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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야기- 신앙체험의 정리와 반성/성공회이야기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성탄 (옮김)


 

<성공회신문 738호 2010.12.17 사설 >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성탄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루가 2:14) 아기 예수의 탄생을 두고 천군 천사들이 부른 찬양이다. 이 노래를 마음으로 듣고 전한 수많은 백성들의 간절한 염원 위에 그리스도교는 위대한 복음의 뿌리를 내려왔다.

성탄일은 산타클로스의 절기가 아니다. 어떤 교조(敎祖)의 탄생을 축하하는 수준도 아니다. 성탄절은 우리에게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을 “성육신(成肉身)”이라는 관점에게 기념하는 일이 된다. 이 세상을 위하여, 이 세상 한 가운데서 이루어진 하느님의 구원사건을 더욱 깊이 되새기는 성탄절기인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축하하는 성탄은 하늘과 땅의 결합이다. 이 땅의 불의와 불화의 현실에 하늘의 정의와 평화의 나라가 연결되고 합쳐지는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의 영광”이 드러나고 그 하늘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땅의 평화”가 가능하다는 경험과 고백이 성탄의 참된 의미이다.

성탄의 기쁨은 연인이나 가족끼리 누리는 조촐한 낭만을 넘어서 온누리에 임하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기쁨이다. 이 땅의 어둠과 죽음의 체제에 대하여 그 정체를 밝히고 권세를 꺾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와 사역을 기억하는 일이기도 하다. 하느님께서 극진히 사랑하시는 이 세상에 생명과 빛으로 임하는 새로운 질서를 맞아들이는 일이다. 깜깜한 어둠을 배경으로 새벽빛이 비쳐오듯이 아기 예수의 탄생은 “죽음의 그늘 및 어둠 속에 사는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주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의 강생인 것이다.

아직도 인류는 땅위에서 온전한 평화를 이루지 못하였다. 지구촌 곳곳에는 기근과 가난과 전쟁이 그치질 않는다. 이 땅에도 한반도의 분단현실을 세계에 드러내는 불행한 참화가 계속되고 있다. 어쩌면 인류에게 전쟁은 평화보다도 훨씬 더 보편적인 경험일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의 입장에서 적을 제거하거나 제압해야만 얻어질 것 같은 “힘에 의한” 평화는 어쩌면 자연스럽고 뿌리깊은 유혹인 것이다. 하지만 교회가  “주님의 평화”를 선포하고 기원하는 일은 바로 그러한 세상의 평화에 대한 통념에 도전하고 바로잡는 일이 되어야 한다.

복음서가 전하는 성탄 이야기는 평화에 대한 기준을 복음적으로 분명히 하도록 해준다.  예수의 성탄은 신화적인 동산에서가 아니라 냉혹한 현실 속에서 이루어졌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아기 예수의 평화로운 자장가는 자신의 왕권에 위협이 될까 두려워 베들레헴 일대의 아기들을 모조리 학살하라고 명령하는 헤로데의 흉악한 외침 위에서 들려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성탄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신앙인의 입장에서는 죽여 없애야만 하는 적은 있을 수 없다.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근심의 뿌리를 말살해야만 평화가 얻어지리라는 것은 헤로데의 추한 논리이다. 한 분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신 그리스도인들의 관점으로는 비록 대립하고 갈등할 지라도 거기에는 인간들 사이에 서로 함께 화해를 이루어야 하는 불화(不和)가 있을 뿐이다. 그 불화는 복음의 능력으로 화해에 이르러야 한다. 성서는 욕심은 죄를 낳고 죄는 죽음을 가져온다고 말하거니와 남을 죽여야 내가 산다는 상황은 비참한 죄악의 현실이다. 빌라도의 십자가는 이 땅의 그러한 죄악을 상징한다. 하지만 남을 살리려는 나의 희생은 위대한 사랑이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하느님의 사랑을 또한 상징한다.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와 구원을 믿는 우리는 이 땅에 전쟁과 불화 대신에 평화와 사랑의 왕국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전례(典禮)를 통해 성탄을 기념한 교회는 이제 세상에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질 수 있음을 선포하고 그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성탄은 산타가 아니라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주님의 강생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