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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반에게

분별력



 

신부님,

오늘 성미카엘과 모든 천사들 축일은 대한성공회 설립 122주년, 관구설립 20주년이 되는 날이죠.

성가 170장 가사는 인간들은 "미혹의 염려 없는" 천사를 부러워하고

천사는 "하느님께서 자녀 삼으신" 인간들을 부러워하나 

하느님의 나라의 한 군사가 연합되리라는 다짐으로 하나됨을 노래합니다.

애찬 시간에 천사가 과연 미혹의 염려가 없을까 김주교님이 문제를 제기하셨죠.

미혹의 이유를 성가는 육신의 사슬과 죄로 표현하였지만 

이 때의 육신은 단순한 몸(바디, 육체성) 이라기 보다, "에고"로 통칭되는 자기중심성일 겁니다.

타락한 천사 루시퍼를 이 자기중심성의 화신으로 보는 전통도 있으니

천사도 미혹의 염려가 여전히 있을 터이고 주교님의 문제제기는 근거가 있죠. 

천사를 포함한 모든 존재는 자기중심성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모든 존재가 추구할 방향은 관계성, 친교성, 일치성을 통한 초월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그러한 구원의 내용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교회공동체를 통해서 구원받는다고 이해하는 것도

교회의 권력이 구원의 기준과 심판을 좌지우지 결정한다는 의미가 절대로 아니고

교회공동체를 통해서 우리들의 자기중심성이 삼위일체의 신비적 사랑 안에서

극복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 저는 천사의 존재와 의미에 대해서 가장 유익하고 아름다운 이해를 

이제는 고인이 되신 위대한 신학자 월터 윙크의 3부작  [ Naming the Power(1984),

Unmasking the Powers(1986),  Engaging the Powers(1992), 세권 모두 <한국기독교연구소>에서

번역 출간] 으로부터 배웠습니다.

 

오늘 설교에서 교무원장 신부님께서도 언급하셨지만,

지금 우리 교회가 위기라고 합니다. 물론 위험을 수반한 기회라는 의미로 이야기되기 시작한 겁니다.

우리끼리 우리가 참 좋은 교회라고 자부하며 지내는 동안,

객관적으로는 영향력이 별로 없는 교회, 잠재력도 실제로는 크지 않은 교회로 진단이 나온 거지요.

그래도 잘 만하면, 즉 지금까지의 확인된 성공회의 귀한 전통과 좋은 제도의 명분에 실제로

부합되는 내용을 좀 더 갖추어 가고, 성공회의 좋은 이미지를 형성하고 잘 알리면, 

열배 스무배 지금보다 더 많은 이들에게 성공회를 통한 참 신앙의 기쁨을 전해줄 수 있을 거랍니다.

 

그런데 일단 "위기"라니까 모두들 짐짓 처음 듣는 것처럼 놀라

무엇이 문제일까,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까... 논의가 분분합니다.

실은 모두가 알고 또 느끼고 있었던 현실이죠.

하지만 진실로 절박하고 깊이있게 우리의 현실을 반성하고 있었는 지에 대해서는

역시 깊은 반성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뭘 잘못하고 있다거나, 해야 할 일을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라면

도리어 별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보기를 회피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무엇이 기준이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파악할 능력이 없는 것이니

개선의 여지가 없는 것이지요.

신앙적인 개념으로는 "회개"의 가능성이 없는 것이지요.

 

무척 심각한 상황이지만 어쩌면 참 우습고 한심한 일이기도 합니다.

속된 말로 제 꼬라지를 모르고 지냈다는, 즉 주제파악이 안되었다는 건데...

신앙인이 갖추어야 할 덕목 중의 덕목은  "분별력"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흔히 "사랑"을 말하지만 그 사랑의 수준에 따라서는

때로 동물이 우리보다 더 깊고 큰 사랑을 보여주는 경우도 적지 않지요.

그러니, 우리의 지금 위기는 지표들이 말해주는 교세의 위기가 본질이 아닙니다.

우리가 실제로는 참 신앙인들이 되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것,

겉모양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공동체에 참된 분별력(식별력)이 없다는 점이

위기의 뿌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당연히 신부님과 제가 함께 책임이 있지요.

급여가 모자라고 더구나 불평등해서 "분별력"을 기르지 못했다 변명할 순 없겠지요.

달보고 짖어대는 개처럼 살 수는 없는 일이지요.

몇 마디의 말이라도 그것을 우리들이 어떻게 애를 써서, 어디에서 얻어서, 어떻게 길러서,

어떻게 전하고 있는 것인지 돌아볼 일입니다.

신앙적인 의미의 분별력은 인간적인 잔머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천사의 이야기에 연결지어보면 우리의 영적인 수준과 상태의 문제입니다. 

대한성공회의 천사는 깨어나야하고 세상을 좀 더 깊이 배워야 합니다. 

  

신부님, 제가 지금 뭔가 말이 되는 말을 하고 있긴 한 건가요?

사랑으로 지적해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