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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야기- 신앙체험의 정리와 반성/성공회이야기

[옮김] 평택향토사이야기 <성공회/ 한국사회에 희망을 심다>

 

 

▲ 현덕 구진개교회(현 대안리교회) 축성 직 후 교인들(193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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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한국사회에 희망을 심다

 

1.개항기의 개신교는 근대적 인간으로 거듭나는 통로

19세기 후반 제국주의 침략의 마수(魔手)가 한반도까지 덮쳤다. 열강의 침략 앞에서 우리민족은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것인가’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서유럽의 사회진화론에 영향을 받은 진보적 지식인들은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근대화(서구화)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대안이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근대화 방식에서도 정부 측 고위관료들은 중국과 같은 온건한 개혁을 지향했지만, 젊은 지식인들은 일본의 메이지유신과 같은 급격한 변화를 원했다.

개항기 개신교(改新敎)는 서양사상, 서양문화의 밑바탕으로 인식되었다. 당시만 해도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구태를 벋어나 근대적 지식인으로 거듭나는 것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진보적 지식인들, 세상 물정에 밝은 상인, 천민들이 앞 다투어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그 가운데는 조선왕조에서 관료를 지냈던 이상재나 남궁억, 윤치호도 있었고, 이승만, 서재필, 안창호, 신채호, 그리고 대상인이었던 이승훈과 백정이었던 박성춘도 있었다. 기독교를 수용했던 지식인들이 독립협회나 신민회같은 조직을 이끌고 사회운동의 중심에 서면서 낮 설기만 했던 기독교가 일반인들에게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하였다. 개신교 수용 초기 교육과 의료, 복지사업에 치중했던 선교사들의 활동이나, 각 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주일학교 운동도 개신교에 대한 이미지를 개선하고 민중들의 근대의식 성장에 기여하였다.

 

2.성공회는 영국국교회가 기원이다

기독교에는 로마 가톨릭, 그리스정교회, 개신교(프로테스탄트)와 같은 종파가 있다. 로마가톨릭과 그리스정교회는 출발은 예수로부터 시작하였지만 로마제국이 동․서로 갈라지면서 분리된 종파다. 개신교는 500여 년 전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으로 나타난 기독교계의 개혁세력이다. 성공회는 기독교라는 관점에서는 세 교파와 같으면서도 교리나 예배형식이 개신교적 요소와 가톨릭적 요소가 뒤섞인 새로운 기독교다.

성공회는 1534년을 기원으로 한다. 1534년 영국 국왕 헨리 8세가 재혼 문제로 로마 교황과 갈등을 빚다가 영국교회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시작된 것이 성공회(영국 국교회)다. 대한 성공회는 1887년 2월 데이비스가 한국선교사를 자원하고, 1889년 11월 코프 주교가 내한하면서 선교가 시작되었다. 코프주교의 초기 선교활동은 서울, 인천, 강화도가 중심이었다. 서울 정동과 낙동에는 선교본부가 건립되었고, 1890년 12월에는 정동의 예배처소를 성공회 장림성당으로 명명하고 첫 미사를 드렸다. 같은 해에는 인천에 성 미카엘 성당, 1893년에는 강화도에 ‘성 니콜라스회당(강화읍 성당)’이 건립되었다.

경기남부지역은 대한성공회의 네 번째 선교지였다. 1904년부터 시작된 경기남부 선교는 1905년에 결실을 맺어 수원에 ‘성 스테판 성당’이 건립되었다. 당시 경기남부지역 선교책임은 브라이들 신부였다. 브라이들은 수원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평택과 천안, 아산 일대의 선교를 김우일과 구세실신부에게 맡겼다. 결과 1906년 팽성읍 객사리에 성공회 ‘성 요한 교회’가 설립되었다. 1908년에는 진위면 견산리 산직말에 ‘성 베드로 성당’이 설립되었고, 같은 해 칠원2동 새말에도 성공회 성 바나바교회가 설립되었다. 1909년에는 진위면 봉남리에 ‘성모마리아교회’, 청북면 덕우리에 성공회 ‘덕우리교회’, 1934년에는 성공회 ‘안중교회’, 1936년에는 성공회 구진교회(현 대안리교회)가 설립되었다.

 

3)토착화를 위해 힘써 노력하다

대한성공회는 기독교 중에서도 토착화에 성공한 대표적인 종파다. 서양의 종교와 문화는 옳고 그 밖의 사상과 종교는 틀리다는 의식이 팽배했던 근대 초기부터 한국문화와의 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성공회의 토착화 노력은 건축에서 발견할 수 있다. 초기 가톨릭이나 개신교의 건축은 서양의 고딕양식이나 바실리카양식, 르네상스양식을 전적으로 받아들였는데 비해서, 성공회 건축물들은 대부분 한옥양식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한옥양식의 대표적인 교회로는 성공회 강화성당을 꼽지만, 평택지역에 건축된 객사리 성 요한교회, 덕우리교회, 안중교회, 현덕면 대안리 구진교회 등도 한옥형태에 바실리카양식의 내부를 갖춘 전형적인 한국형 교회였다.

평택지역에 들어온 성공회 교회는 근대교육을 통하여 평택지역에 희망을 씨앗을 뿌렸다. 교육선교의 뿌리는 성공회 강화교회지만 평택지역에 설립된 교회들도 강화교회를 모델로 하여 선교 초기부터 교육선교에 힘을 쏟았다. 근대학교를 설립한 최초의 교회는 팽성읍 객사리 성 요한교회였다. 성 요한교회를 설립한 사람은 칠원동 출신의 김인순 전도사였다. 김인순 전도사는 성공회 팽성교회 교우였던 강태분(2006년, 86세)씨의 친정어머니 외갓집 대청마루에서 창립예배를 드린 뒤 영국에서 건너온 수녀 3명과 함께 선교활동을 펼쳤다. 1911년 구세실 신부가 부임한 뒤에는 교회 안에 근대교육기관인 신명강습소를 설립하였다. 신명강습소는 나중에 진명학교로 교명을 바꿨는데, 팽성읍지역에 근대교육기관이 전무하던 시절 유일한 근대교육기관이었다. 1928년에는 평택지역 최초로 부용유아원을 개원하였고, 1936년에는 박병무신부의 주도로 교회가 신축되었다. 신축된 교회는 강화읍 교회처럼 전통한옥 형태였으며 중앙에 남녀 내외벽을 설치한 점이 특징이었다.

 

4.근대교육과 복지사업으로 희망을 심다

평택지역 성공회 교회의 발전과정에서 진위면 견산리 산직말의 성 베드로교회와 성공회 안중교회, 그리고 객사리 성 요한교회의 초대 교역자 김인순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성 베드로교회의 설립자는 안성시 보개면 출신의 전도사 김현석(아타나시오)이었다. 김현석은 십자가를 등에 지고 다니며 선교활동을 하였는데, 그의 특이한 복장과 열정적인 선교로 많은 신자들이 입교하였다.

성공회 안중교회의 모태는 안중읍 덕우리교회였다. 덕우리교회는 1909년 경 설립되었고, 1927년 이후 이택화의 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택화는 1934년 서평택지역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하던 안중읍에 성공회 안중교회를 설립하였고 이듬 해 박명무신부를 교역자로 모셨다. 1936년에는 어항으로 유명하였던 현덕면 대안리 구진개에 성공회 구진교회, 서탄면 사리에 성공회 성 힐다교회를 개척하였다. 이택화와 함께 안중교회 발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박병무(어거스틴)신부다. 박병무는 성직자가 부족했던 일제강점기 객사리 성 요한교회와 안중교회를 오가며 목회하였고, 해방 후에는 서평택지역에 중등교육기관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이택화의 둘째 아들 이도응과 박재필 등 지역유지들의 도움을 받아 안중고등공민학교(현 안중중․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한국전쟁 뒤에는 전쟁고아들을 보듬기 위해 안중고아원을 설립하였고, 고아들과 빈민자녀들의 자립갱생을 위해 목공강습소를 설립하였다.

객사리 성 요한교회를 설립한 김인순은 칠원2동 새말이 고향이었다. 김인순이 언제 입교를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906년 객사리 성 요한교회가 설립될 때 담임교역자로 부임한 것을 보면 브라이들 선교사가 경기남부지역 선교를 시작한 1904년 전후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성 요한교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하던 김인순은 1908년 고향마을인 칠원2동 새말에 성 바나바 교회와 부설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그 뒤의 행적은 정확하지 않지만 1928년 객사리 성 요한교회 부설 부용유아원 설립을 주도하였다는 것을 보면, 평생을 선교와 근대교육에 바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평택지역 성공회 교회는 성공회 팽성교회(성 요한교회), 안중교회, 대안리교회(구진교회), 평택교회 뿐이다. 한옥양식의 옛 건축을 유지하고 있는 교회도 현덕면의 대안리교회밖에 없다. 김현석이 열정을 바쳐 세웠던 산직말의 성 베드로교회, 김인순이 설립한 성 바나바교회, 덕우리교회, 봉남리의 성모마리아교회, 서탄면 사리의 성 힐다교회는 일제 말의 박해와 한국전쟁의 영향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개항기 평택지역에 근대의식을 전파하였고,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뒤의 절망적 상황에서 근대교육으로 희망을 싹틔웠던 숭고한 전통조차 계승하고 있는 교회가 많지 않다. 다만 안중교회만이 과거 유산을 발판삼아 노인복지에 힘을 쏟고 있으며, 평택교회가 장학회를 통한 인재육성과 빈민구제에 힘을 쏟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라고 할 수 있다. (2013.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