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문화의 대세가 SNS로 넘어간 지 벌써 한참이다. 나는 이 블로그에 매일의 성찬례 성서정과를 옮기고 주일 본문에만 설교를 덧붙이는 정도로 운영한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글은 자주 못올린다. 많은 이들과 빠른 시간 안에 함께 하는 호흡이 딸리기 때문인데... 더 큰 이유는 역시 내공이 모자라는 때문이겠다.
140자로 표현하는 트윗으로 촌철살인의 통찰과 묵직한 교훈을 전하는 분들의 솜씨와 역량이 참 부럽다.
페이스북을 이용해서 좋은 글을 전하는 분들도 많다. 성공회 영등포교회에 출석하(고 계신 것으로 아)는 권복규 선생의 글은 내가 즐거이 읽고 새로이 배우는 내용이 많아 감사하다.
"강호가 넓다"는 무협지의 표현은... 나의 경험이 좁고 얕다는 뜻이다. 페이스북에서 "슬픈예수", "슬픈 공자", "슬픈 부처"를 주제로 글을 쓰는 세 분을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글을 올리시는 김근수, 이한우, 이광수 세 분은 서로 페친이다. 그 중 나는 신학적인 작업을 하시는 김근수 선생께 친구 삼아주시길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신학은 정직한 마음으로 상식적인 소통을 할 수 있어야 가장 유익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근수 선생은 이런 점에서 나를 깜짝 놀라게 하는 고수다.
나는 십수년전에 천주교의 정양모신부님께 한 학기 강의를 들으며 배웠고, 서공석신부님과 이제민신부님께는 글과 책을 통해 배우는 기쁨을 누렸다. 세 분 모두 신학을 전문신학자 수준으로 깊이 공부하신 분들로서 당신들이 배우고 생각한 바를 정직하고 쉽고 분명하게 교우들과 소통하려 애쓰시는 분들이다. 그런데 천재요 석학인 정양모신부님께서 한탄하시듯이 "한국천주교 이백만 넘는 신자 중에서 내가 전하는 말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이들이 한 이천명이나 될까?" 자문하시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이 분들이 교회와 복음에 관한 소신을 정직하게 밝히다가 바티칸과 바티칸과 연결된 교회 고위층으로부터 따가운 눈초리를 받게 된 일은 이미 알려진 바다.
나는 천주교 사제가 아니라 성공회 사제로서 성공회 특유의 관용적 태도, 곧 신학적 성찰에 대한 자유로운 허용의 분위기를 통해서 교우들과 나의 신학적인 이해를 나누고자 애써왔고, 그 결과로 지금은 부족하나마 나름 이 스승 신부님들의 견해를 일부 비판하고 일부 넘어서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을 깊이 감사한다.
천주교에 왜 이 분들의 후학이 활동하는 모습이 뚜렷하지 않은가, 가장 크고 안정된 교회 안에서 교우들을 관리하는^^ 신학에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과 아쉬움을 그간 정중규님이나 한상봉님 등의 활동을 통해서 달래오고 있었다. 오늘 김근수 이 분의 글을 보니 한 모금 생수를 마시듯 갈증이 해소되는 느낌이다.
그간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을 곧 책으로 묶어 내신다니 고마운 일이다. 우리 성공회에서도 이런 수준의 공부와 사랑이 있는 분들이 실상은 적지 않을 터인데 하루빨리 은둔을 끝내고 어지러운 강호에 빛이 되어주길 기대한다. 아래에 김근수님의 글 한편을 퍼서 옮긴다. 천주교의 내 세 분 스승 신부님을 이어가면서도 일면 뛰어 넘는 느낌이라 반갑고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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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jeonjugo.com/part/part_brd_view.asp?brd_tit=C&brd_type=04&part_brd_id=1009524
예수의 역사에 대해 쓰여진 책은 모두 3권이고 보통 복음 또는 복음서라 부른다. 편집으로는 마태오 마르코 루가 순서지만 실제로 마르코가 서기 70년 무렵 맨처음 쓰여지고 마태오와 루가는 80년경 쓰여진걸로 추측된다. 세 복음서는 서로 순서와 표현이 다르기도 하지만 예수의 역사를 기록하는 공통점이 있다. 1세기 말 집필 시기로 예상되는 예수 역사에 대한 묵상 서적인 요한복음은 성격이 조금 다르다. 바울 편지등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나머지 글과 구별하기 위해 이 4권을 통털어 4복음서라 부른다. 70년경부터 2세기초까지 쓰여진 4복음서와 23개 편지등 모두 27개 글모음을 신약성서라 부른다. 예수 역사인 4복음서를 ‘본문’이라 칭한다면 나머지 23개 글은 예수에 대한 ’해석’ 정...
바울과 베드로는 64년 로마화재때 네로 황제에 의해 처형된 것으로 미루어 4복음서를 구경하지 못한게 분명하다. 예수도 물론 4복음서를 읽어본 적 없다. 4복음서는 당시 예수 곁에서 제자들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글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가 만일 오늘 4복음서를 직접 읽는다면 고치고 보완하고 싶어할 구절은 과연 없을까. 단순한 흥미 이상의 심각한 신학적 질문이다.
4복음서는 왜 쓰여졌을까? 4복음서보다 먼저 쓰여진 바울 편지로 예수를 알기에 충분했을까? 바울 편지에서 예수의 역사는 불행하게도 송두리째 빠져 있다. 잃어버린 예수 역사를 되찾으려는 생각이 복음서 편찬을 낳았다. ‘예수 역사’ 없이 ‘예수 해석’ 없다. 해석이 역사를 억압할 수 없다. 바울 편지와 4복음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바울과 예수의 신학적 방향이 크게 다름을 금방 알 수 있다. 바울은 예수를 알리는데 위대한 업적을 분명 남겼지만 또한 예수를 신학적으로 크게 왜곡한 인물이다. 바울 편지에 근거하여 4복음서를 보기보다 4복음서에 기초하여 바울 편지를 보아야 한다. 그래야 바울의 공적과 잘못이 동시에 뚜렷하게 보인다.
성사(성예전)를 중시한 가톨릭은 마태오복음을 유난히 중시했고 개신교는 바울이 쓴 로마서에 지나치게 의존했다. 본격적인 성서연구는 이제 겨우 200년에 불과하다. 마르코복음이 지금 주요 연구대상이 된 것은 바로 성서연구 덕분이다. 마르코복음이 예수역사의 원전이라면 나머지 3복음서는 마르코에 대한 수정증보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니 예수를 알려면 우선 마르코에 집중해야 한다. 그리스도교 사상 최고 신학자는- 내 생각에- 바울,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루터, 칼빈이 아니라- 바로 마르코 복음 편집자이다.
성서가 본래 말하려는 뜻은 무엇일까?(성서신학) 성서를 우리 시대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나?(교의신학=조직신학) 독일 성서학자들은 성서연구에 탁월한 실력을 보이지만 우리 시대를 분석하는 눈이 아쉽게도 부족하다. 해방신학자들은 우리 시대를 꿰뚫는 눈을 가지고 있지만 성서신학에 대한 식견이 아쉽게도 모자란다. 성서신학과 해방신학이라는 두 눈으로 마르코를 통해 예수를 살펴보겠다. (무능하고 부족한 내 자신이 싫다. 공부 더 할걸...)
*서기(A.D= Anno Domini ‘주님의 해’)는 인류 역사를 그리스도교 중심으로 호칭하는 약어로서 고쳐져야 하겠다. 새로운 용어 BCE(Before Common Era 공통 기원)이 요즘 쓰이긴 한다. 아직 낯설지만 그래도 서기(AD)보다는 좀더 공정하다.
*개신교와 가톨릭이 4복음서를 호칭하는 데에도 여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이 글에선 그 아픔과 부끄러움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겠다. 현재 분열된 그리스도교의 모습은 분열된 인류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셈이다. 그리스도교가 정신 차리려면 아직 멀었는가.(마르코-마가 루가=누가)
되도록이면 객관적인 입장에서 적고자 하시는 작가님들의 마음이
전해져와 제 담벼락에 세분의 글을 소중하게 모시게 된 점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
역사책을 통해 접한 구약시대와 예수시대 그리고 중세시대까지의 역사적 사실들을 기준으로 이와 관계된 것을 보는 제 입장에서는 복음서의 여러 판본들의 존재와 이것들 중 버려지고 채택되는 과정에서의 취사선택과 그 주체의 문제, 각각의 복음서에서 말하는 내용들에 있어서의 불일치, 일관성이 결여된 서술방식등등에 관한 사항에 대해 들은바가 있어 성경의 절대성에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물론 반종교적 시각을 가진 사람들에 동조한 정도지요.. 후세의 기록이므로 약간의 오차가 있을수는 있겠지만 예수가 확실한 어떤 존재였고 언행이 명확했다면 세월이 흐른다하여 그 많은 사본들이 난립하고 서로 앞뒤가 안맞는 일이 있겠나하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예수 언행의 기록이라기보다는 예수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창조물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수메르와 이집트신화와 성서의 사건들이나 예수의 행적과 일치하는 부분도 많고 당시의 로마의 기록에도 거의 언급이 없는 것으로보아 심지어는 성경뿐 아니라 어떤 분의 존재 자체도 혹 그런것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하지요. 이거 굉장히 문제되는 발언인줄 알지만 제 말의 요지는 종교란 문화현상의 하나로 이해하고 있으며 이런 측면으로 해석한다면 애써서 종교를 부정하고 폄하하는 입장과 다른 위치에 설것이기에 심한 위의 표현은 제 생각의 과정중의 하나이다라는 말로 비켜가겠습니다....다른 말 쓰려고 했는데 삼천포로 빠지면서 헛다리 짚는 내용인거 같아 지울까 했습니다만 형님 글 열심히 읽고 성경도 읽어보고 다시 생각해보겠다는 약속으로 용서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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