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초록/2012년도설교초록

2012년 11월 11일 (연중 32주일) 성서정과 및 강론초록

 

 

2012년 11월 11일 (연중 32주일) 녹 성서말씀 / 마틴 (투르의 주교, 수사, 397년)

 

룻기 3:1-5, 4:13-17

1 시어머니 나오미가 룻에게 말했다. "악아, 이젠 너도 행복을 누리며 살 보금자리가 있어야겠구나. 내가 그것을 마련해 주마. 그렇지 않느냐?
2 너는 보아즈 댁 아낙네들과 어울려 지냈지만 그분은 너도 알다시피 우리와는 친척이다. 바로 오늘 밤 그분은 타작 마당에서 보리를 까부를 것이다.
3 그러니 너는 목욕을 하고 향수를 바른 다음 장옷을 입고 그 댁 타작 마당에 내려가 보아라. 그분이 저녁 식사를 마치기까지는 눈치채이지 않도록 하여라.
4 그분이 잠자리에 들거든 그 잠자리를 잘 알아두었다가 살그머니 가서 그 발치께를 들치고, 거기 누워라. 그 다음에 네가 할 일은 그분이 일러줄 것이다."
5 "어머님 말씀대로 어김없이 하겠습니다." 룻은 이렇게 대답하고,
13 이렇게 보아즈는 룻을 맞아 아내로 삼고 한자리에 들었다. 야훼께서 점지해 주셔서 룻이 아들을 낳자,
14 아낙네들이 나오미에게 축하하여 말했다. "오늘 이처럼 당신 가문이 대를 이어 내려가게 해주셨으니 야훼께 찬양을 드립니다. 이제 이 아기의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기림을 받게 되기를 우리는 바랍니다.
15 당신을 그토록 사랑하는 며느리가 낳아준 아들, 아들 일곱보다 더한 며느리가 낳아준 아들이니, 이제 그가 당신에게 살 맛을 되돌려주고 노후를 공양해 줄 것입니다."
16 나오미는 그 아기를 받아 품에 안고 자기 자식으로 길렀다.
17 이웃 아낙네들은 "나오미가 아들을 보았구나!" 하며 그 아기에게 오벳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가 바로 다윗의 할아버지요, 이새의 아버지였다.

 

시편 127

1 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 집 짓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며
✤ 주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일이다.
2 이른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것도 ◯ 밤늦게야 잠자리에 드는 것도,
✤ 먹으려고 애쓰는 것도, 다 헛되고 헛되니 ◯주께서는 사랑하시는 자에게, 잘 때에도 배불리신다.
3 자식은 주님의 선물이며 ◯ 태중의 소생은 그가 주신 상급이다.
4 젊어서 낳은 자식은 ◯ 용사가 손에 든 화살과 같으니,
5 복되어라, 전통에 그런 화살을 채워 가진 자, ◯ 성문에서 원수들과 담판할 때 부끄러움 없으리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히브 9:24-28

24.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하늘의 참 성소를 본떠서 만든 지상의 성소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하느님 앞에 나타나시려고 바로 그 하늘의 성소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25. 대사제는 해마다 다른 짐승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야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번번이 당신 자신을 바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26. 그분이 몸을 여러 번 바쳐야 한다면 그분은 천지 창조 이후 여러 번 고난을 받으셨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분은 이 역사의 절정에 나타나셔서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심으로써 죄를 없이 하셨습니다.
27.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28. 그리스도께서도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의 죄를 없애주셨고 다시 나타나실 때에는 인간의 죄 때문에 다시 희생제물이 되시는 일이 없이 당신을 갈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실 것입니다.

 

마르 12:38-44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마태오 23:1-36; 루가 20:45-47)]
38 예수께서는 가르치시면서 이런 말씀도 하셨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기다란 예복을 걸치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39 회당에서는 가장 높은 자리를 찾으며 잔칫집에 가면 제일 윗자리에 앉으려 한다.
40 또한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오래 한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그만큼 더 엄한 벌을 받을 것이다."
[과부의 헌금 (루가 21:1-4)]
41 예수께서 헌금궤 맞은편에 앉아서 사람들이 헌금궤에 돈을 넣는 것을 바라보고 계셨다. 그 때 부자들은 여럿이 와서 많은 돈을 넣었는데
42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은 와서 겨우 렙톤 두 개를 넣었다. 이것은 동전 한 닢 값어치의 돈이었다.
43 그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은 돈을 헌금궤에 넣었다.
44 다른 사람들은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있는 것을 다 털어넣었으니 생활비를 모두 바친 셈이다."

 

<본기도> 주 하느님, 교만한 자를 내치시고 비천한 자를 높이시나이다. 비옵나니,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 우리의 삶을 봉헌하여, 주께서 큰 권능으로 다시 오실 때 그 영광에 참여하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1>

                                  온전한 봉헌을 이어가는 삶 (마르 12:38-44)

 

지난 주일을 추수감사주일, 교회설립 121주년 기념주일로 지키며 참된 감사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 삶의 일부가 아니라 우리 삶의 전부가 하느님의 은총임을 생각하며, 우리에게 허락된 모든 관계를 소중히 돌아보고, 삶의 결실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성경정과는 참된 봉헌에 대한 말씀입니다. 시어머니 나오미와 그의 하느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이방인 여인 룻의 일생은 그 자체로 온전한 봉헌입니다. 그의 봉헌된 삶은 큰 축복의 결실을 맺었습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이 하느님께 드려진 온전한 봉헌이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봉헌으로 인류는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서는 부유한 율법학자들의 태도를 가난한 과부의 태도와 대비시키며 온전한 봉헌의 의미를 생각하게 해줍니다. 하느님께 온 삶을 봉헌했다는 자처하는 율법학자들은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며” “은밀한 것이라도 모르시는 바 없으신” 하느님을 의식하고 살지 않습니다. 그저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고 존경받고 권위를 누리려고 겉모양으로 온갖 행세를 다하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과부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오래한다”고 비판하십니다.

곧 이어 예수님은 자기가 가진 것 전부인 동전 한 닢을 성전에 바친 가난한 과부를 보시며 “저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은 돈을 헌금궤에 넣었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실은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비록 적은 액수이지만 가진 것 모두를 드린 가난한 과부의 봉헌에는 당연히 하느님을 향한 그녀의 절대적인 헌신과 신뢰가 담겨 있습니다. 그 헌신과 신뢰를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동전 한 닢이 전 재산인 가난한 과부가 그것마저 성전에 바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라면 문제가 있습니다. 그녀의 진심과는 다른 차원에서, 그런 봉헌을 강요하는 냉혹한 율법학자들에게 깊은 반성이 필요하다는 통찰이기도 합니다.

세상 일은 모두 “일리(一理)”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설명과 변명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단순히 옳고 그름을 시비하는 일은 사실 유익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어떤 입장에 있느냐에 따라서 이미 결론적 판단을 가지고 있고 웬만해서는 아무리 설득해도 그 판단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 현대 심리학 연구의 결론입니다. 그런 점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나의 “일리 있음”만을 고집하지 않고 다른 이들의 입장도 동시에 충분히 돌아보며 이해하려는 태도를 갖는 일입니다. 이는 우리가 인간적으로 너그러워져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한 분 하느님 앞에 정직하고 신실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봉헌은 우리의 성취를 과시하는 일일 수 없고 우리의 처지를 무시한 강요일 수도 없습니다. 엄청난 봉헌을 드린다 해도 그 동기가 내가 잘난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면 그 자체로 이미 보상을 다 받은 것이지요. 비록 적더라도 거기에 감사와 찬양과 온전한 신뢰가 담겨있다면 그 봉헌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깊은 은총을 선물 받게 됩니다. 삶의 어려움과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도록 우리와 함께 해주시는 하느님을 생생하게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헌금의 원칙과 기준에 대해서 논란이 많습니다. 온갖 설명과 변명의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더욱 더 진솔한 믿음을 지킵시다. 우리가 봉헌을 할 때에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얼마를 드리는 지를 오직 예수님께서 지켜보신다” (마르12:41)는 것을 다만 기억합시다. 다른 이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 일생동안 우리의 마음을 담아 사랑과 감사의 봉헌을 이어가는 삶이 되기를 기원하고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