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저녁, 신은경의 “음을 이야기하다, 사랑” 콘서트에 다녀왔다. 음악이 좋은 건 우선 작곡자의 공이나 구체화되는 것은 연주다. 어떤 연주자가 어떤 곡을 골라 어떤 연주를 들려주는 기회를 만나는 일은 기연(奇緣)이다. 고마운 만남이다.

내 귀는 ‘막귀’다. 음정과 리듬과 음향의 미묘한 차이에 둔감하다. 그런 식별에는 타고난 감각도 없고 자세한 배움도 없었다. 소리의 질서인 음악의 체계에도 무지하다. 그렇다고 내가 좋아하는 소리와 음악이 없다는 건 아니다. 겪어봐서 아는데,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고 사람을 사귀는 일에 자신이 없을수록 도리어 내심에는 친교의 열망이 간절하고, 시기 질투가 끓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음에 둔감하고 음악에 무지한 사람은 음악을 즐길 수 없는가? 그럴 리 없으니 나도 내 귀에 울려드는 어떤 음향과 멜로디에는 충분히 반응한다.

나를 포함한 대중은 전문성의 잣대로 재면 대개 모자라다. 그런데 그 대중과 공감을 이루어...야만 전문가의 역할이 지속된다. 어떻게 대중과 공감하지? 물론 전문 연주가로서 창조하는 음악이 먼저다. 그런데 음악은 이념이나 명분이 아니다. 이념의 추구에 이바지할 수 있지만, 자칫 최면이나 선동이 되기 쉽다. 음악은 자유로운 느낌의 공유다. 음의 질서를 통해서 느낌을 소통하는 일이다. 전하는 이와 듣는 이가 공감을 이루는 일이다. 함께 참여하고 변화함으로 깊은 친교를 이루는 평화의 장이다. 전문가로서 대중을 계몽하려는 생각은 대개 실패한다. 힘이 없으면 당연히 실패하고, 힘을 가지면 힘에 주로 의지하기에 결국 실패한다.

전문가로서의 권위를 내세우는 대신에 신은경 선생은 ‘스토리’를 제시하는 길을 택한 듯하다. 이념적 내용의 서사도 스토리일 수 있지만, 우선은 연주자가 삶으로 체험한 스토리다. 스토리에 음악을 실은 것인가? 음악에 스토리를 실은 것인가? 물론 스토리가 아니라 피아노 연주가 주가 된다. 연주자가 제시한 스토리는 듣는 이들 각자의 스토리를 초대하여 공감의 마당을 마련한다. 본격적인 음악이 흐르면 각자의 스토리는 음악에 맞추어 춤추듯 흘러가며 새로이 정리된다. 나는 연주를 들으며 샘솟아 흘러가는 느낌의 흐름에 사로잡힌다. 그런데 그 느낌이 핵심은 바로 ‘함께 하는 삶의 느낌’이다. 내게는 그게 스토리의 힘이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내 머리로 느낌을 지어내기에 바빴을 테고 그랬다면 연주를 듣는 일은 쉼이 아니라 고역이었으리라.

스토리텔링 피아노 콘서트, 두 번의 연주회에서 나는 마음껏 음악을 즐겼다. ‘우정’의 주제로는 학창시절의 추억 속으로 선율을 따라 이리저리 운동장과 골목길을 돌아다녔다. 두 번째 연주회는 좀 더 익숙해졌다. 이런 사랑 저런 사랑의 추억은 스토리와 함께 떠올랐다가 피아노의 선율과 음향을 따라 다시금 날아가 어느 곳에 자리 잡는다. 누군들 사랑의 기억이 없으랴! 묻어두었던 아픔과 슬픔이 치유되고 화해를 이루는 느낌이었다. 사실 스토리도 매력적이지만, 나는 신은경 선생의 손길이 건반 위에서 만들어내는 소리가 자체로 참 좋다. 연주회 후에, 같은 곡들을 다른 연주자의 곡들로 비교해보니 모두 다른 가운데 내 취향이 분명해진다. 그동안 알던 분은 우리 전례의 반주자 선생님이신데, 이 연주 시리즈로 피아니스트 신은경 선생을 '새로 알게' 된 일이 무척 행복하다. *

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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