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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초록/2013년도설교초록

2013년 2월 10일 (설날) 성찬례 성서말씀

 

 

2013년 2월 10일 주일 (설날/ 백) 성서말씀 


민수 6:22-27

22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23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런 말로 복을 빌어주라고 하여라.
24 '야훼께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며 너희를 지켜주시고,
25 야훼께서 웃으시며 너희를 귀엽게 보아주시고,
26 야훼께서 너희를 고이 보시어 평화를 주시기를 빈다.'
27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 이름으로 복을 빌어주면 내가 이 백성에게 복을 내리리라."

 

시편 89:1-2, 4-5, 12-16

1 주여, 내가 당신의 사랑을 영원히 노래하|리이|다. ∥ 당신의 미쁘심을 대대로 |전하|리이|다.
2 당신께서 다짐하신 |사-|랑, ∥ 그 미쁘심은 하늘처럼 영원히 흔들리지 |않습|니-|다. 4 내가 너를 왕위에 |앉히|고 ∥ 네 후손 대대로 왕 노릇|하게|하리|라.
5 주여, 하늘은 당신께서 이루신 기적을 |노래|하며 ∥ 거룩한 회중은 당신의 미쁘심을 |기리|옵니|다.
12 북녘과, 남녘을 만드신 이도 당신|이오|니 ∥ 다볼산도 헤르몬산도 당신의 이름을 찬|양하|옵니|다.
13 그 모든 전공이 당신의 |것이|니 ∥ 억세신 당신 손이여, 탁월하신 |오른|손이|여.
14 정의와 공정이 당신의 옥좌를 |받들|고, ∥ 사랑과 진실이 당신의 거동을 인|도하|옵니|다.
15 복되어라, 주님께 만세 부르는 |백-|성 ∥ 그들이 걷는 길을 당신의 환한 얼굴이 |비춰|주시|니
16 날마다 그 이름 높이 |기리|고 ∥ 당신의 정의로 사기도 |드높|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아-|멘

 

야고 4:13-15

13 "오늘이나 내일쯤 아무 아무 도시로 가서 일 년 동안 거기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어보겠다." 하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합니다.
14 당신들은 내일 당신들의 생명이 어떻게 될는지 알지 못합니다. 당신들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리는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15 그러므로 당신들은 "만일 주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우리는 살아가며 이런 일 저런 일을 해보겠다." 하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마태 6:19-21, 25-34

19 "재물을 땅에 쌓아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먹거나 녹이 슬어 못쓰게 되며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간다. 20 그러므로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어라. 거기서는 좀먹거나 녹슬어 못쓰게 되는 일도 없고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가지도 못한다. 21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25 "그러므로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26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먹여주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귀하지 않느냐? 27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목숨을 한 시간인들 더 늘일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는 어찌하여 옷 걱정을 하느냐?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29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한 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 입지 못하였다. 30 너희는 어찌하여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31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32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34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

 

<본기도>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 주님의 은혜로 우리가 대대로 번영을 누리게 해 주심을 감사하나이다. 비옵나니, 설날을 맞이하여 우리 선조들의 영혼을 기억하오니,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영원한 안식을 주시고, 주님의 자녀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한 가정을 이루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으로 이제와 영원히 사시며 다스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1>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설 아침입니다.
“새해에도 하느님께서 풍성한 복을 교우들께 내려주시길 기원합니다.” 

설날은 추석과 더불어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입니다.
우리의 명절은 대체로 조상 숭배와 효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추석은 햇곡식을 거두며 조상에게 감사하는 명절이고
설은 음력 새해를 시작하며 조상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명절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그리스도교 신자인 가족과 신자아닌 가족들이 함께 있으면 조상을 기념하는 제사문제를 두고 불편한 관계를 갖기도 합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하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믿음으로도 우리 전래의 명절을 참되게 기념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형식적으로 고착화된 유교식의 제사예절이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의 조상을 참되게 기억하고 그들의 존재와 삶을 감사하고 조상을 위해 기도하며 바람직한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금 차례의 제사를 대신하여 별세기념성찬예배를 바쳐드립니다.

 

별세기념은 인간의 이중성을 통찰하고 반성하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이 이중적인 존재라는 의미는 성서적인 표현으로 하면
흙으로 지어졌지만 하느님의 입김이 불어넣어진 존재라는 뜻입니다.
육신으로 살다가 죽는 유한한 생명이지만, 영혼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존재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표현은 영혼이 불멸이어서 죽지 않고 오래오래 산다는 의미가 아니라 영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창조주이고 우리 영의 모상이신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우리는 흙덩이에 불과하다는 이 통찰,
하느님을 떠나서는 우리는 살아있어도 이미 죽은 것과 같다는,
하느님이 아니고는 그 무엇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
하느님 없이는 우리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 통찰이 귀한 것입니다.

동시에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흙덩이가 아니라 영적인 존재로서
육신의 죽음을 넘어서서, 이기적인 자기를 넘어서서
영원한 생명,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 위대한 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와서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머리로 생각해낸 추상적인 교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삶을 통해서 실제로 경험하는 하는 진실입니다.

우리가 잘난 체하며 내 뜻대로 인생을 살아보려고 합니다.
지식을 쌓고 돈을 벌고 권세와 힘을 추구하고 명예를 얻으려고 애씁니다.
많은 경우는 그것들을 추구하는 경쟁에서 밀려나 좌절하기도 하고
그 경쟁에서 살아남고 이겼다하더라도 진정한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것을 알게 됩니다.

 

야고보서는 우리가 헛되이 장담하지 말고 겸허히 하느님 앞에 살아가라고 권면합니다.
우리의 삶이 “아침 안개같다”고 표현합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나머지 모든 필요한 것은 아버지께서 채워주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말씀들은 억지로 지어낸 훈계가 아닙니다.
인생의 본질이 그러하기에 마땅히 그러해야한다고 말씀 할 뿐입니다.

우리 인간이란 흙으로 지음을 받았지만 동시에 영으로 살림을 받은 피조물입니다.
유한한 육신을 지니고 이 세상의 한계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지만
우리는 반성하고 기도하는 정신, 자기를 초월하는 정신을 가지고
영이신 하느님을 그리워하며 차원 높은 삶을 살기를 원하는 존재입니다.

죄의 본질은 이런저런 구체적인 범죄 이전에
하느님 없이 내 뜻대로 인생을 성공하려는 태도입니다.
유혹의 본질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느님을 대신하여 다른 것을 통해 인생을 누리려는 마음가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과 화해하여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참으로 감사하고 찬미하올 우리 하느님은 우리와 같이 변덕스런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참으로 변함없이 신실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한 해가 바뀌어서 새로울 수 있고 우리가 결심을 새롭게 하여서 새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새로움은 하느님께서 날마다 하루의 생명을 새로 허락해주시고
우리가 다시금 시작하려는 노력을 축복해주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위태위태한 삶 가운데서도 우리는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보장되는 것을 깊이 깨닫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 존재가 아니라면 조상들을 기억하고 감사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영입니다.
우리도 영이고 조상들도 영이되 하느님께로 하느님께 돌아가는 영입니다.
하느님 안에서만 안식할 수 있는 영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조상들을 기억하고 그 영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위대하게 알려진 성인성녀가 아닐지 몰라도
그 분들은 모두 믿음으로 희망으로 그리고 작지만 영원한 사랑으로 삶을 지탱하고 살아가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자손들에게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남기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복을 위해 지금도 기도하고 계십니다.
우리도 또한 이제 우리 조상들의 영혼을 위하여 이 성찬례를 바쳐드립니다.
이 성찬례를 통하여 그들의 삶을 기억하고, 그들로 인하여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또 그들의 영혼이 주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를 기도드립니다. 

채근담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石火光中,爭長競短,幾何光陰?
석화광중,  쟁장경단, 기하광음
蝸牛角上,較雌論雄,許大世界?
와우각상, 교자론웅,  허대세계
    
부싯돌 빛 속에서 길고 짧음을 다투어 본들 그 세월이 얼마나 되며,
달팽이 뿔 위에서 자웅을 겨루어 본들 그 세계가 얼마나 크겠는가!

최민순 신부 라는 천주교에서 매주 존경받는 시인 신부가 계셨습니다.
이분의 “천당이 어디냐구 ”라는 제목의 시를 읽어드리고 싶습니다.

천당이 어디냐구 가 보았느냐구요.
지옥은 어디냐구 가 보았냐구요.
몰라요 모르지요 몰라도 나는 좋아요
어디나 님 계시면 천당이 거기구요.
님 아니 계시면 어디나 지옥이지요.
악마란 무어냐구 묻지 마세요.
사랑 곧 없다면야 천사도 악마랍니다. (최민순)

우리는 조상님들과 천당에서 만나야 합니다.
하느님이 계신 곳, 지금 여기에서부터 저 훗날 저 세상에서까지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서로 상통하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의 올 한해가 참으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충만한 한해가 되시길 기원하며 별세한 교우들의 영혼이 하느님의 은총을 입어 평안히 쉬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강론초록2>

                 하느님 사랑의 왕국에 참여하는 신앙 (루가 6:17-26)

 

오늘은 설날입니다. 음력으로 새해 첫날이지요.
교회력으로 이미 새해를 맞았고  양력으로 이미 2013년을 시작했는데 이제 음력으로 다시 계사년 새해를 맞이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실 물리적인 시간으로는 오늘이 어제와 별로 다를 바 없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에 우리가 어떤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그 시간은 새로운 차원을 얻게 됩니다.

 

그 의미는 우리가 마음대로 지어낸 것이 아니라 선조들이 삶을 통해 경험해온 것들을 물려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오늘의 변화하는 삶의 상황을 통해 새롭게 경험하게 된 그 전통의 의미를 우리 후대에게 전해주어야 합니다. 이 일이 우리가 명절을 지키는 이유입니다. 그저 형식만으로 지키는 명절은 별로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가 물려받은 것, 우리가 물려줄 것에 대한 내용을 깊이 살피고 누리는 명절이 되어야 합니다.

 

새해 첫 날을 따로 기념하는 것은 시간에 시작과 마지막의 질서를 매기는 노력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노력은 우리의 모든 시간과 공간에 질서가 지켜지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명절을 함께 지키며 우리는 마침내 우리에게 허락된 그 질서의 본성을 깨닫고 확인하고 기억하게 됩니다. 그 본성을 좀 어려운 개념으로 표현하자면 우리 “삶의 관계성”과 우리 “존재의 전체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도 실은 아직 정확히 이해하지를 못해서 공연히 어려운 표현을 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쉬운 말로 하면 우리 모두는 이런저런 관계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는 실은 각자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존재로서가 아니라 전체를 이미 전제로 하는 개체로서 전체를 이루며 어우러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여전히 어렵네요.^^)

사람들은 흔히 실존적인 가치를 좋아합니다. 나라고 하는 개체의 절대적인 중요성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흔히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라는 의미를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가 가장 중요하다”고 해석해서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그건 좀 단순하고 약간은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이해입니다. 실상 그런 해석은 우리가 머리로 지어낸 해석이고, 그저 우리가 믿고 싶어하는 바램에 가깝습니다.

엄밀히 생각해보면 우리는 실상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아무 것도 아니어도 되는 존재입니다. 뭔가가 되려면, 뭔가로 인정받으려면 우리끼리 지어낸 구조와 합의에 의지해야 합니다. 이른바 “조직의 영광과 조직의 쓴 맛”을 인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른바 “실존적인 가치”란 그 속에서 되뇌이는 혼잣말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실존적 중요성을 말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른바 우리의 실존적인 중요성은 십자가에 못으로 꽝꽝 박아버려야 함을 깨닫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 자신의 존재란 참으로 별 볼 일 없고 우스운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제가 억지를 쓰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일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무슨 영웅적인 위대한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당대의 유대인들은 그처럼 무기력한 자칭 그리스도는 차라리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군인들과 군중들은 예수를 향해 “네가 십자가에서 내려온다면 당장 너를 그리스도로 믿어주겠다”고 빈정거리고 조롱합니다. 이 사태는 예수님이 당신의 능력을 감추고 무슨 "쇼"를 하고 계신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마찬가지로 온전히 하느님을 의지하는 완전한 사람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실존을 포기했을 때,  “엘로이 엘로이 라마 사박다니!”, 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는 시편 22편을 외치시며 운명하셨을 때 세상은 깊은 어둠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이른바 가장 거룩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경계를 율법적으로 나누는 상징이었던 성전휘장이 찢어졌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그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가능해졌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생명으로 일으켜지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착각이나 혼령이나 관념이나 이념이 아니고 단순히 육신의 눈으로 보는 목격담도 아닙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따르던 이들이 그 스승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으나 도리어 그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그 분을 우리의 참된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사실, 곧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새로운 차원을 열어주시는 그리스도이심을 인정하셨다는 것을 성령을 통하여 깨닫게 된 사건입니다.

설날 감사성찬례에 너무 교리적인 설교로 딱딱하고 장황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너그러이 양해하십시오. 제 나이도 이제 살 날이 살아온 날보다 짧게 되었습니다. 제가 처음 사제가 되었을 때는 때는 그래도 살 날이 살아온 날보다 많을 수도 있었는데 말이지요.^^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신앙생활은 여러분 개인이 복을 받아서 남보다 부귀와 명예와 건강에서 성공한 사람이 되는 일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여러분 개인이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을 통하여 이 세상이 모두 한 분 하느님 아버지의 관계성 안에, 삼위일체 하느님의 전체성 안에 사랑의 왕국이 되어야 함을 깨닫는 일입니다.

그 사랑의 왕국이어야만 비로소 저와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 엄밀히 말하면 “한 영혼이 천하를 위해서 귀하다”는 것이 참으로 성립합니다.

세상의 왕국에서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저와 여러분 한 분 한 분은 우연히 태어나 우연히 죽어가는 존재, 이 세상에 애당초 없어도 되는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존재, “가엾은 어머니, 왜 나를 나셨나요” 노래할 수 밖에 없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오늘 복음서가 무엇을 기준으로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을 구분한다고 생각하세요?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음을 울며 믿음을 지키는 이들이 행복하다고 선언하는 주님의 말씀이 참으로 믿어지세요? 부요하고 배부르고 등 따습고 웃고 지내며 모든 이에게 부러움을 받는 이들이 정말 불행하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신앙을 지키는 것일까요?

신앙의 목적을 한 개인이 잘 되는 일로 여긴다면 오늘 복음말씀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신앙의 목적은 하느님이 이루어가시는 사랑의 왕국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설 명절을 맞으며 우리 마음에서 하느님 사랑의 왕국이 시작되기를 기도합시다. 나와 나를 분리시키고 서로 미워하고 갈등하는 일을 그치고 나와 내가 하나되어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공연히 남이 제시한 기준에 맞추어 나를 판단하고 자책하고 다른 이를 질투하고 미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가정과 집안이 하느님 사랑의 왕국으로 되어지기를 기도합시다. 한 몸, 한 핏줄로 행복하라고 한 가정, 한 집안을 이루어주셨는데 과연 무엇이 우리 가족들을 서로 불편하게 하고 갈등하게 하고 증오하게 하는지 살펴봅시다. 가진 것 없고 잘 난 것 없어도 사랑 하나로 서로 소중하고 모두 행복할 수 있음을 기억합시다.

우리의 사회와 국가가 하느님 사랑의 왕국으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합시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이 자기들의 이해관계로 이합집산 집단을 이루어서 저마다 “정의”를 들이대며 실제로는 자기 잇속을 챙기는 일을 잘 살펴봅시다. 서로 돕고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며 행복한 세상을 만들라고 우리가 한 나라를 이루도록 해주셨는데 누가 과연 어떤 의도로 우리 욕심을 자극하고 우리 생각을 좌우하며 서로 갈등하고 다투게 하는지 차분히 살펴봅시다. 참된 행복은 욕망의 달성이 아니라 영적인 성장의 결과임을 기억합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과연 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고 있는지를 반성합시다.

이 지구상의 모든 인류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형제자매인 것을 진실로 깨닫기를 기도합시다. 한 사람이 더 이상 실존적인 철인, 더 이상 사회적인 우상이 되려고 애쓰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이 세상을 위해 그저 소박하게 자기 정성을 다하여 일하고 주어지는 모든 것들에 감사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시다.

물론 우리가 이런 기도를 참으로 드리는 것이라면 우리는 기꺼이 가난하고 배고프고 눈물 흘리며 믿음을 지켜가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기억합시다. 참으로 그런 삶이 행복하다는 것을 우리 서로의 눈빛과 잔잔한 웃음으로 나누고 확인하는 교회공동체가 되기를 노력합시다. 우리가 신자로 산다는 일이 단지 "자기 확신을 가진 한 개인"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교회공동체의 한 지체"로 사는 일임을 깨닫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힘입어 우리 교회 공동체가 늘 교회다운 교회가 되기를 힘쓰는 것을 감사하며, 앞으로도 계속될 교우 여러분의 복된 신앙생활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