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22일 (연중 3주일) 성서말씀
빈센트 부제, 스페인 최초의 순교자 304년
요나 3:1-4, 10
1 야훼의 말씀이 또다시 요나에게 내렸다. 2 "어서 저 큰 도시 니느웨로 가 내가 일러준 말을 그대로 전하여라." 3 요나는 야훼의 말씀대로 곧 길을 떠나 니느웨로 갔다. 니느웨는 굉장히 큰 도시로서 돌아다니는 데 사흘이나 걸리는 곳이었다. 4 요나는 니느웨에 들어가 하루 동안 돌아다니며,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는 잿더미가 된다."고 외쳤다. 10 이렇게 사람들이 못된 행실을 버리고 돌아서는 것을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뜻을 돌이켜 그들에게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시었다.
시편 62:5-12
5 내 영혼아, 오직 하느님 품 속에서 고이 쉬어라. ◯ 나의 희망은 오직 주님에게 있나니,
6 그분 홀로 나의 바위, 나의 구원이시며 ◯ 나의 요새이시니, 나는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7 내 구원과 영광은 하느님께 있으니 ◯ 나의 견고한 바위되신 주님께 피신하리라.
8 백성들아, 어떤 일을 당하든지 ◯ 너희는 하느님을 믿어라.
✤ 마음에 있는 걱정일랑 하느님께 쏟아 놓아라. ◯ 하느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다.
9 사람들은 숨결에 지나지 않으니, 높다는 것도 실은 거짓말, ◯ 모두 합쳐 저울에 올려 놓아야 역시 숨결보다도 가볍다.
10 남을 억압하면서 잘 되리라고 믿지 마라: 남의 것을 빼앗아 잘 살려는 생각도 버려라. ◯ 재물이 쌓인다고 거기에 마음 쏟지 마라.
11 하느님께서 한마디 말씀하실 때, ◯ 나는 두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12 힘은 하느님께 속한 것이며, ◯ 인자하심도 하느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주여, 당신은 각 사람에게 ◯ 그 행실대로 갚아주시옵니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1고린 7:29-31
29 형제 여러분, 내 말을 명심하여 들으십시오. 이제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살고 30 슬픔이 있는 사람은 슬픔이 없는 사람처럼 지내고 기쁜 일이 있는 사람은 기쁜 일이 없는 사람처럼 살고 물건을 산 사람은 그 물건이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31 세상과 거래를 하는 사람은 세상과 거래를 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보는 이 세상은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르 1:14-20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래아에 오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15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하셨다.
16 예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는 어부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시고 17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18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19 예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20 부르시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와 삯꾼들을 배에 남겨둔 채 예수를 따라나섰다.
<본기도> 은총의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회개하라 하셨나이다. 비옵나니, 우리가 부르심에 응답한 제자들처럼 옛 생활을 버리고 새 생명의 복음을 세상에 전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으로 이제와 영원히 사시며 다스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1>
“하느님의 나라”로 낚인 사람들 (마르 1:14-20)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복음서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어떤 분들은 “무슨 소리야? 오직 예수가 중요하지!” 하실 지도 모릅니다. 물론 복음서를 비롯하여 성경은 모두 “예수님이 우리의 그리스도이심”을 알리려는 의도로 기록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역사에 종종 나타나는 어떤 인간들처럼 자신을 위대한 존재로 끌어올려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자 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전하시려는 마음 뿐이었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성자 하느님으로 받는 일에도 예수님은 별로 기뻐하지 않으시며 “제자들아, 나를 무작정 높이는 일에 힘쓰는 그 노력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더 널리 깊이 세상에 전해다오.” 하실 지도 모릅니다.
제자들을 비롯하여 사람들이 “사람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보았다. 아들을 통해서 하느님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게 된 것은 예수님의 신적인 전지전능한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이 점에 오해가 없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배불리 먹여주셨기 때문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전하셨기 때문입니다.(요한6장)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과 죽음과 부활로 바로 그 영원한 생명을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인격 안에 바로 그 영원한 생명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영원한 생명의 내용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일, 하느님과 하느님의 아들로서 일치하는 삶입니다. 우리의 마음 안에 이루어진 하느님의 나라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 사는 세상 속에 이루어지는 영원한 생명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을 우리는 주님으로 부르거니와 본래 그 주님이란 호칭은 하느님을 향하여 부르던 것이었습니다. 세상에서는 황제들이 그 주님의 호칭을 듣고 싶어했습니다. 로마의 박해는 주로 그 호칭을 독점하려는 황제들의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를 때 그 분이 엄청난 위력으로 나의 운명을 좌지우지 하는 분이라는 느낌이 주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신 것은 바로 “하느님의 나라”를 전제로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시어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다는 것을 구원의 내용으로 이해하거니와 이 말씀도 하느님의 나라를 전제로 해야 의미가 있습니다. 죄를 대속받아 깨끗해진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가는 일이 구원의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가 받은 죄의 용서는 바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말합니다. 어떤 공간 장소에 들어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은총”을 깨닫는 삶이고 “진리”를 실천하는 삶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자비로운 주님으로서, 가장 인간적인 표상은 바로 돌아온 아들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고 반지를 끼워주는 아버지로서, 우리가 어떤 능력이나 권리가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사랑으로 우리의 자격을 회복시켜 주시고 잔치를 베풀어주십니다. (루가15장)
복음의 내용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는 소식입니다. 물론 그것은 어떤 사람들이 기다리는 모월 모일 모처에서 일어날 “휴거의 날”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를 사람들은 당시 유행했던 이른바 “묵시문학”적인 표현을 따라 초자연적인 왕국으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이들은 당시의 로마제국의 압제를 물리치고 회복하는 다윗시절의 왕국을 떠올리기도 했구요. 하지만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라는 내용으로 알려주십니다. 물론 이것은 바울로가 받은 계시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자비로운 아버지시고 우리는 그 자녀입니다. 그 분의 자비로움을 누리고 그 자비를 본받아 서로 행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살게 됩니다. 그것이 그저 빈 말로 전해지지 않도록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통하여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나누어주시는 성체성사를 세우시며 이 하느님의 은총을 기억하도록 당부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성령을 우리 몸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살게 된 것이지요.
제자들을 비롯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나라가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시작되었고 진행되고 있으며 장차 완성될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예배도 바로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하느님의 나라를 전제로 하여 하느님께 찬양과 감사를 돌리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원시종교처럼 우리는 하느님을 달래려고, 하느님을 기분좋게 하려고 예배를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예배를 드립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는 장차 완전히 이루어질 하느님의 나라를 오늘 이 순간으로 앞당겨 오는 일이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달리 표현하면 하느님의 현존, 하느님의 임재입니다. 하느님이 아니 계신 때가 없고 하느님이 아니 계신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우리 자신의 욕망과 인식을 비우고 하느님의 다스림에 순복하며 하느님의 함께 하심을 기뻐하면 우리는 그 분의 임재를 통해 영원한 차원을 맛보게 됩니다. 그 차원이 우리를 동물적인 존재에서 하느님의 자녀인 영적인 존재로 높여줍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현존은 단지 우리의 심리적인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감정적인 경험이 본질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이 세상에서의 삶을 사로잡는 힘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의 구조적인 힘들을 다스리는 권위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기도하는 것은 단순히 정치적인 권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모교회 출신의 장로 대통령이 나와서 그 교회 인사를 대거 기용하여 정책을 펴는 일이 얼마나 하느님 나라와 거리가 먼 일인가를 우리는 비싼 댓가를 치르며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자비가 이 세상에 그대로 실현되는 일입니다. 작게는 우리들의 작은 실천에서 크게는 우리들의 정치적인 선택에서 우리는 하느님이 살아계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 진실로 문제가 되는 불법(不法)의 기준은 우리가 제정한 법이 아닙니다. 법은 필요하면 개정하거나 폐지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준법의 기준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법에 합치하는 일입니다. 그 법은 사랑의 법입니다. 사랑의 법이라니 추상적이고 막연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그 법은 말 그대로 차별이 없습니다. 무전유죄 유전무죄 이런 것과 거리가 멉니다. 그 법은 사람들을 살리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본래 인간의 법도 힘을 가진 자들의 무제한한 욕망과 임의적인 판단과 무한정한 보복을 제한하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것도 같은 까닭입니다. 하느님나라는 사랑의 법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이 주님이 되시는 세상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길게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첫 번째 제자들로 어부들을 부르시며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제자들은 즉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그저 지나가던 낯선 이의 제안에 아무 생각없이 낚인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바로 “하느님 나라”에 낚인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하느님의 나라”, 그 하느님의 나라를 사람들에게 전하자는 권면에 공감하고 순종한 것입니다.
오늘 성전에서 함께 예배하고 성찬을 나누고 함께 애찬을 나누고 친교를 나누는 우리도 지금 “하느님의 나라”를 전제로 하여 모이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나라로 낚인 사람들이고 또 다시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을 하느님의 나라로 낚아야 하는 어부들입니다.
우리가 예배 가운데 드리는 봉헌은 바로 그렇게 하느님 나라의 어부들로 부름 받고 사명 받은 우리 자신의 삶을 감사로 바치는 일입니다.
또한 우리가 복음을 통하여 변화시켜가는 이 세상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임을 찬양하여 되돌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복음을 전하여 얻은 신자들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영광스럽게 되돌리는 일인 것입니다.***
<강론초록2>
우리는 정말 사람 낚는 어부 인가 ? (마르 1:14-20)
시계바늘은 끝없이 돌고 세월은 쏜살같이 흘러가지만, 우리 인간은 단순히 시간의 흐름에 실려 가는 존재가 아니라, 시간에 의미가 결합되어있는 “때”를 의식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특별히 신앙인은 하느님께서 주신 약속이 들어있는 시간, “때”를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고 선포하시며 인류를 향한 구원사역을 시작하시고,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당신 사역의 협력자가 될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통해 새로운 차원의 삶으로 비약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이 없다면, 곧 우리가 하느님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우리 삶은 태어나서 죽기까지 백년도 못되는 시간에 아웅다웅 일희일비 하다가 마침내 먼지로 돌아가는 인생입니다.
지혜는 바로 “때”를 깨닫는 능력이고, 인생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하느님의 나라”가 내 인생에 다가온 때를 깨닫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는 주님의 말씀은 사랑과 진리의 권고입니다. 인생을 돌아보지 않으면, 즉 회개하지 못하면 우리는 동물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동물에게는 나고 죽는 때 외는 “때”가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삶에 오시는 “하느님의 임재”입니다. 우리의 영과 교제하시며 우리들의 삶을 돌보시고 이 세상역사의 방향을 바로 잡으시는 하느님의 “다스림”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나라는 죽은 후에 “가는” 피안의 세계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랬다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온다”는 표현이 이상하겠지요. 하느님의 나라의 본질은 바로 지금 여기서 우리를 부르시며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살아계심”입니다. 영혼 깊은 곳에서 “나를 따라 오너라” 하시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면 우리는 이제 하느님의 나라에 속하게 됩니다.
인생은 우연과 덧없음이 아니라,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과 계획으로 된 것인데! 세상에는 왜 사는지를 모르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때”를 모르고, “하느님 나라”에 관심 없이, 사라져가는 세상에서 스스로 스러지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에게 “때가 다되어, 다가온 하느님나라”를 꼭 전해야 합니다. “사람 낚는 어부”는 바로 우리의 소명입니다. 수줍고 모자라고 약하고 겁 많은 우리이지만 우리는 용기를 내어 사람 낚는 어부의 길을 나섭니다. 애당초 그 길은 주님의 제안이고 약속이고 보장이기에! 우리는 떳떳하고 행복합니다!***
'설교초록 > 2012년도설교초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2년 1월 24일 (연중3주간 화 녹) 성찬례 성서정과 (0) | 2012.01.23 |
---|---|
2012년 1월 23일 (설날 월 백) 성찬례 성서정과 (0) | 2012.01.22 |
2012년 1월 21일 (아그네스 토 홍) 성찬례 성서정과 (0) | 2012.01.20 |
2012년 1월 20일 (파비안 금 홍) 성찬례 성서정과 (0) | 2012.01.19 |
2012년 1월 19일 (연중2주간 목 녹) 성찬례 성서정과 (0) | 2012.0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