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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글

[설교 옮김] 너희가 이 시대의 희망이 되어라



최은식(도미닉)신부님(성공회 안중교회)의 이번 주일(2012. 7. 29)  설교 말씀을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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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29(연중 17주)/ 2사무11:1-15, 에페3:14-21, 요한 6:1-21

너희가 이 시대의 희망이 되어라

기독교는 언제나 그 시대의 희망이 되야합니다. 그래서 한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주님의 말씀으로 변화되고 치유되는 기적을 늘 경험하며 살아가게 해야합니다. 교회는 이 소명을 2천 년 동안 지속해 왔고 앞으로도 해야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 소명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레아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 따라왔습니다. 그런데 그 먼 곳까지 떼를 지어 예수님을 따라온 이유를 오늘 복음말씀은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기적을 단지 육체의 질병으로 한정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개인의 문제, 영적인 구원만을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언제나 총체적입니다. 개인구원이자 사회구원이요, 육체의 구원이자 영적인 구원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이 갈릴레아 호수를 로마 표기인 티베리아호수라고 동시에 기록하고 있는 것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지금 예수를 통해서 일어나고 있는 치유현상은 유다뿐만 아니라 로마, 이방인 세상도 이러한 치유가 일어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병은 죄와 연계해서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병자를 고쳐주셨다는 말은 죄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는 풀어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죄는 개인의 죄 뿐만아니라 공동체의 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뿐만아니라 온 세계가 아주 심각한 병을 앓고 있습니다. 저는 이 질병이 아모스 예언자의 말씀처럼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참된 가치관을 잃은 데서 오는 질병이라고 생각합니다.(아모8:11-12)

한 연구가는 지금 우리 사회의 병리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있는데 바로 자살과 저 출산이라고 했습니다. 이 두 현상은 단연 세계에서 1위입니다. 단군이래로 이렇게 풍요롭게 살아본 기억이 없습니다. 그런데 행복해야할 사람들은 삶을 포기합니다. 절망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 안에서 행복과 기쁨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젊은 부부가 아기를 낳으려 하지 않습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어쩌면 굶주리고 있는 군중의 현실, 지금 우리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치유해 내야합니다. 이것이 오늘 이 교회에 주신 사명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오천 명이나 되는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찾아 몰려왔습니다. 남자만 오천 명이니까 그 숫자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입니다. 이 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들을 다 먹일 수 있는 음식이 있는지 물으셨습니다. 왜 이런 물음을 물으셨을까요? 우리 안에 이들을 먹일 수 있는 양식, 이들의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 안에 있음을 깨닫게 하여 주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할 수 없다고 포기한 상황에서 천명이 넘는 군중의 굶주림을 해결하셨습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이 세상을 치유할 능력과 힘이 있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굶주리고 있는 이 많은 사람들의 문제를 푸는 키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병이어였습니다. 우리가 이 오병이어의 진리를 바로 깨달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이 세상을 밝혀가는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첫째,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는 관심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찾아 몰려왔습니다. 이 때 주님은 필립보에게 “이 사람들을 다 먹일 수 있는 빵을 우리가 어디서 사올 수 있겠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만한 돈도 없지만 설령 돈이 있다 할지라도 그 많은 음식을 구해올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주님께서 이렇게 물으신 것은 “단지 필립보의 속을 떠보려고 하신 말씀이었다.” 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제자들의 어떤 마음을 떠보려고 하셨을까요? 그냥 “내가 저들을 다 먹여주마!” 하시면 될 것을 구지 제자들의 마음을 떠보려 이렇게 하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주님이 지금 필립보에게 물으신 것은 필립보가 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필립보가 어떤 관심을 갖고 있는지를 묻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관심에서 시작합니다. 마음을 가면 결국 행동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모든 치유의 첫 출발은 관심에서 시작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관심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타계한 스티븐 코비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이 있는데 그 중 첫 번째가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관심이 전환입니다. 관심이 바뀌면 삶이 바뀌고 그 삶에서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1863년 미국 최대 석유회사를 운영했던 록펠러는 55세가 되는 해에 불치병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을 찾았다가 놀라운 것을 경험합니다. 병원로비에서 입원비가 없어 애원하는 한 어머니를 보고, 록펠러는 아무도 모르게 입원비를 지불해주고 소녀가 회복되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그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는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삶이 있는지 몰랐다.”고 말합니다. 이 때부터 자선 사업에 뛰어들어 무려 25억 달러를 기부했다고 합니다. 이 돈을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빌게이츠의 재산의 세배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관심이 바뀌어야 합니다.

때문에 제자들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굶주리고 있는 저 군중의 문제를 어떤 마음으로 보고 있는지를 물으신 것입니다. “나는 그럴만한 힘이 없어!” 라고 생각하고 포기하는 그런 마음이 아니라 비록 나에게는 그만한 힘이 없지만 그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할 수 있는 마음이 있는지 묻고 계십니다.

그러나 빌립보는 군중의 아픔보다 자신의 현실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저들을 다 먹이려면 200데나리온도 더 필요하다는 현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그것이 없다고 하는 자신의 현실만 보았지 지금 굶주리고 있는 군중의 현실을 자신의 문제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과의 차이였습니다.

어제 뉴스를 보았습니다. 현대 모비스가 협력업체는 압력을 넣어 17억이란 돈을 부당하게 받아냈다는 것입니다. 현대모비스는 동반성장하겠다고 서약한 업체입니다. 그런데 입으로는 동반성장하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현대모비스는 작년 한해 1조 8천억이란 이익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17억이란 돈을 가난한 중소기업으로부터 불법으로 받아낸 것입니다. 사실 현대 모비스에게 17억이란 별것 아닙니다. 만원을 가진 사람이 1원을 더 가졌다 해서 크게 어려워 지겠습니까? 그러나 하청업체는 생존과 관계된 돈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관심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나만 생각했지 중소기업이 겪고 있는 아픔에는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말합니다. 아직 세계와 경쟁하려면 아직도 우리가 남긴 이익은 적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패러다임을 바꾸라고 하십니다. 이웃의 아픔을 볼 수 있는 마음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모든 축복의 기본입니다. 때문에 참된 축복으로 가기 위해 교회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선포해야 합니다.

둘째,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는 희망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참 놀라운 것은 5천명을 먹이는 기적의 시작은 200데나리온이란 돈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빵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이가 갖고 있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였습니다.

제자들은 말합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빵 다섯 개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얼마나 작은 것입니까? 5천명에 비해 1명이 먹을 양식, 그것도 어린이가 먹을 양식입니다. 제자들은 이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보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렸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작은 것에 대하여 실망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주님은 그 작은 것을 “손에 빵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왜 제자들과는 달리 이 작은 것에 감사하셨을까요? 이것이 바로 우리의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크고 많은 것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진리가 아닌 것은 희망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이 가져온 이 작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빵 다섯 개는 욕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희망이요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오천 명을 먹이려면 200데나리온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세상이 보는 눈입니다. 여기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욕심과 이기심으로 가득 찬 200데나리온이 어떻게 희망을 줄 수 있겠습니까?

황창연 신부가 이런 말을 합니다.

“100년을 살아도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여 돈만 모으고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여기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저는 삼성이나 현대가 희망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희망이 되야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삽니다. 그래야 이 모진 병고로 아파하는 이 세상이 치유될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의 10에 일은 이웃을 위해 써야 한다는 가르침대로 내 삶을 나누고 섬기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희망입니다. 덤을 가르치며 이렇게 사는 것이 정이 넘치는 것이라고, 행복한 것이라고 가르친 우리 선조들의 가르침이 희망입니다.

태조 이성계의 스승인 무학대사의 스승인 나옹 스님은 이런 가르침을 주였습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이렇게 살아가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정말 이 시대에 희망이 되는 마음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할 때마다 그 일이 주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이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한 다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아무리 작더라도 그것은 작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욥기의 말씀처럼 그 시작은 작습니다. 그러나 그 나중은 창대 할 것입니다. 분명히 그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희망을 안고 비록 작은 것이지만 진리의 씨앗, 사랑의 씨앗, 나눔의 씨앗, 섬김의 씨앗, 평화의 씨앗을 지금 뿌려야 합니다.

셋째,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는 자기 포기입니다. 사랑과 헌신입니다. 실천입니다.

6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마음속에 하실 일을 작정하고 계셨던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5천명을 먹이시려고 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작은 나눔입니다. 우리의 작은 나눔, 작은 사랑의 실천이 기적을 만들어 갑니다. 이것이 주님의 방식이었습니다.

굶주린 5천명을 먹일 수 있는 힘은 5천개의 빵이나 200데나리온의 돈이 아닙니다. 한 어린이가 바친 이 순수한 사랑과 헌신입니다. 자기 포기입니다.

저는 이 자기 포기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배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지식이 있다고 되지 않습니다. 명예가 있다고 권세를 가졌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깨달은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어린이는 지금 자신이 먹어야할 양식을 기꺼이 포기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어린이를 등장시킴으로 젖먹이 어린이와 같지 않고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진리를 아주 유비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지금 내가 먹어야할 가장 소중한 것, 이것을 기꺼이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작은 나눔, 이 작은 헌신으로 5천명을 먹이는 기적을 만드시는 방식이 바로 주님의 방식입니다.

이 기적은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기적이 아닙니다. 그런 기적이라면 처음부터 시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를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런 기적을 만들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사회가 이런 기적을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국회가 이런 기적을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도, 교사도, 법을 다루는 법관도 이런 기적을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윗이 범했던 탐욕이 옷을 벗어버리고 세상을 향해 오병이어를 내 놓을 수 있는 우리가 되야하겠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은 나보다 더 큰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교회공동체는 주님이 하셨던 5천명을 먹이는 기적보다 더 큰 기적을 만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어린아이처럼 기꺼이 나누어야합니다.

이 사랑은 세상을 능히 구원하고도 남을 힘이 있습니다. 사랑은 생명의 힘이요, 창조의 힘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위기는 빵이나 돈의 상실이 아닙니다. 사랑의 상실입니다. 나눔의 상실입니다. 이 상실은 모든 것을 잃게 합니다. 양심을 잃게 하고, 도덕과 윤리를 잃게 하고, 정의와 평화를 잃게 합니다.

때문에 주님은 이 어린이의 사랑의 행위와 이 세상을 구원할 성체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작은 사랑의 나눔을 성체성사의 기적으로 보셨습니다.

21세기의 주제는 사랑의 회복입니다. 어떻게 하면 메말라 가는 영혼에 사랑을 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이 세상이 이 사랑의 힘을 느끼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린이처럼 기꺼이 나를 포기하는 것, 나의 것을 기꺼이 나눌 수 있는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생명까지 아낌없이 주셨던 것처럼, 당신의 살과 피를 아낌없이 주셨던 우리도 그런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오천 명을 먹일 수 있는 빵과 돈이 있기 때문에 먹일 수 있는 곳이 아니라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빵 다섯 개로 기적을 만들어 가는 공동체입니다. 이것으로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고, 소금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갖고 있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빵 다섯을 드리십시오.

결론으로 에페소 3장 17절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여러분의 마음속에 들어 가 사실 수 있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박고 사랑을 기초로 하여 살아감으로써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느님의 신비가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길은 지를 깨달아 알고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