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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초록/2013년도설교초록

2013년 4월 14일 (부활 3주일) 성서말씀과 강론초록

 

2013년 4월 14일 (부활 3주일) 성서말씀

 

사도 9:1-6[7-20]

1 한편 사울은 여전히 살기를 띠고 주의 제자들을 위협하며 대사제에게 가서 2 다마스쿠스에 있는 여러 회당에 보내는 공문을 청하였다.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은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눈에 띄는 대로 잡아서 예루살렘으로 끌어올 수 있는 권한을 받았다. 3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환히 비추었다.  4 그가 땅에 엎드러지자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5   사울이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6 일어나서 시내로 들어가거라. 그러면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는 대답이 들려왔다.
[7 사울과 동행하던 사람들도 그 음성은 들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벙벙해서 서 있기만 하였다. 8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끌고 다마스쿠스로 데리고 갔다. 9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못 보고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10 다마스쿠스에 아나니아라는 제자 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주께서 신비로운 영상 가운데 나타나 "아나니아야!" 하고 부르셨다. 아나니아가 "예, 주님, 말씀하십시오." 하고 대답하자 11 주께서는 "어서 일어나 '곧은 거리'라는 동네에 사는 유다의 집으로 가서 다르소 사람 사울을 찾아라. 사울은 지금 기도를 하고 있는데 12 그는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들어와서 손을 얹어 다시 눈을 뜨게 해주는 것을 신비로운 영상으로 보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13 이 말씀을 듣고 아나니아가 "주님, 그 사람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에게서 들은 바 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사는 주님의 성도들에게 많은 해를 끼쳤다고 합니다. 14    더구나 그는 대사제에게서 주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갈 권한을 받아가지고 여기 와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5 주께서는 그에게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래도 가야 한다. 그 사람은 내가 뽑은 인재로서 내 이름을 이방인들과 제왕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널리 전파할 사람이다. 16 나는 그가 내 이름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지 그에게 보여주겠다."
17 그래서 아나니아는 곧 그 집을 찾아가서 사울에게 손을 얹고 이렇게 말하였다. "사울 형제, 나는 주님의 심부름으로 왔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여기 오는 길에 나타나셨던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이 나를 보내시며 당신의 눈을 뜨게 하고 성령을 가득히 받게 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18 그러자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세례를 받은 다음, 19 음식을 먹고 기운을 회복하였다. 사울은 며칠 동안 다마스쿠스에 있는 신도들과 함께 지내고 나서 20  곧 여러 회당에서 예수가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시편 30

1 주여, 나를 건져 주셨으니 높이 받들어 기리|나이|다. 원수들이 나를 보고 비웃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2 나의 주 하느님, 살려 달라 외치는 내 소리를 들|으시|고 병들었던 이 몸을 고쳐 |주셨|습니|다.
3 주여, 내 목숨 지하에서 건져 |주시|고 깊은 구렁에 떨어지지 않게 살려 |주셨|습니|다.
4 주님을 믿는 자들아, 찬양노래 |불러|라. ∥ 그의 거룩하신 이름에 감사|기도|바쳐|라.
5 그의 진노는 잠시뿐이요 그 어지심은 영원|하시|니, ∥ 저녁에 눈물 흘려도 아침이면 |기쁘|리-|라.
6 마음 편히 지낼 때에는 스스로 말|하기|를 ∥ 이제는 절대로 안심이다 |하였|는-|데
7 나를 어여삐 여겨, 산 위에 든든히 세워 |주시|던 ∥ 주께서 외면하셨을 때는 두려워 어쩔 줄 |몰랐|습니|다.
8 주여, 이 몸은 당신께 부르|짖으|며, ∥ 당신께 자비만을 구|하였|습니|다.
9 이 몸이 피를 흘리고 땅 속에 묻힌다 |해-|서 ∥ 당신께 좋을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 티끌들이 당신을 찬미할 수 있으|리이|까? ∥ 당신의 미쁘심을 알릴 수 |있으|리이|까?
10 주여, 이 애원을 들으시고 불쌍히 여겨 |주소|서. ∥ 주여, 부디 |도와|주소|서.
11 당신은 나의 통곡하는 슬픔을 춤으로 바꿔 |주시|고 ∥ 베옷을 벗기시고 잔치옷으로 갈아 입|히셨|습니|다.
12 이는 내 영혼이 끊임없이 주님을 찬미하라 하|심이|니 ∥ 주, 나의 하느님, 그 은총 노래에 담아 영원히 찬|양 하|리이|다.
영광이 |성부|와 ∥ 성|자와|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아-|멘

 

묵시 5:11-14

11 나는 또 그 옥좌를 둘러선 많은 천사들과 생물들과 원로들을 보았고 그들의 음성도 들었습니다. 그들의 수효는 수천 수만이었습니다.
12 그들은 큰소리로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권능과 부귀와 지혜와 힘과 영예와 영광과 찬양을 받으실 자격이 있으십니다." 하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13 그리고 나는 하늘과 땅과 땅 아래와 바다에 있는 모든 피조물 곧 온 우주 안에 있는 만물이, "옥좌에 앉으신 분과 어린 양께서 찬양과 영예와 영광과 권능을 영원 무궁토록 받으소서!" 하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14 그러자 네 생물은 "아멘." 하고 화답했으며 원로들은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요한 21:1-19

1 그 뒤 예수께서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셨는데 그 경위는 이러하다. 2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는 토마와 갈릴래아 가나 사람 나타나엘과 제베대오의 아들들과 그 밖의 두 제자가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3 그 때 시몬 베드로가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 하자 나머지 사람들도 같이 가겠다고 따라나섰다. 그들은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나갔으나 그 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4 이튿날 날이 밝아올 때 예수께서 호숫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이신 줄을 미처 몰랐다. 5 예수께서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아무것도 못 잡았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6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보아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들이 예수께서 이르시는 대로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을 끌어올릴 수 없을 만큼 고기가 많이 걸려들었다. 7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베드로에게 "저분은 주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 옷을 벗고 있던 시몬 베드로는 몸에 겉옷을 두르고 그냥 물 속에 뛰어들었다. 8 나머지 제자들은 고기가 잔뜩 걸려든 그물을 끌며 배를 저어 육지로 나왔다. 그들이 들어갔던 곳은 육지에서 백 미터쯤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9 그들이 육지에 올라와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생선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빵도 있었다. 10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11 시몬 베드로는 배에 가서 그물을 육지로 끌어올렸다. 그물 속에는 백쉰세 마리나 되는 큰 고기가 가득히 들어 있었다. 그렇게 많은 고기가 들어 있었는데도 그물은 터지지 않았다. 12  예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들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중에는 감히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바로 주님이시라는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13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빵을 집어주시고 또 생선도 집어주셨다. 14 예수께서 부활하신 뒤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은 이것이 세 번째였다.
15 모두들 조반을 끝내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베드로가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16 예수께서 두 번째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17 예수께서 세 번째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는 바람에 마음이 슬퍼졌다. 그러나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분부하셨다. 18 이어서 "정말 잘 들어두어라. 네가 젊었을 때에는 제 손으로 띠를 띠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이를 먹으면 그 때는 팔을 벌리고 남이 와서 허리를 묶어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9 예수의 이 말씀은 베드로가 장차 어떻게 죽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될 것인가를 암시하신 말씀이었다. 이 말씀을 하신 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성자 예수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영원한 생명의 문을 우리에게 열어주셨나이다. 비옵나니,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우리가 성령으로 새로워져서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1>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19)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우리 시대에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과거에 비해 더욱 어려워진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가 “세계화”를 통하여 전 지구촌을 완전히 장악하여 물량중심의 가치관을 전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발전과 보편화로 인해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은 더 이상 전통적인 교리가 전제하는 소박한 우주관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교통과 정보의 발달과 공유로 이제는 종교가 다원화 되었습니다. 예전처럼 단 하나의 종교가 지배적인 사회가 아니라 다양한 종교가 동등한 권위를 내세우는 것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떠합니까? 세상이 내세우는 물질중심의 가치를 그리스도교의 영적인 가치로 분별하고 이겨내고 있습니까? 과학적인 세계관을 이해하면서도 신앙적인 세계관을 조화롭게 가질 수 있습니까? 다른 종교를 적대시하거나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그리스도교에 헌신과 충성을 다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세례를 받고 예배에 참여하고 종교적인 의무를 다하는 우리의 외형적인 활동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正體性)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나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육체나 소유는 우리의 정체성을 말해주지 못합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 우리 육신과 정신은 스러져갑니다.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는 어떨까요? 경험하거니와 우리가 세상에서 맺는 많은 관계도 참으로 덧없습니다. 하기야 나라고 하는 주체 자체가 무상한데 무상한 존재끼리 맺은 관계는 또 얼마나 무상한 일일까요?

예수님도 인간으로 나시고 사시고 죽으시면서 그 인생무상(人生無常)에서 예외는 아니셨습니다. 군중들은 몰려들었다가 등을 돌리며 떠나가고, 제자들은 배신하고 마침내 모두 흩어졌습니다. 열성과 혼신을 다한 주님 사역의 끝은 십자가에서 맞이한 비참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무상함에서 의연히 일어나 돌아오셨습니다. 살아계신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세상의 권세에 의해 끝장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으로 살아오셨습니다. 도망친 제자들에게 잊혀진 존재로서가 아니라 제자들 가운데 살아계신 스승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육신의 소생 자체가 아니라 이 상황의 역전이야말로 부활의 신비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하느님께서 우리네 무상한 삶에 베푸신 절대적인 은총입니다. 부활을 누리는 우리는 더 이상 인생이 덧없이 허무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요한복음은 그 예수님이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일곱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빵과 생선으로 “회식(會食)”을 베풀어주신 이야기를 전합니다. 우리가 먹고 사는 동안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하도록 해주시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의 성찬례(聖餐禮)가 바로 주님께서 차려주시던 회식의 그 자리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방금 잡은” 물고기를 가지고 이 자리에 참여합니다. 감히 아무도 묻는 이 없이, 주님의 현존이 너무나 분명하므로! 회식을 마치시고 주님은 특별히 베드로에게 세번 되풀이 물으십니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고 당부하십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하느님 앞에서 그 분의 물음을 통해 들어납니다. 일찌기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카인아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 하신 성부 하느님의 물음이 있었고 오늘 “요한의 아들 시몬아 ,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 물으시는 주님의 자애로운 음성이 있습니다. 우리의 부활체험은 오늘 이 음성을 듣는 일입니다.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 이 음성을 듣지 못하면 자기의 정체성을 엉뚱한 곳에서 찾으려 듭니다. 사랑이 우리가 누구인가 밝혀줍니다. 가장 큰 사랑이 가장 궁극적으로 우리를 존재하게 합니다. 사랑에 대하여 좀 더 생각해봅시다.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모두가 주님을 버릴지라도 자신은 주님을 따르겠노라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혈기에 찬 장담이 사랑을 지탱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부활하신 주님의 물음에 베드로는 혈기로 대답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생각하며 그 주님의 마음에 메아리로 대답합니다.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사랑을 힘으로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것이 우리들 생각입니다. 자녀가 원하는 것, 아내나 남편이 원하는 것, 부모님이 원하는 것을 척척 들어줄 능력이 있다면 사랑하는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울까요?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경제력을 갖는 것도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어떤 때 자녀, 배우자, 부모의 건강이 위험할 때 우리는 무력합니다. 어떤 때 자녀, 배우자, 부모의 사업이 기울 때 우리는 무력합니다. 어떤 때 자녀, 배우자, 부모의 마음이 외로울 때 우리는 무력합니다. 아무런 장담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때 우리의 그 무력함이 오히려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칩니다.

주님의 사랑 앞에 도리어 슬플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우리의 가난한 고백이 우리 사랑을 주님께 연결해줍니다. 신앙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그 사랑이 하느님의 사랑의 방식인 것을 우리도 그런 사랑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주신 그 사랑으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그 분이 그 사랑으로 우리를 신뢰하시며 다시금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도 베드로처럼 대답할 수 있을까요?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은 당부하십니다.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그 사랑으로 서로를 돌보는 일 그것이 교회공동체의 일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