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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과 소신

감찰 하시는 하느님



 

대한성공회 성령봉사회가 발행하는 <새기운> 지에 1995년경에 실렸던 제 글입니다.

http://h-spirit.net/gnuboard4/bbs/board.php?bo_table=saekiwoon&wr_id=4&page=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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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찰 하시는 하느님 

 

5년 전 이맘때 쯤 나는 성공회 사목신학연구원 성직과정의 2년차 학생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에 나는 각별히 사랑한 사람도 미워한 사람도 없었다. 나는 그런대로 착하고 겸손했고 머리도 나쁜 편은 아니어서 합리적인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었다. 내 생활은 모범적이라기는 뭐해도 비난 받을 정도도 아니었고 이른바 민중 신학에 많은 관심을 둔 편이었지만 성령운동을 나쁘게 보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나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었는데 당시에는 우습게도 오히려 그것을 내심 자랑으로 여겼던 것 같다. 나같이 여러모로 균형 잡힌(?) 사람은 별로 많지 않으리라고 자부하며 중용의 도를 표방하는 우리 성공회의 성직자로는 내가 꽤 적격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최근에야 나는 그때의 나를 두고 하신 하느님의 생각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디모데후서 3장에 이르신 대로 ‘그때에 나는 배신하며, 무모하며, 자만하며, 하느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며 겉으로는 경건하게 보이나 경건의 노력은 부인하는 자’였던 것이다. 다행히도 속사람을 감찰하시는 하느님께서 곧 나 같은 자가 섬기는 길을 함부로 가지 못하도록 막으셨는데 그 후에도 나는 오히려 한 가닥 하느님을 원망하는 마음까지 더하여 여전히 배신하고 앞뒤를 가리지 않고 자만으로 부풀어서는 하느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고 겉으로는 종교생활을 하는 듯이 보이지만 종교의 힘을 부인하는 삶을 살아왔다. 

 

지난 2월말 어느 재미있는 모임에 참석 했는데 그것은 어느 사역자의 특별한 은사를 중심으로 한 자리였다. 그 사역자는 하느님께로부터 다른 이의 영적 상태에 관해 대언하고 영적치유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은사를 받았다는 것이었는데 나도 직접 그이를 통해 내게 하시는 하느님의 직접적인 평가(?)를 듣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참 신기한 일이었다. 그런 일에 대한 성서적인 근거, 교리적 인 평가에 대해서는 더 깊은 논의가 있을 수 있겠지만 내게는 매우 유익한 경험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사역자와 대면하기 전에 나는 하느님, 제게 과연 무슨 말씀을 하시렵니까? 하고 기도하려고 했다. 순간 나는 평소에 얼마나 하느님께 나에 대해 아무것도 말씀드리지 않았던 가를 깨달았다. 나는 내 머리 속에 나의 하느님을 그렸을 뿐이지 한 번도 하느님을 살아계신 인격으로 대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때 나는 내심 내가 성직을 지망했다가 포기한 일에 대해 하느님께서 가볍게 책망하시고 깊이 위로해 주시길 기대했었다. 그간 사람들에게서 곱지 않은 눈길을 받아왔기에 하느님께는 인정을 받고 싶었다. 하느님께서 그간의 일은 다 용서해 줄 테니 다시 성직의 길로 돌아오라고 하시 면 어쩌지 하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그러나 정작 내가 들은 것은 내가 듣기 원했던 그런 고상하고 위안이 되는 말씀이 아니었다. 도리어 내가 어릴 적에 받은 어떤 상처로 인해 내 자아가 이제껏 온전히 자라지 못하고 뒤틀려있다는 말씀이었다. 세상에나! 내가 그런 표현을 들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곧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껏 내가 삶속에서 맺은 열매가 나의 영적상태를 증언하고 있음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남들은 잘 알 수 없고 나 자신마저도 잘 몰랐지만 나는 멸망의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이다. 어렴풋이 이게 아닌데 하는 느낌 속에서 그래도 이정도면 되겠지 하는 내 생각대로 나는 삶을 꾸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주님께서 나를 치유하시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을 들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마태 11:28)는 말씀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주님의 사랑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 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5, 38-39)

 

15년이 넘는 동안 이제껏 나는 신앙생활의 주어가 나인 줄로만 알았다. 내가 믿는 것, 내가 사랑하는 것, 내가 느끼는 것, 내가 이해하는 것, 그것들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덧없이 사라지는 이슬 같은 것인지를 모르고 거기에 매달렸다. 죄인인 내게서 나온 모든 것들이 온전치 못한 것들이었다. 죄인인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는 그 사랑의 하느님이 바로 신앙의 주체이시고 나는 그저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수동의 존재에 불과함을 이제 알게 되었다.

하느님께 대한 나의 신실함과 나에 대한 하느님의 신실하심 중 어느 편이 의지할만한 것인가? 하느님께 대한 나의 사랑과 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 중 어느 편이 참된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이제 나는 나의 것을 버리고 하느님의 것을 선택한다. 내 예전의 관심이란 하느님을 아는데 있어서 지적인 이해가 더 우선하는가 아니면 감성적인 느낌이 우선하는가의 문제였다. 이제 생각하면 참 어리석은 접근이었다. 어느 쪽이든 그것은 사람의 편에서 하느님을 규정해 가려는 불순한 시도였던 것이다. 

 

진정 관심을 두어야할 것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뜻에 어떻게 순종하고 헌신하는가 하는 문제임을 이제는 깨닫는다. 그동안 나는 하느님께 진심으로 순복하지 않으면서도 막연히 하느님이 나를 사랑해 주시는 줄로만 알았다. 마치 내게 무슨 권리라도 있는 것처럼 당연히 나를 구원해 주셔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근거 없는 낙관주의였고 올바른 믿음은 아니었다. 하느님은 나를 사랑 하셨지만 내가 나의 교만을 인정하기까지 아무 일도 하시지 않으셨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실 때 나는 내게 멸망의 가능성이 얼마나 현실적인지를, 사탄의 세력이 얼마나 위협적인지를 보았다.

그리고 나서야 나는 요한복음 3장 16절의 그 위대한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잃은 현실 속에서도 나를 구원하신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리라는 하박국 13장 17절 이하의 환성을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 임종호 (프란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