술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능력에 의지했다는데 있을까요? 아니면, 치료비 대신에 예수님께 청탁하는 믿음을 통해 치유받았다는 데 초점이 있을까요?

우리의 구원은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몸으로 경험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행복은 몸의 조건을 따릅니다.

영혼이 저 세상에서 복락을 누리는 일이 구원이 아닙니다. 거지 라자로의 경우는 어떠냐구요? 루가복음서의 그 대목은 현세의 부조리한 처지를 뒤집는 하느님의 공정한 처사를 전합니다. 죽음과 하느님 앞에 인간은 평등하다는 진실을 알리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우리 삶을 연결되어있고 공동의 책임이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사후세계의 천당에 대한 정보를 말하는 내용으로 알아듣는 것은 일종의 오해입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은 영혼도 훌륭할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두뇌의 기능이 경쟁력이 있을 뿐입니다. 몸의 일부인 두뇌가 기능이 좋은 것이지만 더 선하고 의로운 인격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미인과 미남, 요즘말로 얼짱은 더 인격이 훌륭할까요? 몸의 일부인 안면 기관의 배열이 조화롭게 된 이들입니다. 호감을 더 얻기는 하지만 꼭 인품이 좋으리라 믿을 수는 없습니다. 현실에서 잘난 사람, 성공한 사람, 행복한 사람은 훨씬 유리한 육체의 기능과 구조를 허락받은 이들입니다.

정신적, 영적인 성취로 여겨지는 많은 일들이 실은 육신의 조건과 연결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점에서 몸의 현실을 건강하게 누리는 일이 구원입니다. 나병환자에게는 자신의 나병이 치유되는 일이 곧 구원입니다. 육체의 회복 자체보다 더 중요한 일은 나병이 치유되어 다시 마을공동체, 사회로 복귀하는 일입니다. 나병의 치유는 거기까지의 회복을 포함합니다.

그런데 나병은 전염병이어서, 요즘 메르스와 마찬가지로 격리가 최선입니다. 치료법도 쉽지 않아서, 마치 하느님의 징벌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던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몸을 가진 사람이 그 몸에 나병이 생기면, 그는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인간으로 평가절하되고, 더 이상 인간사회에 어울려 살 수 없는 인간으로 소외되어 버립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나병의 치유는 이런 수준의 버려진 삶, 망가진 삶에 대한 치유요 회복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요? 당사자의 간절한 필요와 예수님의 자비가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떤 기적을 체험하기 위한 조건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은총의 도우심이 필요한 현실에서 생겨나는 인간의 간절함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몸의 필요에 정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이의 몸의 필요에 민감해야 합니다. 그 필요을 채우는 일은 하찮은 일, 세속적인 일이 아니라 실은 고귀한 일, 거룩한 일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몸의 필요와 마음의 욕망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의 욕망을 부풀리고 채우는 일이 성공이고 행복인 것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체로 내 몸의 필요는 다른 이의 몸의 필요와 충돌하지 않습니다. 필요를 채우기에 부족한 결핍의 상황은 함께 힘을 모아 해결하면 됩니다. 그러면 몸의 필요를 채우는 일이 함께 사랑을 누리는 일이 됩니다. 오늘 우리의 성찬례는 바로 이러한 삶의 신비, 신앙의 신비, 구원의 신비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욕망을 채우려는 의도는 쉽게 다른 이의 욕망과 충돌하고, 다른 이의 필요를 외면합니다. 인류 역사의 고통과 죽음, 그리고 악한 관습과 체제는 대체로 욕망을 서로 모방하고 경쟁하고 다투는 데서 생깁니다. (르네 지라르)
육이오 한국전쟁도 민중들의 참된 필요를 외면해왔던 봉건체제와 제국주의, 군국주의 체제의 행악을 안고 있는 현실에서, 그 해결방법을 이념으로 내세운 체제경쟁의 욕망이 결합된 불필요한 전쟁, 참혹한 내전, 어리석은 대리전쟁이었습니다.

욕망를 채우는 일은 중독을 가져옵니다. 필요를 해결하는 일이 중독을 가져오는 일은 없습니다.
나의 필요를 해결하는 일에 진심을 다하는 일, 다른 이의 필요를 해결하는 일에 민감하게 함께 하는 일, 함께 우리들의 필요를 해결하는 일에 힘과 지혜를 모으는 일, 이 모든 일이 우리들의 신앙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신뢰하되, 우리의 삶에 정직하고 진지하게 살아가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일은 생각으로 덕담으로 좋은 이야기를 늘어놓는 일이 아닙니다. 나 자신에 대해서, 다른 이에 대해서, 우리 모두에 대해서, 몸의 필요와 한계를 인정하고, 그래서 더욱 그 필요에 정직하고 진실하게 사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우리의 모든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삶의 현실이 하느님의 창조의 은총으로 주어진 것을 깨닫고 감사하는 일입니다. 육체가 있어서 질병도 생깁니다. 생명이기 때문에 죽음도 불가피합니다. 단세포 생물은 질병도 없고, 무생물은 죽음도 없습니다. 슈퍼맨이 되거나 성공한 사람이 되는 일이 믿음으로 구할 내용이 아닙니다.

우리에 주어진 이 세상의 삶, 저마다 자신의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 몸의 현실, 이 세상의 뛰어남과 빼어남이 모두 육체적인 조건과 한계 안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인간들의 우열이란 참 우스꽝스러운 것임을 알게 됩니다. 영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일은 육체적인 일들을 배제하고 몸의 현실과 동떨어진 어떤 것에서 행복의 근거를 찾는 게 아닙니다. 저마다의 몸의 현실을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각자와 서로의 필요를 잘 채우고, 돕고, 누리는 일이 영적인 진리 추구입니다. 현대의 개념으로는 복지사회의 원리입니다.

제가 관념적인 이야기를 더 정교하게 표현한다고 해서 신앙적으로 훌륭한 건 아니지요. 현실 속에 경험되지도 않는 이야기를 그럴 듯하게 주장하고 알리는 일은 선교도 아니고 전도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치유하시고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저 사회로 복귀해서 정상적으로 살아가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구원과 능력을 선전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회복된 삶을 세상 속에서 드러내며 살아가는 일입니다.

 

일주일 관상기도, 40일 피정을 해서 더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훌륭해지는 것 아닙니다. 그런 기대와 착각을 버리는 게 좋습니다. 물론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겠요. 하지만 그런 기도가 인간을 구원하는 일에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님은 분명합니다. 몸의 현실을 사는 사람의 고통과 기쁨, 그러니까 몸을 움직여서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 교우님들의 삶이 구원의 대상이요 내용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어주시는 은총과 가르치시는 진리를 따라서 함께 치유와 회복을 누리는 일이 구원이요 사랑입니다. 우리의 성찬례는 그 구원과 사랑을 기억하여 다시금 오늘의 삶에 이루어내는 일입니다.

 

오늘 안마리아, 주동일 요한, 김규식 다니엘 세분의 별세를 기념합니다. 이 분들이 위인이고 영웅이어서가 아닙니다. 평범하고 소박하지만, 하느님의 은총 안에 구원을 누리며 세상을 떠난 분들입니다. 그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가 구원으로 드러났기에 이 분들은 거룩하고 선한 분들입니다.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로 은총 안에서 거룩하고 선한 이들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