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학이야기- 신앙체험의 정리와 반성/성공회이야기

성공회 신앙 전통

(홍영선신부님이 지으신 성공회교리해설서에서 옮깁니다)

성공회 신앙전통

⑴ 성공회 신앙의 3대 특징

위에서 영국 교회의 흐름을 대강 살펴보았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을 통해 성공회는 독특한 교회의 정신과 특징을 갖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많은 교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굳이 우리가 성공회를 선택한 것은 성공회만의 어떤 독특한 특징과 그것이 자신에게 매력으로 작용한 점도 있을 것입니다. 그 독특한 특징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관용성’(resonable tolerance faith)을 들 수 있습니다.

어떤 교단은 ‘자기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공회는 그러한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이요,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온 교회’가 오직 성공회만이라고 아전인수적인 주장도 하지 않습니다. 성공회 외에도 훌륭한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거룩한 신자들의 모임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신앙의 본질적 차원을 뒤흔드는 것이 아니라면 ‘서로의 다름’은 얼마든지 인정되고 용납될 수 있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비록 다른 그리스도교 공동체라 할지라도 그들이 역사 속에서 형성해 온 훌륭한 신앙의 유산들은 모두가 배울 가치가 있고, 오히려 그리스도교 신앙을 더욱 풍성히 하는 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공회는 ‘오직 우리 성공회만이 진리라고 주장하지 않고, 우리의 가르침은 거의 진리에 가깝다.’ 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름을 인정하는 ‘관용성’과 ‘포용력’이 성공회의 대표적인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둘째, 중용주의(中庸, via media)의 정신입니다.

이것은 영국 성공회가 16세기를 전후하여 교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격동을 겪으며 얻은 소중한 역사적 경험의 소산입니다. 중용을 특징으로 내세우는 교회라는 것은, 단순히 양쪽의 중간적 입장이라는 것이 아니라 영국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신구교 서로의 다름이 야기했던 무수한 피 흘림의 역사와 비그리스도교적 태도를 종식시키고, 서로의 다름 속에서도 면면히 흐르고 있었던 ‘서로의 같음’, 그리고 동서교회로 갈라지기 전 초대교회가 간직하고 있었던 ‘그리스도교 일치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도 어떤 분들은, 이 중용의 정신에 대해 비판하며 신교도 구교도 아닌 분명하지 않은 교회라고 폄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공회의 특징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해 본 이들은, 성공회가 신구교의 두 가지 큰 흐름을 충분히 담지하고 있는 훌륭한 전통을 간직한 큰 그릇의 교회라고 수긍을 합니다. 이러한 중용의 정신으로 인해 성공회는 어떤 극단적인 것을 고집스럽게 내세운다거나 어떤 특별한 모습을 보이고자 하지 않습니다. 다만 오랜 역사 속에서 전통으로 형성해 온 신앙의 경험을, 오늘의 현실 속에서 공동체가 공유할 수 있도록 이성적으로 반성해 가며, 또한 현대 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여러 사안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배제되지 않도록 배려해 갑니다. 그렇게 해서 하느님의 말씀이 오늘을 위한 복음이 되도록 끊임없이 개혁해 가고 있는 중도주의 교회입니다.

셋째, 모호성(ambiguity)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공회가 너무 포괄적이어서 모호하다고 불평처럼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왜 쉽게 이해하고 주장할 수 있는 분명한 교리체계를 내세우지 않는지, 왜 모든 사안에 대하여 어느 한편의 선명한 입장을 빨리 결정하지 않는지 답답하다고 하소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성공회의 그러한 성격이야말로 장점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복잡다단한 현실을 살고 있습니다. 이 현실 속에서 우리는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무엇인가를 결정하도록 요구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안에 대해 섣불리 결정을 내리고 정죄하였다가 그 결과가 뒤집히어 오히려 큰 낭패를 겪는 모습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이런 일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좀 늦더라도 시간을 갖고 천천히 사안을 다루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그 사안에 대해 빨리 결정하지 못해 모호하다는 비판을 듣더라도 진정으로 생명을 위한 길이 어디에 있는지 천천히 찾아보는 것이 훨씬 더 낫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비난처럼 이야기하는 모호함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성공회에서 이야기하는 모호성은 결코 현실에 대하여 둔감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단죄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진정한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는 속 깊은 태도입니다. 한 편의 입장만을 내세우고, 한 편의 주장만을 강요하는 태도가 아니라, 현실의 문제가 가장 하느님의 뜻에 맞게 해결되는 과정을 위해 오히려 가장 예민한 태도로, 모든 가능성 앞에 겸손한 태도로 기도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청하며 인내하는 정신입니다. 이것은 점점 다원화되고, 분권화되고, 정보화되어가는 현대에 더욱 빛을 발할 수 있는 성공회의 귀한 가능성이 될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이상의 세 가지 주요한 특징을 기반으로 하여 성공회는 동서교회로 분열되기 이전 초대교회와 공의회가 결정한 모든 교리를 지키며, 성서와 성사를 신앙생활의 중심으로 삼고, 학문에 대한 존중, 자국 교회로의 토착화에 심혈을 기울입니다. 로마카톨릭처럼 교황제도나 중앙집권기구, 또는 국제적인 교회법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세계 어디에 존재하든 자연스럽게 같은 전통의 교리와 예배의식을 가진 한 몸을 이룬 ‘세계성공회공동체’로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