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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초록/2011년도설교초록

2011년 10월 16일 (연중 29주일) 성서정과 및 강론초록

2011년 10월 16일 (연중 29주일) 성서말씀 / 성가수녀원성당 축성

이사 45:1-7

1 야훼께서 당신이 기름 부어 세우신 고레스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의 오른손을 잡아주어 만백성을 네 앞에 굴복시키고 제왕들을 무장해제 시키리라. 네 앞에 성문을 활짝 열어 젖혀 다시는 닫히지 않게 하리라. 2 내가 너를 이끌고 앞장서서 언덕을 훤하게 밀고 나가리라. 청동성문을 두드려 부수고 쇠빗장을 부러뜨리리라. 3 내가 감추어두었던 보화, 숨겨두었던 재물을 너에게 주면 너는 알리라, 내가 바로 야훼임을. 내가 바로 너를 지명하여 불러낸 이스라엘의 하느님임을! 4 나의 종 야곱을 도우라고 내가 뽑아 세운 이스라엘을 도우라고 나는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 나를 알지도 못하는 너에게 이 작위를 내렸다.
5 내가 야훼다. 누가 또 있느냐? 나밖에 다른 신은 없다. 너는 비록 나를 몰랐지만 너를 무장시킨 것은 나다. 6 이는 나밖에 다른 신이 없음을 해 뜨는 곳에서 해 지는 곳에까지 알리려는 것이다. 내가 야훼다. 누가 또 있느냐? 7 빛을 만든 것도 나요, 어둠을 지은 것도 나다. 행복을 주는 것도 나요, 불행을 조장하는 것도 나다. 이 모든 일을 나 야훼가 하였다.

시편 96:1-9

1 새 노래로 주님을 /노래/하여라. ∥ 온 세상아, 주님을 /노래/하여/라.
2 주님을 노래하고 그 이름을 찬양하여라. 우리를 /구원/하셨다. ∥ 그 기쁜 소식 날마다 /전하/여-/라.
3 놀라운 일을 이루시어 이름을 /떨치/셨으니 ∥ 뭇 민족, 만백성에게 이를 /알리/어-/라.
4 높으신 주님을 어찌 다 /찬양/하랴. ∥ 신이 많다지만 주님만큼 두려운 신이 /어디/있으/랴.
5 뭇 족속이 섬기는 신은 모두 /허수‧ 아비/지만 ∥ 주께서는 하늘을 만드신 /분이/시-/다.
6 그 앞에 찬란한 영광이 |감돌|고 ∥ 그 계시는 곳에 힘과 아름다|움이|있-|다.
7 힘과 영광을 주님께 |돌려|라. ∥ 민족들아, 지파마다 주님께 영|광을|돌려|라.
8 예물을 들고 하느님 앞에 |나아|가 ∥ 그 이름에 어울리는 영광을 주|님께|돌려|라.
9 거룩한 광채 입으신 주님을 경배|하여|라. ∥ 온 땅은 그 앞에서 무|서워|떨어|라
영광이 |성부|와 ∥ 성|자와|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 ∥ 그리고 영|원히,|아-|멘

1데살 1:1-10

1 나 바울로와 실바노와 디모테오는 아버지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데살로니카 교회 여러분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깃들기를 빕니다.
2 우리는 언제나 여러분 모두를 생각하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할 때마다 3 여러분의 믿음의 활동과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꾸준한 희망을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4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택해 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5 그것은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이 그저 말만으로 전해진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굳은 확신으로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여러분을 위해서 어떻게 살았는지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6 여러분은 많은 환난 중에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을 가지고 말씀을 받아들여 우리뿐만 아니라 주님까지 본받았습니다. 7 그래서 여러분은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에 있는 모든 신도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8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으로부터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을 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하느님을 잘 믿고 있다는 이야기가 사방에 널리 퍼져 나갔으니 그 이야기는 더 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9 우리가 여러분에게 갔을 때 여러분이 우리를 어떻게 받아들였으며 또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려서 살아 계신 참 하느님을 섬기게 되었는지는 오히려 그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날을 여러분이 고대하게 되었다는 것도 그들이 널리 전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장차 닥쳐올 하느님의 진노에서 우리를 건져내 주실 분입니다.

마태 22:15-22

15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물러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의 말씀을 트집잡아 올가미를 씌울까 하고 궁리한 끝에 16 자기네 제자들을 헤로데 당원 몇 사람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이렇게 묻게 하였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진실하신 분으로서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꺼리지 않고 하느님의 진리를 참되게 가르치시는 줄을 압니다.
17 그래서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자 합니다.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18 예수께서 그들의 간악한 속셈을 아시고 "이 위선자들아, 어찌하여 나의 속을 떠보느냐? 19 세금으로 바치는 돈을 나에게 보여라." 하셨다. 그들이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오자 20 "이 초상과 글자는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셨다.
21 "카이사르의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대답하자 "그러면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22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경탄하면서 예수를 떠나갔다.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세상에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셨나이다. 비옵나니, 우리가 굳센 믿음으로 인내하며,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십자가의 진리를 전하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1>

                      카이사르가 하느님을 믿으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  오랫동안 많은 이들이 주님의 이 말씀을 정치와 종교와의 관계에 대한 분명한 입장정리의 말씀으로 알아들었습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라고 하셨으니 정치적인 문제는 통치자나 정치가들에게 맡기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라”고 하셨으니 우리 신앙인들은 교회 안에서 예배와 봉헌을 드리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좀 더 생각해볼 여지가 있을 듯 합니다.

우선 주님이 오늘 말씀하시는 상황이 특별합니다. “카이사르(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주님의 말씀은 어떻게 대답해도 올가미를 피할 수 없는 이 간교한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맥락을 살펴보면 주님의 이 말씀은 단순히 이러이러해야한다는 당위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간교한 그 물음의 의도를 깨뜨리는 지혜의 말씀, 곧 불순하고 얄팍한 의도를 깔고 예상된 대답을 기다리며 묻는 이에게 그 물음을 되돌리는 차원 높은 물음입니다.

예수님은 황제의 초상과 황제가 신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데나리온 동전의 존재를 통해 당대의 상황을 객관화시키십니다. 이 동전을 들고 다니는 이의 현실은 엄연히 로마제국의 식민지입니다. 유대왕국은 성전체제와 율법체계로 백성들의 일상을 통제하는 일종의 제정일치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정치권력은 이미 대제국 로마와 그 제국의 용인을 받은 헤로데(정통 유대인도 아닙니다) 왕가에 넘겨진 상태입니다. 그나마 남은 종교권력으로 백성들을 일상생활을 통제하는 이들이 유대의 지도자들입니다. 헤로데 왕가는 성전을 화려하게 지어 백성들의 환심을 샀습니다. 그 종교권력을 유지하는 이면에는 이미 정치적인 결탁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밑바닥의 백성들은 로마제국의 수탈과 유대 지도자들의 통제라는 이중적인 압제 속에서 허덕여야 했습니다. 민감한 양심을 가진 지도자라면 황제의 초상이 새겨진 동전 속에서 당대의 현실을 아프게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카이사르(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으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했던 이들은 “이 초상과 글자는 누구의 것이냐?” 는 예수님의 질문 앞에 “카이사르의 것입니다.”라고 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있는 하느님 백성의 나라, 그 처해있는 상황은 예수님이나, 올가미를 씌우려드는 바리사이파나 헤로데당원이나 모두 같습니다.  예수님의  “그러면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는 말씀은 그 식민지의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직시하도록 촉구합니다.  만유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돌려야 하는 모든 것들 가운데서 무엇을 카이사르의 것으로 인정할 것인지는 결국 우리에게 되돌려지는 물음인 것입니다. 올가미를 씌우는 일에 실패하고 그들은 가장 본질적인 물음을 되새기며 돌아가야 했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경탄해마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복음 말씀의 뜻은 단순히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야 한다는 상식적인 교훈이 아닙니다. 오늘의 우리에게도 정치와 종교와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세상의 논리와 가치와 권세를 따를 것인지, 복음이 전하는 논리와 가치와 권세를 따를 것인지를 우리는 정직하게 답해야 합니다.  물론 그 답은 종이 위에 옳다 아니다로 표현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직면한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기도하며 결단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세상을 살고 있고 세상에는 엄연히 카이사르 즉 세속의 질서가 있습니다. 역사적 과정을 거쳐 하느님을 자처하는 카이사르, 개인의 왕권으로부터 합의에 의한 선출된 민주적 정권으로 진보한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좌우간 세속의 질서는 우리가 무시할 수 없는, 때로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힘을 가진 현실입니다. 하지만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하느님나라의 질서라고 하는 새로운 질서를 경험하는 일이고 그 질서야말로 우리에게 궁극적인 평화와 행복을 보장한다는 것을 깨닫는 일입니다. 카이사르가 지배하는 땅의 질서에 대비되는 하느님이 다스리시는 하늘나라의 질서입니다.  

카이사르로 상징되는 정치와 하느님으로 상징되는 종교와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나누어질 수 있는 영역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 사람의 실존은 정치와 종교의 동시적인 영향 아래 있습니다. 어느 것이 더 필요하고 불필요하냐가 아니라 둘 다 중요하지만 어떤 권위가 더 우선적일까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것은 “카이사르의 것이냐 하느님의 것이냐”를 양자택일하는 일이 아니라, 카이사르의 것처럼 보여지는 현실 속에서 하느님의 주권을 깨닫는 일입니다. 단순히 영역(領域)의 문제가 아니라 차원(次元)의 문제인 것입니다.  

카이사르와 하느님의 차이는 단순히 인간이냐 신이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세속정치와 신정정치의 차이도 아닙니다. 결정적인 차이는 카이사르의 통치는 그것이 황제든, 대통령이든간에 권력에 의한, 힘에 의한, 타율적인 통치를 내용으로 한다는 점입니다. 이에 비해 하느님의 통치, 하느님나라의 질서는 하느님의 자기희생적 사랑에 의해서 불러 일으켜진 우리들의 자발적인 사랑의 응답을 그 내용으로 한다는 점입니다.  하느님의 주권이 권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랑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예수님 당시나 오늘의 우리들이나 모두 하느님의 주권이 카이사르의 주권을 몰아내고 신정정치를 펼쳤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과 무관한 저 세상의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권력에 의한 통치가 아니라 사랑에 의한 통치라는 의미로서 그것은 차원의 문제입니다. 차원은 분리되어 있지 않지만 구분됩니다.  
어째 말씀드릴수록 점점 더 어렵고 복잡해지는 느낌이라 죄송합니다.^^ 

세상살이를 하면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활동의 공간과 시간의 영역을 나누는 일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세상살이는 세상의 가치와 논리대로, 신앙생활은 교회안의 가치와 관습대로 “적당히” 살아가는 일이 아닙니다.
세상살이를 하면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우리 삶의 여러 차원을 깨닫고 분별하며 살아가는 일입니다.
가령 부부간의 관계에도 질서가 필요합니다. 아내가 남편의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은 카이사르에게서 배워온 질서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아내를 목숨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배우는 질서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권위 아래 있다는 것은 카이사르에게서 유추되어온 질서입니다. 그런데 자녀 역시 하느님 앞의 한 영혼이라는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배우는 시각입니다. 기업이 경쟁을 이기고 이윤을 내야 살아남는 것은 카이사르의 입장에서 당연한 현실입니다. 하지만 회사도 큰 차원에서 사회에 기여해야하고 이윤을 환원해야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은 신앙적인 진실입니다. 전쟁과 학살의 가해자를 적대시하는 것은 카이사르의 입장에서 자연스런 일입니다. 하지만 용서와 화해를 통해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것은 신앙적인 과제입니다.

카이사르를 떠받드는 일은 옳지 못하고 카이사르를 무시하는 일은 비현실적입니다. 카이사르의 존재를 인정하되, 우리가 지켜야 할 하느님의 질서를 잊지 않는 것이 최선입니다.
국가적 차원에서, 지구적 차원에서의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질서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할 수 있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것이 우리가 주님의 기도 속에서 염원하는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위에 이루어지는 일이겠습니다만 그 완성은 하느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마음 속의 작은 카이사르들, 우리 가정과 사회 속의 작은 카이사르들에게 열심히 더 깊고 높고 의미있는 가치와 질서, 곧 살아계신 하느님의 사랑과 뜻을 열심히 전해야 할 것입니다.  ✠

<강론초록2>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오늘의 복음말씀은 정말 짧지만 흥미진진한 드라마입니다.

“카이사르(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하는 질문은 어떻게 대답을 해도 올가미에 빠질 수밖에 없는 간교하게 의도된 질문입니다. 그 곤경에 처하여 예수님은 동전의 초상과 글자가 황제의 것이라는 데 착안하여 “그러니 세금은 황제에게 바쳐도 된다. 대신 하느님께는 다른 차원의 봉헌을 드리면 된다.”는 뜻으로 “그러면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하고 대답하시어 위기를 넘기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오랫동안 이 말씀은 이른바 정교분리(政敎分離)의근거가 되는 말씀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현실의 정치나 사회의 문제는 왕이나 정치인들에게 맡겨야 하고 교회는 현실을 초월하는 영적인 문제들을 다루어야 한다고 예수님이 가르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대답이 그런 의미라면 비록 번뜩이는 재치는 인정한다 하더라도 대답의 내용은 너무나 “뻔히 속 보이는 것”이어서 결코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낼 만한 것은 아닐 듯싶습니다.

그런데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사실 예수님은 지금 단순히 질문에 대한 답을 하신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그 질문을 다시 질문한 이에게 되돌려 묻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는 말씀은 단순히 카이사르와 하느님을 대등하게 이원론적으로 상정하여 정교분리를 말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곧 “자 내가 도리어 네게 묻겠다. 너는 과연 무엇을 카이사르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무엇을 하느님의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너는 피조물에 불과한 카이사르를 하느님과 대등한 존재라고 여기는 것이냐? ” 하고 물으시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우리도 세상에 살면서 끝없이 “세상살이는 세상의 가치와 논리대로, 신앙생활은 교회에서만 교회의 가르침대로, 이분적인 영역에서 이중적인 태도로 살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고 예수님께 묻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네가 보는 이 세상이 세상의 논리와 가치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네가 정말 세상을 살 때 하느님의 뜻을 무시하고 살려는 것이냐? 이 세상에 속한 것처럼 보이는 그것들은 과연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니겠느냐?” 하고 간곡하게 되물으시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진실로 “모든 것은 하느님께 속한 것입니다.” 라고 하느님의 주권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