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5일 (연중 5주일) 성서말씀
/ 아가타 순교자 시실리 251년경
이사 40:21-31
/ 아가타 순교자 시실리 251년경
이사 40:21-31
21 너희는 모르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한 처음부터 너희 인간에게 알려진 것이 아니냐? 땅의 터가 잡힐 때부터 잘 알고 있던 일이 아니냐?
22 지구의 대기권 위에 앉아 계시는 이, 그의 앞에서 세상 주민은 메뚜기 같지 않느냐? 그는 이 하늘을 엷은 포목인 양 펴시고 사람 사는 천막인 양 쳐놓으셨다. 23 고위층 인사들을 없애버리시고 위정자들을 그 자취도 남겨두지 아니하신다. 24 나무를 심기가 무섭게, 씨를 뿌리기가 무섭게, 그루가 땅에 뿌리를 박기가 무섭게, 하느님께서 입김을 부시니 그것들은 말라버리고 불어오는 거센 바람에 검불처럼 날려가고 만다.
25 "내가 누구의 모습이라도 닮았다는 말이냐? 내가 누구와 같다는 말이냐?" 거룩하신 이께서 말씀하신다. 26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아라. 누가 저 별들을 창조하였느냐? 그 군대를 불러내시어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 점호하시는 이는 그분이시다. 힘이 세고 기력이 장사이신 그분의 부르심에 누가 빠질 수 있으랴?
27 야곱아, 네가 어찌 이런 말을 하느냐?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 이런 주장을 펴느냐? "야훼께서는 나의 고생길 같은 것은 관심도 두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내 권리 따위, 알은 체도 않으신다." 28 너희는 모르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야훼께서는 영원하신 하느님, 땅의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힘이 솟구쳐 피곤을 모르시고, 슬기가 무궁하신 분이시다. 29 힘이 빠진 사람에게 힘을 주시고 기진한 사람에게 기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30 청년들도 힘이 빠져 허덕이겠고 장정들도 비틀거리겠지만 31 야훼를 믿고 바라는 사람은 새 힘이 솟아나리라. 날개쳐 솟아오르는 독수리처럼 아무리 뛰어도 고단하지 아니하고 아무리 걸어도 지치지 아니하리라.
시편 147:1-11
1 알렐루야!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 노래 얼마나 좋으냐. ◯ 우리 하느님, 그 찬미 얼마나 부드러우냐.
2 주님은 예루살렘을 세우신 분, ◯ 흩어졌던 이스라엘을 모아들이시는 분,
3 상처 입은 마음을 고치시고 ◯ 터진 상처를 싸매 주시는 분,
4 별들의 수효를 헤아리시고 ◯ 낱낱이 이름을 붙여 주시는 분,
5 전능하신 우리의 주님 얼마나 크시냐. ◯그의 슬기 형용할 길 없어라.
6 주, 낮은 자는 들어 올리시고 ◯ 악인들은 땅에까지 낮추신다.
7 주님께 감사노래 불러라. ◯ 수금 타며 우리 하느님 찬미하여라.
8 구름으로 하늘 덮어 땅에 비를 내리시고, ◯이 산에도 풀, 저 산에도 풀, 사람 먹을 곡식 나게 하시며,
9 짐승들과 울어대는 까마귀 새끼에게 ◯ 먹이를 마련하시는 분,
10 힘센 말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 힘 좋은 장정의 다리도 반기지 않으신다.
11 당신 두려운 줄 아는 사람, ◯ 당신 사랑 믿는 사람, 그들만을 반기신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1고린 9:16-23
16 내가 복음을 전한다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 17 만일 내가 내 자유로 이 일을 택해서 하고 있다면 응당 보수를 바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내 자유로 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 일을 내 직무로 맡겨주신 것입니다. 18 그러니 나에게 무슨 보수가 있겠습니까? 보수가 있다면 그것은 내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응당 받을 수 있는 것을 요구하지 않고 복음을 거저 전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19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매여 있지 않는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20 내가 유다인들을 대할 때에는 그들을 얻으려고 유다인처럼 되었고 율법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나 자신은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얻으려고 율법의 지배를 받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21 나는 그리스도의 법의 지배를 받고 있으니 실상은 하느님의 율법을 떠난 사람이 아니지만 율법이 없는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그들을 얻으려고 율법이 없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22 그리고 내가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그들을 얻으려고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내가 어떤 사람을 대하든지 그들처럼 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중에서 다만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한 것입니다. 23 나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과 다 같이 복음의 축복을 나누려는 것입니다.
마르 1:29-39
29 얼마 뒤에 예수께서 회당에서 나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에 들어가셨다. 30 때마침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사정을 예수께 알렸다. 31 예수께서 그 부인 곁으로 가서 손을 잡아 일으키시자 열이 내리고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32 해가 지고 날이 저물었을 때에 사람들이 병자와 마귀 들린 사람들을 모두 예수께 데려왔으며 33 온 동네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34 예수께서는 온갖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시며 자기 일을 입 밖에 내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마귀들은 예수가 누구신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5 다음날 새벽 예수께서는 먼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외딴 곳으로 가시어 기도하고 계셨다. 36 그 때 시몬의 일행이 예수를 찾아다니다가 37 만나서 "모두들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8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근방 다음 동네에도 가자. 거기에서도 전도해야 한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 하고 말씀하셨다.
39 이렇게 갈릴래아 지방을 두루 찾아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며 마귀를 쫓아내셨다.
<본기도> 구원의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병든 이들을 고치시어 몸과 마음을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비옵나니,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상한 몸과 영혼을 치유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1>
하느님의 눈길, 손길, 발길을 전하는 전도 (마르 1:29-39)
오늘 복음서는 예수님의 전도여행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회당에서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시고 가르치시며 곳곳마다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한 곳에 머물지 않으시고 계속 여행을 하시면서도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시는 모습은 인상적입니다.
요즘엔 전도라는 말이 “자기 교회에 새 신자를 데려오는 일”로 의미가 좁아졌지만 실상 전도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나라를 세상에 알리고 전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바로 전도인 것이지요.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은 일종의 여가생활, 취미생활 같은 느낌마저 들지만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은 나라 전체가 철저하게 율법에 의해서 통제되는 사회였습니다. 율법은 단순히 종교적인 전례법규(루브릭)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가치를 형성하는 세계관의 근거이기도 하고 생활관계를 통제하는 실정법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진 복음, 예수님이 행하신 전도를 이해하고 오늘 우리 시대에 복음을 전하려면 율법의 이런 성격을 잘 살펴야 합니다. 바울로 사도께서 자신의 이방인 선교의 과정에서 밝히신 대로 예수님의 복음은 바로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는 일이고 곧 율법을 폐기하고 대안을 세우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 여러 가지 갈등이 깊습니다. 이념, 세대간, 계층간, 지역간, 각종 이해관계의 갈등 들이 서로 얽혀있습니다. 이 갈등에 대한 최선의 답이 바로 “법”을 만들고 법을 지키자는 것입니다. 입법부는 법을 만들고 행정부는 법을 따라 일하고 사법부는 법에 의거해 심판합니다. 우리나라가 이만큼 안정된 법치국가임은 참 감사할 일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여전히 혼란스럽습니까? 왜 이렇게 억울하다는 사람이 많습니까? 법을 내세우기 이전에 이미 우리의 가치관이 어지러워졌기 때문입니다. 법이 아니고는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인심이 각박하고 흉흉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어둠과 혼란은 법이 없어서 생긴 일이 아닙니다. 법을 더 엄격히 해서 해결될 일도 아닙니다. 우리가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어떤 의미인가를 진정 깨닫지 못하는 한 계속 반복될 수 밖에 없는 불행입니다.
예수님의 전도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웬 법 이야기로 흘러가는가 의아하시지요? 예수님은 자신의 이름으로 그리스도교를 세우고 그 신자를 얻기 위해서 전도하시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단지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쫒는 기적적인 능력을 가진 영험한 무당의 차원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어야 하는 것, 따라야 하는 것이 단순히 “예수 믿고 병고치자, 예수 믿고 부자되자, 예수 믿어 천당가자”는 내용이 아님을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병의 치유는 자기 몸에 대한 사랑과 의술의 도움으로 이루어집니다. 부자가 되는 일은 자신의 노력과 다른 이들의 도움으로 가능해집니다. 천당에 가는 일은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와 자비에 의지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아니어도 건강한 이, 부자, 마음이 평안한 이들이 많습니다.
물론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건강한 몸으로 부족함 없는 경제생활을 하며 평안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기도하고 경험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목적의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그 나머지 “모든 것은 곁들여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눈길과 손길과 발길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십니다. 당시에 병자들은 율법의 눈길로 보면 무언가 하느님께 죄를 지어 벌을 받는 이들입니다. 육신의 병도 고통스러운데 죄인이라는 정죄까지 따라붙는 것입니다. 율법의 손길은 병자들을 방치하거나 격리하는 것으로 그칩니다. 충분히 벌을 받아야 하고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합리적인 판단입니다. 율법의 발길은 병자들을 피해갑니다. 종교적인 거룩함을 핑계로 삼고 말입니다. 병자들은 악령에 사로잡혀 시달리는 사람들로 간주됩니다. 율법은 그들을 불편해하지만 돕지는 못합니다. 하느님의 묵인 하에 악령이 행세한다고 여기는 한 악령을 쫓아내는 일에 하느님의 권위를 행사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가르치시며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내시며 병자를 고쳐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신 것은 일관된 언행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병으로 사람을 벌하시지 않는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고치시고 살리시는 분이시지 병들고 망하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마귀의 일들을 묵인하고 방치하시지 않고 쫓아내어 사람들을 자유롭고 행복하게 하십니다.
율법을 주장하는 이들의 권위 없는 가르침, 마치 철사줄 같은 통제에 옥죄이며 살던 이들에게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은 생생한 복음,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권위, 새로운 가르침, 마침내 당신의 삶과 죽음으로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문자적인 차원이 아니라 그 정신을 구현하는 차원에서 하느님나라, 하느님 사랑의 이름으로 완성하신 것입니다.
율법을 주장하는 이들의 권위 없는 가르침, 마치 철사줄 같은 통제에 옥죄이며 살던 이들에게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은 생생한 복음,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권위, 새로운 가르침, 마침내 당신의 삶과 죽음으로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문자적인 차원이 아니라 그 정신을 구현하는 차원에서 하느님나라, 하느님 사랑의 이름으로 완성하신 것입니다.
전도란 세상을 향해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하느님의 눈길, 손길, 발길을 전하는 일입니다. 이 세상에 하느님의 사랑의 통치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재물과 권력이 우리를 통제하여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법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윤리, 도덕, 법을 잘 지키라는 것이 복음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우리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라는 것이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시선이 주님의 눈길을 닮아야 합니다. 우리의 실천이 주님의 손길을 닮아야 합니다. 우리의 입장이 주님의 발길을 닮아야 합니다.
저나 교우 여러분이나 이 사회에 적응해 살기 위해 지식과 지혜를 많이 갖춘 편에 속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치판단을 가지고 이 땅의 불행한 사람들, 억울한 사람들, 허약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못 배운 사람들, 병든 사람들을 마치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들을 “있는 그대로” “하느님의 마음으로 대할 수 있을 때”까지 아직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충분히 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보다 잘 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보면 어쩌면 우리들도 하느님께 인정받지 못하여 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쓸데없는 콤플렉스를 가지지 않고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 애틋한 마음을 깊이 느끼지 못한다면 아직 우리는 하느님을 충분히 아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는 하느님의 마음에 감동하고 하느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우리 자신에서부터 가장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이에게까지 하느님의 그 마음과 능력은 차별과 제한이 없으심을 전하는 일입니다. 차가운 율법의 벽 뒤에서 자기들끼리 누리는 고상한 거룩함이 구원일 수 없습니다. 뜨거운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 모두가 함께 마주잡는 손길이 구원입니다. 전도는 그래서 자격있는 회원을 모으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받은 은총과 진리를 조건없이 나누는 일입니다. 전도는 무슨 목표를 달성하고 실적을 올려야 하는 부담스런 사역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 경험한 만큼 기쁘게 전할 수 있는 기회의 연속입니다.
올 한 해 우리 교회, 우리 성공회, 한국교회에 주님의 눈길, 주님의 손길, 주님의 발길을 기쁘게 세상에 전하는 전도의 기운이 새로워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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