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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초록/2013년도설교초록

[설교]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 (루가 18:1-8)

 

 

<강론>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 (루가 18:1-8)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

 

오늘 들으신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는 찬찬히 읽어보면 생각보다 해석이 어렵습니다. 교우 한 분이 들으신 소감을 말씀하시되, 왜 과부는 재판관에게 매달려 시간을 허비하는가, 하느님께 직접 호소하면 지체 없이 응답을 받았을 터인데... 하십니다.
보통 이 말씀이 비유의 말씀이니만큼, 재판관과 하느님의 위상을 비슷하게 이해하면서 “고약한 재판관도 이러한데 하물며 자비하신 하느님이야” 하고 이른바 “황차(況且)용법, 하물며 용법”(정양모)으로 해석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재판관 말고 하느님에게”라고 해석하는 것을 보니 좀 엉뚱하지만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이 본문의 맥락을 살펴보니 바로 앞부분에 루가 17:20절 이하에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이라는 제목으로 “하느님 나라”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느님나라가 언제 오겠느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영광스러운 날을 단 하루라고 보고 싶어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 마치 번개가 번쩍하여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환하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의 아들도 그 날에 그렇게 올 것이다.”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일상생활의 가치에 연연하다가 그 때, 곧 사람의 아들이 올 때를 놓치고 망하고 만다는 말씀이 되풀이 강조됩니다.
그리고는 오늘 본문 말씀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이렇게 비유를 들어 가르치셨다”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살펴보니 오늘 본문의 중심문장은 “사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실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는 말씀으로 떠오릅니다.

즉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들의 소원성취를 위해서 끈기있게 매달리고 부르짖어야 한다는 “기도에 관한 교훈” 말씀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 나라-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을 기다리는 신자의 “종말론적인 삶의 태도”를 가르치는 말씀인 것입니다. 

‘종말론’은 세상이 언제 망한다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부딪혀 이 ‘세상 나라’가 산산조각 나는 소망을 뜻합니다. 이 세상의 성공에 소망을 두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다스림, 하느님의 함께하심에 소망을 두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기도에 대한 가르침도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다”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택하신 백성이 밤낮 부르짖는” 일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나라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이렇게 촛점을 “종말론적 삶의 태도”로 바꾸어 읽으면, “기도의 본질이 바로 하느님 나라를 구하는 것임”을 그리고 “신앙생활이란 하느님 나라를 구하는 일에 용기를 잃지 않는 일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왜 고약한 재판관을 비유로 드셨는가가 분명해집니다. 이 과부는 “저에게 억울한 일 한 사람이 있는” 것 때문에 올바른 판결을 구하지만 고약한 재판관은 도통 관심이 없습니다. “고약한 재판관”은 단순히 비유를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가 아니라, 예수님 말씀을 듣는 많은 이들이 실제로 삶 속에서 고통스럽게 대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현실에서 나온 캐릭터입니다. 오늘의 우리도 고약한 재판관 같은 인간이나 제도 때문에 치떨리게 억울한 적이 있질 않습니까? 생각하면 “하느님도 두려워 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고약한 재판관”은 바로 물신(物神)을 섬기고 기득권(旣得權)을 고수하는 “이 세상” 자체입니다.

이는 비유를 위한 설정이기 이전에, 당대의 현실을 반영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이를 풀려다가 고약한 재판관같은 인간이나 제도에 당해본 경험이 없습니까? 억울한 일이 있고 그 억울한 일을 풀려다가 더 억울한 일을 당하는 저 과부가 겪는 이중의 억울한 처지를 공감하는 사람만은 오늘의 비유를 확실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나라가 뭐냐?” 는 중요한 물음은 이 대목에서 “억울한 일이 없는 세상”라는 답을 얻습니다. 우리 세상살이의 고통의 본질은 “내게 억울한 일을 한 사람”이 있고 “그 억울함을 풀어줄 권세가 전혀 내 편이 아니라”는 경험입니다.
당대의 유대인들에게는 하느님의 나라, 사람의 아들의 영광은 군사력을 통하여  로마제국으로부터 해방된 유대왕국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여주는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있는” 세상, “억울함이 없는 세상”“억울함이 풀리는 세상” 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지체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시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생각하면 “억울함”이 세상살이의 본질적 문제입니다. 세상의 죄와 고통은 바로 억울함의 원인과 결과입니다. 나는 과연 무엇을 억울해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아무런 억울함도 없다구요? 좋은 것 같지만 어쩌면 세상을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억울함 없는 인생살이는 없다고 단언해도 좋습니다.

그런데 내가 잘못한 일은 사실 억울할 일이 아닙니다. (내가 잘못한 일을 아무런 반성없이 그저 좋은 결과로 만들어달라는 기도는 이상합니다. 내가 잘못을 고치고 잘 수습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맞습니다.)
공평한 룰을 통해 얻은 결과도 사실은 억울한 일이 아닙니다. (가령 운동경기에서 우리 편을 이기게 해달라는 기도는 넌센스입니다. 공정한 경기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가 맞습니다.)

문제가 되는 억울함은 부당하게 어떤 이가 내게 행한 억울함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그 억울함을 무시하는 기득권이 주는 이중의 억울함입니다. (그 부당한 억울함을 가하는 세력이 바로 ‘죄’요 ‘사탄’입니다. 죄은 용서되어야 하고, 사탄은 추방되어야 하고, 인간은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 일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하느님 나라의 일입니다.)

이 때 우리의 기도는 하느님을 향해 힘을 얻습니다. 시편의 탄원은 이런 상황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 억울함을 못견디는 마음, 그 억울함을 풀려는 마음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느님께 그 억울함을 아뢰는 마음, 하느님께서 그 억울함을 풀어주실 것을 신뢰하는 마음이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대충 세상을 살아가며 이런저런 바라는 것을 청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락한 교회의자에 앉아서 마음의 평안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기도는 우리의 삶, 우리의 이웃과 세상에 “억울함(원한)”이 사라지도록 하느님께 “밤낮 부르짖는”일이어야 합니다. 그 억울함을 풀어주시는 하느님의 나라가 속히 올 것을 믿는, 이 세상에 집착 없이 의연한 믿음!

우리에게 주님은 물으십니다. “과연 사람의 아들이 다시 올 때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자, 우리가 대답해 봅시다. 우리의 믿음은 과연 하느님의 나라를 진실로 원합니까? 어떤 하느님의 나라입니까? 죽은 후에 또는 돈을 많이 벌어서 누릴 수 있는 사철 온화한 기후에, 풍성한 과일나무, 금은보석이 넘쳐나는 이상향이 하느님나라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품에서 모든 이의 눈에서 눈물이 씻겨지는 세상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과연 땀과 눈물을 흘리며 이 세상을 살아갑니까? 다른 이의 눈물을 보며 간절히 하느님의 나라를 기원합니까? 그저 대충 사는 일에 만족하지 않습니까? 우리 주위에 억울한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그저 팔자가 기구하구나, 재수가 없는 거지, 사는 게 그저 그런거지 하며 무관심하지 않습니까?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하는” 까닭은 우리 욕망을 성취하려는 동기에서가 아닙니다. 바로 억울한 이들의 억울함이 모두 풀어지는 세상, 그래서 억울함을 당한 이와 억울한 일을 행한 이가 서로 화해하고 용서하고 하나가 되는 그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서 입니다.

저와 사랑하는 우리 교우님 모두 이 ‘믿음’으로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않는 신앙생활이 되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간절히 기원합니다.* (임종호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