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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초록/2013년도설교초록

2013년 7월 21일 (연중 16주일) 성찬례 성서정과 및 강론초록

 

 

2013년 7월 21일 (연중 16주일) 성서말씀 

 

아모 8:1-12

1 다시 주 야훼께서 보여주신 것은 다 1)익은 과일 한 바구니였다.   1)"익은 과일"이라는 말과 "끝"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비슷하다.
2 야훼께서 나에게 이렇게 물으셨다. "아모스야, 무엇이 보이느냐?" "다 익은 과일 한 바구니가 보입니다." 하고 내가 아뢰자, 야훼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내 백성 이스라엘도 그 모양이니, 이젠 될 대로 다 되었다. 더 용서해 줄 수도 없구나.
3 그 날이 오면, 궁궐에서 노래하는 여자들도 울부짖으리라. -주 야훼의 말씀이시다. 간 데마다 버려진 시체투성이가 되리라."
4 이 말을 들어라. 가난한 사람을 짓밟고 흙에 묻혀 사는 천더기의 숨통을 끊는 자들아,
5 겨우 한다는 소리가 "곡식을 팔아야 하겠는데 초하루 축제는 언제 지나지? 밀을 팔아야 하겠는데 안식일은 언제 지나지? 되는 작게, 추는 크게 만들고 가짜 저울로 속이며
6 등겨까지 팔아먹어야지. 힘없는 자, 빚돈에 종으로 삼고 미투리 한 켤레 값에 가난한 자, 종으로 부려먹어야지." 하는 자들아.
7 야훼께서는 야곱이 자랑으로 여기는 당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신다. "나는 이 백성이 한 일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8 그리하여 땅은 뒤틀리고 거기 사는 사람은 모두 찌들리라. 이집트의 나일 강처럼 부풀어올랐다가 잦아들리라.
9 그 날이 와서 대낮에 해가 꺼지고 백주에 땅이 캄캄해지거든, 모두 내가 한 일인 줄 알아라. -주 야훼의 말씀이시다.
10 순례절에도 통곡 소리 터지고 흥겨운 노랫소리 그치며 상여 소리 구슬피 퍼지리라. 모두들 굵은 베를 허리에 걸치고 머리를 밀며 외아들이라도 잃은 듯 통곡하리라. 마지막 날은 이런 비극으로 끝나리라.
11 내가 이 땅에 기근을 내릴 날이 멀지 않았다. -주 야훼의 말씀이시다. 양식이 없어 배고픈 것이 아니요,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야훼의 말씀을 들을 수 없어 굶주린 것이다.
12 이 바다에서 저 바다로 헤매고 북녘에서 동녘으로 돌아다니며 야훼의 말씀을 찾아도 들을 수 없는 세상이다.

 

창세 18:1-10

1. 야훼께서는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아브라함은 한창 더운 대낮에 천막 문 어귀에 앉아 있다가
2. 고개를 들어 웬 사람 셋이 자기를 향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들을 보자마자 천막 문에서 뛰어나가 맞으며 땅에 엎드려 3. 청을 드렸다. "손님네들, 괜찮으시다면 소인 곁을 그냥 지나쳐 가지 마십시오. 4. 물을 길어올 터이니 발을 씻으시고 나무 밑에서 좀 쉬십시오. 5. 떡도 가져올 터이니 잡수시고 피곤을 푸신 뒤에 길을 떠나십시오. 모처럼 소인한테 오셨는데, 어찌 그냥 가시겠습니까?" 그들이 대답하였다. "아! 그렇게 하여주시겠소?"
6. 아브라함은 급히 천막으로 들어가 사라에게 고운 밀가루 서 말을 내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고 이르고 7. 소떼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살이 연하고 맛있어 보이는 송아지 한 마리를 끌어다가 종에게 맡겨 빨리 잡아서 요리하게 하고는 8. 그 송아지 요리에다가 엉긴 젖과 우유를 곁들여서 손님들 앞에 차려놓고, 손님들이 나무 밑에서 먹는 동안 그 곁에 서서 시중을 들었다.
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부인 사라는 어디 계시오?" 하고 묻자, 아브라함은 사라가 천막에 있다고 대답하였다. 10. 그러자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내년 봄 새싹이 돋아날 무렵, 내가 틀림없이 너를 찾아오리라. 그 때 네 아내 사라는 이미 아들을 낳았을 것이다." 사라는 아브라함이 등지고 서 있는 천막 문 어귀에서 이 말을 엿듣고 있었다.

 

시편52

1 악명 높은 영웅이여! ◯ 네 어찌 악한 일을 자랑하느냐?
¶ 너는 어찌하여 경건한 사람에게 ◯ 저지른 악한 일을 쉬임 없이 자랑하느냐?
2 너는 자나깨나 해악을 꾸미고 ◯ 네 혀는 날카로운 면도날, 속임수의 명수로구나.
3 착한 일보다 악한 일을 더 즐기고 ◯ 바른 소리보다 거짓말을 더 좋아하니
4 남을 해치는 소리라면 ◯ 모두 좋아하는 사기꾼이로구나.
5 하느님께서 너를 박살내어 영영 없애 버리시리라: 장막에서 너를 끌어내어, ◯ 인간 세상에서 뿌리째 뽑아 버리시리라.
6 의인들이 그 꼴을 보고는 숙연해지고, ◯ 그를 보고 비웃으며 말하리라.
7 “하느님을 의지하지 않고 많은 재산만 믿고, ◯ 악행으로 세도를 부리더니, 저 꼴을 보아라.”
8 나는 주님의 집에 푸르른 올리브 나무같이 ◯ 한결같은 주님의 사랑을 믿고 살리라.
9 주님이 해주신 일 고마워 항상 찬미하리이다. ◯ 성도들 앞에서, 어지신 당신의 이름을 기리리이다.
 
시편 15

1 주여! 당신 장막에서 살 자 누구이며, ◯ 당신의 거룩한 산에 머무를 자 누구입니까?
2 허물없이 정직하게 살며 ◯ 마음으로부터 진실을 말하고
3 남을 모함하지 않으며 ◯ 이웃을 해하거나, 친지를 모욕하지 않는 사람,
4 주님 눈 밖에 난 자를 얕보되: 주님 두려워하는 이는 높이는 사람, ◯ 손해를 볼지라도 맹세한 것을 지키고,
5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주지 않으며, ◯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지 않는 사람,
¶  이렇게 사는 사람은 ◯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골로 1:15-28

15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시며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 분이십니다. 16 그것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 곧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왕권과 주권과 권세와 세력의 여러 천신들과 같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모두 그분을 통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그분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읍니다. 17 그분은 만물보다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속합니다. 18 그리스도는 또한 당신의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의 시작이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최초의 분이시며 만물의 으뜸이 되셨읍니다. 19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완전한 본질을 그리스도에게 기꺼이 주시고 20 그리스도를 내세워 하늘과 땅의 만물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셨읍니다. 곧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로써 평화를 이룩하셨읍니다.
 21. 여러분도 전에는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서 하느님께 적의를 품고 사악한 행동을 일삼고 있었습니다. 22. 그러나 이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의 몸을 희생시키시어 여러분과 화해하시고 여러분을 거룩하고 흠없고 탓할 데 없는 사람으로서 당신 앞에 서게 하여주셨습니다. 23. 물론 여러분은 튼튼한 믿음의 기초 위에 굳건히 서서 여러분이 이미 받아들인 복음의 희망을 저버리지 말고 신앙 생활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 복음은 하늘 아래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었고 나 바울로는 그 소식을 전하는 일꾼입니다. 24. 그래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꺼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25. 나는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따라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남김없이 전하기 위해서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26. 이 심오한 진리는 과거의 모든 세대, 모든 사람에게 감추어져 있던 것인데 이제는 하느님의 성도들에게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27. 하느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 드러내신 이 심오한 진리가 얼마나 풍성하고 영광스러운 것인가를 성도들에게 알리려 하신 것입니다. 이 심오한 진리는 곧 이방인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사실과 또 영광을 차지하게 되리라는 희망입니다. 28. 우리는 바로 이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고 성숙한 인간으로 하느님 앞에 서도록 하려고, 우리는 지혜를 다하여 모든 사람을 경고하며 가르칩니다.

 

루가 10:38-42

38. 예수의 일행이 여행하다가 어떤 마을에 들렀는데 마르타라는 여자가 자기 집에 예수를 모셔 들였다. 39. 그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40. 시중드는 일에 경황이 없던 마르타는 예수께 와서 "주님, 제 동생이 저에게만 일을 떠맡기는데 이것을 보시고도 가만두십니까? 마리아더러 저를 좀 거들어주라고 일러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41. 그러나 주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42.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성령을 통하여 우리와 늘 함께 하시나이다. 비옵나니, 일상 속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우리 곁에 계시는 주님을 항상 만나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1>

                               실상 필요한 한 가지 (루가 10:25-37)

 

제 경험으로 삶은 외롭습니다. 우리 모두는 각기 “자기”라는 고립된 개인으로 살아갑니다. 다른 이들의 불필요한 통제나 간섭 없이 홀로 살아가는 일은 어쩌면 소중한 평화일지도 모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홀로 편히 은밀하게 하는 신앙생활을 선호합니다. 교회공동체가 요청하는 봉사나 어울림을 부담스러워 하지요.

그런데 사람이 과연 홀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일까 의문입니다. 사람은 말 그대로 인간, 곧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살아가는 존재여서 사람의 참된 행복은 올바른 관계에서 경험됩니다. 우리의 속마음도 누구의 사랑을 깊이 받고 누구를 한없이 사랑한다는 느낌을 살고 싶습니다.
실은 본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이야기가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그런 사랑을 갈망하기 때문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어 영적인 진실로서 신의 사랑은 우리를 절대적으로 무한히 사랑한다는 것을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기억하게 되는 것이지요. 십자가를 정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동적인 과정의 사건으로 경험하는 일이 우리의 성찬례입니다.


우리가 신의 사랑을 받고 신을 사랑한다는 것 어떤 의미일까요? 인간으로서 어떻게 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감사하게도 우리는 신의 화신으로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건 정말 신비하고 심오한 신의 사랑이지만 우선은 우리가 한 인간을 사랑하는 방식이 신을 사랑하는 방식과도 연결된다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셨다고만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물론 우리 자신과 신의 관계와도 연결되어있구요.)

신을 사랑하는 일에서도 우리는 인간적인 경험을 무시하지 못합니다. 어쩌면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에 충실한 것일까요? 우리는 하느님을 열심히 대접해드리려고 애를 씁니다. 오늘 복음의 마르타와 같은 태도입니다. 정말 좋은 일이고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하지만 율법과 예언서가 하느님더러 읽으시라고 마련된 게 아니듯 그 골자인 황금률도 하느님께는 적용하면 안됩니다. 하느님께는 우리가 드리는 것들이 전혀 필요 없습니다. 아니 표현을 달리하면 우리가 드리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우리의 전 존재, 우리의 모든 관심과 사랑을 원하십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마리아의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의 헌신과 봉사를 받으시길 원치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섬기는 자로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물론 그 섬김은 단순한 시중, 곧 속된말로 시다바리 역할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가장 알맞은 때에 전해시어 우리를 성장시키고 행복과 기쁨을 누리도록 도우시는 역할입니다. 우리에게 말씀을 전하시고, 그 말씀을 통하여 성령을 전하시는 역할입니다. 그것을 알아차린 마리아는 가장 좋은 몫을 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대접받기 좋아하는 분인 것처럼 여겨 접대하는 일에만 골몰하는 마르타의 마음은 한편 아름다운 일이지만 지혜로운 일은 아닙니다. 함께 먹고 마시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시는 예수님이지만 예수님이 정말 기뻐하신 것은 당신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말씀을 통하여 하느님나라의 도래를 깨닫는 이들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주고 받기를 원하는 사랑의 진짜 내용은 무엇일까요? 보다 많은 이들과 친밀하게 지내고 원하는 것을 주고받는 관계일까요? 외향적이고 사교적인 사람들이 잘 한다는 이른바 인간관계, 인맥관리일까요? 어떤 자리에서든 잡담을 잘하고 분위기를 띄워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누리는 일일까요? 신나게 먹고 마시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일일까요?
자신의 존재, 자신의 진실, 자신의 깊은 고통과 슬픔을 있는 그대로 나누었을 때 진정한 마음으로 공감하고 함께 소망을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마리아는 예수님과의 잡담과 수다를 즐기고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마리아를 편애해서 기분을 맞춰주시는 게 아닙니다.

오늘 서신에서 바울로사도는 “심오한 진리”를 전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온 몸에 받기를 원합니다. 실상 하느님의 말씀은 알면 재테트에 도움되는 부동산 정보같은 차원이 아니고, 까페에서 다정히 주고받는 연애고백의 수준도 아닙니다. 철저히 세상을 갈라놓은 네편과 내편의 구분, 심하면 미움과 죽임에 이르는 차별과 억압의 구조를 전제로 합니다. 그 현실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모든 사람이 정의롭고 평화롭게 하나되게 하신다는 깨달음입니다. 그 실현을 위해 사랑의 수고로 참여하라는 요청입니다.

오늘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가 하는 오해는 인간적인 경험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조차도 우리가 어떤 만족을 얻는가를 기준으로 생각합니다. 디너쇼가 좋을까 토크쇼가 좋을까 고민하여 선택하는 것처럼 말씀도 봉사도 내 기준과 선호로 판단합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회복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반드시 사람들, 이웃들과의 관계로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한없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아무런 조건도 걸지 않으시고 대가도 요청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알리시어 일치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전하시는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이 됨을, 우리를 성령에 사로잡히게 하는 능력이 됨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일부가 아니라 우리의 전부가 하느님의 사랑의 대상입니다.

우리와 생각이 같은 이들, 전통과 관습이 같은 이들만 이웃이 아닙니다. 하느님 안에서 사람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우리의 새로운 이웃, 본래의 이웃입니다. 이웃이 되어 줄 마음이 우리에게 있으면 누구나 우리의 이웃이 됩니다.


마르타와 마리아 가운데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올바로 알아들을 가능성은 누가 있을까요? 얼핏 실천에 강한 마르타일 것 같지요? 하지만 마르타는 자기 선입견과 주견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입니다. 자기 마음에 드는 이에게는 잘 해주만 그렇지 않으면 똑같은 열정으로 냉대를 실천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마르타님, 미안해요. 예를 들기 위해 깍아 내립니다. ^^) 마리아가 진심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했다면 마리아는 자기가 판단한 싫고 좋음을 넘어서서, 있는 그대로의 이웃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얻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단 한 가지는 “은총을 깨닫는 일”이라고 봅니다. 지금 우리는 잘 짜여진 순서와 의식과 동작을 따르며 감사성찬례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이 전례는 기계적으로 은총을 생산하는 일종의 수단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 곧 하느님의 현존을 경험하는 자리입니다. 우리의 죄악과 고통과 죽음의 현실 가운데서 우리를 위해 용서와 위로와 생명의 새 관계를 이루어가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깨닫고 그 은총 안에 새로워지고 그 은총 안에 하나가 되는 자리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이 예배를 보고 쓸데없는 “시간낭비”라고 말하곤 합니다. 우리의 봉헌을 어리석게 속아서 행하는 어리석은 낭비라고 빈정거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은총을 깨닫는 이들은 이 시간낭비야말로 거룩하다고 표현합니다. 백년안팎으로 사라질 우리의 존재를 영원한 차원의 삶으로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봉헌을 하느님께서 거룩하게 변화시키셔서 이 땅에 하느님나라를 이루는 일에 쓰시기 위해 되돌려주신다고 고백합니다.

오늘 이 감사성찬례를 통해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우리는 우리 시대의 마리아들입니다. 우리가 택한 가장 좋은 몫은 “은총의 말씀을 통한 우리 삶의 거룩한 변화”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

 

<강론초록1>


                    참된 환대(歡待)는 경청(敬聽)입니다 (루가 10:25-37)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은 종종 우리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가령 하루 종일 일한 일꾼들에게나, 한 시간 일한 일꾼에게나 똑같이 대우한 ‘포도원주인의 비유’(마태 20:1-16)가 대표적입니다. 오늘의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는 쉽게 공감할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의 한 장면 같으면서도, 생각하면 할수록 그 의미가 알쏭달쏭해집니다.


우리가 선입견과 경험에 비추어 이 말씀을 읽기 시작하면 대개 마르타는 애써 남을 위해 일하고 봉사하는 이타적인 인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에 비해 마리아의 태도는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도리어 마르타를 나무라시고 마리아를 칭찬하시는 것에 당황하게 됩니다. 가령 교회 안에서도 몸을 아끼지 않고 여러가지 봉사를 하는 어머니보다도 뺀질뺀질^^ 하게 여겨질 정도로 몸을 사리면서 우아한 일만 좋아하는 어머니가 더 칭찬을 받는다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질 않는 것이지요.

이런 해석의 오해를 풀어봅시다. 우선 마리아의 태도는 결코 한가롭고 이기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놀러오신 예수님과 노닥거리며 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세상을 유람 다니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나라의 말씀을 전하시러 “머리 둘 곳 조차 없이” 외로이 떠도신 과정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전하신 말씀에 대한 권력자들의 반대와 모함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마리아는 그 말씀을 전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신” 그 예수님께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경청(敬聽)을 통하여 마리아는 여자의 몸으로 어엿한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의 촛점은 ‘봉사’와 ‘기도’를 대립시키는데 있지 않습니다. 중세에는 이 복음말씀이 사도적인 봉사를 하는 활동수도회보다 기도에 전념하는 관상수도회가 더 우월하다는 근거로 이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실은 ‘사도봉사직’과 ‘관상기도’는 양자택일 해야 하는 대립적인 일이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로 통일되어야 하는 하느님나라의 일이지요.

오늘 복음이 관심하는 것은 참된 ‘환대(歡待)’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우리 마음과 삶에 모시는 것, 곧 ‘참된 환대’는 예수님께 이것저것을 바치고 잘 해드리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향한 참된 환대는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敬聽)하여 그 분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가는 일입니다. 활동을 하든 기도를 하든 우선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할 것은 ‘세상의 소음’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미사에 와 계신 여러분 모두가 바로 ‘좋은 몫을 택한’ 복된 ‘마리아’인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