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옮긴글

성육신(聖肉身) 신앙과 성탄 (성공회신문 사설)

2018년 12월 22일자 성공회신문 사설원고

성육신(聖肉身) 신앙과 성탄

12월 25일, 성탄대축일의 법령상 명칭은 기독탄신일(基督誕辰日)이다. 그리스도교 국가가 아님에도 1949년에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근대화의 과정에서 그리스도교가 우리 사회에 기여한 바가 컸기 때문이었을까? 해방 직후에 어느 민족지도자는 “경찰서 열 개보다 교회 한 개가 더 긴요하다” 말했다 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성탄일이 여전히 사회 통합에 기여하는 축제일로 기능하고 있는 것일까? 성탄일의 기념일 지정이 지금 논의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의문이다. 현재 이 땅의 교회가 보여주는 사회적인 역할이나 영향력을 봐서는 국민의 공감과 지지를 얻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성탄 축하에 열심이기 전에 오늘 교회가 교회다운가를 먼저 성찰할 일이다. 교회가 반지성의 태도로 아무 성찰도 없이 자기 이익만 챙기며 틀에 박힌 주장만을 되풀이한다면 누가 예수의 성탄을 함께 기뻐하고 감사하겠는가? 


  교회의 성탄대축일은 단순한 생일축하가 아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일을 성육신(成肉身)의 신비로 기념하려는 뜻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 우리는 모두 그분에게서 넘치는 은총을 받고 또 받았다.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분이 하느님을 알려주셨다.” (요한 1:14,16,18) 


  요한복음의 증언에 따른 성육신의 신앙은 구원을 저 세상의 일로 여기지 않는다. 이 땅의 삶과 동떨어진 추상적 관념과 의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규정하려들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신자 개개인의 신념과 정서의 문제로 좁히지 않는다. 성육신 신앙은 이 세상의 죄악과 고통과 슬픔을 직시하고 그 현실에 깊이 참여하라고 요청한다. 그 참여를 통해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주님을 만날 수 있음을 가르친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은총과 진리 가운데 살아가는 길이다. 교리 지식을 잘 아는 일도 필요하고, 관상 기도로 마음을 비우는 일도 좋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은 세상의 한가운데서 우리와 함께하시는(임마누엘) 하느님의 은총과 진리를 누리는 일이다. 신앙은 우리 뜻대로 만사가 형통하고 천당복락을 누려야 한다고 하느님께 요구하는 일이 아니다. 물신(物神)을 높이며 경쟁하고 빼앗고 독점하는 일이 성공이라는 세상 속에서 신앙은 물신을 거절하고 하느님을 신뢰하며 서로 돕고 나누고 섬기는 새로운 질서를 이루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땅에 하느님 나라는 시작되었다. 하지만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나 이미 성취되었다. 교회는 바로 이 역설과 긴장 사이에서 살아간다. 교회는 '이상적인 교회' 건설이 목적이 아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무의미하거나 불필요하다는 생각도 큰 착각이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시작하고 완성하시는 하느님나라를 위해서 세워지고 이어진다. 교회는 2천년 전의 성탄을 기억하고, 오늘 임마누엘의 의미를 되새기고, 주님이 다시 오시기를 기다린다. 예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 성육신하셨듯이, 교회도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세상 속에 성육신한다. 예수께서 성육신으로 보이신 은총과 진리는 교회공동체의 신앙과 실천을 통해 세상에 전해져야 한다. 주님의 성탄을 성육신의 신비로 기념하고 감사하면 주님의 몸인 교회의 사명도 절로 자명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