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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반에게

별세기도를 준비하며



 

신부님,
오늘 한 교우의 부친을 위해 별세기도를 드립니다.
급작스런 죽음이어서 모두 놀라고 슬퍼합니다.

죽음이란 신비이지요.
죽임은 직면하여 물리칠 악이지만
죽음은 받아들여 완수할 삶의 한 과정입니다.
핵심은 역시 나라는 존재의 문제이죠.
내가 더 이상 나라고 주장하지 못할 때,
내가 더 이상 에고로서 존재하지 못할 때,
그 때 나는 누구인가? 하는 것이죠.

영혼이라는 실체로 상정하고 그것을 나를 생각해서
죽음 너머에도 영원히 여전한 쾌락을 누리고 싶다는 생각은
유용하고 편리하긴 하지만 죽음 앞에서 지혜로운 마음은 아닙니다.
죽음은 어쩌면 “에고”를 멈추는 고마운 시간입니다.
살아서 의지하고 경험하는 우리의 “실체성”이 한계를 드러내고
순수하게 우리의 “관계성”이 드러나는 기점입니다.
우리가 욕망과 사랑을 정화할 수 있는 기회이지요.
사랑 속에 나 자신의 참된 본성을 깨달을 수 있는 기회이지요.
하느님의 사랑이 아니고는, 은총이 아니고는
이 세상 모든 것이 무의미하고 불가능하다는 걸
우리는 죽음을 통해 비로소 깊이 실감하게 됩니다.
사랑에의 의탁, 은총에의 감사야말로
최선의 삶을 위한 근간임을 깨닫는 일은 죽음의 선물입니다.

저는 죽음을 이야기하면서도 너무 현학적이지요?
어떤 이는 장례예식 중에 그런 식으로 설교하면 사목자로서
별세의 슬픔을 위로하는 데 문제가 없냐고 짐짓 걱정합니다.
지금까지의 제 경험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유족의 슬픔을 완벽히 위로하려는 것은 공연한 오해이고 욕심입니다.
슬픔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어서 실은 위로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충분히 슬퍼하면 되는 것이지요.
실제로 몇 마디 설교가 슬픔을 위로하지도 못합니다.
그저 고인의 죽음 앞에 우리가 함께 한다는 사실 자체가
위로가 된다면 되는 거지요.
더 중요한 문제는 유족, 친지, 교우들의 그 슬픔이
덧없는 슬픔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살아갈 힘과 지혜를 빼앗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복음의 능력은 죽음의 슬픔을 위로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이기는 일, 죽음의 한계를 통찰하고
죽음을 통해 사랑과 지혜를 얻게 해줍니다.
죽음 자체가 우리를 하느님의 신비에 연결해주는 것처럼
죽음에 관한 설교도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에 연결해주어야 합니다.
그건 통속적인 교리나 위안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현실을 복음 빛에서 다시금 비추어보는 일입니다.

그 어느 현자도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우리의 고백은 그 모든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
그래서 죽음보다 강한 것이 하느님의 현존이라는 것,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는 죽음을 맞고
산 이와 죽은 이가 화해한다는 것!
열심히 말해보지만 말로 다 전할 수 없습니다.
다만 지금을 깨닫게 하고, 방향을 가르치고, 성령의 능력에 의지할 뿐입니다.

신부님,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의 생명을 보여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신부님과 저의 허락된 “관계”를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신부님, 제가 죽으면 공연히 우울한 분위기 되지 않게 도와주세요.
저를 사랑했던 만큼 슬퍼하시되
제 죽음이 깊은 축복임을 확인해주세요.
신부님께서 제가 이해했던 죽음에 관한 이야기들을 다시금 정리해서 더 깊이 들려주세요.
우리가 죽음을 맞게 되면 하느님 안에서 신부님이 저고 제가 신부님이라는 게
어떻게 분명히 경험될까 궁금해지고 정말 기대가 됩니다.
신부님,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