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학이야기- 신앙체험의 정리와 반성/성공회이야기

[옮김]성공회신문 853호 사설; 신앙의 예법을 마련하자

 

 

[성공회신문 853호 사설] 

신앙의 예법(禮法)을 마련하자 

대한성공회 선교 125주년 기념에 분주한 9월말, 우리는 한국인 순교자들 축일, 추석 명절, 성미카엘과 모든 천사 축일과 더불어 대한성공회 창립 기념일을 맞는다. 이 축일들은 우리 생명과 신앙의 선조들의 보여준 삶의 태도를 기억하여 오늘 우리 삶에 되살리려는 깊은 뜻을 지닌다. 사람과 공동체에 대한 예()를 중요시한 우리 문화가 예배와 전례로 신앙을 훈련하는 그리스도교 전통과 만나는 지점이다. 이 점에서 예()와 예배로 수행하는 삶이야말로 세상을 향한 선교의 핵심이다.

우리 교회 현실을 보자. 성공회 신자와 신자, 성직자와 성직자, 성직자와 신자가 서로 만나면 어떻게 인사하는가? 어떤 말과 태도로 상대방에게 존경과 사랑을 표현하는가? 신자든 성직자든 나이나 서품 연수에 따라 스스로 윗사람이 되어 반말과 하대를 하지는 않는가? 교회에서 서로 부르는 호칭은 무엇이 좋을까? 세상 사람들이 성공회 사람들의 언행에서 성공회 사람임을 알아보는 표지는 무엇일까? 이런 일을 단지 친밀감 표현, 교양, 상식의 문제로 좁힐 수도 있으나 전례와 성사를 중시하는 교회는 이 문제를 신앙의 예법(禮法)”이라는 관점으로 살펴야 한다. 세상을 향한 선교의 품격은 신앙인의 삶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선교와 예법의 관계는 긴밀하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이웃을 형제자매로 깨닫고 사는 일에는 그에 알맞는 예법이 필요하다. 우리 교회가 전례를 중시하는 까닭은 하느님께 표하는 예의가 신앙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그 예의에 바탕을 두어 사람들 사이에서도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온 마음과 행동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일이 한가지로 통한다.

세상의 예법은 각자 자기중심의 태도로 남이 가진 힘과 지위를 계산하며 대처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복음의 예법은 하느님의 은총을 경험한 이들이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성직자들 사이의 상호존중에서 서품서열이 기준이 될까? 신자들 사이의 상호배려에서 나이, 입교연수(年數), 사회적 지위, 능력 등이 기준이 될까? 복음의 성찰과 신앙의 예법이 없으면 이런 물음에 세상의 관습을 반성 없이 적용시켜 오해와 착각을 낳는다.

우리가 성찬례에서 나누는 평화의 인사가 곧 일상에서 교우들이 서로 만나고, 또 세상에서 낯선 사람과 만날 때 나누는 인사가 되어야 한다. 일상의 삶에서 복음의 예법을 실천하는 일은 주님의 선교명령이다. 선교는 하느님을 믿으라는 선전이 아니다. 실제로 하느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삶의 새로운 예법을 보여주고 전하는 일이다.

전례의 정수인 성찬례의 성찬기도는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한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라!” 이 때 이 예를 행하라는 말씀은 이것을 행하라(Do this!), 이 일을 행하라"는 뜻을 좁혀 번역한 것이다. 제자들에게 성전 안의 제의로서만 아니라 이 세상의 먹고 마시는, 곧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님의 뜻을 드러내어 기억하라고 당부하시는 말씀이다.

교회는 전례의 법이 삶의 예법으로 잘 연결되도록 살피고 다듬어야 한다. 관구와 교구의 전례위원회에서 하루 빨리 성공회 예법을 연구하여 정리하기를 기대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자기 신념을 내세우는 믿음이 아니라, 사랑으로 표현하고 실천하는 믿음이 중요하다.(갈라 5:6 참조) 성공회의 여러 훌륭한 전통과 지향이 명분에 머물지 않아야 한다. 신자와 성직자들이 신앙생활 안에서 몸으로 익히고 몸으로 실천해야 한다. 전례와 선교에 명실상부한 성공회가 되려면 성공회의 예법 마련은 절실한 과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