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초록/2011년도설교초록

2011년 12월 11일 (대림 3주일 /나해) 성서정과 및 강론초록

임종호 2011. 12. 11. 03:30
2011년 12월 11일 (나해 대림 3주일) 성서말씀 
 
이사 61:1-4, 8-11

1 주 야훼의 영을 내려주시며 야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고 나를 보내시며 이르셨다. "억눌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라. 찢긴 마음을 싸매 주고, 포로들에게 해방을 알려라. 옥에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 2 야훼께서 우리를 반겨주실 해, 우리 하느님께서 원수갚으실 날이 이르렀다고 선포하여라. 슬퍼하는 모든 사람을 위로하여라.
3 시온에서 슬퍼하는 사람에게 희망을 주어라. 재를 뒤집어썼던 사람에게 빛나는 관을 씌워주어라. 상복을 입었던 몸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주어라. 침울한 마음에서 찬양이 울려 퍼지게 하여라. 그들을 이름하여 '정의의 느티나무 숲'이라 하여라. 야훼가 자기의 자랑거리로 손수 심은 것, 8 나 야훼는 공평을 좋아하고 약탈과 부정을 싫어한다. 나는 그들에게 고생한 대가를 어김없이 갚아주며 영원한 계약을 그들과 맺으리라. 9 그들의 후손은 만방에 알려지고 자식들은 뭇 백성 가운데서 이름을 날리리라. 그들을 보는 자마다 야훼께 복받은 종족임을 알게 되리라."
10 야훼를 생각하면 나의 마음은 기쁘다. 나의 하느님 생각만 하면 가슴이 뛴다. 그는 구원의 빛나는 옷을 나에게 입혀주셨고 정의가 펄럭이는 겉옷을 둘러주셨다. 신랑처럼 빛나는 관을 씌워주셨고 신부처럼 패물을 달아주셨다. 11 땅에서 새싹이 돋아나듯 동산에 뿌린 씨가 움트듯 주 야훼께서는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정의가 서고 찬양이 넘쳐흐르게 하신다. 

시편 126

1 주께서 시온의 포로들을 풀어 주|시던|날, ∥ 꿈이든가 |생시|든-|가!

2 그 날 우리의 입에서는 함박 같은 웃음 |터지|고 ∥ 흥겨운 노랫가락 입술에 |흘렀|도-|다.
○ 그 날 이교 백성 가운데서 들려오는 |말소|리, ∥ 놀라워라, 주께서 저 사람들에게 |하신|일-|들!
3 주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일 하|셨으|니 ∥ 우리는 얼마나 |기뻤|던-|가.
4 주여, 저 네겝 강바닥에 물길 돌아|오듯|이 ∥ 우리의 포로들을 다시 |데려|오소|서.
5 눈물을 흘리며 씨뿌|리는|자, ∥ 기뻐하며 거두어 |들이|리-|라.
6 씨를 담아 들고 울며 나|가는|자, ∥ 곡식단을 안고서 노랫소리 흥겹게 |들어|오리|라.
○ 영광이 |성부|와 ∥ 성|자와|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 ∥ 그리고 영|원히,|아-|멘

1데살 5:16-24

16 항상 기뻐하십시오. 17 늘 기도하십시오. 18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19 성령의 불을 끄지 말고 20 성령의 감동을 받아 전하는 말을 멸시하지 마십시오.
21 모든 것을 시험해 보고 좋은 것을 꼭 붙드십시오.
22 그리고 악한 일은 어떤 종류이든지 멀리하십시오.
23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온전히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시기를 빕니다. 또 여러분의 심령과 영혼과 육체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완전하고 흠없게 지켜주시기를 빕니다. 24 여러분을 불러주신 분은 진실하셔서 이 일을 다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요한 1:6-8, 19-28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그 빛을 증언하러 왔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증언을 듣고 믿게 하려고 온 것이다. 8 그는 빛이 아니라 다만 그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19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대사제들과 레위 지파 사람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게 하였다. 이 때 요한은 이렇게 증언하였다.
20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 그는 조금도 숨기지 않고 분명히 말해 주었다.
21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다시 묻자 요한은 또 아니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우리가 기다리던 그 예언자요?" 그들이 다시 물었을 때 요한은 그도 아니라고 하였다.
22 "우리를 보낸 사람들에게 대답해 줄 말이 있어야 하겠으니 당신이 누군지 좀 알려주시오. 당신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소?" 이렇게 다그쳐 묻자 23 요한은 그제야 "나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대로 '주님의 길을 곧게 하여라.' 하며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 하고 대답하였다. 24 그들은 바리사이파에서 보낸 사람들이었다.
25 그들은 또 요한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는 거요?" 하고 물었다. 26 요한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다만 물로 세례를 베풀 따름이오. 그런데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 한 분이 당신들 가운데 서 계십니다. 27 이분은 내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이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는 몸이오."
28 이것은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다니아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세례자 요한을 보내시어 성자 예수의 오심을 예비하게 하셨나이다. 비옵나니, 우리에게 지혜와 믿음을 주시어, 평화와 정의를 위하여 큰 영광과 권능으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1>

                           성탄의 기쁨, 구원의 기쁨 (요한1:6-8,19-28)

성탄절의 두 가지 이미지는 아기 예수님과 산타클로스입니다. 성탄절의 주인공은 산타가 아니라 예수님이시라는 건 당연한 사실이고 새삼 그 말씀을 드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산타 클로스를 내세워 선물과 소비의 분위기로 이끌어 가는 세상의 상술과 교회의 추종은 비판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잘 살피지 않으면 결국 우리도 역시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는 산타 예수님을 환영하는 것이지 우리에게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고난과 희생의 길을 걸으라고 당부하시는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님을 환영하는 것은 아니게 됩니다.

성탄절을 잘 맞기 위한 준비가 대림절기의 의도입니다만, 대림절기의 분위기도 여러 가지 일 수 있습니다. 이십년 전 쯤 어떤 교회에서는 교우들이 대림 4주일에 성탄장식을 했다가 주교님께 다 떼어내라는 꾸지람을 들었답니다. 그 주교님은 대림절은 철저하게 회개와 근신의 마음으로 지내야 하고 성탄밤까지는 들 뜬 분위기를 가져서는 안된다는 생각이셨지요. 반면 어떤 교회는 대림절기를 이미 성탄절기의 시작으로 보고  기쁨과 설렘의 분위기로 가져갑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성탄절과 대림절의 정신을 우리의 삶에 진정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성탄절의 참된 기쁨을 위해서 성경은 우리에게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 예언자의 전통을 잇는 분으로서 당대에 크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이로 세례 요한만큼 큰 인물은 없다”고 칭찬하실 정도입니다. 실제로도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의 제자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복음서는 세례자 요한이 겸손하게 자신을 “빛이 아니라 빛을 증언하는 자”,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인식했음을 전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겸손은 위대하지만 그것을 배우라는 메시지보다 더 중요한 초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례자 요한이 인류역사 동안 인간들이 하느님께 부르짖었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셨던 위대한 구원의 이야기에 큰 전환점을 마련한 인물이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례 요한의 준비로 인해 예수님은 만복선물(萬福膳物)세트를 전달하는 산타 예수가 아니라, 당신의 삶과 인격으로 이 땅의 어둠에 빛이 되는 분, 곧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성탄의 이야기는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그 구원은 오늘 이사야서가 노래하듯, 시편이 노래하듯 억눌린 자, 억울한 자, 상하고 갇히고 찢긴 자들에게 회복되는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의 세상입니다. 우리도 진실로 그러한 구원을 고대합니까?

세례자 요한은 예언자의 전통을 따라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심판이 곧 임박했음을 전하고  마음과 삶의 변화를 촉구하고 그 회개의 표시로 세례를 베풉니다.

당시 적지 않은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선택받은 민족임으로 성전제사와 율법준수라는 구원의 방법들에 충실하면 구원의 결과는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처럼 안이하게 생각했습니다. 형식은 내용을 담고 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인데 내용에 관한 반성없이 형식을 되풀이하다보면 형식이 굴레가 되어버립니다. 우리도 경험하거니와 사실 어떤 종교에 속해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함께 삶의 현실을 살아간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살아계신 하느님 앞에서 살아가며 겪게 되는 생생한 삶의 역동과 긴장들, 곧 우리의 삶에 본질적으로 얽혀있는 자유와 배반, 욕망과 실수,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 그런 의미들이 중요합니다.

잘 짜여진 종교시스템이 관리해주는 의식과 규율로 삶의 내용을 채우는 것은 우리를 특정한 종교인이 되게 할 수는 있지만 우리를 지으시고 구원하신 하느님 자녀가 되게 하지는 못합니다. 하느님이 지어주신 우리 인생은 삶의 기쁨과 보람과 행복이 보장되는 본질적으로 “사랑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종교를 잘못 의지하면 하느님이 아니라 종교시스템이 우리를 다스리게  됩니다. 그러면 아무리 온갖 설교와 율법에 휘둘려도 결국은 “인과응보”의 원리에 얽매여 산 인생 이상의 기쁨을 누리기 어렵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삶의 문제, 구원의 문제를 고심하는 우리를 하느님 앞으로 이끌어 세웁니다. 그것이 우리 각자가 주인공이 되는 성탄과 구원이야기의 시작입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문제는 성전제도나 율법제도 등이 외면적으로 보장하는 용서와 축복 시스템이 해결하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마음을 깨닫는 일이고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이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입니다.

아기로 이 땅에 태어나 온전한 사람으로 사시며 세상의 죄와 죽음의 권세 앞에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이 전해집니다. 그 사랑의 능력이 부활의 능력임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일이 구원입니다. 하느님의 영,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는 일이 구원입니다. 따로 무슨 3박자 구원종합선물세트를 구할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이 되신다는 것,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 임마누엘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는 고백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성탄은 바로 그 구원의 사건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외침은 우리의 삶을 가지고 하느님 앞에 나아가라는 요청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우리는 두려운 하느님이 아니라 아기 예수를 통해 우리와 함께 탄생과 성장과 삶과 죽음을 함께 해주신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요한이 자못 두려운 심판주로 느껴지도록 표현한 하느님을 예수님은 자비하신 사랑의 아버지로 알려 주십니다. 스스로 연약한 아기로 태어나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인간의 삶을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를 신뢰하며 하느님 나라를 위해 사셨고 마침내 죽음을 이기고 부활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아기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것에서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아차리는 일은  인간세계의 지식과 논리와 시각을 내려놓고 가난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다면 성탄은 알아내기 조차 힘든 외딴 곳의 작은 사건처럼 숨겨져 진행됩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성탄의 기쁨은 우리의 믿음 안에서 하느님께서 시작하신 구원의 사건, 하느님 나라의 시작이 오늘도 우리 마음 안에서 새롭게 일어나 우리와 세상을 구원하리라는 기쁨과 소망을 누리는 것입니다.

<강론초록2>

               주님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처럼 (요한1:6-8,19-28)

예수님이 구세주로 이 땅에 오신 일은 꿈이나 환상이 아니라, 생생하고 엄연한 인간의 “역사”속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역사 속에서 예수님의 앞길을 밝힌 이가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역사에는 단절이 없습니다. 역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참다운 삶에 대한 고뇌와 노력을 이어가는 과정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례 요한”에 대한 요한복음의 말씀을 듣습니다. 복음은 세례요한이 “빛이 아니라 빛을 증언하러 온 것”이고, 그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길을 곧게 하기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였다고 표현합니다. 이 세례요한의 영성은 우리에게 깊은 감화를 줍니다.

사실 세례 요한은 자기가 예수의 스승이었다고 내세워도 될 정도의 큰 인물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당시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지지를 받았고 예수님께서도 세례 요한에게 큰 영향을 받으신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이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인물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세례 요한은 자기를 높이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다만 자기 뒤에 오시는 “나보다 훌륭한 이”, “나보다 더 큰 일을 하실 분”에게 관심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과연 세례요한처럼 겸손하고 진지하고 사욕이 없습니까? 하느님 앞에, 진리 앞에, 또 하느님이 쓰시는 다른 사람 앞에 기꺼이 우리 자신을 낮추고 비울 수 있습니까?

이 시대에 가정, 사회, 교회의 큰 문제의 하나는 바로 세대 간의 불신입니다. 선배들은 후배들을 신뢰하지 못하고, 후배들은 선배들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저마다 자기가 자기를 높이는데 열심이고, 짧은 자기 당대에 모든 칭찬을 받고 싶은 마음이 앞섭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신뢰하며,  더 큰 역사의 흐름 가운데, 자기를 바로 세울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주님만을 높이는 마음으로 지혜롭고 겸허하고 충성스러운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자기의 역할에 충실하고 만족하는 세례요한의 겸손은 결코 어리석은 것이 아닙니다.

큰 항아리에 물을 부어 채울 때 처음 바닥에 물을 붓는 이도 있고 맨 나중에 넘치도록 물을 붓는 이도 있습니다. 맨 마지막에 부은 이의 영광이 드러나 보이지만 처음 부은 이의 바닥을 적시는 물이 없다면 항아리는 결코 가득 차지 못합니다. 크게 드러나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주어진 역할에 순종하고 기뻐하며 최선을 다하는 것, 세례 요한에게서 우리가 배운 귀하고 아름다운 영성이고, 이 대림절에 되새길 참된 믿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