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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야기- 신앙체험의 정리와 반성/성공회이야기

성공회 공동체의 삶에 대하여 - 미국성공회 의장주교 프랭크 그리스월드 발제문


미국성공회 의장주교 프랭크 그리스월드 발제문 -성공회 공동체의 삶에 대하여(2005.11.6. 2면)

http://www.agl.or.kr/view.php?id=plan&page=3&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61

성공회 공동체의 삶에 대하여

미국성공회 의장주교 프랭크 그리스월드

성공회 공동체의 삶에 대해서 말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저의 방문이 성공회 공동체 내의 자매 교회로서 동반자 관계를 증거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기쁩니다. 몇 년전 마태 주교님과 제가 함께 참석한 성공회 관구장 회의에서, 케임브리지대학의 데이비드 포드 교수가 성서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성공회 공동체는 지금 공동체가 되어 가고 있는 과정에 있다는 말을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공동체는 하느님의 선물

지난 몇 년 동안 그 교수님의 말을 생각하면서, 저는 공동체(Communion)라는 것이 인간의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점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공동체란 지상에서 단순히 서로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삼위 일체에 속하는 공동체의 영원한 삶 속으로 성령에 의해서 인도되어지는 우리 자신들에 관한 것입니다. 지상에서 공동체란 언제나 일정한 결함을 가지고 있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으로서 우리 자신의 죄와, 하느님의 방식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죽음을 통해서 하나의 몸속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나는 당신이 필요 없어”(1고린 12:21)라고 서로에게 말할 수 없습니다. 이는 공동체를 유지한다는 것이 성스러운 의무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내를 요구하고, 끊임없는 대화를 요구하며, 복음에 충실하기를 바라면서, 서로 차이가 나는 다양한 방식들을 이해하기 위한 순수한 욕구가 또한 필요합니다.

공동기도서는 생명의 빵과 구원의 잔을 함께 나누는 것에 기초

십자가의 피를 통해서, 이방인과 유대인들 사이를 갈라놓고 있는 벽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여기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은 모든 민족적 구분을 상징하는 것이며, 문화적 사회적 구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차이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차이는 화해되어야 하고, 공동체 안으로 서로 끌려 들어와야 합니다. 때문에 차이는 선물입니다. 모든 인간 안에서 드러나는 그리스도 현존의 완전성의 표현입니다. 그것은 바로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더 이상 개인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지체이며,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이라고 선언하는 바울로의 선포 안에 표현된 진리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은 모든 차이가 함께 모여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의 완전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것이 만들어졌으며, 인종과 국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방식을 통해 만물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성공회 공동체에 대해서 생각하면, 성공회와 성공회 전통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한미 성공회가 다같이 물려받고 있는 유산이기 때문입니다. 성공회 정신이 16세기에 교회의 정체성으로 등장했을 때, 그것은 교회가 공통의 기도라는 맥락 안에 함께 있어야만 한다는 것에 대한 다양한 이해들을 함께 포괄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었습니다. 한편에서는 유럽으로부터 해협을 건너서 불어 닥친 개혁의 긴급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과거로부터 이어온 가톨릭적 전통의 핵심적인 요소들, 특히 삼품성직, 신조와 성사와 같은 것들을 버려야 할 이유가 없다고 보는 영국적 보수주의가 있었습니다. 이는 성사와 사도적 사목에 뿌리를 두고 있는 교회에 대한 가톨릭적 이해와, 성서와 개인적인 구원에 우선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개혁 사이에 긴장을 야기하였습니다. 시작부터 성공회는 이처럼 긴장 가운데 있는 두 가지 다른 관점을 함께 포괄하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말씀과 성사 안에서 만나는 그리스도라는 근거를 가지고 이 둘을 포괄하려 했던 것입니다. 공동기도서는 그런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서 우리는 일치를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일치는 함께 기도하는 것에 기초하고 있으며, 생명의 빵과 구원의 잔을 함께 나누는 것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거냐 저거냐” 하는 것 보다는 “그리고 함께” 라는 입장은, 결국은 서로 모순적으로 보이는 것을 일치 속에서 함께 지켜 가는 일인데, 이는 성공회가 모호하고 불명확하다고 보는 사람들에게는 절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으로는, 긴장이야 말로 성공회 정신의 정수입니다. 물론 그것은 상호 존중하면서 은혜롭게 살아가는 것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 성공회 전통은 다양한 관점을 허락합니다. 그리고 진리란 단순히 한가지 관점 보다는 큰 것이라는 점을 인정합니다.

중도를 가르치는 전형적인 성공회적인 모임

여기서 요한복음에서 전하는 예수의 말씀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할 말이 많다. 그러나 너희들은 그것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면, 그 성령께서 그것을 이끌어 내 너희에게 알게 할 것이다”하셨습니다. 단순히 정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 그 자체인 진리란 항상 그 자신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드러낸다고 보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처럼” 진리를 파악하는 우리의 능력은 항상 새롭게 열리고 그리고 확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현실 중의 하나는 바로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셔 교회에 긴장을 유발하고, 때로는 일치에 긴장을 가져오는 그런 방식으로 우리가 나아가도록 초대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그런 예를 봅니다. 초대 교회는, 당신이 만약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그래서 진리의 길을 따른 자가 된다면, 그것은 당신 스스로 유대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보는 생각에 대해서 기쁘게 동의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는 이상한 순간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성령께서 사도 공동체의 범위를 갑자기 뛰어 넘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율법을 엄격하게 따르고 있지 않은 이방인들을 삶 속에서 자신의 활동을 드러내 보입니다. 그래서 그 공동체는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결국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율법의 많은 부분을 배제하고, 그 중에 중요한 것들을 유지하기로 합니다. 항상 중도를 가르치는 전형적인 성공회적인 모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 이야기를 보면, 정상적이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영역을 뛰어 넘어서 현조하기를 선택하시는 성령에 의해서, 공동체의 일치가 위기와 긴장을 맞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새로운 방향을 움직여 가면서, 처음 교회 안에 만들어졌던 그 긴장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긴장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저는 미국성공회의 삶 안에서 이러한 긴장이 결코 낯선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신합니다.

예를 들어 의학의 진보를 바라보면서, 그리고 새로운 진리들이 끊임없이 발견되는 현실 속에서 우리의 우주에 대한 이해도 변해가고 있습니다. 지식의 증대는 우리 삶의 여러 영역에서 일어나고, 마찬가지로 신학과 하느님에 관한 우리의 이해,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하는 하느님의 방식, 그리고 인간성에 대한 이해에서도 일어납니다.

성령은 복음이 특정한 상황, 곧 특정한 사회적 정치적 실제 속에서 자신을 드러나게 함

다시 “이거냐 저거냐” 와 “그리고 함께”라는 생각으로 돌아가 보려 합니다.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451년 칼케톤 공의회의 정의는 예수가 완전한 인간이며, 완전한 신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정통이라는 것은 두가지 명백히 모순되는 것을 동시에 진리로 유지하는 것입니다. 칼케톤 공의회가 극복하고자 했던 이단들은, 예수를 본질적으로 인간으로 보거나, 아니면 본질적으로 신이라고 보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입장을 택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오늘날 교회안에 일어나는 긴장을 바라보면서도, 이러한 태도를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예수가 누구냐 라는 질문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문제에 대해서 같은 생각을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 미국성공회 총회가 여성성직을 받아들인지 30년이 지났지만, 교회 안에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도 않은 채, 다양한 의견들이 존중받고 있습니다. 여성 성직자를 가지고 있는 교구들 중에서도, 여성의 사목을 환영하지 않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차이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비록 다수의 사람들이 여성 성직을 받아들이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 현실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입니다.

인간의 성문제에 대해서도, 지난 40년 동안, 동성애자들 안에서 이루어진 성령의 열매를 식별하기 위한 연구와 기도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성공회는 자신과 같은 성을 나누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끌리고 있는 남자와 여자들이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주교와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함께 참여한 총회에서 동성애 관계에 있는 주교의 선출에 대해서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이는 우리 교회가 다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문제를 완전히 풀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들 대다수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상호 존중하고, 우리가 함께 나누는 선교에 공통의 초점을 맞추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결정이 공동체 내의 여러 곳에서 많은 어려움과 긴장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관구 교회들의 삶은 다양한 차이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곳에서 시급하고 실제적인 문제가 다른 지역에서는 낯설고 동떨어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버지니아보고서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복음은 지역적으로 구현됩니다. 그리고 관구장 회의에서 개발도상국 관구장님 중의 한분이 지적하셨던 것처럼, 성령은 다른 지역에서는 다른 일을 합니다. 모든 관구들은 복음이 특정한 상황, 곧 특정한 사회적 정치적 실제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게 함으로써 복음을 살아야만 합니다.

교회의 선교는 하느님과의 일치로 모든 사람들을 회복시키는 것

다른 관구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성공회 안에서 우리는 비록 긴장 가운데 살아가지만, 하지만 언론보도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것이 항상 심각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미국성공회의 압도적인 현실은 제가 “다양한 중심”이라고 말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다양한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있고, 그리고 주교들을 포함해서 교회의 선교와 화해의 사역에 대해서 일차적인 관심을 두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국 공도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교회의 선교는 하느님과의 일치로 모든 사람들을 회복시키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간에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성취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세례 받고 서품 받음으로서 우리가 그것을 이루도록 불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대하고 상상하는 것 보다는 항상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으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한 몇 일은 저에게 크나큰 선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연대와 공동체를 새롭게 하는 기회였습니다. 공동체의 신비의 삶을 통해서 성공회 공동체 안에 있는 우리가 갈라지고 깨어진 세계를 향하여 복음의 핵심에 화해의 사랑이 있고, 그 화해의 사랑이야 말로 모든 차이를 함께 포용할 수 있고, 또한 그 차이를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