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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야기- 신앙체험의 정리와 반성/성공회이야기

평신도의 입장에서 보는 교회와 선교


                              

                         평신도의 입장에서 보는 교회와 선교

                                  
            - 우리가 교회를 이루어 예배하고 선교하는 일이 곧 구원입니다


1. 세 가지 물음

우리는 본교회 교인이고 성공회 신자이며 그리스도교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성공회라는 교파에 속하여, 거주하는 지역의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 가지 물음을 던질 수 있습니다.

첫째, 다른 성공회 본교회에 비해 주교좌성당이 어떤 자랑거리가 있을까요? “성당건물이 아름답다, 전례가 아름답다, 가족적인 분위기다” 등의 답이 가능하겠지요.
둘째, 다른 개신교나 천주교에 비해 성공회가 좋은 점은 무엇인가요? “열린 교회다, 관용적인 교회다, 말씀과 전례가 조화를 이룬다, 간섭이 적고 자유롭다” 등의 답이 있겠습니다.
셋째, 무종교인이나 타종교인에 비해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지는 자부심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 성령, 영원한 생명, 하느님 나라, 구원” 등의 개념이 말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세 가지 물음에 대한 답들이 서로 내용적인 연관을 긴밀히 가지고 있습니까? 복음, 곧 하느님 나라의 소식과 일(사역)을 위해서 성공회는 어떤 특성으로 봉사하며 그 성공회의 장점이 주교좌성당에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물음은 동시에 주교좌성당의 장점이 어떻게 성공회의 특성을 이루며 그 성공회의 장점이 또 어떻게 복음을 실현하는데 쓰임 받는가를 묻는 일이기도 합니다. 주교좌성당교우로서의 자랑과 성공회교인으로서의 긍지와 그리스도교인으로서의 기쁨이 내용적으로 깊이 이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새로운 사람이 성공회 교인이 되고자 대성당을 찾아옵니다. 주교좌성당의 성전건물이나 전례의 아름다움에 반했을 수 있습니다. 성공회 교회가 보여주는 교회다운 건전하고 건강한 이미지가 좋았을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통해 구원받은 삶을 살고자 하는 동기가 분명할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이제 몇 년 동안 주교좌성당에서 생활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게 될 것입니다. 주교좌성당의 성전건물과 전례의 아름다움에 탄복하며 점차 성전과 예전에 익숙하게 될 것입니다. 별로 간섭 없는 교회생활도 편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성공회에 대해 가졌던 이미지를 실제로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과연 이 교회공동체가 새로운 사람들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배려하는가? 정말 다른 생각, 다른 경험, 다른 성향을 가진 이들에 대해 너그럽고 이해하려 하는가? 정말 성경을 열심히 읽는 신자들인가? 정말 영적으로 참되게 전례를 바치는 교우들인가? 공번된 교회의 신자로서 다른 형제교회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깊이 배우며 그 기준으로 자신의 교회, 곧 주교좌성당을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정말 구원의 확신과 기쁨이 말씀과 전례를 통해 표현되고 있는가?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전하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명이 활발한 선교활동을 통해 펼쳐지고 있는가? 세상을 향해 들려져야 하는 예언자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가?

주교좌성당 신자공동체가 복음적인 기준으로 도와주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더 이상 그리스도교 신자로 자라나지 못할 것입니다. 주교좌성당이 성공회교회로서의 특성을 분명히 전해주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또한 성공회 신자로 계속 남을  필요를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처음 느낀 성전건물과 전례가 주는 감동이 지속되는 동안 이 사람은 주교좌성당의 신자로 남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이 참으로 진지한 신앙인이라면 점차 그렇게 단순히 주교좌성당의 신자로 남는 일이 별로 신앙적인 의미가 깊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성공회 신자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계속 성숙하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또 다른 목마름을 안고서 처음 찾아 올 때처럼 조용히 주교좌성당을 떠나버릴 가능성이 큽니다.

새신자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일생을 주교좌성당의 교우로 지내신 분들도 같은 물음을 스스로 던져보시면 유익할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대성당 자랑의 내용은  성공회의 장점을 얼마나 담아내고 실현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내세우는 성공회 자랑의 내용은 복음의 능력, 선교의 사명을 얼마나 담아내고 실현하고 있는 것일까? 성전건물과 예전이 아름답다, 가족적인 분위기이다, 간섭없이 자유롭고 편하다 등의 쉽게 공감되는 이유들이 과연 주교좌성당이 성공회교회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 일에 얼마나 본질적인 요소가 되는 것일까?”


2. 구원 - 교회를 이루는 일

신앙생활을 왜 하는가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답은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입니다. 물론 하느님을 잘 섬기고 기도를 바쳐서 이런저런 축복을 받고, 곤란과 역경을 벗어나 소원을 이루고자 하는 동기는 내세우지 않아도 이미 자명하게 전제되어 있습니다. 많은 이유 가운데 그래도 영적인 것에 가까운 느낌을 주기 때문에 “마음의 평화”라는 답이 선호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에서 “마음의 평안”은 우리가 죄와 죽음과 고통에서 구원받은 결과이지 그 자체가 추구되는 목적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로서 좀 더 좋은 답은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이 “구원”에 관하여 좀 더 깊은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보통 우리는 신앙생활을 “내가 교회에 나가면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로 생각합니다. “교회에 나가면”이라는 말 대신에 “예수님을 믿으면”, “믿음이 좋으면”, “선행을 쌓으면” 등으로 바꿔 표현할 수 있겠지만 좌우간 그것을 조건으로 하여 이른바 “구원”을 전해 받거나 보장 받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때에 교회도 구원도 우리와 거리를 두고 존재하는 객관적인 실체처럼 여겨집니다. 그런데 평범하고 무난해 보이는 이런 이해가 우리 신앙생활에 몇 가지 혼란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지 않나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우선 문제가 되는 것은 믿음의 주체가 “나”인 것처럼 생각되는 일입니다. 결국 “내가 어떻게 되느냐”가 제일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여도, 아니 열심히 할수록 나 중심의 이기적인 마음이 사라지기 어렵습니다. 자칫하면 내 판단에 의해 내가 원하는 구원이 내게 주어질 것 같지 않으면 신앙도 바꾸고 교회도 바꾸고 그리스도교도 떠나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믿음의 주체가 우리가 아니라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이시라고 힘주어 가르치는 것입니다.

다음 문제는 교회에 나가는 일을 무슨 조건을 충족하는 일처럼 생각하는 점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에 나가는 일 또는 예수를 믿는 일을 과연 얼마나 충실히 해야 확실히 구원을 받을 자격을 갖추게 되는가에 관심하게 됩니다. 이것을 확인하여 보장받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 틈을 타서 온갖 사이비, 이단들이 유혹합니다. “그렇게 대충하면 구원이 없어”하고 위협하는 집단도 있고, 반대로 “그렇게 힘들게 안해도 돼” 하며 값싼 조건을 내거는 집단도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구원을 밖에서 주어지는 천국입장권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되면 신앙생활의 목적을 “자신의 변화와 성장과 성숙”에 두지 못합니다. 그저 영험한 종교 지도자를 통해서 가장 확실한 루트로 구원을 보장받는 것이 중요해집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여러분 안에 그리스도가 형성될 때 까지 나는 또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겠습니다.” 이렇게 외치는 바울로 사도의 고백 같은 것을 도통 이해하지 못하는 신자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교우들께 이렇게 제안을 드립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우리가 교회를 이루는 일이 구원이다!”는 의미로 이해하시면 좋겠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교회를 다니면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와 “우리가 교회를 이루는 일이 구원이다”라는 의미의 차이를 이해하신다면 참으로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시게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좀 더 분명한 설명을 위해서 교회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교회는 성전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같은 생각이나 경향을 가진 이들의 동호회 모임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 안에 성직자 및 수도자와 평신도로 구성된 조직이나 제도가 아닙니다. 교회는 저 홀로 독립된 실체가 아닙니다. 교회의 위치는 삼위일체 하느님과 세상 사이에서,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합니다.

교회는 죄악으로 가득하여 멸망할 이 세상으로부터 탈출하여 올라타야 하는 구원의 방주(方舟)가 아닙니다. 구원의 문제를 교회에 다녀야만 죽은 후에 영혼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이해하는 것은 무척 좁은 이해입니다. 구원의 문제는 우리를 포함한 이 세상과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회복되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모시고, 피조물로서 하느님과의 친교를 이루는” 이 올바른 관계가 깨어진 상태를 일컬어 성경은 “죄”라고 합니다. “죄”가 상습적이 되고 구조화 된 것이 “악”입니다. “악”은 세력을 이루어 세상에 대해 “죽음의 권세”를 가지는 바 이것이 이 세상의 온갖 고통과 불행의 원인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죄와 악과 죽음을 이기게 하셨습니다. 십자가 사건과 부활사건이 그 승리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복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이것이 복음이 전하는 구원의 내용입니다. 바울로 사도가 “하느님의 의(義)”(개역성경),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공동번역)”이라고 표현한 이 구원을 마르코복음과 루가복음은 “하느님의 나라”라고 표현합니다. 이 피조된 세상이 창조주 하느님의 다스림 아래로 돌아가고, 구원자 하느님의 완전한 주권적 통치를 받는 상태를 이루는 것이 “하느님 나라”의 의미입니다. 이 하느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땅에 시작되었고 계속 되고 장차 완성되리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마태오복음은 유대인들의 표현법에 따라 “하느님나라” 대신에 “하늘나라”라고 표현합니다. 요한복음은 이것을 “영원한 생명”이라고 표현하는데 우리 마음, 우리 영혼에 이루어진 “하느님나라”라는 의미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 하느님나라를 이 세상에 이루시기 위해, 하느님의 다스림 아래로  이 세상을 이끌어 구원하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택하여 부르시고 세우신 모임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성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살피면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 입니다. 우리 각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느님을 떠나 살던 세상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 응답하여 교회에 속하는 일이 바로 하느님의 자녀,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일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살피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리 각 사람은 그 지체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하느님나라를 위한 그리스도의 남은 사역을 이어가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그것을 “선교”라고 합니다. 우리 각자는 지체를 이루기 때문에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를 귀하게 대해야 합니다. 대체할 수 있는 조직원이 아니라 한 몸을 이룬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협조자 성령님과의 관계에서 살피면 교회는 바로 “성령의 공동체”입니다. 우리 각 사람은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령의 전입니다. 교회건물이 아니라 우리가 성전입니다. 교회는 성령강림을 통해 실체화 되었습니다. 성령의 가장 큰 은사는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교회는 실제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교회는 오늘도 소유와 파벌과 장벽을 뛰어넘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사탄을 거절하고, 믿음을 고백하고, 사랑의 새계명을 약속하며 우리는 세례를 통해 교회에 속하게 됩니다. 조직에 소속되는 차원이 아니라 우리가 교회를 이루는 차원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는 것이 구원을 받는 조건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례를 통하여 교회의 일원이 되는 일, 곧 우리가 교회를 이루는 일이 바로 구원의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가 구원의 성사인 것이고, 세례 받은 이를 구원받았다고 표현하는 것이지요. 세례받은 이는 교회의 지체를 이루며 이미 구원을 받았고 성령을 받았습니다. 다시 “구원의 확신이 있느냐”고 시비하고, 새삼 “성령을 받았냐”고 시비하는 이야기에 현혹될 필요가 없습니다.


3. 교회인 우리가 하는 일 - 예배와 선교

 
세상에서 부름을 받아 교회를 이루는 일이 구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교회 안에서 일생을 살아야 참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교회는 그 자체로 독립된 실체여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세상과의 사이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세상에 드러내는 일 곧 “예배”,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세상에 펼치는 일, 곧 “선교”를 감당함으로 의미를 가집니다. 교우들의 삶의 현장은 세상입니다. 그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아 모인 신자들의 모임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하느님을 부인하는 세상 가운에 살면서도 하느님께서 우리의 창조주요 구원자이심을 깨닫고 응답한 이들이 모인 것입니다. 교회를 뜻하는 “에클레시아”라는 희랍어는 “소집되어 모인 모임”을 뜻합니다. 모이지 않으면 신자가 아니고 교회도 아닙니다.  나 혼자 구원의 도리를 추구하면 충분하지 구태여 불완전한 인간들의 모임인 교회에 참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리스도교 신자일 수 없습니다. 교회공동체로 모이지 않으면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닙니다. 이름만 교적부에 올려놓고 도무지 모이는 일에 관심이 없다면 그는 네모난 동그라미가 있을 수 없듯 신자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일과 모임을 지키라는 강조는 신자에게 따로 부여되는 의무조항이 아닙니다. 신자의 본질 자체에 모이는 일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정상 주일예배나 모임에 결석할 수도 있지요. 그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그 마음이 문제입니다. 내가 참석하지 않고도 교회가 교회로 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은 여전히 교회를 건물이나 제도나 조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른 이해는 “내가 곧 교회”라는 것입니다. 내가 모이지 않으면 교회는 불완전하게 됩니다. 내가 떠나게 되면 교회는 피 흘리며 지체를 잃는 셈입니다. 내가 교회를 포기하면 성령께서 깊이 근심하고 상심하십니다.

교회를 이루어서 우리는 무엇을 합니까? 가장 중요한 일은 “예배”를 드리는 일입니다. 전례(Liturgy)라는 말의 어원은 “전체를 이루도록, 또는 전체를 위해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예배는 교회의 기능이라기보다는 교회의 본질입니다. 예배는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높이고 찬양 드리며 우리를 우리의 본분으로 확인하는 일입니다. 예배는 봉헌을 필요로 합니다. 봉헌은 하느님께서 지으신 이 세상이 마땅히 하느님의 것임을 선포하고 되돌려 드리며 감사하고 찬양하는 일입니다. 그 일은 바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통하여 시작됩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의 우리 삶을 통해서, 우리의 기쁨과 슬픔, 고통과 희망, 성공과 실패, 기원과 실천 모두를 제단으로 가지고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바쳐드리는 것입니다. 그 봉헌을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기쁘게 받으신다는 것, 성령께서 임재하시어 그 봉헌물의 가치를 변화시켜 우리를 위해 내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되게 하시어 다시금 우리에게 내어 주시고 먹여주시는 일이 성체성사의 본래 의미입니다. 화체설, 상징설 운운의 논의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성체성사로 말미암아 우리의 존재와 삶의 차원이 얼마나 “실제로 달라지느냐”가 중요합니다. 그 은총의 능력은 곧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되고, 세상으로 우리가 먼저 맛 본 하느님 나라의 경험을 가지고 가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는 우리가 세상을 하느님의 백성(자녀)으로, 그리스도의 몸(지체)으로, 성령의 공동체(사람)으로 살아감을 감사하고 기뻐하는 구원의 잔치가 됩니다.

그리고 신자들은 예배를 마치고 세상으로 흩어져 삶의 현장으로 돌아갑니다. 예배를 끝낸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예배의 연속이요 실현입니다. 세상 속에서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바쳐 드리는 “산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세상의 누룩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부름 받아 교회로 모이는 일”을 소명(召命)이라 하면 “세상으로 파견되어 보냄 받는 일”은 사명(使命)이라 합니다. 같은 내용이지만 방향의 차이입니다. 소명(召命)을 전하는 일을 전도(傳道)라고 하면, 사명(使命)을 함께 하는 일을 선교(宣敎)라 합니다. 역시 같은 내용을 방향의 차이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의 실질적인 주체는 부름받은 이들, 곧 평신도 교우들입니다. 교회 안에서 성직자, 수도자와의 관계에서 평신도가 숫자가 많고 헌금을 내기 때문에 힘이 있는 존재라는 게 아닙니다. 세상 속에 하느님의 나라를 드러내는 예배, 세상 속에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선교의 사명이 실상 평신도에게 맡겨진 것이기에 평신도의 자각과 헌신이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4.  인사말씀

다소 장황하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마음이 소박한 분들은 여전히 “그런 설명은 너무 복잡해요. 나는 다만 예수님 믿고 우리 교회를 다니며 행복하고 신앙생활 잘해서 복 받고 죽어서 천국 가기를 원하는 것 뿐인데...” 하실 지도 모릅니다. 그런 소망을 깍아내리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런 소망을 참으로 이루기 위해서 역시 신앙생활에 대한 이해를 "내가 교회를 다니면 구원을 받는다“는 내용으로부터 “우리가 교회를 이루는 것이 구원이다”는 내용으로 바꿀 필요가 있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교회를 다니는 식이 아니라 우리가 교회를 이루는 내용이 되면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거리감이나 틈이 없어지게 되고, 사탄이 그 틈을 타서 속이고 이용할 여지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온전한 은총과 축복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살아서부터 죽음 너머까지 풍성히 누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하략) 
(2008. 12. / 임종호신부)


* 지난 2008년 대림절에 주교좌성당에서 행한 신앙강연의 원고입니다. 어쩌면 이 강연이 끼친 영향이 제가 지난 2010년 2월에 주교좌성당의 보좌사제로  인사명령을 받게 된 계기 중의 하나일 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