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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9일 (대림2주일) 성서정과 및 강론초록

임종호 2012. 12. 7. 12:31

 

2012년 12월 9일 (대림2주일) 성서말씀  /냉정리성당 축성

 

말라 3:1-4

1 "보아라. 나 이제 특사를 보내어 나의 행차 길을 닦으리라. 그는 너희가 애타게 기다리는 너희의 상전이다. 그가 곧 자기 궁궐에 나타나리라. 너희는 그가 와서 계약을 맺어주기를 기다리지 않느냐? 보아라. 이제 그가 온다.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2 그가 오는 날, 누가 당해 내랴? 그가 나타나는 날, 누가 버텨내랴? 그는 대장간의 불길 같고, 빨래터의 잿물 같으리라. 3 그는 자리를 잡고 앉아, 풀무질하여 은에서 쇠똥을 걸러내듯, 레위 후손을 깨끗하게 만들리라. 그리하면 레위 후손은 순금이나 순은처럼 순수하게 되어 올바른 마음으로 제물을 바치게 되리라. 4 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이 바치는 제물이 옛날 그 한 처음처럼 나에게 기쁨이 되리라.

 

즈가리야송가

1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을 찬미|하여|라! ∥ 그 백성을 돌아보시어 |구원|하시|고,
2 우리를 위하여 주님의 종 다윗 |가문|에 ∥ 전능하신 구세주를 세|우셨|습니|다.
3 이는 하느님께서 예|로부|터 ∥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것이|며,
4 우리를 원수로부터 구|하시|고 ∥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하려 |하심|입니|다.
5 주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 그 거룩하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6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대-|로 ∥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해|내셨|습니|다.
7 두려움 없이 주님을 |섬기|며 ∥ 한 평생을 거룩하고 올바르게 살게 |하셨|습니|다. 8 아가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예언자가 |되리|니, ∥ 주님보다 앞서 와서 그의 |길을|닦으|며,
9 주님의 백성에게 그 구원을 알게 |하-|여 ∥ 주님의 용서하심을 |얻게|하여|라.
10 이는 하느님의 인자하신 |덕분|이니 ∥ 새벽빛이 위로부터 우리에게 |비추|시-|어  11 어둠과 죽음의 그늘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을 |주시|고 ∥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시|리-|라.

○ 영광이 |성부|와 ∥ 성|자와|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 ∥ 그리고 영|원히,|아-|멘

 

필립 1:3-11

3 나는 여러분을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4 기도할 때마다 언제나 여러분 모두를 위해서 기쁜 마음으로 간구합니다. 5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한 첫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복음을 전하는 데 협력해 온 것을 나는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

6 여러분들에게 훌륭한 일을 시작하신 하느님께서는 그 일을 계속하실 것이며 마침내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완성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신념입니다.
7 여러분은 내가 갇혀 있을 때나 복음을 수호하고 입증할 때에 나와 함께 은총을 나누어 받으며 고생을 같이 해온 사람들로서 항상 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으니 내가 여러분을 그런 생각으로 대하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8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지극한 사랑으로 여러분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하느님께서 잘 알고 계십니다.

9 내가 여러분을 위해서 기원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참된 지식과 분별력을 갖추어 점점 더 풍성해져서 10 가장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가릴 수 있게 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순결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게 되고 11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올바른 일을 많이 하여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루가 3:1-6

1 로마 황제 티베리오가 다스린 지 십오 년째 되던 해에 본티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있었다. 그리고 갈릴래아 지방의 영주는 헤로데였고 이두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는 헤로데의 동생 필립보였으며 아빌레네 지방의 영주는 리사니아였다. 2 그리고 당시의 대사제는 안나스와 가야파였다. 바로 그 무렵에 즈가리야의 아들 요한은 광야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

3 그리고는 요르단 강 부근의 모든 지방을 두루 다니며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 하고 선포하였다. 4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의 책에 기록된 말씀대로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5 모든 골짜기는 메워지고 높은 산과 작은 언덕은 눕혀져 굽은 길이 곧아지며 험한 길이 고르게 되는 날, 6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본기도> 구원의 하느님, 우리의 잘못된 마음과 행실을 올바르게 고쳐주시나이다. 구하오니, 우리의 삶을 정결하게 하시어 주께서 우리 안에 시작하신 구원의 역사를 이루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1>

                 마음과 삶을 변화시키는 회개 (루가 3:1-6)

 

대림 2주일입니다. 한 달을 앞서가는 교회력입니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데 이미 새해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교우 여러분은 요즈음 어떤 감정을 느끼시는지요?

우리 육신의 생명은 오래 살아도 백년을 넘기기 어렵습니다. 혹여 천년을 산다해도 우리 자신의 진정한 성장과 성숙과 변화없이 그저 돌맹이 같이 버티고 살아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마지막에는 그저 한바탕 꿈이요, 덧없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궁극적 관심은 우리 삶의 외부적인 조건이 어떻게 우리 소원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가 비결을 찾고 따르는 일이 아닙니다. 물질관계이든 인간관계이든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이 무엇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어디에 시선을 두는가가 문제입니다. 흘러가는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그 시간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경험하고 무엇을 깨닫고 어떻게 달라지는가가 중요합니다.

회개는 바로 우리 마음과 삶의 변화에 대한 것입니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은 신의 용서를 받아 마음 속의 죄의식을 덜고 심리적인 평정을 누리는 일이 아닙니다. 세상에 속하여 세상의 논리와 가치를 따라 얽매여 살던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분의 통치아래 삶을 살기로 다짐하는 일입니다. 정서적인 후회감이 아니라 우리 실존과 역사의 본질을 하느님 앞에 깨닫는 것이 회개입니다. 세례와 죄의 용서는 우리가 이제 하느님의 자녀, 하느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거듭났다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과는 다른 차원의 인식과 가치와 정서를 가지고 새로운 삶을 사는 일이 중요합니다. 

혹시 이 세상을 지배하는 사탄의 존재와 세력을 의식하며 살고 계세요? 이 땅에 도래하는 하느님의 나라,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일은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의 불의와 고난의 현실을 전제합니다. 우리는 어떤 관심으로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여전히 세상이 인정하는 명예와 부와 성공을 제일로 추구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성공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구 하면서요. 이미 교회조차도 세상의 가치와 논리를 반성 없이 그대로 가져다 쓰는 일은 참으로 마음 아프고 두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이는 징벌이 두려워 실수를 후회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우리가 참된 사랑으로 살고 있는가를 반성하는 일입니다. 이 약하고 추하고 어리석고 두렵고 고통스런 우리의 세상살이에 하느님께서 몸소 강림하셔서 우리의 곁에 참 사람으로 오셨음을 기억합니다. 가난하고 외롭고 서러움 많은 인간들 사이에 하느님의 아들이 오셨다는 그 기쁜 소식을 경험한 이들은 얼마나 복된가요?

오늘 복음서는 로마황제 티베리오와 유다총독 빌라도 , 갈릴래아 영주 헤로데 등의 이름을 전하며 예수님의 강림이 신화가 아니라 분명한 역사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역사적인 관점은 우리의 신앙의 문제를 단순한 종교심의 문제로 축소 환원하지 않고 엄연한 실존과 엄정한 역사의 문제로 살려보도록 해주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성탄을 기억하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은 동화 같고 신화 같은 이야기에 그칠 수 없습니다. 우리 역사의 한 가운데에서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린다는 인식과 고백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 역사의 한 가운데에 바로 우리 자신과 우리 이웃과 우리 신자공동체가 존재합니다.

오늘 복음서는 전합니다. 성탄의 이야기는 신화가 아니라 역사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외친 우리의 회개도 개인의 심리적인 결심이나 평정의 문제가 아니라 이 세상에 속한 삶에서 예수님께서 열어가시는 하느님 나라에 속한 삶으로 돌이키는 차원 변화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꽃들에게 희망을” 이라는 동화가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애벌레가 남보다 통통히 살찌고 남을 짓밟고 더 높이 올라서려는 관심을 넘어서서 스스로가 변형될 나비의 가능성을 믿고 작은 죽음과 같은 고치를 트는 일이 신앙적인 회개의 의미를 잘 표현해줍니다.

교회와 성서의 가르침은 무슨 도덕적인 교훈이나 인간관계의 처세훈이 아니라 이 세상의 불의와 고통과 반역에 대하여 하느님의 나라가 어떻게 사랑의 왕국, 평화의 왕국으로 도래하는지에 대한 선포와 초대를 내용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축복은 단순히 이 세상에서 만사형통 소원성취의 축복을 누리고 죽은 후에 영혼이 천당에 간다는 내용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질서와 하느님의 나라가 충돌하는 지점에 서게 되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참된 구원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죽음의 권세를 꺽으신 예수님의 다시 사심을 확신하며 그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기쁘게 살 수 있는 일이 신앙의 축복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참된 생명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지혜와 의지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우리의 경험이요 고백입니다. 

 바울로 사도는 필립비교회 교우와 오늘 우리를 위해 기원합니다.
 “내가 여러분을 위해서 기원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참된 지식과 분별력을 갖추어 점점 더 풍성해져서 가장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가릴 수 있게 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순결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게 되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올바른 일을 많이 하여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강론초록2>

                              기쁨으로 회개하십시오! (루가 3:1-6)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 즈가리야의 아들 요한이 광야에서 듣고 선포한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회개는 지난 일에 대한 감정적인 후회가 아닙니다. 회개는 이제껏 하느님을 모르는 것처럼 살아왔던 삶에서 돌이켜 하느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삶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회개는 우리의 결심이 먼저가 아닙니다. 우리를 한없이 아끼시고 오래 참으시며 따뜻한 음성으로 부르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먼저입니다. 회개는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기다리시고 품어 안으시는 아버지의 사랑(루가 15장)임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펼치시는 새로움에 참여하기 위해 우리 스스로 고통스런 정화(淨化)의 길을 선택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정죄하고 징벌하시려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시며 돌보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의 그 사랑을 진정 신뢰하는 만큼만 우리의 삶은 변화됩니다. 우리 자신의 후회와 결심만으로는 작심삼일을 되풀이하다가 자포자기 하기 쉽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이 회개이고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습니다. 이 때 죄의 용서는 죄책감을 덜거나 징벌을 면하게 됨이 초점이 아닙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새로운 사랑의 삶을 시작하게 됨이 초점입니다.
우리의 삶을 바로 잡는 일, 주님을 모시기 위해 우리 마음을 정결하게 하는 일은 지옥불이 두려워 떠는 일과 같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을 위하여 사랑의 기쁨과 설레임으로 자기를 단장하는 일과 같습니다. 대림(待臨)절기는 절제와 반성의 시간이지만 그 밑바탕에는 크나큰 기다림과 기쁨의 정서가 깔려있는 것이지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요, 약속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사는 삶은 율법의 힘을 늘 두려워하면서 짐짓 위선을 떨거나 남을 정죄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의로움을 깨달은 사람은 자기의 죄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용기를 내어 하느님의 은총을 향해 나아갑니다. 사랑을 위해 자기의 마음과 삶을 열어 성령을 모셔 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강생(降生)하신 까닭은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은총을 깨달아 누리며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들에게 훌륭한 일을 시작하신 하느님께서는 그 일을 계속하실 것이며 마침내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완성하실 것입니다(필립1:6).” 대림절을 지키는 마음이 가득 담긴 말씀입니다!✠

 

<강론초록3>

                          대림절에 회개가 필요한 까닭 (루가 3:1-6)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  즈가리야의 아들 요한이 광야에서 들었던 하느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회개”가 무엇일까요? 회개는 단순한 감정적인 후회가 아니라 자기 중심의 삶을 철저하게 뉘우치고 완전하게 삶의 방향을 하느님께로 돌이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된 “회개”는 새로이 다가오는 하느님의 나라, 우리에게 임하시는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만 가능합니다. 하느님만이 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을 우리를 정죄하려고 엄격한 율법의 잣대로 들이대는 이미지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은 율법에 따라서 우리를 정죄 하는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당신의 무조건적인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를 감싸 안으시고 새로운 삶의 기회를 허락 하시는데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는 것이 하느님의 약속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의로움을 바로 깨닫는다면 회개란 바로 그 하느님의 의로움을 의지해서 살아가기를 결심하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살던 삶은 율법과의 긴장 속에서 자신의 죄를 의식하면서 짐짓 위선을 떨거나 남을 정죄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의로움을 깨달은 사람은 자기의 죄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용기를 내어 하느님의 은총을 향해 나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하느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철저하게 깨닫도록 해주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를 정죄하시지 않으시고 도리어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희생하여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의로움을 깨닫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알아볼 수 없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여전히 권력과 명예와 부귀의 왕으로 예수를 오해하고 현세의 복을 빌 뿐입니다.

대림 2주일에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맞이하기 위하여,  ‘회개’하라는 세례요한의 외침에 귀를 기울입니다. 모든 차별과 장벽과 오해와 선입견을 내버리고 자유롭고 깨끗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해서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