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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야기- 신앙체험의 정리와 반성/성공회이야기

[옮김] 사목단상 - 구균하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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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균하 신부님의 페북에서 옮겨둡니다.








 

해가 그립다. 누군가의 바람과 상관없이 구름 위에 분명 해가 있다. 더위. 후덥지근하고 끈적거리는 열기. 

 

병원에 입원하신 교우를 찾아 뵈었다. 두 무릎 모두 수술을 하신 70대다. 벌써 지난 주에 수술하셨는데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으셨단다. 오히려 뒤늦게 찾아간 신부에게 바쁜데 오시게 해서 죄송하단다. 인사말이라 여기면서도 오늘따라 머릿속을 맴돈다. 돌아오는 길에 떠오른 생각들.

 

나쁜사람. 바쁜사람.

얼마 전 개그 프로그램의 한 꼭지를 보았다. 경찰서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범죄의 확증을 가지고 취조를 하던 형사는 용의자로 잡혀온 사람의 사정을 들으며 자신들이 확증하는 증거들이 사실의 일부분, 그것도 왜곡된 사실이란 사실에 괴로워하며 용의자를 범인으로 몰아세우려는 이들을 향해 연신 '나쁜 사람'이라 절규...한다. 개그는 개그일 뿐이라지만 보고 난 뒤 내게 남은 건 웃음이나 유쾌함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실이란 여러 요인들의 조합과 특정한 관점이 만들어낸 해석일 뿐인지도 모른다는 물음표였다.

 

많이 바쁘시지요?

신부들은 언젠가부터 바쁜 사람이 되었다. 주변 사람들도 신부를 만나면 첫마디가 "많이 바쁘시지요?"라고 묻는다. 이렇게 묻는 사람이 신부와 잠시 대화를 나누고자 하는 뜻을 알기에 당연히 그와 만난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나도 모르게 스스로 바쁜 사람임을 자처하고 있었다. 너무 오래되어 언제부터였는지 알 수 없어서 더 당혹스럽다.

 

현대인들은 모두 바쁘다.

어느 누군가가 바쁘지 않을까. 유치원에 갈 나이만 되면 하루동안 해야 할 일이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인 것 같다. 모두가 바쁘기에 "바쁘시지요?"라고 묻는 한 마디는 "안녕하세요?"정도의 의미일지도 모른다. 바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관점으로 어떤 요인들을 중심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바쁘다는 말이 담고 있은 의미는 달라진다. 개그의 한 꼭지처럼. 사목자라면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가?
 
 
단순화를 넘어 중독으로
 
2년쯤 전인가 보다. '피로사회'라는 작은 책을 읽었다. 많은 이야기들, 생각할 거리들을 담고 있는 책이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 책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이렇게 표현하는 것도 가능한 듯 싶다. "인간은 복잡한 관계와 무수히 많은 요인들로 이루어진 삶을 살아간다. 그렇기에 인간은 단순화 될 수 없다. 한 가지 관점으로 삶을 해석하고 그 관점에 맞게 삶을 질서지우고 살아가는 것은 인간답지 못한 삶이다. 삶의 여러 결들을 한 덩어리로 묶어 단순화시킴으로 인한 중독된 상태를 벗어나야 한다." 인간인 우리가 다양하게 경험해야 할 삶을 현대에 와서는 바쁨이라는 상태로 단순화되었다. 놀이나 휴식 역시 일하듯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적은 없는가? 그런면에서 단순화를 넘어 이미 바쁨에 중독된 상태임에 분명하다. 중독은 스스로 중독인지 알 수 없게 만든다.
 
 
사목자로 산다는 것
 
솔직히 말해서 사목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서품 10년이 넘은 마당에 아무것도 몰라서 모른다고 하는 말은 아니다. 누군가 정치가 생물이라고 했지만 사목이 진정 생물이기에 어떤 한가지로 규정될 수 없어서 하는 말이다. 개중엔 자신의 경험을 조합하여 만든 사실의 일부분을 붙들고 도사인척 하는 이들 탓에 다수의 고민하는 사목자들이 함량부족처럼 보인다는게 안타깝다. 한편에선 많은 이들이 말하는 사목에서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단지 바쁨에 중독되는 것이 사목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렇게 비뚤게 듣는 나 자신이 문제일 수 있지만. 어쩌면 사목을 구체적인 개인의 활동이며 자신의 일로 이해하고 있어서인지 모른다. 그리스도께서 수행하시던 사명을 이어 받았다는 사실. 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해야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어느틈에 하느님의 일이라는 제목만 붙은 나의 일을 하고있지는 않는가? 돌아볼 일이다. 열심한 이들이라면 더욱 돌아볼 일이다.
 
 
누가 제 이웃입니까?
 
지난 주일 복음말씀이다. 이웃은 현실이란 말로 바꿀 수 있다. 그러면 질문은 "나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나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비약일런지 몰라도 대략 이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 아니 질문했던 이의 답을 빌어 바꾸어보면 "지금 나와 만나는 사람과 사건과 사물들이 나의 현실이고 있는 그대로 살피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돌보며 살아야 한다" 정도가 아닐까? 하지만 참 어렵다. 강정마을, 4대강, 밀양, 그리고 가장 가까이 대한문 앞...... 아니 그보다 내가 몸담고 있는 나를 불러준 주님의 교회! 이 곳!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진다. 차라리 바쁨에 중독되어 살아가는 편이 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멀거린다. 모진 현실. 피하지 말라는 주님의 가르침. 멀쩡히 보고 지나친 이들을 향해 손가락질 할 수 없는 내 자신. 하느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여 ,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최근 부쩍 우울했었다. 원인모른 우울감이라 내심 걱정스러웠다. 삶의 미세한 갈라진 틈들이 그 원인이었구나 싶다. 조금은 긴 호흡을 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