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초록/2013년도설교초록

2013년 2월 17일 (사순 1주일) 성서말씀과 강론

 

 

2013년 2월 17일 (사순 1주일/ 자) 성서말씀

 

신명 26:1-11

1. 너희 하느님 야훼께 유산으로 받은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하고 자리잡게 되거든 2. 너희 하느님 야훼께 받은 그 땅에서 너희가 거둔 각종 햇곡식을 떠내어 광주리에 담아가지고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고르신 곳으로 가거라. 3. 너희는 당직 사제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여라.
'나는 야훼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우리의 선조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이 땅에 들어오게 된 것을 오늘 나의 하느님 야훼께 아룁니다.'
4. 사제가 그 광주리를 네 손에서 받아 너희 하느님 야훼의 제단 앞에 놓으면 5.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 앞에 아래와 같이 아뢰어야 한다.
 '제 선조는 떠돌며 사는 아람인이었습니다. 그는 얼마 안 되는 사람을 거느리고 이집트로 내려가서 거기에 몸붙여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불어나 크고 강대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6. 그래서 이집트인들은 우리를 억누르고 괴롭혔습니다. 우리를 사정없이 부렸습니다. 7. 우리가 우리 선조들의 하느님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야훼께서는 우리의 아우성을 들으시고 우리가 억눌려 고생하며 착취당하는 것을 굽어살피셨습니다. 8. 그리고 야훼께서는 억센 손으로 치시며 팔을 뻗으시어 온갖 표적과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모두 두려워 떨게 하시고는 우리를 이집트에서 구출해 내셨습니다. 9. 그리하여 우리를 이 곳으로 데려오시어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10. 그런즉 야훼여, 주께서 저에게 주신 이 땅의 햇곡식을 이제 제가 이렇게 가져왔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너희 하느님 야훼 앞에 놓고 너희 하느님 야훼 앞에 엎드려 예배 드리고 11.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와 너희 집에 주신 온갖 좋은 것을 먹으며 즐겨라. 너희뿐 아니라 너희 가운데 있는 레위인과 떠돌이도 함께 즐기도록 하여라.

 

시편 91:1-2, 9-16

1. 지존하신 분의 거처에 몸을 |숨기|고 ∥ 전능하신 분의 그늘 아래 머|무는|사람|아,
2. 주께서 네 피난처시요, 네 요새|이시|며 ∥ 네가 의지하는 하느님이라고 |말하|여-|라.
9. 주님을 너의 피난처라 |하-|고 ∥ 지극히 높으신 분을, 너의 요새로 |삼았|으-|니,
10. 어떤 불행도 너를 덮치지 못|하리|라. ∥ 어떤 재앙도 네 집을 가까이 |못하|리-|라.
11. 주께서 너를 두고 천사들을 |명하|여 ∥ 너 가는 길마다 지키게 |하셨|으-|니,
12. 행여 너 돌 뿌리에 발을 다|칠세|라 ∥ 천사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고|가리|라.
13. 네가 사자와 독사 위를 짓밟고 |다니|며, 사자새끼와 살모사를 |짓이|기리|라.
14. 나에게 부르짖는 자를 내가 건|져 주|며 나의 이름을 아는 자를 내가 |높여|주리|라.
15. 나를 부르는 자에게 대답해 주고: 환난 중에 그와 함께 있|으리|니 ∥ 나는 그를 건져주고 |높여|주리|라.
16. 그로 하여금 마음껏 오래 살게 |하-|고 ∥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여|주리|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아-|멘

 

로마 10:8-13

8. 하느님께서 "말씀은 네 바로 곁에 있고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 하셨는데 이것은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을 가리켜 하신 말씀입니다.
9.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또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0. 곧 마음으로 믿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게 됩니다. 11. 성서에도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12. 유다인이나 이방인이나 아무런 구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만민의 주님이 되시고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찾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복을 내리십니다. 13.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루가 4:1-13

1. 예수께서는 요르단 강에서 성령을 가득히 받고 돌아오신 뒤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셔서 2.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 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서 사십 일이 지났을 때에는 몹시 허기지셨다.
3. 그 때에 악마가 예수께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하여 보시오." 하고 꾀었다. 4. 예수께서는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5. 그러자 악마는 예수를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잠깐 사이에 세상의 모든 왕국을 보여주며 6. 다시 말하였다. "저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저것은 내가 받은 것이니 누구에게나 내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줄 수 있소. 7. 만일 당신이 내 앞에 엎드려 절만 하면 모두가 당신의 것이 될 것이오." 8. 예수께서는 악마에게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예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라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9. 다시 악마는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시오. 10. 성서에 '하느님이 당신의 천사들을 시켜 너를 지켜주시리라.' 하였고 11. 또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손으로 너를 받들게 하시리라.'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소?" 하고 말하였다. 12. 예수께서는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떠보지 마라'라는 말씀이 성서에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13. 악마는 이렇게 여러 가지로 유혹해 본 끝에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예수를 떠나갔다.

 

<본기도> 구원의 하느님,  하느님 백성이 광야의 시련을 거쳐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셨나이다. 비옵나니, 우리가 이 세상 광야를 지나는 동안 주님의 이끄심을 따라 마침내 약속하신 영광의 나라에 이르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1>

                            신앙을 되돌아 보는 사순절 (루가 4:1-13)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몇 년 전 인사발령을 받았던 때가 생각납니다. 가야할 때를 알고 가는 사람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시도 있지만 이제는 가야할 때라는 것을 잘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인사발령이 확정해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저는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중심이 되어왔다고 느끼던 많은 일에서 이제 저는 사라지게 됩니다. 제가 사라진 후에 남는 결과들이야말로 정작 실제의 열매가 됩니다. 여전히 제가 영향을 미치고 싶고 인정을 받고 열매를 맛보고 싶은 마음이 있음을 깨달으며 저는 제 사역의 진정성을 반성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제가 무엇을 의지했고 무엇을 바라고 누구를 어떤 동기로 얼마나 사랑해왔는가 하는 것을 뒤돌아보며 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덕목들이 여전히 자기중심적이고 아주 보잘 것 없이 흔들리는 불완전한 것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에 하느님께서 위로의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본래 그런 것이야. 너를 지탱해주는 것은 너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아니라 너를 향한 나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란 제가 제 마음 안에 소유하고 있는 지식과 정서와 의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저라는 존재가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누리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주체가 단순히 저 자신이 아니라 저를 이 땅에 내시고 부르시고 보내시는 살아계신 하느님이심을 생각하니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우리 각자가 어떤 내용을 확신하고 신념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신앙적인 의미의 믿음은 지금도 살아계신 하느님께서 하느님을 찾는 우리를 향하여 변치 않는 신의를 지키신다는 것을 깨닫고 신뢰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우리의 소망도 우리가 무엇을 원하고 그것을 하느님께 구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신앙적인 의미의 소망은 살아계신 하느님이 우리에게 가지고 계신 뜻과 계획을 듣고 따르는 일입니다.

우리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어떤 대상을 좋아하고 뭔가를 베풀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의 풍성한 사랑 안에서 그 사랑을 누리고 그 사랑의 힘으로 우리들 사이의 여러 가지 장벽을 넘어서 친교를 나눌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오늘은 사순1주일입니다.
교우 여러분, 사순절기를 왜 지키는 것입니까? 부활절기를 잘 맞이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의 모든 일은 그 의미가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뚝 끊어져 있는 법은 없습니다. 사순절기는 사순절기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부활을 기쁘고 뜻있게 기념하기 위한 준비입니다. 부활절기는 무엇입니까?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켜서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게 하신 사건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아시는 바대로 모든 주일은 작은 부활절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부활의 의미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가 전하는 부활은 단순히 한 자연인으로서의 예수님이 육신의 사망선고를 받았다가 기적적으로 다시 소생하게 되었다는 그런 기적이 아닙니다. 그런 기적은 요즘도 가끔 해외토픽에 나오곤 하지만 별로 깊은 의미가 없는 해프닝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런 수준이 아니라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시고 가르치시고 보여주신 예수님께서 세상의 권력자들에게 십자가형을 당하여 무참히 돌아가셨지만 무덤에서 덧없이 썩어지는 육신으로 남지 않으시고 다시금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지금 이곳에 이루시는 분으로 돌아오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의미를 전제로 해서 오늘 로마서에서 바울로 사도는 말씀합니다.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또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차원의 예수님의 부활을 참으로 믿는 이들입니다. 안 믿어지는 사실을 억지로 머리로 믿는 수준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활을 믿을 뿐만 아니라 직접 주님의 부활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언제 어떻게요?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바치는 이 감사성찬례가 바로 그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부활하신 주님의 손과 발에 못자국이 선명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를 만나주시되 당신의 몸을 쪼개고 피를 흘려서 우리에게 먹여주심으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이제 곧 우리는 주님의 상처 난 몸, 흘리신 피를 성체와 보혈로 먹고 마시게 됩니다. 십자가의 주님이 부활의 주님이 되신 것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일이 오늘 우리의 감사성찬례입니다.

부활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하느님께서 참된 구원의 길, 행복한 인생의 길로 인정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사순절기는 예수님이 걸으신 십자가의 길에 동참해서 예수님이 선취하신 그 부활의 기쁨에 참여하려는 것입니다.

사순절기 내내 잊지 마셔야 합니다.
사순절을 지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잘 단련해서 훌륭한 성인처럼 되자는 의도가 아닙니다. 부활절기를 잘 맞이하기 위하여 주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자는 의도입니다.

 

오늘 사순 1주일에 우리는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의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신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 이야기는 얼핏 인간적인 욕망을 자극하는 악마를 이겨내시는 예수님의 믿음을 보여주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굶주림을 이기시는 인내심, 세상의 부귀영화를 초연해 하시는 무욕, 기적에 의지하지 않는 겸손함 등등 예수님의 놀라운 인격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아서 굳센 믿음으로 훌륭한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는 데에 초점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말씀은  우리가 예수님께서 어떤 차원을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신가,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보여주신 하느님 나라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를 전하려는 데에 초점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예수님 공생애 후반의 게세마니에서의 기도 장면과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장면을 미리 암시하는 일종의 복선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인간의 모든 욕망이 믿는 바대로 이루어지고 해결되는 그런 유토피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기적적인 해결사로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시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하느님의 말씀을 의지하시고, 우리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들려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현실이 곧 이 땅의 하느님 나라를 이루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경제력과 권력으로 이루는 이 땅위의 화려한 제국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리 하셨듯이 하느님을 오직 한 분 아버지 하느님으로 받들 때에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우리 욕망을 투사하여 세우는 모든 우상은 제거되어야 합니다. 한 분 하느님을 얻을 때에 그 분을 통하여 우리는 참으로 이 세계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한 분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모심으로써 우리는 이 세상을 지배하는 악마에게서 이 세계를 되찾아 하느님께 봉헌해드리게 됩니다. 그것이 성찬례에서 우리가 드리는 봉헌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무엇을 얻는 일에 하느님을 이용하고 세상에서 얻은 것으로 하느님 앞에 자랑하는 것은 어리석은 태도일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보이고 그것을 신앙의 힘이라고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하느님의 현존을 기적으로 통해 드러내고 자랑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는 평범한 우리들의 마음과 일상과 세계에서 어떻게 우리가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고 누리는가에 달려있습니다. 교회는 우리가 참된 하느님의 현존을 “말씀과 성사”를 통해서 경험할 수 있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사순절기는 우리 신앙을 깊은 차원에서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내세워 추구했던 욕망들을 살피는 시간입니다.
한 분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의지하며 하느님의 말씀과 성사에 충실한 삶,
사순절기는 그러한 행복을 참 맘으로 추구하는 시간입니다.
복된 사순절기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

 

<강론초록2>

                  유혹을 이기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 살자 (루가 4:1-13)

 

예수님의 광야시험은 공생애동안 하느님의 일을 하시며 늘 겪으셨던 유혹을 내용으로 합니다. 또한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 신앙인들이 살면서 겪어야 하는 유혹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빵’이라는 말로 표현된 재물, 세상이 인정하는 ‘권세와 영광’, 그리고 ‘기적’을 원합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하느님으로부터 기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라 하느님 당신의 사랑과 자비 자체입니다. 우리를 참으로 변화시키고 행복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우리와 함께 해주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유혹은 인간이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행동하는 자세를 뜻합니다. 악마의 유혹은 그저 터무니 없고 황당한 것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럴듯한 것이 특징입니다.
인간에게 빵이 중요하고 재물을 가지면 힘도 가지게  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먹고 사는 일이 전부인 듯 살아서는 안된다고 말씀합니다.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악마는 권력과 영광을 가진 사람에게 엎드리고 빌붙어서 세상의 몫을 차지하라고 우리를 유혹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은 부귀와 영화를 탐하여 아무 데나 엎드려 절하지 않습니다.

악마가 기적을 행하라고 유혹하는 것은 기적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처럼 기대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셨고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기적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초능력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분 안에 보이는 하느님의 자비와 은혜로우심을 경험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는 하느님의 기적(奇蹟)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당신의 뜻과 사랑과 자비로 함께 하시는  성사(聖事)의 하느님을 의지하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가 기대할 바는 자비와 능력과 은혜의 성 삼위 하느님 자체이지, 재물과 권세와 영광 그리고 기적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신앙인은 하느님의 자비와 은혜로우심을 경험하고 전합니다.
자기 소원을 성취하겠다고 열심히 기도하는 일,  권력과 영광을 얻어 보겠다고 비굴하게 엎드리는 일은 하느님의 자녀로서는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초보적인 수준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이 하신 일 안에 하느님의 일을 알아보고, 자기도 같은 실천으로 하느님의 자비와 은혜로우심을 주위에 전하는 생명의 사람입니다. 그것이 하느님 자녀가 되어 성장하고 성숙하며 사는 복된 길입니다. ✠

 

<강론초록3>

                              유혹의 본질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시기전에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서 40일간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신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이제 40일간 사순절기를 절제하고 삼가고 정화하며 지내는 우리가 이겨야 할 유혹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 가지 유혹의 내용을 마치 우리네 육신을 가지고 사는 인간들이 이런저런 욕심과 정욕으로 인해 받는 윤리적 유혹과 비슷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실은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유혹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이라는 전제가 붙은 것이었습니다. 즉, 그리스도라는 자의식을 가지시고, 성령에 충만하신 상태에서 받으신 유혹입니다. 단순히 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로서 받으신 유혹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세 가지 유혹은 예수님의 육신적인 연약함을 시험하여 메시야의 자격이 있는가를 떠보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 당신의 구원사역을 어떤 방향과 깊이로 펼쳐 가실지를 알아보려는 데 의도가 있습니다. 이 유혹 이야기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원과 하느님께서 이루시려는 구원이 본질적으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악마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원하는 것들을 간파하여 예수가 그리스도라면 군중들의 이런 요구들을 수용하고 해결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상 이 유혹이야기의 가치는 “예수님을 추종하는 우리들이 과연 예수님께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를 드러내고 “우리의 그러한 요구를 예수님께서 어떻게 처리하실 것인지”를 깨닫게 해주는데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과  사랑과 의로움”을 구하여야 합니다. 그것만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 “경제적인 부, 권력과 명예, 기적과 신비”를 예수님께 신앙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모두 다 악마적인 “유혹”에 해당합니다. 이 사순 절기에 우리는 바로 이 치명적인 유혹을 피하기 위하여 성찰하고 또 성찰하고 깊이 깊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