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15일 (연중 2주일) 성서말씀
사무상 3:1-20
1 소년 사무엘은 엘리 밑에서 야훼를 섬기고 있었다. 그 때는 야훼께서 말씀도 자주 들려주시지 않았고 계시를 보여주시는 일도 드물었다. 2 엘리는 이미 눈이 어두워 앞을 잘 보지 못했다. 하루는 그가 자기의 자리에 누워 있고 3 사무엘은 하느님의 궤가 있는 야훼의 성전에서 자고 있었는데, 하느님의 등불이 꺼지기 전에 4 야훼께서 사무엘을 부르셨다. 사무엘은 "예." 하고 대답하면서 5 엘리에게 뛰어가 "부르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나는 너를 부른 일이 없다. 가서 자거라." 엘리의 이 말을 듣고 사무엘은 돌아와 자리에 누웠는데 6 야훼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셨다. 사무엘이 일어나 엘리에게 가서 "부르셨습니까?" 하고 물으니, 엘리는 "사무엘아, 나는 너를 부른 일이 없다. 가서 자거라." 하고 대답하였다. 7 야훼께서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나타나신 적이 없으셨고 사무엘은 아직 야훼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8 야훼께서 세 번째로 사무엘을 부르셨다. 그가 일어나 엘리에게 가서 "부르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제야 엘리는 야훼께서 소년 사무엘을 부르시는 줄 알아차리고 9 사무엘에게 "가서 누워 있어라. 그리고 다시 부르는 소리가 나거든, 이렇게 대답하여라. '야훼여, 말씀하십시오.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일러주었다. 사무엘은 돌아와 자기 자리에 누워 있었다.
10 그러자 야훼께서 거기에 나타나 서시어 아까처럼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셨다. 사무엘이 "야훼여, 말씀하십시오.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11 야훼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들어라. 내가 이제 이스라엘에서 무슨 일을 할 터인데, 듣는 사람마다 가슴이 내려앉으리라. 12 그 날이 오면, 내가 엘리와 그 집안을 두고 말한 일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루어지리라. 13 너에게 알려주거니와, 나는 엘리의 가문을 심판하여 끝내 벌하고야 말겠다. 그것은 제 자식들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을 알면서도 바로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14 그러므로 나는 엘리의 집안을 두고, 제물이나 예물을 소홀히 다룬 그 죄는 영영 용서해 주지 않으리라고 맹세하였다."
15 사무엘은 아침까지 누워 있다가 야훼의 성전 문들을 열었으나, 감히 밤에 보고 들은 것을 엘리에게 고하지 못하였다. 16 그러는데 엘리가 "얘, 사무엘아!" 하고 불렀다. 사무엘이 "예!" 하고 대답하자 17 엘리가 "무슨 말씀을 하시더냐? 나에게 숨기지 말고 말해 다오. 너에게 하신 말씀을 한마디라도 숨긴다면, 하느님께서는 너에게도 나에게 내리시는 벌 못지않은 큰 벌을 내리실 것이다." 하고 다그쳤다.
18 그래서 사무엘은 숨김없이 다 털어놓았다. 그 말을 듣고 엘리는 중얼거렸다. "야훼께서 하시는 일, 어련하시랴!"
19 사무엘이 자라는 동안 야훼께서 그와 함께 계시어, 그가 한 말은 모두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셨다. 20 그리하여 단에서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을 야훼께서 세우신 예언자로 받들게 되었다.
15 사무엘은 아침까지 누워 있다가 야훼의 성전 문들을 열었으나, 감히 밤에 보고 들은 것을 엘리에게 고하지 못하였다. 16 그러는데 엘리가 "얘, 사무엘아!" 하고 불렀다. 사무엘이 "예!" 하고 대답하자 17 엘리가 "무슨 말씀을 하시더냐? 나에게 숨기지 말고 말해 다오. 너에게 하신 말씀을 한마디라도 숨긴다면, 하느님께서는 너에게도 나에게 내리시는 벌 못지않은 큰 벌을 내리실 것이다." 하고 다그쳤다.
18 그래서 사무엘은 숨김없이 다 털어놓았다. 그 말을 듣고 엘리는 중얼거렸다. "야훼께서 하시는 일, 어련하시랴!"
19 사무엘이 자라는 동안 야훼께서 그와 함께 계시어, 그가 한 말은 모두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셨다. 20 그리하여 단에서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을 야훼께서 세우신 예언자로 받들게 되었다.
시편 139:1-6, 13-18
1,2 주여, 당신께서는 나를 환히 아시니: 내가 앉아도 아시고, 서 있어도 아십니다. ◯ 멀리 있어도, 당신은 내 생각을 꿰뚫어 보십니다.
3 걸어 갈 때나 누웠을 때나 환히 아시고, ◯ 내 모든 행실을 당신은 매양 아십니다.
4 내가 입을 벌리기도 전에 ◯ 무슨 소리 할지, 주께서는 다 아십니다.
5 앞뒤를 막으시고 ◯ 당신의 손 내 위에 있습니다.
6 그 지식은 놀라와 내 힘 미치지 않고 ◯ 그 높으심 아득하여 엄두도 아니납니다.
13 당신은 오장육부 만들어 주시고 ◯ 어머니 뱃속에 나를 빚어 주셨으니
14 내가 있다는 놀라움, 하신 일의 놀라움: 이 모든 신비들, 그저 당신께 감사합니다. ◯ 당신은 이 몸을 속속들이 다 아십니다.
15 은밀한 곳에서 내가 만들어질 때: 깊은 땅속에서 내가 꾸며질 때 ◯ 뼈 마디마디 당신께 숨겨진 것, 하나도 없었습니다.
16 내 형상이 생기기 전부터 당신 눈은 보고 계셨으며 ◯ 그 됨됨이를 모두 당신 책에 기록하셨고
✤나의 나날은 그 단 하루가 시작하기도 전에 ◯ 하루하루가 기록되고 정해졌습니다.
17 하느님, 당신의 생각은 너무 깊어 미칠 길 없고, ◯ 너무 많아 이루 다 헤아릴 길 없습니다.
18 세어 보면 모래보다 많고 ◯ 다 세었다 생각하면 또 있습니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1고린 6:12-20
12 누구나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자유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지 해서 다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과연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무엇에게도 얽매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13 또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것도 저것도 다 없애버리실 것입니다. 몸은 음행을 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몸을 돌보아주시는 분이십니다.
14 하느님께서 주님을 다시 살리셨으니 우리도 당신의 권능으로 다시 살려주실 것입니다.
15 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그런데 그리스도의 몸의 한 부분을 떼어서 창녀의 몸의 지체로 만들어서야 되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16 창녀와 관계를 하는 사람은 그 창녀와 한 몸이 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하느님께서 "두 사람이 한 몸이 되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17 그러나 주님과 합하는 사람은 주님과 영적으로 하나가 됩니다.
18 그러니 음행을 물리치십시오. 인간이 짓는 모든 딴 죄는 자기 몸 밖에서 일어나는 것이지만 음행하는 자는 제 몸에다 죄를 짓는 것입니다.
19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이 계시는 성전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20 하느님께서는 값을 치르고 여러분의 몸을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기 몸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시오.
요한 1:43-51
43 그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래아로 떠나가시려던 참에 필립보를 만나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부르셨다. 44 필립보는 베싸이다 출신으로 안드레아와 베드로와 한 고향 사람이다.
45 그가 나타나엘을 찾아가서 "우리는 모세의 율법서와 예언자들의 글에 기록되어 있는 분을 만났소. 그분은 요셉의 아들 예수인데 나자렛 사람이오." 하고 말하였다.
46 그러나 그는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고 물었다. 그래서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라고 권하였다.
47 예수께서는 나타나엘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보시고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조금도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48 나타나엘이 예수께 "어떻게 저를 아십니까?" 하고 물었다. "필립보가 너를 찾아가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시자 49 나타나엘은 "선생님, 선생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50 예수께서는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는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하시고 51 "정말 잘 들어두어라. 너희는 하늘이 열려 있는 것과 하느님의 천사들이 하늘과 사람의 아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우리 몸을 성령의 전으로 삼아 주셨나이다. 비옵나니, 우리가 성령의 은총으로 주님과 하나 되어 하느님의 영광을 온 세상에 드러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1>
어떻게 저를 아십니까? (요한 1:43-51)
신앙적으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떤 분들은 “무슨 소리냐? 중요한 것은 오직 예수가 누구신가 하는 물음이다” 하실 것입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누구신가 하는 내용은 어떤 사실 정보로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을 경험한 이들의 고백을 통해서입니다. 성경을 읽으며 제일 오해하기 쉬운 부분이 바로 이 점입니다. 성경이 하느님의 말씀이고 그 성경에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까닭이 사실 정보로 기록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모든 일들을 문자 그대로 사실 그대로 믿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믿으라고 하는 것은 성경의 문자적 사건이나 사실이 아니라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의 구세주이심입니다. 더 분명히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신뢰하고 주님으로 모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그 분의 사랑과 계획을 깨닫고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객관적인 인물로서 사실적인 존재로 환원시켜 이해하려는 시도가 오랫동안 있어 왔습니다. 결론적으로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임이 밝혀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모든 이야기들은 이미 사실 자체를 정확히 전하는 관심사가 아니라 그 분이 어떤 분이셨는가를 우리가 만나야 하는 인격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사건은 영계의 출입국관리소에서 통할 증명서를 영험한 이에게 확인받는 차원의 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예수님의 인격을 어떻게 경험하는가,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어떻게 고백하는가, 이 세상의 복잡하고 소란스런 상황 속에서 그 분의 은총과 진리가 어떻게 깨닫고 따르는가의 차원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회복된 존재”라는 답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사실정보로 알게 된 답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그 분의 가르침과 십자가의 사랑과 부활의 능력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현존을 경험하여 하게 되는 고백인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답은 이렇게 저렇게 규정하여 “너는 ~이다” 라고 명제화하여 표현할 수 없습니다. 신앙적으로 그런 규정은 오직 하느님 만이 가능합니다. 하느님 외에 그러한 규정은 모두 우상화의 일입니다. 우리는 다만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입니다. 관계가 사라지면 우리 존재도 무의미해집니다. 우리는 홀로 존재할 수 있는 신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관계 중에 가장 중요한 관계는 바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입니다.
현대인들은 자기 자신을 이 세상보다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 시대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너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다 소유할 수 있다. 모든 것을 다 지배할 수 있다.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다.” 소유와 능력과 지식의 가능성을 보여주며 우리더러 신이 되라고, "be gods" 하라는 유혹합니다. 그러나 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게다가 인간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관념에 불과합니다. 어떤 일부의 인간들이 그런 지식과 소유와 능력을 자랑하며 우리 위에 군림하면서 우리를 속이고 우리 모두의 운명을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갈 뿐입니다. 우리의 욕망과 두려움, 현세와 내세의 문제를 일거에 다 해결해줄 것처럼 구는 가짜 메시야를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가 하느님의 소유된 백성라는 것, "Be God's" 라는 당부를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나타나엘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어떻게 저를 아십니까?”
용기를 내어 우리도 주님께 이 질문을 해보시면 어떨까요?
우리가 하느님을 향하기 전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 전에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알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와 새로운 관계를 맺고자 하십니다. 그런 존재인 우리를 바울로 사도는 “우리 몸이 성령의 성전”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냅니다. 주님과 합하는 사람은 주님과 영적으로 하나가 된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은 그 분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전능자이시라는 사실 이상입니다. 예수님의 우리의 구원의 차원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오겠는가?”
그것은 나타나엘이 이해한 구원관의 반영입니다.
정치적인 해방자를 고대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는 유대인으로서의 정통성을 가져야하고 기적적인 능력과 정치적인 역량을 통해 많은 지지자들을 얻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타나엘에게 그의 존재를 꿰뚫어 감찰하시는 일종의 신통력을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네가 그리스도를 아는 것보다 내가 너를 아는 것이 먼저라는 말씀을 통해서 나타나엘의 구원관을 바꾸고 심화하는 단초가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에게 정말 중요한 차원을 약속하십니다.
“이제 하늘이 열려 있는 것과 하느님의 천사들이 하늘과 사람의 아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은 야곱이 베델에서 돌베개를 베고 자다 꿈에서 하늘에 닿는 층계에 천사가 오르내리는 것을 본 이야기(창세28:12)와 통합니다.
구원이 하늘로부터 온다는 것, 그것은 단순히 초자연적인, 묵시문학적인 구원을 뜻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은 구원의 차원을 하늘 곧 하느님의 육화로 말미암아 이 땅에 이루어지는 새로운 생명의 현실로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간의 끝으로 미루어지는 종말이 아니라 이 세상의 한 복판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되는 종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을 깨닫는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신앙의 근본적인 질문인 까닭은 그것이 결국 우리 존재의 근거를 우리 자신이 규정하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규정할 수 없는 존재인 “살아계신 하느님”과의 합일에서 찾으며 우리 자신을 “살아있는 물음” 그 자체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종교적인 노력은 우리가 신을 우리의 대상으로 전제하고 파악하고 규정하고 관계하는 방식으로 시작됩니다. 기도, 경전, 계율, 제의 등을 통해 화를 피하고 복을 구하는 노력입니다. 그러나 종교의 차원이 깊어질수록 신앙의 방향이 반대로 됩니다. 우리 자신이 신의 상대임을 깨닫고 우리가 어떻게 변화되는가가 중요한 신앙적 관심사가 됩니다. 기도, 경전, 계율, 제의 등이 모두 차원이 달라지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우리가 하느님을 아는 것 이전에 하느님이 우리를 아시기 때문에 성립하게 됩니다. 우리가 아는 것에 근거를 둔 신앙은 자칫 우리 욕망의 투사에 불과한 우상숭배로 빠질 위험이 큽니다. 우리를 아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하늘이 열리는 것과, 하늘과 땅의 소통을 깨닫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것은 신앙의 신비이고 그것이 성사(聖事)의 생활입니다.
“주님, 어떻게 저를 아셨습니까? 지금도 저를 알고 계시지요? 언제까지나 저를 알아주시지요?” 이렇게 묻고 그 대답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우리 기도의 내용으로 삼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란 바로 이렇게 진리로 전지(全知)하시고 은총으로 전능(全能)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이미 알고 계셨고, 지금도 알고 계시며, 장차도 다 알아주시리라는 진실에 근거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주님의 약속대로 “하늘이 열린 것을 보게 될 것이고,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깨달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통해 하느님의 관심, 하느님의 사역에 참여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생이란 하느님이 우리에 대하여 계획하시고 알고 계시고 사랑하시는 그런 삶을 사는 일입니다. 그런 삶이야말로 구원받은 우리의 존재요 정체성인 것입니다. ✠(2009.1.18)
<강론초록2>
하늘이 열려있는 것을 보는 믿음 (요한 1:43-51)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필립보와 나타나엘을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은 다른 복음서에도 많이 나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시몬과 안드레아를 부르시자 그들이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마르1:16-18)고 하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성경독자들이 예수님의 부르심과 제자들의 순종이 정말 이처럼 단순하고 돌연히 성립된 일인 것으로만 이해하면 그에 따라 우리가 신앙을 갖고 소명을 받는 일도 마치 우연이나 행운에 따라서 저절로 되지 않으면 안되는 일처럼 생각하게 될 우려도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바로 이런 오해가 없도록 보완 설명해주고자 하는 듯합니다. 즉, 메시아(구세주)를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이라야 주님의 존재를 의식하고 그 분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으며, 실제로 제자들도 그런 소망을 가진 상태에서 예수님께 “와서 함께 있어보는” 체험을 한 후에 온전히 제자가 될 수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처음에 전해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하며 냉소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 구세주를 간절히 기다리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뵙고 예수님이 이미 자신의 존재를 꿰뚫어 알고 계심에 대해 화들짝 놀라 믿음을 고백하는 나타나엘의 태도는 그가 바로 예수님 말씀대로 “정말 (메시아를 기다리는) 이스라엘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를 기다리던 그에게 정말 중요한 차원을 약속하십니다.
“이제 하늘이 열려 있는 것과 하느님의 천사들이 하늘과 사람의 아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제 하늘이 열려 있는 것과 하느님의 천사들이 하늘과 사람의 아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야곱이 베델에서 돌베개를 베고 자다 꿈에서 하늘에 닿는 층계에 천사가 오르내리는 것을 본 이야기(창세28:12)와 통합니다. “하늘”은 하느님의 질서를, “땅”은 인간들의 질서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인 동시에 온전한 인간으로서 이제 하늘의 질서와 땅의 질서를 조화시키시고 통일하시는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에게서 땅위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적만을 기대하며 자기들의 필요와 욕심을 채우려고 몰려드는 군중이 아닙니다. “이 땅 위에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사역을 깨닫고, 뒤따르는 제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구원과 영생의 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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