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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야기- 신앙체험의 정리와 반성/성공회이야기

개별화된 사회와 성공회 공동체(의 교회론/구원론)

 

 

<2015년도 전국성직자신학연수 발제원고>

개별화된 사회와 성공회 공동체(의 교회론/구원론)
- 성공회 사목자로서의 사목 신학과 사목 경험을 통한 응답

 

                                            임종호 (프란시스 신부/ 서울주교좌교회 보좌사제)


1. <영혼구원의 메시지>를 더욱 더 깊이 이해하고 설명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인간의 “개별화”가 가져오는 현실의 고통에 관하여 사회학적, 신학적 통찰과 고민의 말씀을 잘 들었습니다. 세월호 참사는 “개별화된 인간을 통치하는 세상의 지배체제”가 “개별화된 피통치자”에게 어떤 현실을 살게하는가를 절실히 깨닫고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인간의 구원에 관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에는 “개별화시키는 세상”과 “공동체를 이루는 하느님나라” 사이의 대비와 긴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개인의 육체로 표상되는 개별화된 인간이 죄의 원인인 동시에 죄의 결과여서 살아도 죽어도 참된 삶과 참된 안식에 이르지 못한다고 봅니다.

개별화된 인간을 다시금 공동체의 인간으로 회복하는 일이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인간의 구원입니다. 개인의 영이 하느님의 영과 연합하여 모두가 영으로 이루는 일치가 신앙공동체의 상징입니다.

구약성서는 개별화된 인간이 살게 되는 “노예살이”로부터의 해방을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타민족에 의해서든, 자기민족 사이에서든, 노예살이는 개별화의 상징적 결과이며 삶의 현실입니다. 노예살이는 권력에 눌려 고통스럽게 산다는 점보다도 인격적인 가치를 위해서 연대할 줄 모르는 개별화된 미각성의 상태가 본질입니다. 개별화된 인간은 쉽게 노예살이에 빠지고 스스로의 힘으로 그 상태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성서의 구원은 인간의 처우를 개선해주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 인격적인 주체로서 친교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각성시키고 회복시키는 일입니다. 출애굽 사건과 율법 수여, 포로귀환과 성전과 율법공동체의 회복은 모두 개별성을 극복하는 신앙의 사건들입니다.

신약성서에서 복음의 선포는 “때가 다 되었다”는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로마제국의 지배는 제국 전체가 노예살이의 수준으로 개별화가 진행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율법공동체가 율법의 정죄로 개별화된 인간을 만드는 아이러니를 잘 살펴야 합니다. 유다인들에게도 율법의 기준에 의해서 정죄된 사람들은 개인이든 집단이든 이미 개별화된 상태입니다. 전체 공동체에서 소외된 상태입니다. 그 개별화를 극복하고 참된 공동체를 이루게 하는 새로운 질서의 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시작된다는 선포가 하느님나라의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하느님나라”라는 새 빛을 통해서 모두를 다시금 새로운 공동체로 초대하여 새로운 공동체의 질서를 살게 합니다. 이것이 예수가 말하는 은총입니다. 바울로 사도가 보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 개별화를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됨으로 극복하는 차원입니다. 소외되었던 이방인은 물론 소외시켰던 유다인까지도 복음을 통해 개별화를 극복하여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이루는 구원을 받게되는 일이 참된 구원이라는 이해입니다.

개별화의 긍정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인간을 인격화하는 일입니다. 개인의 인격(person)은 개인이지만 보편적인 인간을 전제로 합니다. 한 인격이 한 공동체와 전체 인류를 대표한다는 말입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씀에의, ‘한 영혼’은 그러한 의미일 것입니다.
*[35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 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37 사람이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마르 8:35-37]

인격의 근거는 한 사람의 구체적인 몸입니다. 몸을 함부로 대하고서는 그 다음의 사랑이 불가능합니다. 그 몸의 사람들이 성령으로 공동체의 몸이요, (부활하신) 예수의 새 몸인 교회공동체를 이루고, 예수의 몸인 성체와 보혈을 먹고 마시며 세상을 향하여 성체와 보혈이 되는 새로운 삶의 차원을 살아갑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교회론, 성사론이 만납니다. 한 사람의 인격적인 존재와 삶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의 깊은 친교와 일치에 이르고 이웃과의 참된 친교의 삶을 살아가는 가능성을 얻습니다.

그러나 개별화에는 부정적인 함의와 현실이 있습니다. 인간의 육체성이 생존과 생활의 수준에서 세상의 지배체제에 영향을 받으면 쉽게 개체화/개인화(individual)됩니다. 이 때 개별화된 개인들은 자유로운 생각과 담론의 여유를 누리는 것 같지만, 실은 개별화된 인간을 유혹과 위협의 이중적인 태도로, 언어와 이미지를 조작하는 대중매체의 수단으로 쉽게 통제하는 권력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감성적 소비주의와 하느님나라의 정치”를 큰 주제로 밝혀주셨지만, 개별화된 인간이 감성적 소비주의를 극복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하느님나라조차도 이미 개별화된 인간의 감성적 소비의 대상으로 오해되고 있습니다.

성공회 사목자들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진보적, 적극적 정치적 행동에 나서는 일과 병행하여, 영혼구원의 메시지에 대한 새롭게 깊은 이해와 설명을 마련해야 합니다.

인간을 육체와 영혼으로 구분하는 일은 모든 종교가 공유하는 전통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영혼을 육체와 비슷한 모양의 실체로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성서와 교회가 말하려는 영혼의 본래 의미는 육체적 개별화와 구별되며 인간존재의 근거가 되는 인간의 전체성, 통합성입니다. 그 영혼이 성령에 의해서 한가지로 사로잡힐 때에 우리는 개별화를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표현되는 교회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

영혼구원을 개별화된 인간 스스로 신앙적 확신으로 은총을 얻는 것이라는 이해는 극복되어야 하는 설명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영혼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개별화를 넘어서는 인간으로 인격화된 구성원이 인격적인 공동체를 이루는 일입니다. 개인의 믿음으로 영혼이 지옥을 피하고 천당에 가게 된다는 설명은 성서적이지 않으며 현대세계에서는 유치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교회공동체를 이루어 하느님나라를 세상에 전하는 일을 온전히 감당할 때에 인간은 영혼이라는 차원까지 구원을 받는다는 성서의 가르침*입니다. * [26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감추인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 27 내가 어두운 데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서 말하고, 귀에 대고 속삭이는 말을 지붕 위에서 외쳐라. 28 그리고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마태 10:26-28]

영혼구원의 메시지를 깊이 이해하고 설명하는 일이 우리가 하느님나라를 전하는 일을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하다고 봅니다.

 

2. <전례와 성사의 의미와 가치>를 재확인하고 교우들과 공유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성공회 전통과 교회가 현재 집중하는 신앙의 행위는 “전례”와 “사회참여적인 선교”입니다. 그런데 전례를 대체로 예배를 드릴 때 정해진 형식을 준수하는 문제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회참여의 내용을 사회복지의 실현에 교회가 봉사하는 일로 오해합니다.

전례의 가치는 형식을 준수하는 일 자체에서 생기는 아름다움이나 감동에 있지 않습니다. 전례의 가치는 교회 공동체가 자신의 정체성을 성서와 복음에 기반한 교회의 기억, 곧 구원받은 기억을 유지하며 그 구원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일에 있습니다. 전례를 통해서 교회는 세상에 하느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선교의 동기와 지혜를 얻게 됩니다. 전례는 개별화된 개인이 신앙적인 만족감을 누리는 수준의 예배가 아닙니다. 인격화된 개인이 인격화된 예수의 몸(교회공동체)의 지체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베풀어진 구원의 기억, 곧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베푸신 구원의 기억에 공동체의 일원으로 참여하는 예배입니다.

성사(聖事, Sacrament)는 의무적으로 지켜야 하는 교회 내의 정해진 의식이라는 점에 가치가 있지 않습니다. 성사의 가치는 교회의 존재와 교회의 모든 전례와 선교의 의미가 바로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이루시려는 하느님의 나라를 위한 것임을 기억하고 몸으로 드러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신앙이 삶의 문제임을 성사는 기억하고 체험하게 합니다. 성사는 신앙의 신비가 참여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점을 되새깁니다.

개별화된 인간의 머리와 가슴 속에서 형성된 관념과 감흥은 신앙의 신비가 아닙니다. 교회공동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며 깨닫고 누리는 다른 차원의 현실감, 다른 수준의 일체감이 신앙적인 신비입니다. 교회가 행하는 사회참여의 봉사는 교회의 성사적 신앙의 신비가 다다르는 귀결입니다.

세상을 향하여 다시 한번 성육신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은 예수님의 영과 몸으로 이루어진 교회공동체가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일로 세상에 드러납니다.

성공회가 소중하게 이어온 전례와 성사의 참된 힘은 우리 시대의 개별화된  이기적이고 관념적인 정서주의를 극복할 중요한 유산입니다. 전례와 성사의 가치는 단지 복음적인 가치를 보완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나라의 본질에 해당하는 인격화된 공동체의 현실성을 이 세상의 삶 속에서 교회가 기억하고 체험하고 보장하는 수단이 된다는 점에 있습니다. 성공회의 선교는 이 전례와 성사를 잘 이해하고 드러내는 일을 통해서 가장 풍성한 열매를 거두리라고 봅니다.


3. <성공회의 신앙예절(예법)>을 마련하여 성공회의 “신앙적 친교”를 경험하고 드러내 보여주어야 합니다.

세상을 향해 드러낼 교회공동체의 친교를 위해서, 교회구성원들 특별히 성직자의 역할과 권위를 살피면서, 전례와 성사에 관한 좀 더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성공회의 신앙예절(예법)>을 마련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지배체제를 극복하는 하느님나라 공동체의 모습은 “깊은 친교”(코이노니아, 코뮤니언)로 나타납니다. 그 친교는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일체성으로 설명되기도 하고, 교회공동체가 이루는 공동체성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이들끼리 벌이는 이합집산이 친교일 리 없습니다. 우리 교회공동체 안에서 성직자들은 복음적인 친교의 구심점입니다. 개별화를 극복한 인격화의 상징적인 인물들입니다. 성직자는 모든 교우를 인격으로 대하고, 모든 성직자를 서로 인격으로 대하고, 세상의 모든 이와 더불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체와 자연물까지도 인격적으로 대해야 합니다. 성직의 가치와 권위는 인격화된 친교를 마련하고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성직의 권위가 함부로 무시되어서는 안되지만 동시에 그 권위가 비인격적이고 개별화하는 방식으로 사용되어서는 더더욱 안됩니다.

참으로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어진 이 세상을 바로잡기 위한 출발로서 우리 교회공동체 안에 좋은 예법을 마련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전례의 삶을 세상의 친교의 삶으로 연결하는 일이 바로 예법입니다. 가령 전례에서 나누는 평화의 인사가 우리가 일상에서 교우끼리, 교우와 성직자 사이에, 성직자와 성직자 사이에서 나누는 인사와 똑같은 예법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제정사의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라!”는 말씀은 전례의 자리만이 아니라 생활의 자리로도 이어져야 합니다. 무례한 공동체여서는 이 무례한 세상을 향해 하느님나라를 전할 수 없습니다. 가령, “네, 프란시스회장님”과 “어이, 베드로씨”의 호칭이 공존하며 그 차이가 교회공동체안에도 느껴지면 우리 공동체는 이미 무례한 것입니다.


 

<토론방향에 대한 3가지 제안>

 

1. <영혼구원의 교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내용으로 교우들에게 가르칠 것인가를 성직자들이 함께 연구하고 정리해야 합니다. 실체적인 영의 존재와 그 영혼이 천국에 가는 일로 구원을 설명하는 것이 하느님의 선교, 곧 하느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로서의 선교와 서로 부합되는 설명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영혼의 개념이 가지는 통전성, 관계성, 연합성이 강조되지 않고, 그저 개별화된 육체 대신 영속하는 실체로 설명하게 되면 그리스도교가 강조하는 본래의 “인격적인 신앙” 대신에 “개인적인 신앙”을 조장하게 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2. <전례와 성사의 가치>를 존중하고 활용하는 일이 성공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까를 우선 살피고 합의해야 합니다. 전례와 성사의 중요성을 어떻게 교회 안밖에 이해시키고 지지를 얻을 수 있을까 신학적으로 정리해야 합니다. 개인적인 신앙에 더 만족을 주느냐 아니냐는 기준으로 전례와 성사의 가치를 말하기보다는, 복음적인 가치를 경험하고 함께 공유하는 일로서 전례와 성사의 필요성을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3. <신앙예절(예법)>이 성공회 공동체 안에 마련되어서 모든 구성원들 사이에서 “올바른 관계”를 위한 지침과 안내로 작용하도록 해야 합니다. 성공회는 교리나 체험을 내세우기보다는 현실에서 “올바른 관계”를 살아가는 일을 중시하는 생활종교/실천종교입니다. 불필요하고 낡아버린, 비본질적인 권위의식에 의지하기보다는, 이제는 서로를 동등한 인격으로 존중하고, 모두를 사역을 함께 하는 협력자로 존경하는 예절을 세워 지켜야 합니다. 바람직한 성공회공동체 안의 예절을 제안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