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17일 (사순 5주일) 성서말씀 / 패트릭
패트릭(주교, 선교사, 아일랜드 수호성인, 460년경)
이사 43:16-21
16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바다에 큰 길을 내시고 거센 물길을 뚫고 한길을 내신 이, 17 그들을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거꾸러뜨리시고, 꺼진 심지처럼 사그라뜨리시려고 병거와 기마를 출동시키시고 군대와 용사를 출동시키신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18 "지나간 일을 생각하지 마라. 흘러간 일에 마음을 묶어두지 마라. 19 보아라, 내가 이제 새 일을 시작하였다. 이미 싹이 돋았는데 그것이 보이지 않느냐? 내가 사막에 큰 길을 내리라. 광야에 한길들을 트리라.
20 사막에 물을 대어주고 광야에 물줄기를 끌어들이리니, 뽑아 세운 내 백성이 양껏 마시고 승냥이와 타조 같은 들짐승들이 나를 공경하리라.
21 내가 친히 손으로 빚은 나의 백성이 나를 찬양하고 기리리라.
시편 126
1 주께서 시온의 포로들을 풀어 주시던 날, ◯ 꿈이든가 생시든가!
2 그 날 우리의 입에서는 함박 같은 웃음 터지고 ◯ 흥겨운 노랫가락 입술에 흘렀도다.
¶ 그 날 이교 백성 가운데서 들려오는 말소리, ◯ “놀라와라, 주께서 저 사람들에게 하신 일들!”
3 주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일 하셨으니 ◯ 우리는 얼마나 기뻤던가.
4 주여, 저 네겝 강바닥에 물길 돌아오듯이 ◯ 우리의 포로들을 다시 데려 오소서.
5 눈물을 흘리며 씨뿌리는 자, ◯ 기뻐하며 거두어들이리라.
6 씨를 담아 들고 울며 나가는 자, ◯ 곡식단을 안고서 노랫소리 흥겹게 들어오리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필립 3:4-14
4 하기야 세속적인 면에서도 나는 내세울 만한 것이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세속적인 것을 가지고 자랑하려 든다면 나에게는 자랑할 만한 것이 더 많습니다. 5 나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에서 태어났으며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히브리 사람 중의 히브리 사람입니다. 나는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파 사람이며 6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면 나는 조금도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7 그러나 나에게 유익했던 이런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장해물로 여겼습니다. 8 그뿐만 아니라 나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장해물로 생각됩니다.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려는 것입니다. 내가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내 믿음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것입니다.
10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 11 그러다가 마침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12 나는 이 희망을 이미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 또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달음질칠 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붙드신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13 형제 여러분, 나는 그것을 이미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고 앞에 있는 것만 바라보면서 14 목표를 향하여 달려갈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를 부르셔서 높은 곳에 살게 하십니다. 그것이 나의 목표이며 내가 바라는 상입니다.
요한 12:1-8
1 예수께서는 과월절을 엿새 앞두고 베다니아로 가셨는데 그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라자로가 사는 고장이었다.
2 거기에서 예수를 영접하는 만찬회가 베풀어졌는데 라자로는 손님들 사이에 끼여 예수와 함께 식탁에 앉아 있었고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있었다.
3 그 때 마리아가 매우 값진 순 나르드 향유 한 근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드렸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다.
4 예수의 제자로서 장차 예수를 배반할 가리옷 사람 유다가 5 "이 향유를 팔았더라면 삼백 데나리온은 받았을 것이고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었을 터인데 이게 무슨 짓인가?" 하고 투덜거렸다.
6 유다는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가 도둑이어서 이런 말을 한 것이었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아가지고 거기 들어 있는 것을 늘 꺼내 쓰곤 하였다.
7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내 장례일을 위하여 하는 일이니 이 여자 일에 참견하지 마라. 8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지만, 나는 언제나 함께 있지는 않을 것이다."
<본기도> 주 예수 그리스도여, 값비싼 향유를 아낌없이 드림으로써 주님의 수난을 예비한 여인을 칭찬하셨나이다. 비옵나니, 우리도 모든 것을 봉헌하여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1>
거룩하고 참된 봉헌 (요한 12:1-8)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우리는 베다니아의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린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우리 전례의 참된 의미, 그 가운데서도 우리의 봉헌이 어떤 가치가 있는가를 잘 말씀해줍니다.
유다의 생각과 같은 실용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전례는 허례허식처럼 보이기 쉽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봉헌은 그저 어리석은 낭비처럼 보이기 쉽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 스스로 지혜롭다는 세상 사람들은 냉소적으로 우리의 전례와 봉헌을 공격합니다. 물론 사이비 종교인들이 종종 전례를 미신행위로 타락시키고 봉헌을 중간에서 착취하여 낭비하는 일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타락과 속임수는 사람들이 전례와 봉헌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자기의 소원성취를 위해 하느님과 거래하려는 불순한 동기를 가지고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례를 기준으로 해서 교회공동체가 드리는 전례의 가치를 깎아내릴 수는 없습니다. 전례는 하느님의 기쁨이고 우리의 의무입니다. 오늘 이사야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친히 손으로 빚은 나의 백성이 나를 찬양하고 기리리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우리는 살아계신 하느님께 감사성찬례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 집에서 나오면서 우리가 어떤 기대를 하고 이곳에 모였는지를 생각해봅시다. 어떤 분에게는 아름다운 전례가 제단 위에서 거행되는 것을 보러 오는 기쁨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홀로 하느님께 간절한 소원을 말씀드리러 오실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유익하고 감동적인 설교말씀을 기대하고 오시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사랑으로 내어주시는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성체성사의 감격에 설레는 가슴으로 오시기도 합니다. 모두 좋습니다. 참으로 소중하고 아름다운 믿음들입니다. 다만 제가 우리들의 믿음과 기대를 조금씩 수정하여 표현하려고 합니다. 허락해주시고 주의깊게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오늘 감사성찬례는 단순히 제대를 중심으로 집전사제와 전례봉사자들만이 거행하는 보여지기 위한 예배가 아닙니다. 감사성찬례는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교우들이 함께 바치는 예배입니다. 기둥 뒤에 겸손하게 숨겨지신 채로 눈을 감고 계신 교우님의 마음 속에서도 전례가 거행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이 이곳에 있지만 정작 우리의 마음은 다른 곳에 가있다면 그동안 우리의 예배는 약간의 상처를 입는 셈입니다. 이 성경말씀과 설교말씀을 경청하시는 교우님들의 태도는 중요한 전례의 요소입니다. 평화의 인사를 하실 때 참으로 교우님들이 반갑고 기쁜 얼굴로 인사하시는 일도 중요한 전례의 요소입니다. 성체성사를 위해서 행렬을 지어 제대로 향해 걸어가는 교우님들의 발걸음 발걸음이 전례의 내용에 포함됩니다. 성당 날개쪽 회랑에서 어떤 아기가 칭얼거리는 소리도 어쩌면 전례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 전례를 더욱 아름답게 하는 요소인지도 모릅니다. 전례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우리가 주관적으로 느끼는 감동이 기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어 우리의 최선의 정성을 주님께 봉헌한다고 하는 사실에서 전례의 아름다움은 비로소 객관적인 사실이 됩니다.
성가대의 성가가 너무나 아름답지만 그것은 단지 그 찬양이 음악적으로 훌륭하여서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그 훌륭한 음악을 봉헌하기 위해 저 많은 이들이 시간과 정성을 모아 함께 준비하고 이 자리에서 기쁜 마음으로 찬양하는 그 봉헌이 진정 아름다운 것입니다.
오늘 간절한 기도제목을 가지고 이 예배에 참석한 우리 서로를 우리는 사랑으로 환영합니다. 하지만 우리 각자가 이 시간 홀로 하느님의 응답을 구하며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감사성찬례는 우리들의 간구를 하나로 모으고 그것을 하느님께 바치는 일이 됩니다. 우리의 소원은 전례를 통하여 살아계신 하느님 앞에서 정직해집니다. 정화됩니다. 부끄러움 없이 진정해집니다. 그 소원은 곧 우리 교회공동체 전체의 소원이 되고 동시에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의 간절한 소원이 되고 성부 하느님이 이루어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소원이 됩니다.
설교말씀에 기대를 가지고 오신 교우님들에게 저는 특별한 감사를 표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설교는 무슨 유익한 신앙강좌를 듣는 일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감사성찬례의 말씀의 전례에서 먼저 성경말씀이 독서자에 의해 낭독되어 선포되는 것을 듣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고 되새겨야 합니다. 일반적인 신앙적인 교훈을 재미있는 예화로 전달받는 일은 이 예배 후에 신앙강연이나 교리공부, 성경공부 시간에 배우시면 됩니다. 지금 이 시간은 오늘 정과표를 따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 앞에 모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주님의 그 말씀에 응답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고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면서 주님의 뜻에 우리의 삶을 일치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고백으로 하느님의 그 말씀에 응답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에서 가져온 우리의 봉헌예물을 드립니다. 단순히 봉투에 담긴 헌금을 드리는 일이 아닙니다. 그 헌금에는 한 주간의 우리의 삶이 담겨있습니다. 공짜 없는 세상에서 땀과 눈물로 얻은 수확이 담겨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복음의 가치를 위해서 일하고 참아낸 사랑의 수고가 담겨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봉헌은 예배에서 은총을 누리는 댓가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적인 서비스에 대한 사례비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봉헌은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드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봉헌이 그만큼 가치가 있을까요? 우리 자신이 정말로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봉헌물이 될 수 있을까요? 여기서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단 한번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려 하느님과의 완전한 화해를 이루셨다”고 하는 성서의 가르침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봉헌은 이 감사성찬례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성부께 자신을 바치신 그 사랑과 희생의 봉헌과 결합됩니다. 우리의 봉헌 자체가 값비싼 것이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봉헌이 가능하도록 이미 완전한 봉헌자이신 예수님의 봉헌이 먼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봉헌은 성령을 통하여 주님의 몸과 피로 거룩하게 변화됩니다. 그 몸과 피를 먹고 마시며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과 의지에 온전히 일치하며 주님의 몸된 공동체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성체성사의 신비는 면병과 포도주가 피가 흐르는 살점으로 변화된다는 신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바쳐진 우리 자신의 봉헌이 성령을 통하여 성부께서 기뻐하시는 성자의 몸과 피로 변화되는 신비이고 그 성체와 보혈을 생명의 양식으로 먹고 마시며 우리가 주님의 몸으로서 하나된 지체로 변화되는 신비입니다. 우리의 봉헌을 통해서 이 세상은 본래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되돌려 봉헌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다시금 오늘 복음서의 장면으로 돌아갑니다.
아마도 가리옷 사람 유다는 대단히 합리적인 판단의 소유자임을 스스로 자랑하는 인물 같습니다. 저도 가리옷 유다의 말이 공감이 갑니다. "이게 무슨 짓인가?" 삼백데나리온의 향유는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적어도 2천만원정도의 값어치입니다. 이천만원이면 가난한 이들에게 4천원짜리 식사를 오천명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액수입니다. 그것을 발에 부어 버리다니, 이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인가 말이지요!
성경 기자는 실은 그가 공금유용을 일삼던 “도둑”이어서 다른 욕심으로 그런 말을 했다고 단정합니다. 하지만 설령 그가 진심으로 “가난한 이들”을 생각했다고 하더라도 그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없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는 자기 판단력을 자랑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잔머리에 갇혀있는 가련한 인간의 전형입니다. 재정관리실무는 능통했지만 정작 “봉헌”의 깊은 의미는 몰랐던 것 같습니다.
마리아의 봉헌을 이해하려면 라자로의 이야기를 기억해야 합니다. 마리아의 오빠 라자로가 바로 예수님께서 죽은 지 사흘이나 된 무덤에서 다시 살리신 그 사람입니다. 그 일은 예수님이 초능력을 드러내기 위한 단순한 기적이 아닙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아니하리라.”는 말씀을 선포하기 위한 표징의 사건입니다.
육신을 가진 모든 인간은 병고와 죽음의 위협아래 있습니다. 그것을 마술적으로 해결하는 일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슬퍼하는 마르타에게 “네가 믿기만 하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시고 무덤 속에 갇혀 시신에 냄새가 나는 인간을 향해 “라자로야, 나오너라!” 말씀 하십니다. 라자로는 그저 운이 좋아 기적적으로 몇 십 년 더 살게 된 행운의 사나이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삶의 차원이 달라진 사람입니다.
율법은 병고와 죽음을 하느님의 저주와 징벌로 보았습니다. 율법을 신봉하는 이들은 그 이상의 사랑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현세의 질서에 체념하거나 만족합니다. 짧은 육신의 생명을 누리는 동안 자기들의 기득권을 보장해주는 율법체계, 성전체계를 포기할 마음이 없습니다. 라자로를 살리신 일, 즉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으로 생명과 삶의 새로운 차원을 깨닫게 하신 일을 통해 사람들이 무리지어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게 되고 그 무리로 인해 정치적인 소요가 일어나고 그에 대한 로마의 무력진압을 두려워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여 없애기로 결의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 수난과 죽음의 길을 피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길을 택하여 걸어가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리아의 봉헌은 이러한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죽은 라자로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의 라자로가 되었습니다. 그 오빠가 이제 예수님과 함께 다시 만찬의 식탁에 앉아있습니다. 그 만찬의 식탁은 바로 오늘 이 감사성찬례의 제대를 상징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유향을 붓고 자신의 머리칼로 발을 닦아 드린 봉헌은 라자로의 죽음의 경험과 새 생명의 은총에 대한 감사와 찬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쁘게 마리아의 봉헌을 받으시고 “이는 내 장례일을 위하여 한 일이니 그 여자의 일에 참견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리아의 봉헌을 통해서 라자로의 죽음과 생명은 예수님의 죽음의 깊이와 부활의 영광에 결합하게 됩니다.
우리의 봉헌은 우리의 삶의 고난과 행복, 삶과 죽음, 기쁨과 슬픔이 모두 담긴 감사의 예물입니다. 내게 일어난 행운에 대하여 일정부분 계산을 통해 할애하여 보답하는 사례금일 수 없습니다. 그런 일은 봉헌이 아니라 거래입니다. 우리의 봉헌은 단순히 의무가 아니라 감사와 사랑이 전부여야 합니다.
오늘 이 감사성찬례에 참여한 우리는 모두 또 한 사람의 마리아들입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가장 값비싼 향유를 들고 왔습니다. 머리카락을 풀어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리려는 사랑의 마음으로 이곳에 모였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교우들의 귀한 시간과 물질을 가치로 환산하면 분명 삼백데나리온, 약 2천만원은 훨씬 넘을 것입니다.)
주일아침 세상은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왜 쓸데없이 교회 가서 시간을 낭비하려고 그래. 더 중요한 일, 더 신나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 주일에 텅텅 비는 성당들이 상징하는 서구교회의 쇠퇴는 단순히 우리가 비웃을 수 있는 수준 낮은 타락이 아닙니다. 여가생활이 중요해지고 가능해진 세상이 한 원인입니다. 그리고 가리옷 사람 유다의 말에 사람들이 솔깃하였기 때문입니다. “헌금을 교회에 갖다 바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야. 그럴 돈이 있으면 직접 사회단체에 기부하면 되지...” 사회의 변화에 따라 반드시 한국교회도 서구교회의 뒤를 따라 가리라고 봅니다.
우리 교회, 특별히 우리 대한성공회의 유력한 활로는 전례공동체로서의 교회의 본분을 회복하고 확인하는 길입니다. 그 전례가 단순한 종교적인 내용의 쇼처럼 되어서는 안됩니다. 전례를 통하여 우리 자신을 봉헌하고 주님과 일치되어 다시금 세상으로 돌아가 복음을 살아내는 선교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지만 나는 언제나 함께 있지는 않을 것이다.” 늘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는 좀 당황스럽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인 교훈입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을 깨닫고 감사하고 뒤따르는 마음이어야 가난한 이들 속에 계신 주님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적인 계산과 욕심을 가지고는 주님을 유력인사들 가운데서만 찾으려 들고, 뭔가를 주님께 얻어내는 일에만 골몰하기 쉬울 터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실리(實利)를 위한 주님과의 거래가 아닙니다. 주님을 통해 어떤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는 공리적(公利的)인 정치행위도 아닙니다. 때로는 주님께 개인적인 복락을 구할 수도 있고 때로는 주님께 사회정의를 호소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모든 것이 우리의 믿음에 달려있습니다.
“죽은 이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 하느님”(로마4:17)을 굳게 신뢰하는 믿음이어야 우리 자신을 “감사의 산 제물”로 바쳐드리는 것이 가능합니다. 우리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하여 하느님의 뜻과 사랑에 일치하고서야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었는가 아닌가를 말할 수 있습니다.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이야기는 주관적인 착각에 불과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가리옷 유다처럼 “합리적인 계산과 논리”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계산과 논리”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휘감는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우리를 구원합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욕심과 속셈은 오늘도 주님께 실망하고 주님을 탓하고 주님을 배신하게 합니다. 하느님을 내가 욕망하는 방법과 내용으로 섬기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은총과 사랑을 깊이 누리야 합니다. 우리들은 불안하고 인색합니다. 주님의 은총과 사랑을 진정으로 깨닫는 만큼만 우리 자신을 열 수 있습니다. 우리 소유와 삶을 아낌없이 주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그 때에 우리는 “언제나 우리 와 함께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깊은 사랑으로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시려 자신을 바치신 거룩한 봉헌자이신 예수님께 기쁘게 자신을 봉헌하는 사랑의 마리아들이 되시길 기원드립니다. ✠
<강론초록2>
유다의 계산과 마리아의 사랑 (요한 12:1-8)
예수님의 수난을 앞두고 베다니아의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아낌없이 붓고 자신의 머리칼로 그 발을 닦아드립니다. “장차 주님을 배반하게 될” 가리옷 사람 유다는 우리를 대신해 한탄합니다. “아니, 이게 무슨 짓인가? 이 향유를 팔면 족히 삼백 데나리온(이천만원 상당)은 받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을 텐데 !” 성경 기자는 실은 그가 공금유용을 일삼던 “도둑”이어서 다른 욕심으로 그런 말을 했다고 단정합니다. 하지만 설령 그가 진심으로 “가난한 이들”을 생각했다고 하더라도 그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없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는 “잔머리”를 굴리며 스스로를 망쳐갑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리신 라자로가 바로 마리아의 오빠였고 그 라자로는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습니다. 과연 마리아가 어리석었겠습니까? 죽었던 친 오빠를 다시 살려주신 그 분께 이천만원짜리 향유를 바쳐드리는 일이 과연 낭비일까요? 아니, 마리아의 마음은 그 무엇도 아깝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오빠 라자로를 살리신 그 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될까봐 서 권력자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 수난과 죽음의 길을 피할 기색이 아니십니다. 이런 정황 속에서 마리아는 참으로 절박하게 자신의 믿음과 사랑을 예수님께 봉헌하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는 내 장례일을 위하여 한 일이니 그 여자의 일에 참견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지만 나는 언제나 함께 있지는 않을 것이다.” 속 뜻 깊은 말씀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희생을 깨닫고 감사하고 뒤따르는 마음이어야 가난한 이들 속에 계신 주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계산과 욕심으로는 주님을 유력인사들 가운데서만 찾으려 들고, 뭔가를 주님께 얻어내는 일에만 골몰하기 쉬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실리(實利)를 위한 주님과의 거래가 아니고, 주님을 통해 어떤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는 공리적(公利的)인 정치행위도 아닙니다. “죽은 이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 하느님”(로마4:17)을 굳게 신뢰하여 우리 자신을 “감사의 산 제물”로 바쳐드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욕심과 속셈은 오늘도 주님을 배반하여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우리는 가리옷 유다처럼 “합리적인 계산과 논리”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계산과 논리”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휘감는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우리를 구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은총과 사랑을 깊이 누리며, 소유와 삶을 아낌없이 주님께 드려, 진정 이 세계의 가난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
'설교초록 > 2013년도설교초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3년 3월 19일 (성요셉 /사순 30일째) 성서말씀 (0) | 2013.03.18 |
---|---|
2013년 3월 18일 (사순5주 월/사순 29일째) 성서말씀 (0) | 2013.03.17 |
2013년 3월 16일 (사순4주 토/ 사순28일째) 성서말씀 (0) | 2013.03.15 |
2013년 3월 15일 (사순4주 금 /사순27일째) 성서말씀 (0) | 2013.03.14 |
2013년 3월 14일 (사순4주 목 / 사순26일째) 성서말씀 (0) | 2013.03.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