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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초록/2013년도설교초록

2013년 6월 9일 (연중 10주일) 성서말씀

 

 

2013년 6월 9일 (연중 10주일 /녹) 성서말씀 / 콜롬바

콜롬바(아이오나 수도원장, 선교사, 597년), 에프렘(부제, 에데싸, 시인, 373년)

 

열왕상 17:(8)17-24

 
8 야훼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내렸다.
9 "여기를 떠나 시돈 지방의 사렙다로 가서 그 곳에서 살도록 하여라. 거기에 한 과부가 살고 있는데 내가 그 과부로 하여금 너에게 음식을 주도록 해놓았다."
10 그래서 엘리야는 그 곳을 떠나 사렙다로 갔다. 마을에 들어서 보니 한 여인이 땔감을 줍고 있었는데 과부였다. 엘리야는 그 여인에게 말을 건넸다. "목이 마른데 물 한 그릇 떠주실 수 없겠소?"
11 여인이 물을 뜨러 가는데 엘리야가 다시 불러서 말했다. "기왕이면 떡도 한 조각만 가져다 주시오."
12 여인이 대답하였다. "군 떡은 없습니다. 있다면 천벌을 받아도 좋습니다. 저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뒤주에 밀가루 한 줌과 병에 기름 몇 방울이 있을 뿐입니다. 저는 지금 땔감을 조금 주워다가 저희 모자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있는 것이나 모두 먹을 작정이었습니다."
13 엘리야가 과부에게 말하였다. "그렇게 걱정하지 마시오. 집에 들어가서 방금 말한 대로 음식을 준비하시오. 그러나 음식을 만들어 나에게 먼저 한 조각 가져오고 그 후에 아들과 함께 들도록 하시오.
14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내가 이 땅에 비를 다시 내릴 때까지 뒤주에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을 것이고 병에 기름이 마르지 아니하리라.'"
15 이 말을 듣자 과부는 곧 집 안에 들어가 엘리야가 말한 대로 하였다. 그리하여 엘리야와 과부 모자에게는 먹을 양식이 떨어지지 않았다.
16 엘리야가 전한 야훼의 말씀 그대로 뒤주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았고 병의 기름도 동이 나지 않았다.
17  이 일이 있은 후에 과부의 아들이 병들어 눕게 되었는데 병이 매우 심하여져서 마침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18 여인이 엘리야를 추궁하였다. "오, 하느님의 사람이여! 어른께서는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렇게 오시어 내 죄를 일깨워주시고 아들을 죽게 하십니까?"  19 그가 말하였다. "부인, 아이를 좀 봅시다." 그는 과부의 품에서 아이를 받아 안고 자기가 거처하고 있는 다락방으로 올라가서 자기 잠자리에 뉘었다. 20 그리고 그는 야훼를 소리쳐 불렀다. "오, 나의 하느님 야훼여, 당신께서는 기어이 제가 머무르고 있는 이 과부의 집에 슬픔을 내리시어 아이를 죽이시렵니까?"  21 그는 아이 위에 세 번 엎드려 몸과 몸을 맞추고 나서 야훼께 기도하였다. "오, 야훼 나의 하느님, 제가 당신께 기도합니다. 이 아이의 몸에 다시 생명의 호흡이 돌아오게 해주십시오." 22 야훼께서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아이에게 다시 생명의 호흡을 주시어 마침내 아이는 살아났다. 23    엘리야는 그 아이를 안고 아래층으로 내려와 아이 어머니에게 주면서 말하였다. "보시오. 부인의 아들이 살아났습니다."  24    그러자 여인이 엘리야에게 말하였다. "어른께서는 과연 하느님의 사람이십니다. 어른께서 전하신 야훼의 말씀도 참이심을 이제 알았습니다."

 

시편 146

1,2. 알렐루야! 내 마음 주님을 찬양하리라. 한평생 주님을 찬양하리라. ◯ 이 목숨 있는 동안 수금 타며 하느님을 찬양하리라.
3. 너희는 권력가들을 믿지 마라. ◯ 사람은 너희를 구해 줄 수 없으니
4. 숨 한번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고 ◯ 그 때에는 모든 계획 사라진다.
5. 복되어라, 야곱의 하느님께 도움 받을 사람! ◯ 자기 하느님께 희망을 거는 사람!
6. 하느님은 하늘과 땅, 바다와 거기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신 분, ◯ 언제나 신의를 지키시고
7. 억눌린 자들의 권익을 보호하시며 ◯ 굶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8. 주님은 묶인 자들을 풀어 주신다. ◯ 주님은 앞 못 보는 자들을 눈뜨게 하시고 거꾸러진 자들을 일으켜 주시며
9. 주님은 의인을 사랑하신다. 주님은 나그네를 보살피시고, ◯ 고아와 과부들을 붙들어 주시나 악인들의 길은 멸망으로 이끄신다.
10. 주, 영원히 다스리시니 ◯ 시온아, 네 하느님이 영원히 다스리신다. 알렐루야!

 

또는 시편30


1 주여, 나를 건져 주셨으니 높이 받들어 기리나이다. ◯ 원수들이 나를 보고 비웃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2 나의 주 하느님, 살려 달라 외치는 내 소리를 들으시고 ◯ 병들었던 이 몸을 고쳐 주셨습니다.
3 주여, 내 목숨 지하에서 건져 주시고 ◯ 깊은 구렁에 떨어지지 않게 살려 주셨습니다.
4 주님을 믿는 자들아, 찬양노래 불러라. ◯ 그의 거룩하신 이름에 감사기도 바쳐라.
5 그의 진노는 잠시뿐이요 그 어지심은 영원하시니, ◯ 저녁에 눈물 흘려도 아침이면 기쁘리라.
6 마음 편히 지낼 때에는 스스로 말하기를 ◯ 이제는 절대로 안심이다 하였는데
7 나를 어여삐 여겨, 산 위에 든든히 세워 주시던 ◯ 주께서 외면하셨을 때는 두려워 어쩔 줄 몰랐습니다.
8 주여, 이 몸은 당신께 부르짖으며, ◯ 당신의 자비만을 구하옵니다.
9 이 몸이 피를 흘리고 땅 속에 묻힌다 해서 ◯ 당신께 좋을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 티끌들이 당신을 찬미할 수 있으리이까? ◯ 당신의 미쁘심을 알릴 수 있으리이까?
10 주여, 이 애원을 들으시고 불쌍히 여겨 주소서. ◯ 주여, 부디 도와주소서.
11 당신은 나의 통곡하는 슬픔을 춤으로 바꿔 주시고 ◯ 베옷을 벗기시고 잔치옷으로 갈아입히셨습니다.
12 이는 내 영혼이 끊임없이 주님을 찬미하라 하심이니 ◯ 주, 나의 하느님, 그 은총 노래에 담아 영원히 찬양 하리이다.

 

갈라 1:11-24

11 형제 여러분,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말해 둡니다. 12 이 복음은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나에게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13 내가 전에 유다교 신자였을 때의 소행은 여러분이 다 들었을 터이지만 나는 하느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였습니다. 아니, 아주 없애버리려고까지 하였습니다. 14 나는 그 때 내 동족 중 동년배들 사이에서는 누구보다도 유다교를 신봉하는 데 앞장섰으며 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도 훨씬 더 열성적이었습니다. 15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내가 나기 전에 이미 은총으로 나를 택하셔서 불러주셨고 16 당신의 아들을 이방인들에게 널리 알리게 하시려고 기꺼이 그 아들을 나에게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 때 나는 어떤 사람과도 상의하지 않았고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사람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곧바로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갔습니다. 18 그리고 삼 년 후에 나는 베드로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보름 동안을 지냈습니다. 19 그 때 주님의 동생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는 만나지 않았습니다. 20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이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알고 계십니다.

21 그 뒤에 나는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갔습니다. 22 그래서 유다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나를 직접 대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23 그들은 다만 전에 자기네를 박해하고 그 교를 없애버리려고 하던 사람이 이제는 그 교를 전파하고 있다는 소문만 듣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24 내가 하는 일을 두고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루가 7:11-17

11 얼마 뒤에 예수께서 나인이라는 동네로 가시는데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도 함께 따라갔다. 12 예수께서 성문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마침 죽은 사람을 메고 나오는 장례 행렬과 마주치시게 되었다. 죽은 사람은 어떤 과부의 외아들이었고 동네 사람들이 큰 떼를 지어 과부와 함께 상여를 따라오고 있었다.
13 주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울지 마라." 하고 위로하시며 14 앞으로 다가서서 상여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 때 예수께서 "젊은이여, 일어나라." 하고 명령하셨다.
15 그랬더니 죽었던 젊은이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16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 위대한 예언자가 나타나셨다."고 말하기도 하였고 또 "하느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와 주셨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17 예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근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본기도> 위로하시는 하느님, 성자 예수를 통하여 고통과 죽음의 신비를 보여주셨나이다. 비옵나니, 우리가 고통 속에서도 주님의 수난을 기억하고 더욱 주님과 연합하여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1>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느님 (루가 7:11-17)

 

교회력에 따라 성삼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펼치신 구원 사역을 기념하여 왔습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기, 주님의 탄생을 기뻐하는 성탄절기,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며 부활을 준비하는 사순절기, 구원사역의 절정인 수난과 부활절기, 승천일과 성령강림일, 그리고 삼위일체 주일까지! 우리는 참으로 드라마틱한 시간의 흐름을 반년 넘게 경험하며 은총 속에 지내왔습니다.

 

우리는 다시금 그 구원의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존재, 우리 삶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를 확인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유한한 존재로서의 우리의 “죽음”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나인성의 과부의 외아들인 젊은이를 다시 살리신 이야기를 전합니다.

 
우리 현대의 신앙인들은 이미 실증적인 사고방식에 물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건이 “사실”로 증명이 되어야만 비로소 그 사실로부터 거짓이 아닌 참된 “의미”가 가능하다고 믿는 이들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은 실제 “사실”의 증거를 요구하고 확인하여 쌓아올리는 인식체계가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새로운 눈이 뜨이고 귀가 열리는 위로부터의 선물입니다. 토마처럼 “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아야만 믿겠다”는 태도는 나쁜 것으로 비난받을 일은 아니지만, 복된 것으로 칭찬받을 일도 아닙니다. 행복한 믿음은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성경의 기적 이야기를 비록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지만 무조건 사실로 굳게 믿어야 한다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의 기적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러나 너무나도 분명한 우리 삶의 진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모두 태어나서 어김없이 죽습니다. 오늘 복음말씀이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도 그 젊은이처럼 얼마든지 실제로 죽었다가 살아날 수 있고, 따라서 우리도 죽은 이를 두고 그런 이적을 경험하기 위해서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는 그런 수준의 말씀일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생명과 삶의 주관자이시라는 것, 곧 “죽은 이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로마4:17참조) 분이라는 것! 우리의 믿음은 바로 그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사랑의 관계를 신뢰하는 것이지, 우리가 확신하는 어떤 “사실”에 매달리는 것이 아닙니다.
 
과부의 외아들의 죽음이란 우리 인간에게 불행이 겹치고 겹쳐서 모든 희망이 산산조각 난 상태를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보이신 기적은 하느님께서 그 절망에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서에서 죽은 이가 살아나는 기적은 단순히 죽은 이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죽은 이의 입장이라면 살아났다가 다시 죽는 번거로움(?)보다 하느님 품에 평안히 지내는 편이 더 나을 지도 모릅니다. 다시 살아나는 일은 산 이와 죽은 이가 절망적인 관계에서 함께 회복되는 기적입니다. 되살아난다 해도 일상의 삶으로 돌아올 뿐이고 그 일상이란 살아있는 이들에게는 그저 평범한 하루하루일 뿐입니다. 중요한 건 우리가 일상을 살아있는 우리에게 허락된 여러 차원의 관계들을  정말 진지하고 소중히 여기고 감사하며 살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살아난 이는 결국 다시 죽겠지만 되살아난 그가 깨달은 삶의 기쁨과 관계에 대한 통찰은 생생하고 깊은 체험일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인성의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이야기는 우리에게 부활(復活)의 깊은 의미를 가르칩니다. 

 

우리 모두는 종종 죽음의 권세에 휘둘려지고 참담하게 쓰러지는 “죽음”을 경험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 때에 주님께서 우리를 참으로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맺어온 소중한 관계를 파탄 냅니다. 비통한 슬픔으로 맞는 죽음은 삶에 대한  부정입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으나 죽음은 우리 삶의 부정이 아니라 완성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죽음에는 주님의 임재가 함께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모든 생명의 주인이심을 깨닫고 고백합니다. 모든 죽음 앞에서 좌절하거나 냉소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죽음에 하느님께서 어떻게 함께 하시는 지를 늘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성경은 예수님께서 젊은이를 되살리시자 젊은이는 말을 하기 시작하였고 예수님은 그 아들을 어머니에게 돌려주었다고 표현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죽음을 구원하십니다. 죽은 이의 죽음은 무참하게 빼앗긴 죽음이어서는 안됩니다. 죽은 자와 산 자는 하느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죽은 이의 말을 살아있는 이의 말인 것처럼 충분히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이 우리 자신의 상실이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 안에서 참된 자신을 되찾는 일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과 죽음은 하나이어야 합니다. 죽음을 전제로 삶을 살아야 하고 삶을 완결짓는 마음으로 죽음을 대해야 합니다. 살아가는 나와 죽어가는 나가 늘 깊이 대화하고 존중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문자적인 의미의 소생이 늘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의미의 부활은 죽음의 권세를 꺽으신 주님께 우리 삶을 맡기고 믿음을 고백하는 순간마다 우리에게 허락되는 새로운 생명의 현실입니다.
주님은 죽은 우리를 살리시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