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21일 (부활 4주일) 성서말씀과 강론초록
안셀름(캔터베리대주교, 1109년)
사도 9:36-43
36 한편 요빠에는 다비타라는 여신도가 살고 있었다. 그 이름은 그리스 말로 도르가, 곧 사슴이라는 뜻이다. 그 여자는 착한 일과 구제 사업을 많이 한 사람이었는데 37 그 무렵에 병이 들어 죽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깨끗이 씻어서 이층 방에 눕혀놓았다. 38 리따는 요빠에서 가까운 곳이어서 베드로가 리따에 있다는 말을 들은 신도들이 그에게 사람 둘을 보내어 지체하지 말고 와달라고 청하였다. 39 그래서 베드로는 곧 그들을 따라 나섰다. 베드로가 요빠에 이르자 사람들이 그를 이층 방으로 안내하였다. 과부들이 모두 베드로에게 몰려와서 울며 도르가가 살아 있을 때에 만들어두었던 속옷과 겉옷을 보여주었다. 40 베드로는 사람들을 방에서 모두 내보낸 뒤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고 나서 시체쪽으로 돌아서며 "다비타, 일어나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 여자는 눈을 뜨고 베드로를 바라보며 일어나 앉았다. 41 베드로는 그 여자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다시 살아난 도르가를 보여주었다. 42 이 소문이 온 요빠에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주를 믿게 되었다. 43 그 뒤 베드로는 한동안 요빠에서 피장이 시몬의 집에 머물러 있었다.
시편 23
1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 아쉬/울 것/없어/라.
2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 물가로 이끌어 /쉬게/하시/니
3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그 이름 /목자/이시니 ∥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 길이/요,4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 당신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없어/라.
5 원수들 보는 앞에서 상을 /차려 /주시고, ∥ 기름 부어 내 머리에 발라주시니, 내 잔이 /넘치/옵니/다.
6 한평생 은총과 복에 겨워 /사는 /이 몸, ∥ 영원히 주님 집에 /거하/리이/다.
영광이 |성부|와 ∥ 성|자와|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 ∥ 그리고 영|원히,|아-|멘
묵시 7:9-17
9 그 뒤에 나는 아무도 그 수효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인 군중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모든 나라와 민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자들로서 흰 두루마기를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서 옥좌와 어린 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10 그리고 그들은 큰소리로 "구원을 주시는 분은 옥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느님과 어린 양이십니다." 하고 외쳤습니다.
11 그러자 천사들은 모두 옥좌와 원로들과 네 생물을 둘러서 있다가 옥좌 앞에 엎드려 하느님께 경배하며 12 "아멘, 우리 하느님께서 영원 무궁토록 찬양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영예와 권능과 세력을 누리시기를 빕니다. 아멘." 하고 외쳤습니다.
13 그 때 그 원로들 가운데 하나가 "흰 두루마기를 입은 이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이며 또 어디에서 왔습니까?" 하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14 "어른께서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내가 대답했더니 그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 희게 만들었습니다. 15 그러므로 그들은 하느님의 옥좌 앞에 있으며 하느님의 성전에서 밤낮으로 그분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옥좌에 앉으신 분이 그들을 가려주실 것입니다. 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며 태양이나 어떤 뜨거운 열도 그들을 괴롭히지 못할 것이요, 17 옥좌 한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그들을 생명의 샘터로 인도하실 것이며 3)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주실 것입니다."
요한 10:22-30
22 때는 겨울이었다. 예루살렘에서는 봉헌절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23 예수께서는 성전 구내에 있는 솔로몬 행각을 거닐고 계셨는데 24 유다인들이 예수를 둘러싸고 "당신은 얼마나 더 오래 우리의 마음을 조이게 할 작정입니까? 당신이 정말 그리스도라면 그렇다고 분명히 말해 주시오." 하고 말하였다. 25 그러자 예수께서는 "내가 이미 말했는데도 너희는 내 말을 믿지 않는구나.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바로 나를 증명해 준다. 26 그러나 너희는 내 양이 아니기 때문에 나를 믿지 않는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온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 29 아버지께서 내게 맡겨주신 것은 무엇보다도 소중하다. 아무도 그것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갈 수 없다. 30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본기도> 은혜로우신 하느님, 잃은 양들을 찾아 바른길로 이끌어 주시나이다. 비옵나니, 우리가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순종함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1>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 (요한 10:22-30)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참 좋은 봄날입니다. 봄은 생명이 되살아나는 신비와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줍니다. 감사하게도 이 봄날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 그것도 부활4주일에 우리가 들은 성경 말씀은 생명에 관한 말씀들입니다. 정확히는 “영원한 생명”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생명에 관한 진리를 전해주는 성경말씀은 놀랍게도 “죽음”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합니다. 아니, 놀라운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인가요?
아시는 바대로 “생명”이란 실은 “죽음이 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무생물은 죽음이 불가능하지요.
그런데 죽음이 가능하다는 것 때문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서 모든 생명은 “자기복제”의 능력을 갖게 된 것이지요. 자기와 똑같은 존재를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개체의 죽음, 곧 소멸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가장 중요한 특성을 그대로 남기려는 의도가 이른바 유전자를 복제하는 일로 나타납니다. 참 신비한 일입니다.
구조가 단순한 즉 차원이 낮은 생명체는 단순한 분열로 자기복제를 합니다. 하지만 구조가 복잡한, 차원이 높은 생명일수록 그 자기복제는 생식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그리고 그러한 생식능력을 갖추기 까지 성장하고 성숙하는 과정을 생명활동의 내용으로 갖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시며 물고기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생명체들에게 “이 땅에 가득 번성하여라!” 하신 하느님의 축복은 바로 개체들의 죽음을 전제로 하신 것이 진실입니다.
좀 어려운 말씀이 되었지만... 분명 차분히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내용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죽음 앞에서 깊은 불안을 느끼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의 죽음에는 혹시 용기를 낼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는 대책없는 슬픔과 고통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말씀은 베드로가 요빠에서 다비타, 즉 도르가, 사슴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의 여성을 다시 살려낸 이야기를 전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다비타, 일어나시오.” 하신 말씀을 들으면,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 일찍이 “탈리다 쿰, 곧 소녀야 일어나거라” 하는 말씀으로 회당장의 딸을 살리신 이야기를 기억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제자인 것이 이 일로 분명해집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베드로가 전하는 주님을 믿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고 전합니다. 성서는 스승이신 주님이 하신 일은 제자도 마땅히 할 수 있다고 말씀하는 듯 합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스승 예수님께서 제자 베드로에게로 물려주신 “사도직”의 계보를 잇는 제자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죽음을 극복하는 능력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죽음은 우리가 생명이기에 피할 수 없는 당연한 귀결입니다. 절대로 죽지 않으려 하고, 죽음을 피하려고 아등바등 하고, 죽음의 불안을 잊어버리려고 쾌락에 빠져드는 그런 태도를 가져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죽음을 대면하여 생명의 귀결로 받아들이되 어떻게 죽음을 극복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다비타의 소생은 어쩌면 너무나도 평범한 답을 제시해줍니다. 그건 다비타가 모든 이들에게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다비타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었고, 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계속 기억하고 싶어했습니다. 다비타가 착한 일과 구제사업을 많이 했다고 성서는 전합니다. 그는 허락된 생명의 과정을 아름답게 충실하게 살았습니다. 자기 육신만을 보존하려는 동물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고 자기의 영혼을 기쁘게 하는 “하느님의 일”에 참여했습니다. 더불어 나누고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다비타가 다시 사람들을 위하여 “일어나야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다비타가 죽음을 극복한 삶을 살았음을 사람들에게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죽음을 극복하려면, 하느님 안에서 착한 일과 남을 돕는 일을 많이 해야 한다고 성서가 증언합니다.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나는 일을 모든 사람이 기뻐해야, 그런 인간으로 성숙해가는 삶을 충실히 살았어야,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일을 더욱 더 기뻐하시리라 생각되지 않으세요?
어떤 분은 제 말씀이 너무 가볍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죽음을 이기기 위해서는 착한 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 오직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이겠지요. 만일 그런 말씀이라면 훌륭한 지적입니다.
맞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그 믿음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입니다. 그 의미를 오늘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밝혀주십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찾아와 둘러싸고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얼마나 더 오래 우리의 마음을 조이게 할 작정입니까? 당신이 정말 그리스도라면 그렇다고 분명히 말해 주시오."
하소연을 하는 것인지 시비를 거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렇다. 내가 그리스도다”라고 다시 분명히 말씀하셨으면 “네, 감사합니다. 이제 분명히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했을까요? 아마도 “그렇다면 당신은 무슨 기적을 보여주실 건가요?” 하고 또 물었을 것입니다.
결국 이 유다인들은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가 흔히 할 수 있는 신앙적인 오해를 드러내주고 있는 셈입니다.
유다인들은 그리스도에 관한 정보를 얻고 싶어합니다. “당신이 그리스도 맞소?”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가 베푸는 기적적인 능력이 자신들을 구원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라면 기적을 보여주시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유다인들만이 아니라, 오늘의 그리스도인인 저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마치 세상살이의 처세술로서 유력한 사람에 관한 정보를 파악해서 그를 흡족하게 해서 내가 원하는 청탁을 이루어내는 거래의 원칙과 방법을 신앙생활에도 적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그런 유다인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내가 이미 말했는데도 너희는 내 말을 믿지 않는구나.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바로 나를 증명해 준다. ”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일은 어떤 사실의 주장에 대하여 “그렇다, 아니다” 하는 식의 정보판단 수준으로 되어지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뜻과 기준으로 모든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차별 없는 사랑을 베푸시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일, 그분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에 관한 정보가 아니라 예수라는 분의 “인격”을 알게 됩니다. 그 분의 인격이 곧 참된 그리스도, 구세주, 구원자의 의미임을 깨닫게 돕니다. 그리고 그 분의 인격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일, 그래서 그 분의 일에 함께 참여하는 일이 바로 우리가 구원받는 일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일은, 저 멀리서 우리 운명을 좌우하시는 능력자의 마음에 들려고 노심초사 하는 일일 수 없는 것이지요. 몸소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를 이끄시고 돌보시는 살아계신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 삶을 온전히 내맡기며 살아가는 일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을 비유하여 주님은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온다”고 표현하십니다. 우리는 목자이신 주님과 인격적 관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 진정한 기쁨, 참된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신앙은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입니다. 인격적인 관계란 우리의 삶을 주님의 이끄심과 돌보심에 맡겨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우리가 한 마음, 한 믿음으로 증언하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는 고백을 다시금 되새겨봅시다. 그러면 그 고백은 단순히 입술로 선언하는 걸로 그칠 수 없음이 분명해집니다.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과 우리 교회의 사명을 오늘 복음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신 일” 이라는 기준으로 내용을 채워가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곧 우리가 머리 속에서 인지하고 독점하는 신령한 정보가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온 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사는 삶 자체를 의미합니다.
요한복음이 말씀하는 “영원한 생명” 곧 우리의 구원은 우리 삶 외부에서 주어지는 물질적인 외면적인 보상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 곧 우리의 구원은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친교를 살아가는 일입니다. 우리의 몸과 영으로 살아가는 구체적 현실적인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끄심과 돌보심 안에서 더욱 더 높아지고 깊어지고 넓어지는 일을 의미합니다. 세례성사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교회의 지체가 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우리 영과 몸에 가득히 모시며 사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삶에 연결된 죽음도 새로운 차원을 얻게 됩니다. 죽음은 삶을 파괴하고 소멸시키는 일이 아니라 새로이 얻게 된 “영원한 생명”을 확인하는 계기가 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살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일하고 하느님의 자비에 고통과 슬픔과 죽음조차 내맡기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삶이 바로 “영원한 생명”의 내용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의 힘으로 성 삼위일체 하느님과 일치되는 삶을 사는 일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은총은 예수님께서 그 영원한 생명을 우리도 누리도록 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 곧 그리스도이신 당신의 “인격”을 당신의 살과 피, 곧 성체와 보혈이라는 형태로 먹고 마실 수 있도록 성사(聖事)화 해주십니다. 그 성사(聖事)를 통해서 시공간을 넘어서 오늘 이곳에서 우리가 주님의 현존을 누리는 일, 곧 우리의 몸과 영, 우리의 인격과 삶에 그 “영원한 생명”의 차원이 실현되는 일이 가능해집니다. 지금 우리가 드리는 이 성찬례가 바로 그 일을 이루는 성체성사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며, 영원한 생명을 먹고 마시는 일 곧 오늘 이곳에 살아계신 주님과 우리가 일치되어 하나를 이루는 구원의 신비를 누리는 자리입니다. 이 성찬례는 이 성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계속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찬례의 끝은 “나가서 주님의 복음을 전합시다” 가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삶을 우리의 삶으로 뒤따르고, 그 영원한 생명을 우리의 참된 생명으로 삼는 일이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 되어 친교를 누리기를 간구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일하는 데에 진정한 기쁨과 보람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느님의 크신 은총에 삶을 내맡겨 고통과 슬픔과 좌절을 이기며 살아가기를 간구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느님의 자비에 죽음마저 봉헌하여 지금부터 영원까지 참된 평화를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 드렸습니다. 아멘
<강론초록2>
당신이 정말 그리스도라면? (요한 10:22-30)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이 말은 예수님께서 가장 많이 들으신 말씀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에는 “예수님,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면 “전지전능(全知全能)”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면 자비로운 분이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청을 들어주셔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이 없거나 느린 것은 우리가 뭔가 모를 잘못을 범했거나 간절하게 매달리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요한복음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전하는 본래의 의미와는 큰 거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이런 식으로 우리의 주관적 기대를 기준으로 이해하는 것은 실상 심각한 오해입니다. 푸닥거리를 하는 무당이 “어허, 정성이 부족하다!” 하고, 푸닥거리 결과가 신통치 않으면 “부정을 탓다”고 합니다. 우리의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말하는 기도와 응답은 결코 그런 수준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가 누구이며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차리는 일로 시작됩니다. 살아계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불러 주시고 대화를 시작하시는 것이 참된 기도의 실제적인 시작입니다. 신앙인의 기도는 우리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깨닫고 회복하고 유지하는 일입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그 분의 사랑을 알고 그 분의 뜻을 따르는 일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영이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을 따를 수 있는 것이 참된 은총입니다. 우리의 상황과 조건이 유리하게 되는 것은 참으로 곁들여 거저 주시는 부가적인 은총입니다. 어쩌면 외면적인 수준의 복락은 우리를 유혹하려 드는 악마에게도 허락된 능력입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마음을 알아드리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순종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느님과 기도로 하나가 되어 사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일이었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원하는 일을 해서 사람들의 인정과 존경을 받고 추종자를 얻으시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기도합니까? 우리는 어떤 믿음으로 기도합니까? 많은 신앙인들이 화려하게 기도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일을 이루시고 저 일을 이루시고 이렇게 하시고 저렇게 하소서.” 그런데 실상 그 마지막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모든 일이 제 뜻 안에서 이루어지소서. ” 아무리 “믿는 대로 된다”는 강력한 신념으로 기도한다하더라도 이런 기도는 신앙인의 기도라 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차라리 진솔하게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열심을 다해 구하기로 합시다. “사랑이신 아버지, 저를 사랑하시니 제 뜻을 이루어주소서. 이것이 필요하고 저것이 필요합니다. 이 일을 이루어주시고 저 일을 이루어 주소서.” 그러나 마지막에는 반드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여 진심으로 아뢰기로 합시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우리의 뜻보다 크고 깊고 정밀하고 실제적임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보다 크고 넓고 현실적임을 신뢰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확신으로 사셨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는 확신이 예수님을 그리스도가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든 제자들이 하느님 아버지를 깊이 온전히 아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추종자를 얻으려 하지 않으십니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듯이 당신의 말씀을 알아듣는 당신의 양을 찾기 원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참으로 알아듣는가를 반성해봅니다. 우리가 머리로 지어내고 우리가 우리의 필요에 따라 기대하는 예수님은 비록 예수님이라는 이름으로 추종되지만 실은 우상숭배의 일종에 가까울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난처하고 두려운 일입니다. 복음서의 말씀들은 그래서 소중합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정보를 구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뜻, 예수님의 사역, 성령의 역사가 이야기에 담긴 경전입니다. 외적인 일을 해결하는 데는 정보가 유용하지만 내적인 일을 해결하는 데는 깨우침이 유익합니다. 어떤 이들은 “성서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는 표어를 내세우며 “오직 성서가 하느님의 뜻을 알려준다”고 주장합니다. 신실한 믿음이야 칭찬받아 마땅하지만 이 분들은 종종 하느님의 뜻을 정보 수준으로 격하시킵니다. 마치 오늘 예수님께서 와서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그렇다고 말해주시오.” 하는 이들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외면적인 그리스도로서의 신분을 확인하려고 드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이 따르는 목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해와 기대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렇다. 내가 그리스도다” 하신다고 해서 이들이 "아 그렇구요. 이제 믿겠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이미 내가 그리스도라고 말했다. 그러나 너희가 어떻게 그것을 믿겠다는 말이냐? 그런 믿음이 정보를 얻는 차원이겠느냐? 너희는 진정 하느님의 뜻에 관심이 있느냐? 너희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얻으려는 구원 자체에만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냐? 하느님께서 너의 기대와 요청에 응답하시기를 구하기전에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원하시는 너희 자신의 변화에 대하여 준비가 되어있느냐?”
신앙적인 의미의 구원은 단순한 외적인 문제해결이 아닙니다. 우리가 영으로 하느님을 아는 일,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 우리가 삶으로 하느님을 받들고 예수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일이 구원이요,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입니다. “믿는 대로 되리니, 네가 원하는 것을 얻고 네가 세상에서 성공하고 만사형통하기 위해서는” 그저 믿음이 중요하다고 그저 열정이 중요하다고 그저 실천이 중요하다고 몰아치지 말아야 합니다. 잠잠히 하느님과 우리의 참된 관계를 묵상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신 예수님! 그러나 인간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며 “네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봐라!”고 조롱하였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며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얻었습니까? 밖으로 얻은 것은 무엇이고 안으로 얻은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떻게 달라진 삶을 살아오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 안에 “영원한 생명”을 얻었노라고 간증할 수 있습니까? 오늘 이 곳에서 우리는 예수님께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하고 나서 그 분께 무엇을 청하려합니까? *
<강론초록3>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따르는 삶 (요한 10:22-30)
하느님을 믿는 믿음은 하느님에 관한 교리를 지적으로 이해하고 동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얼핏 덧없어 보이는 나의 삶이 사실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능한 것임을 깨닫고, 그 하느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신뢰하는 일이 믿음의 내용입니다. 그런 신뢰 없이 다만 머리 속에 어떤 교리체계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고집하는 이들은 불행합니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좁은 생각과 판단에 사로잡혀 살기 쉽습니다.
물론 믿음에는 올바른 교리가 필요합니다. 성서와 전통과 이성에 근거한 올바른 교리를 알지 못하면 우리의 삶 가운데서 참된 하느님 체험을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교리는 우리 신앙의 내용을 분명하고 안전하게 해줍니다. 하지만 교리의 가치는 우리가 자기 믿음을 절대시하여 안주하고 교만하게 고집하도록 하지 않고 , 도리어 삶을 통해 계속되는 생생하고 다양한 믿음의 경험들을 늘 겸손하게 반성하도록 빛을 비추어 주는데 있습니다.
교리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 자체입니다. 교리가 믿음의 삶을 위해 있는 것이지, 믿음의 삶이 교리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대하여 자신의 물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에 대하여 매일 아침 눈뜰 때마다 놀라운 경외감과 감사함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무상(無常)해 보이는 우리의 생명이 그러나 신비한 기운으로 가득하여 무엇을 향하여 달려 나가고 있는지 그 지향(志向)을 물어야 합니다.
왜 우리는 무(無)가 아니고 나(自己)입니까?
우리는 무엇에서 기쁨과 행복을 누리고 무엇을 슬퍼하고 두려워합니까?
고통과 불행에 직면하여서도 왜 자살하지 않고 살아야 합니까?
점쟁이에게 인생을 상담하는 그런 물음 말고, 주님을 신뢰하고 우리의 삶의 신비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진지한 물음을 목마르고 배고프고 갈 길 모르는 양처럼 간절히 가져야 합니다. 그 물음이 우리를 참 목자이신 주님 앞에 서게 하고 그 분의 음성을 듣게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며 우리의 앞길을 가르치시고 인도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 곧 생명의 나라, 즉 새로운 차원의 삶의 질서로 우리를 살게 하십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성실한 실천이 우리를 주님의 뒤를 따라가게 합니다. 우리를 참되고 행복하게 살게 합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온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며... 옥좌 한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그들을 생명의 샘터로 인도하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주실 것입니다." 묵시록이 약속하는 소망입니다. 참 목자이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강론초록4>
“해결사 그리스도”와 “참 목자 그리스도”
우리는 그리스도, 곧 우리의 구원자를 고대합니다. 우리네 삶의 본질적인 어려움들, 피할 수 없는 힘들고 고통스런 현실과 문득문득 엄습하는 덧없고 허무한 느낌에 대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힘과 위로를 얻고 대답을 듣기를 원하는 것은 자연스런 소망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바라는 구원이 우리 삶의 외부적인 조건이 내가 원하는 대로 변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생각하기 쉬운데서 생깁니다. 나의 소원대로 병이 낫고 사업이 잘 풀리고 좋은 사람들 사이에서 지내는 것이 구원처럼 여겨집니다. 그래서 신앙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능하신 하느님께 복과 만사형통을 기원합니다. 그리스도라면 무엇보다 우선 우리 삶의 외면적인 환경을 확실히 변화시켜줄 수 있어야 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당신이 정말 그리스도라면 그렇다고 분명히 말해주시오.” 이 말은 이 천년 전 유다인들의 말인 동시에 바로 지금 우리가 예수님께 따지듯 드리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 유다인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 우리에게 우리가 바라는 대로 우리 삶의 외면적인 조건들을 변화시켜달라고 청하면서, 그런 변화가 보장되어야만 예수를 주님으로 모실 수 있겠노라고, 그러니 분명한 확약을 주십사고 졸라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유다인들이 기대하는 그런 “해결사 그리스도”가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은 “참 목자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렇다. 내가 그리스도로서 신적인 능력과 권위를 가지고 실패하지 않는 정치적 혁명을 주도할 터이니 나를 믿고 군사를 일으켜라”고 말씀해주면 좋았으련만 주님은 “너희는 내 양이 아니기 때문에 나를 믿지 않는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는 전혀 기대 밖의 엉뚱한 말씀을 하실 뿐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일까요?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마치 양이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따르듯이 그렇게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순종하는가 여부에 달려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외적인 삶의 형편이 달라지는 데서가 아니라 우리의 내면이 “영원한 생명”으로 채워지는데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우리의 영이 예수님의 영, 곧 성령으로 채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하시면서 수난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입니다.”하고 고백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신앙생활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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