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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야기- 신앙체험의 정리와 반성/성공회이야기

동성애용인문제와 세계성공회의 분열위기에 대한 의견(옮김)

올초 성공회 관구게시판에 올라온 글 중에서 두 개의 게시글을 옮깁니다.
견해가 비교적 솔직하고, 분명하고, 신학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듯 하여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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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용인문제와 세계성공회의 분열위기에 대한 의견

글쓴이 : 용기없는이 (2007.1.27 - 04:41)

주낙현 신부님의 글을 계기로 표면화된 신학적인 논쟁에 저도 한 말씀 드리렵니다.

저는 한국성공회의 한 신자로서 동성애 주교 서품 문제로 세계성공회가 분열의 위기에 처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장차는 한국성공회에도 그 여파가 밀려와 서로가 동성애 문제에 대한 서로의 입장을 확인하고 적과 동지를 구분하려 들겠지요.

결론부터 말하면 저는 동성애 주교 서품은 전적으로 미국성공회가 고민하고 결정할 문제이지 다른 관구에서 세계성공회의 일치를 위협하는 문제로 확대시킬 사안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해결을 위해서 벌이고 있는 작금의 과정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는 주낙현신부님의 견해에 대체로 동의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또 어떤 분들이 댓글을 달아서 인신공격에 가까운 발언들을 하시겠지요.
성공회 사람의 댓글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주낙현 신부님의 글은 말씀 그대로 신학적인 성찰입니다. 신학적 성찰을 표현하지 말라니... 그 무슨 성공회 교인 답지 않은 말씀입니까? 정말 문제가 되는 것는 "신학적 성찰"이 아닌 "신앙적인 공격"입니다.

무엇이 위험합니까? 자신의 신학적인 성찰을 말하는 것이 위험합니까?

정말 위험한 것은 아무 생각없이(스스로의 반성없이, 타인에 대한 배려나 존중없이) 자신의 신앙의 기준으로 남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성공회의 사제가 보여주어야 하는 태도는 남을 나의 신앙으로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의 신앙을 존중하며 신학적으로 대화하는 태도입니다. 저는 주신부님이 용기있게 그 길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난과 욕설은 사실 쉬운 길입니다.

성서에 동성애가 "죄"라고 언급되어 있다는 정도를 누가 모릅니까? 구약성서의 율법에 따르자면 돼지고기만 먹어도 죄가 아닙니까? 그러나 죄의 문제가 그렇게 단순한 규정으로 해결될 문제입니까?

성서에 노예제도는 긍정이 되어있어서 그리 오래 인류는 노예제도를 지켜왔는가요? 노예제도가 폐지된 것이 언제인가요? 그나마 영국성공회 교인들의 노력이 크게 이바지 하지 않았던가요?

신학적 성찰에는 같은 고민과 같은 수준의 신학적 성찰로 답하면 좋지 않을까요? 
저는 가령 대한성공회 주교님의 공식입장같은 것이 문제의 본질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공식입장이 어떤 신학적 성찰에 근거했는가, 그리고 어떤 교회공동체의 합의절차를 거쳤는가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봅니다.

사실 지금 세계성공회의 위기도 동성애 문제 자체에서 기인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교회사에서 많은 교파들이 성경해석에 있어서 자기들의 상황속에서 자기들의 입장을 고집하며 분리의 길을 걸었습니다. “내가 옳고 네가 틀리니” 함께 할 수 없다는데 누가 그 분열의 길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특이하게도 성공회는 분명 다른 신학적 입장의 교회들이 이른바 "시카고-람베스 4개조"와 같은 최소한(어쩌면 최대한)의 기준을 함께 하며 서로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존중해온 것이 특징이고 자랑이라고 봅니다. 지금 문제는 그 자부심이 참담히 깨질 분열의 위기에 있는 것이지요.

미국성공회를 비난하며 분열의 길을 "의롭게" 걸어가는 것은 대단해 보이지만 사실 그리 어려운 선택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 정도 분별과 결단의 능력을 자랑하는 것은 제 생각에는 유치하고 경솔한 태도로 여겨집니다.

주교님이 동성애를 용인하는 미국성공회에 반대하는 공식적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걱정하시는 것은 미국성공회처럼 교회가 공식적으로 동성애를 죄가 아니라고 용인하는 것이 우리 교우들의 신앙생활에 심각한 장애가 된다고 여겨서이겠지요.

이해는 가지만, 묻고 싶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제 경험으로는 미국성공회의 동성애 용인문제와 대한성공회의 우리가 참된 신자로 살아가는 일은 그다지 심각한 연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깊이 따지자면 물론 연관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요.

그렇다면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물신주의에 대하여 교회는 어떤 태도입니까?
자원을 차지하려고 강대국이 일으키는 전쟁에 대하여 신앙인은 무어라 말합니까?
그대로 용인하면 신앙생활에 심각한 장애가 될 본질적인 문제는 산더미 같습니다.

정말 그렇게 복음에 충실하다면,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갈망한다면  동성애 문제에 쏟는 그 관심을 세상의 모든 불의를 향하여도 열정적으로 보여야 마땅한 일이 아닐까요?

저는 사실 위선적으로 삽니다. 그리고 저의 위선적인 삶을 그나마 사랑하고 감사합니다.
"시몬아, 자고 있느냐? 단 한 시간도 깨어있을 수 없단 말이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구나!"는 말씀을 제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을 수 있어서이죠.

저는 영원한 죄인으로 끝없이 주님의 자비를 구하고 싶습니다.

저는 저의 믿음으로 이 세상에서 완전하게 되어 도무지 죄를 짓지 않는 성인이 되어 여전히 죄짓은 이들을 정죄하고 비난하고 상종하지 않는 그런 신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저와 반대입장의 분들은 절대로 신실하게 사신다구요?

부럽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요한8:7) 하시는 말씀에 “기꺼이 제가 합지요” 나설 수 있으시니 좋겠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정말로 풀어야 할 문제는 성경에서 동성애가 죄인가 아닌가를 해석하는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 곁에 엄연히 우리와 같은 인간이 동성애자로서 삶을 살아가는데 그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들과 어떻게 더불어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가 아닐까요?

그들이 동성애를 통하여 우리와 사회에 자신들에게 분명한 해악을 끼치고 스스로도 불행해 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도와 동성애를 벗어나도록 해야 하고, 필요하면 정죄하고 규제하는 법을 만들어서 강제력을 동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성공회의 입장은 그리스월드 前수좌주교가 표현하듯이 “우리는 동성애자들을 통하여서도 성령의 빛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이 마땅히 인간다운 삶, 신자다운 생활의 기준에서 조금도 부족함없이 충분히 아름다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반박하려면 반대의 증거들을 충분히 많이 검토하고 드러내 보여야 할 것입니다. 반대의 증거를 들 수 없으면 좀 더 시간을 두고 판단을 유보해야 할 것입니다.

저 같은 이성애자더러 “너는 동성애자가 되어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강요한다면 참으로 황당한 일이듯이, 이제 “타고난” 경향으로 또는 “자유로운”(=책임있는) 선택으로 동성애자로 사는 사람들에게 “너는 동성애를 포기하고 이성애자가 되어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강요가 과연 타당한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동성애를 용인하는 입장이 교회의 권위를 무시하고 성경의 권위를 무시한다구요?
과연 미국성공회는 교회도 아니고 성경도 인정하지 않는 것일끼요? 
제가 이해하기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본질적인 문제는 신앙을 분별하는 권위로서의 “성서, 전통, 이성”에 얼마나 충실한가의 문제입니다. 이 때 “이성”은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결론내고 주장하는 인간적인 자기주장의 능력이 아닙니다. “이성”은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려는 인간의 진지한 반성 능력이고 그것을 서로 공감하고 대화할 수 있는 소통의 능력입니다.

“오직 성서로만 충분하고 오직 성서에만 충실하다”는 많은 이들이 그런 반성하고 소통하는 참된 “이성”의 능력을 부인한 채, 실제로는 성서의 문자적 이해를 고집하는 자기들의 제한된 이성을 내세우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성경의 권위란 무엇일까요? 성경은 하느님의 유언장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성경을 남기고 죽으시거나 떠나신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셔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의 권위는 성서의 쓰여진 문자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성경의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분별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에 성경은 신앙의 기준입니다.

성서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는 인간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알게 됩니다. 그 현존을 체험한 신앙인들의 고백들, 성자 아드님 체험, 성령 체험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우리의 삶에 적용하게 됩니다. 성서의 권위에 비추어 저는 예수님께서 동성애자를 정죄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고 믿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라면 동성애자를 대하시는 일이 예수님 당대의 세리나 창녀나 죄인들을 대하는 태도와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잣대로 인간을 판단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제 믿음은 “성경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라고 문자적인 이해를 강조하는 부흥사의 주장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그렇다 하는 것”을 전통(교회 역사속의 하느님 체험)에 비추어 보고 이성을 통한 해석(성령의 깨우침)을 통하여 이해하고 그 실제를 현실 속에서 경험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저와 다른 견해를 가지신 분들께 부탁드립니다.
뭐, 이 정도의 제 신학적인 설명에 설득되실 리가 없겠지요.
하지만 제 신앙을 공격하지는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가령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너는 성공회 신자일 수 없다, 알량한 이성으로 궤변을 늘어놓아 복음을 훼손하지 말아라, 나아가 너는 마귀들린 적그리스도다는 식의 황당한 말씀은 제발 말아주십시오. 저는 도리어 그런 말씀을 하시는 분이 정말 그리스도인이지 의심이 들고 정말 걱정이 되거든요.

장차 정말 신앙의 입장이 달라서 한국성공회의 우리도 갈라설 수 밖에 없다고 분열의 길을 걷게 된다면 어쩌겠습니까? 가능성으로 보면 가령 동성애를 용인하는 입장에서 먼저 분열하자고 주장할리는 없습니다. 동성애를 절대 반대하는 입장에서 용인하는 입장의 적그리스도(?)와는 함께 할 수 없다고 분열의 길을 밟겠지요.

저는 만일 제가 소수의 입장이 되어서 교회를 떠나게 된다하더라도 원망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일생을 살고자 하는 것이 유일한 소망일 뿐이고, 남을 정죄하여 내가 옳고 잘났음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으니까요.

다만 저와 다른 견해의 신실한 형제 교우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입장을 끝내 함께 하지는 못해도, 나와 다르다고 상대를 정죄하고 저주하는 일은 있을 수 없겠지요. 그러니 신학적인 대화는 계속해도 신앙적인 공격은 서로 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사실 세계성공회는 바로 이런 제 마음과 통하는 태도, 즉 현실적인 다름과 갈등을 인정하면서 “신학적인 대화를 계속하되 서로와 단절하는 것은 피하는” 입장으로 계속 유지되어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저는 동성애의 용인 문제가 세계성공회가 분열되어야 하는 이유로서는 모자란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미국성공회는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미국 정부의 불공정한 세계지배에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것 아닌가”의 문제제기로 공격하고 만일 미국성공회의 입장변화가 없을시엔 관계단절도 무릅쓰겠다는 아프리카 교회가 있다면... 하느님께서 빙긋이 웃으시며 편들어 주시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무지하게 길어졌네요. 읽어 주셔서 감사한데 혹시 너무 마음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무조건 비난말고 자상한 비판의 가르침을 주시면 경청하며 감사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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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동성애용인문제와 세계성공회의 분열위기에 대한 의견

글쓴이 : 분석 (2007.1.27 - 12:17)

지금 성공회가 당면하고 있는 위기에 대해서 이러한 생각을 적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일반적으로 언론에 보도되는 바는 성공회가 동성애의 문제로 분열의 위기를 맞고 있다고 하니까, 그렇게 이해하신 것도 당연합니다. 그리고, 단순히 그 문제로 분열의 위기가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정말 슬픈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읽어본 바로는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동성애 논쟁이 된 지는 이미 30 년 이상이 지났고 1998년 램버스 회의에서 이 문제가 많이 토론되고 다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제야 그 문제가 터졌다는 사실이 이러한 사실을 입증합니다. 이 논란의 배경에는 교회에 대한 이해와 그 논쟁 과정에서 생긴 신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문제입니다.

첫째, 캔터베리 대주교가 거듭 강조하는 교회에 대한 이해입니다.
교회는 성사적 공동체입니다. 이는 교회가 하나되기 위해서는 성사에 대한 일반적인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성애 문제 이전에 다른 어떤 신학적 이견보다도 여성 성직자 문제가 교회 일치에 가장 큰 문제를 제기하게 된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한 교구의 성직자가 다른 교구에서는 성직자로 인정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성사적 공동체의 정신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문제는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하기로 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지만, 그것이 진정 공교회의 정신에 맞는 해결책이었는지는 아직도 논의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동성애가 죄가 아니냐는 논의로 인해서 교회가 분열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사의 문제로 발전될 때, 문제가 제기되는 것입니다. 캐나다의 웨스트민스터 교구나, 현 미국 관구장이 관구장이 되기 전에 교구장이던 네바다 교구 같은 경우, 동성애자들의 결합을 축복하기 위한 축복식이 거행됩니다. 교회의 한 쪽에서는 죄라고 인정되는 것이 다른 쪽에서는 축복의 대상으로 여겨진다면 그것은 더 이상 성사 공동체로 보기가 힘들겠지요. 영국의 관구장인 캔터베리 대주교를 비롯해서 아일랜드의 관구장, 스코틀랜드의 관구장 등은 모두 동성애를 죄로 보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의 공통점은 동성애자를 서품하거난 동성애자의 연합을 축복하는 것을 안 된다고 선언했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로는 교회의 뜻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미국과 캐나다는 그렇게 교회를 이해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공회에 대한 이해가 완전히 다른 관구끼리 계속 하나의 공동체를 이룰 수가 있느냐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둘째, 동성애 지지자들의 이론을 들어보면, 의학적 이론, 심리학적 이론, 사회학적 이론, 그리고 자신들의 경험(그들은 이것을 성령의 움직임이라고 부릅니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기독교 윤리는 거기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이는 성서와 전통, 이성에 근거한 조직 신학에 바탕을 두는 것입니다. 지난 미국 관구 의회 때, 센타무 요크 대주교가 의회를 방문했었는데, 어느 한 사람이 현재의 논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대주교는 동성애 지지자들은 이에 대해 다른 사람들을 충분히 설득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성서적 근거를 대어서 설득해야 하는 데,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이론을 내면서도 성서적 근거를 거의 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기독교 전통애도 위배되기 때문에 전통을 들어서도 설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성에만 의존해서 신학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시 말하자면 동성애 지지자들의 대다수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신학의 방법을 포기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것이 더 이상 기독교라고 불릴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미국 관구는 사실상 성공회를 떠났다고 사려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단순히 헌장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사회 단체라면, 미국 관구의 결정은 교회 헌장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므로 절대로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를 신앙 공동체, 성사 공동체로 이해한다면, 이러한 공동체 정신을 떠난 행동이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캔터베리 대주교가 누차 강조하는 것처럼, 신학적 토론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교회의 정신에 따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 관구가 사실상 성공회를 떠났다면, 그것을 법적으로도 구체화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특히, 구체화 시키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한 지역에 한 관구만 있을 수 있다는 성공회 전통 때문에, 미국의 정통파 성공회 교인들이 설 자리가 없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성공회 정신을 제대로 지니고 있는 교회들이 미국 성공회를 떠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실지로 동성애를 찬성하더라도 교회의 뜻을 더 중요시하는 교인들까지 합하면 미국 내에도 정통파 교인은 1/3 이상 될 것입니다. 미국에 진정한 의미의 성공회 교회가 생길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현재의 관구는 성공회에서 분리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세계 성공회가 실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덧붙힌다면, 일반 언론에서, "분노"와 같은 표현을 자주 쓰다 보니, 이 논쟁의 양쪽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고 있다고 오해하기가 쉬운데, 실지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에 그들은 서로를 비판하면서도 친분을 유지하고 있고, 친분이 없다고 하더라도 미움의 동기에서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서로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실행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 성공회의 지도자들은 분열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만, 교회의 정신에 알맞는 옳은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