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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초록/2012년도설교초록

2012년 9월 9일 (연중 23주일) 성서정과 및 강론초록

 

 

2012년 9월 9일 (연중 23주일 /녹) 성서말씀

 

잠언 22:1-2, 8-9, 22-23

1 명예는 많은 재산보다 소중하고 존경받는 것은 금은보다 낫다.
2 늘 상종하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 이들은 모두 야훼께서 지으셨다.
8 악을 심으면 재난을 거두고 홧김에 남을 때리면 그 몽치에 제가 맞는다.
9 남 보살펴 주는 사람, 곧 가난한 사람에게 제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은 복을 받는다.
22 힘 없다고 해서 가난한 사람을 털지 말며 법정에서 어려운 사람을 짓누르지 말아라.
23 야훼께서 그들의 송사를 떠맡으시고 어려운 사람 등치는 자를 목조르신다.

 

시편 125

1.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시온산과 /같아/서 ‖ 흔들림이 없고 영원히 /서 있/으리/라
2.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있는 /산악/처럼 ‖ 주님께서는 주님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토록 /품어/ 주신/다
3. 의인들에게 /맡겨․진/ 땅에 ‖ 한 지배자의 왕홀이 /머물․지/ 못하/리라 
4. 의인들이 그들의 /손을/ 돌려 ‖ 악한 일을 꾸미지 못하게 /하려/하심/이다
5. 주님 선한 사람들을 선하게 /대하․여/주소서 ‖ 마음이 올바른 자들을 선하게 /대하․여/ 주소/서
6. 그러나 비뚤어진 길로 빗나간 행악자들은 내 쫓아/버리/소서 ‖ 이스라엘에 /평화․가/ 있으/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 ○ 그/리~/고 ‖ 영/원히/ 아~/멘

 

야고 2:1-10, 14-17

1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주님이신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들을 차별해서 대우하지 마십시오. 2 가령 여러분의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과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왔다고 합시다. 3 그 때 여러분이 화려한 옷차림을 한 사람에게는 특별한 호의를 보이며 "여기 윗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거기 서 있든지 밑바닥에 앉든지 하시오." 하고 말한다면 4 여러분은 불순한 생각으로 사람들을 판단하여 차별 대우를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5 내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을 부요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해 주신 그 나라를 차지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6 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들을 업신여겼습니다. 여러분을 압박하는 자들은 바로 부자가 아닙니까? 또 여러분을 법정으로 끌고 가는 자들도 그들이 아닙니까? 7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그 존귀한 이름을 모독하는 자들도 바로 그들이 아닙니까? 8 여러분이 성경 말씀을 따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최고의 법을 지킨다면 잘 하는 일이지만 9 차별을 두고 사람을 대우한다면 그것은 죄를 짓는 것이고 여러분은 계명을 어기는 사람으로 판정됩니다. 10 누구든지 계명을 다 지키다가도 한 조목을 어기면 계명 전체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14 나의 형제 여러분,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15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양식조차 떨어졌는데 16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어라." 하고 말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7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마르 7:24-37

24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띠로 지방으로 가셨다. 거기서 어떤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계시려 했으나 결국 알려지고 말았다. 25 그래서 악령이 들린 어린 딸을 둔 어떤 여자가 곧 소문을 듣고 예수를 찾아와 그 앞에 엎드렸다. 26 그 여자는 시로페니키아 출생의 이방인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달라고 간청하였다. 27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는 빵을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8 그래도 그 여자는 "선생님, 그렇긴 합니다만 상 밑에 있는 강아지도 아이들이 먹다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얻어 먹지 않습니까?" 하고 사정하였다. 29 그제야 예수께서는 "옳은 말이다. 어서 돌아가 보아라. 마귀는 이미 네 딸에게서 떠나갔다." 하고 말씀하셨다. 30 그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보니 아이는 자리에 누워 있었고 과연 마귀는 떠나가고 없었다.
31 그 뒤 예수께서는 띠로 지방을 떠나 시돈에 들르셨다가 데카폴리스 지방을 거쳐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32 그 때에 사람들이 귀먹은 반벙어리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주시기를 청하였다. 33 예수께서는 그 사람을 군중 사이에서 따로 불러내어 손가락을 그의 귓속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시고 34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쉰 다음 "에파타." 하고 말씀하셨다. '열려라.'라는 뜻이었다. 35 그러자 그는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36 예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셨으나 그럴수록 사람들은 더욱 더 널리 소문을 퍼뜨렸다. 37 사람들은 "귀머거리를 듣게 하시고 벙어리도 말을 하게 하시니 그분이 하시는 일은 놀랍기만 하구나." 하며 경탄하여 마지않았다.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우리에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주시나이다. 비옵나니, 우리가 주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하늘나라의 소망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온전히 이루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1>

                   장벽과 불행을 넘는 하느님 은총 (마르 7:24-37)

 

우리 신앙인에게 구원이란 개인이 죽은 후에 홀로 천국에 들어가는 일이 아닙니다.  구원은 우선 이 세상에서 우리가 더불어 기쁘고 행복하게 사는 일입니다.
잠언서는 평범하지만 중요한 진실을 확인합니다.  “늘 상종하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 이들은 모두 야훼께서 지으셨다.”
부자의 것을 강제로 빼앗아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사랑도 아니고 정의도 아니고 무엇보다 오래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또 다시 누군가는 더욱 불의한 부자가 되기 십상이고 결국은 모두가 빈곤에 빠지기 쉽습니다. 현실 사회주의체제의 일당 독재의 결과는 이미 지혜롭지 않은 일로 확인 된 바입니다.
관념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의 참된 인간다움, 곧 인간의 영성은 실제의 인간관계, 사회관계 속에서 드러나고 확인되고 지지됩니다.
“명예는 많은 재산보다 소중하고 존경받는 것은 금은보다 낫다.”
부자와 가난한 이 모두 바른 가치관을 갖는 일이 중요합니다. 서로 존중하고 존경하는 사회가 인간을 행복하게 합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는 별개가 아니라 한 사회 속에 하나의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부자가 망하면 가난한 자들도 고통스럽고, 가난한 자가 건강하지 못하면 부자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인간 사회에서 빈부차이는 없앨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격차는 최대한 좁혀져야 합니다. 지나친 양극화는 높은 장벽과 큰 균열이 되어 사회를 두 조각 냅니다.

오늘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이방인 여인의 믿음을 통해 하느님의 한없는 자비를 드러내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방인 여인의 강한 믿음이 예수님을 감동시켜서 그 딸이 악령치유의 은총을 입은 것처럼 우리도 강한 믿음으로 예수님께 매달려야한다는 것이 오늘의 교훈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다음 장면의 언어장애, 청각장애자는 어떤 믿음으로 은총을 입었을까요?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식의 교훈은 성경 안에서는 어쩌면 너무 표면적이고 도식적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단지 정도가 강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이 깊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신실하고 굳건해서 하느님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중의 착각입니다.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처럼 우리도 은연중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특권의식이 있는지 모릅니다. 이점은 늘 조심해야 합니다.


참된 믿음은 우리가 내세우는 어떤 특권의식도 하느님의 은총 앞에서는 무의미하고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단순한 보상이 아니라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이방인여인은 고통받는 딸을 위한 그녀의 절실함 자체로 은총을 입기에 충분합니다. 귀먹은 반벙어리는 군중 속에서 소외될 수 밖에 없는 비참한 처지로 인해 마땅히 은총을 입어야 합니다. 그의 귀와 입이 주님의 손길과 “에파타” 명령에 열리듯, 우리의 닫힌 마음도 주님의 말씀과 성사를 통해서 활짝 열려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을 통해서 배우는 것은 우리의 삶, 우리의 인간사회가 단순히 동물의 왕국을 정교하게 발전시킨 경쟁체제와 보상체계에 의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닮은 피조물인 우리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내신 바 하느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배우고 그것을 본받아야 행복하리라는 것입니다.

모든 차별을 없애고 모든 인간의 절실한 필요를 채우고 소외된 이들을 끝없이 끌어안는 사회! 신앙인들이 소망하는 하늘나라는 나 홀로 들어가는 저 세상 낙원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삶과 죽음을 넘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함께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상태입니다.
헛된 이상이라구요?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교회가 그 구체적인 소망의 증거입니다.
혼배성사로 가정을 이루고, 세례성사와 성체성사로 교회를 이룹니다.
우리는 외롭게 흩어진 개인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새로 태어난 공동체의 지체입니다.
두 사람, 여러 사람이 합쳐졌다고 가정이나 교회와 같은 공동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지향하는 복된 과업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 공동체를 만듭니다.
가정은 생명과 사랑과 행복의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넓게 열린 영적인 가정입니다. 이기적인 신자, 개별적인 신자는 사실 원리적으로 이미 불가능합니다. 교회의 지체들이 어찌하여 세상적인 가치를 따라 다투고 분열하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다르나 한 빵을 나누며 한 몸을 이루는 신비를 깊이 묵상하고 순간순간 늘 기억할 일입니다. *

 

<강론초록2>

                  지성감천(至誠感天)의 믿음이란! (마르 7:24-37)

 

우리의 믿음은 장식품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문화 ․ 여가생활의 일부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우리가 지어낸 신념체계가 아니지요.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난” 이들이 그 분을 통하여 삶과 죽음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해결 받은 경험과 고백과 증언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목적이 분명한데 바로 우리 “삶의 문제”를 해결 받는 것입니다. 믿음이 믿음 자체를 위해 있는 것처럼 점잖은 위선을 떨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신앙으로 산다면 우리가 직면하는 삶의 모든 일에 간절히 구체적으로 주님께 부르짖으며 간청을 드려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삶의 문제를 해결 받는 그 구원의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는 좀 더 더욱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우리는 그 구원이 우리가 간청했기 때문에, 다시 말해 우리 정성이 지극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마음을 바꾸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지성감천 (至誠感天) 이라는 말을 우리는 자연스럽게 성경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 자신도 이 주제로 많은 간증을 듣고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좀 달리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가 교우님들에게 뜨거운 신앙생활을 강조합니까? 믿음의 분량만큼의 헌물과 헌신을 강조하고 그만큼 구원이 있고 축복이 있다고 강조하던가요? 사목자인 제가 그렇게 강조하지 않는 것이 저 스스로가 뜨거운 믿음이 없어서일까요? 교우들께서 부담감을 느끼고 교회를 떠나실까봐 눈치를 보느라고 그럴까요? 천만에요!

제가 정말 저의 믿음으로 제게 맡겨진 사목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저는 빨리 사목을 그만 두어야 합니다. 또 정말 어떤 분이 분명한 신앙생활이 부담스러워 교회를 떠나실 거라면 참으로 안타깝지만 너무 오래 기회를 엿보거나 만들지 말고, 되도록 서둘러 말없이 떠나셔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교회다움을 잃지 않고 건강하며, 인간의 모임이 아닌 주님의 교회가 됩니다. 그렇다고 제가 악한 것 아니고, 떠나는 그 분이 나쁜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연약한 사람들이고,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진실로 다만 주님의 자비와 은총에 힘입어 이루어짐을 믿고 바라고 축복할 뿐입니다.

 

교회의 전통에서는 좀 다르게 가르칩니다. 구원은 지성감천의 결과가 아닙니다. 구원은 우리가 주관적인 열심으로 말하고 행한 결과가 아니라, 그저 하느님의 절대적인 사랑 덕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구하기 전에 먼저 하느님의 우리를 향한 그 사랑을 오직 신뢰하고 신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믿음으로 우리의 삶의 문제가 해결 받는 그 일은 우리의 능력으로 하느님을 움직여 우리의 욕망을 달성하는 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시는 그 분께서 먼저 우리의 간절한 필요를 당신의 필요와 일치시키시기 때문에 구원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시로페니키아 그 여인이 경험한 일이 그 일입니다. 에파타(열려라!)의 말씀대로 듣고 말하게 된 그 이가 경험한 일이 그 일입니다.

우리의 소원이 중요하지만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우리의 바램은 현실적인 제약이 있지만 하느님의 사랑과 의지는 차별이 없이 절대적입니다. 그 크신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니다. 지성감천의 천(天)은 우리와 함께 해주시는 주님입니다!  신앙적인 노력은  하늘을 감동시키려는 일이기보다 도리어 그 하늘의 베푸심에 감동되어 최선을 다하는 태도입니다. *

 

 

 

 

교회의 전통에서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주관적인 열심으로 말하고 행하는 것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오직 신뢰하고 신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믿음으로 우리의 삶의 문제가 해결 받는 그 일은 우리의 능력으로 하느님을 움직여 우리의 욕망을 달성하는 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시는 그 분께서 먼저 우리의 간절한 필요를 당신의 필요와 일치시키시기 때문에 구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시로페니키아 그 여인이 경험한 일이 그 일입니다. 에파타(열려라!)의 말씀대로 듣고 말하게 된 그 이가 경험한 일이 그 일입니다.  우리의 소원이 중요하지만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우리의 바램은 현실적인 제약이 있지만 하느님의 사랑과 의지는 차별이 없이 절대적입니다. 그 크신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니다. 지성감천의 천(天)은 우리와 함께 해주시는 주님입니다!  신앙적인 노력은  하늘을 감동시키려는 일이기보다 도리어 그 하늘의 베푸심에 감동되고 사로잡혀 최선을 다하는 태도입니다. *

 

<강론초록3>

                           강아지 같은(?) 신심(信心)으로 (마르 7:24-37)

 

요즘 형편이 좋은 강아지는 처지가 안 좋은 사람보다 더 사랑받고 호강합니다. 그래도 강아지는 역시 천한 동물일 뿐이서 사람을 개에다 비유하면 아주 나쁜 욕이 됩니다. 그러나 현실은 “개만도 못한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남 이야기가 아니라 저부터 그렇습니다.
강아지의 삶이란 주인에게 의지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강아지만큼이라도 우리의 주님을 의지합니까? 꼬리치는 강아지만큼이라도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합니까?
오늘 복음의 이방인 여인, 시로페니키아의 여인은 주님 앞에 기꺼이 강아지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성공회 교우들은 대체로 사회적으로도 존경받고 인정받는 훌륭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우리 성공회 교회의 신앙적인 내용이 우리 교우들이 그런 개인적 사회적 성공을 이루는 일에 도움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고, 역으로 개인적 사회적 성취를 이루신 분들의 신앙적 욕구와 수준을 나름 우리 성공회가 잘 채워줄 수 있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좌우간 저도 그런 교우들을 많이 알고 대합니다. 좋은 자질을 지니고 열심히 노력하여서 여러 면에서 존경과 부러움을 받을 만한 삶을 살아오신 분들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저는 그 분들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모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 분들이 하느님 앞에서는 기꺼이 ‘강아지’같이 자신을 낮출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모습이야말로 겸손하고 지혜롭고 인생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달관한 결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하느님을 섬기며 살지 않고, 교회 공동체를 우습게 여기며, 여전히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누리는 여유와 인정받음으로만 만족하려는 경향이 우리에게도 있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모든 것을 나의 알량한 ‘자존심’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영적으로는 귀가 먹어 듣지 못하고 입이 막혀 진실과 진리를 말하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하느님과 이웃과 진정한 소통(疏通)을 하지 못하고 이기적 자아의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이제 사랑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손길을 통해 저는 무거운 병을 치유 받을 수 있었습니다. 교우들과 함께 이미 우리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진리를 듣고 주님을 찬양할 수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