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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과 소신

연극 거울공주 평강이야기 관람 소감 (2005. 3. 27)


몇 년 전에 보았던 연극관람소감입니다. 성공회 교회음악을 위해 애쓰시는 노선락 선생이 <사제중창단>을 도와주실 때 그무렵 작곡을 맡았던 뮤지컬에 초청을 해주셨더랬죠.  중창단 게시판에서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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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공주 평강이야기>를 보았습니다.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성금요일과 겹친 바람에... 제 양심에 걸린다기보다도 연약한 분들의 믿음에 상처를 드릴까봐... 자리를 마련해주시는 노선락 선생께 제가 보는 것은 비밀로 해주세요 부탁했건만^^ 나름대로 근신절제도 가능할 것이라며 결국 다른 신부님과 나란히 앉아보는 끼리끼리 의식을 맛보도록 깊이 배려를 하셨습니다.^^

오전에 수난 예식- 장엄기도와 십자가 경배를 인도하면서도 은혜를 많이 받았지만 딱 우리 교회만한 극장에 앉아 이 아카펠라 뮤지컬을 보며 마침내 저는 눈물을 흘리며 크게 은혜를 받았습니다.

내용을 보자면;

평강공주의 시녀 연이가 평강공주처럼 되고 싶어서 평강공주의 거울을 훔쳐다가 비추어 보는 낙으로 삽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만난 야생소년을 바보 온달로 삼아서 가상의 관계로 연인관계를 맺으며 대리만족을 합니다. 바보 온달을 암살하려 찾아온 후주국의 무사에게 평강으로 오인된 연이가 잡히고 거울을 빼앗기자 야생소년은 그들과 싸워 물리치고 거울을 빼앗아 돌려주려다가 상처를 입어 죽게 됩니다. 연이는 자기는 결국 평강공주아닌 시녀 연이임을 깨닫고 야생소년이야말로 자기와 깊이 진짜 사랑을 나누었던 상대임을 깨닫습니다. 야생소년은 죽었지만... 연이는 꿈에서 깨어나고^^

제 깨우침은 뭐냐하면;

산다는 것은 자기 존재의 의미를 알아내는 일입니다. 그것은 상대적인 대상에 비추어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상대에 비추어보아야 결국 나는 나 외에 아무것도 아니고 나 아닌 그 무엇도 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고 나의 의미가 나 자신을 들여다보아서 찾아지지는 않습니다. 존재니, 실체니 하는데서 우리의 본질을 찾으려 하는 짓은 실패하게 마련입니다. 실제 우리의 삶을 가능하게 하고 진실로 의미 있게 하는 것은 우리가 선택하며 맺어가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평강과 바보 온달은 따로 있는 실체로서가 아니라 두 주체가 평강과 온달로 맺어가는 관계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연이와 야생소년은 다른 주체지만 그들 또한 둘의 또다른 ‘평강-온달’관계를 통해 진정한 자기를 발견해가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잘 아는 사랑의 이중 계명,

“네 모든 것을 다해, 마음과 목숨과 생각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절대에 비추어 네 존재를 긍정하라는 뜻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은 네 안에 갇히지 말고 관계를 맺어가라는 뜻일 터입니다.

절대와 상대가 어우러져 사랑은 자기를 발견하고 초월하게 해줍니다. 제도적인 굴레, 현실적인 억압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이죠.

연극을 보는 내내 배우들의 내공이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일거수 일투족, 한마디 한소리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배우가 된다는 것은 그렇게 많은 수련을 쌓아가는 과정을 밟아가는 길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연극이 주는 감동도 새롭게 자극이 됩니다.

사실 우리의 예배는 연극과 같은 구조, 성격, 원리로 이루어졌습니다. 훨씬 더 깊은 감동을 줄 수 있는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재미도 감동도 없는 예배가 되는 것은 많은 부분 사제들의 탓이라고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 배우들만큼의 프로의식도 없이, 열심도 없이, 준비도 없이 예전을 집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저를 포함하여 우리 성직자님들 모두 각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연극을 보게 해주시고, 무엇보다 좋은 음악을 작곡하신 노선락 선생님 고맙습니다. 이틀밖에 안남은 공연이지만 바로 몇몇 사람에게 관람을 추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좋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기회는 그 기회를 붙잡는 사람의 것이라는 평범한 진실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