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한 일도 없이, 걸맞는 역량도 믿음도 없이, 
몸과 마음이 무겁게 나이만 들어가는 느낌입니다.

이전에 썼던 글을 다시 읽으며
내 삶과 고민이 주님과 공동체앞에
진정하고 성실했는가... 돌아봅니다.

아무런 공감도 반대도 얻지 못했던 글들은...
어차피 나의 인생이란
홀로 울다 스러지는 종소리  같은 거라... 훈계합니다.

그래도 나는 한 때 이렇게 내 마음을 울었다고...
하면... 허허, 이런 생각이 위안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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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직자원 포럼(2009. 07. 28/프란시스홀)

발제자:임종호신부


                   한국성공회는 참으로 전례(典禮)와 선교(宣敎)의 공동체인가?

                                       - 정체성과 성장사이의 논의에 참여하며


1. 시작하며

우리는 지금 “성공회정체성”과 “교회성장”을 대립적인 주제로 설정하고 있는 것일까? 그럴 수 없다. 우리 중에 성공회에 속하지 않은 이가 있는가? 그리고 우리 중에 성장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우리 모두 성공회 성직자로서 성공회의 성장은 간절히 원한다. 다만, 성공회 신앙과 직제의 관용의 폭을 이해하는 정도는 각기 다를 수도 있다. 교회성장을 물량적 지표를 기준으로 보는가 신앙과 실천의 건강함(성숙함)까지 포함시키는가에 해석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다.

오늘 우리가 성공회의 정체성을 논의하고 모색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건강한 교회성장을 위해서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이 땅에서 이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하고 할 수있는 선교를 충실히 감당하기 위해서다. 교회성장의 방향과 교회성장의 방법 즉, 성장의 의미(가치)와 성장 가능성(효율성)을 함께 고민해 볼 때 우리는 교회성장의 실제 문제가 단순히 그것을 원하느냐, 아니냐의 차원이 아니라 모두가 성공회 정체성의 이해를 포함하는 교회본질의 회복문제임을 깨닫게 된다.

정체성과 성장 중 어떤 것이 더 우선적인가 하는 질문은 버려야 한다. 함께 물어야 할 물음은 이것이다. 우리는 이 시대에 이 땅에서 어떻게 선교하고자 하는가? (“어떻게 선교하고자” 라는 표현은 “마땅히 어떻게 선교해야 한다”는 이론과 “실제 어떻게 선교하고 있다”는 실천을 우리가 주체적으로 반성하고 있다는 의미를 나타내준다.) 왜냐하면 성공회의 정체성은 어떤 이론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이 교회가 각자 처한 상황 속에서 전통을 맥락화하며 수행하는 선교의 실천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교회성장에 관련되어 떠오르는 물음들(브레인스토밍의 예)

(1) 지역의 개교회가 성장하여 그 결과로 교단이 성장하는 것인가?

(2) 교단차원의 사목방향과 지원이 개교회의 성장을 추동할 수 있는 것인가?

(3) “작은교회”와 “대형교회”가 서로 다른 유형의 교회라는 것을 인식하는가? 우리의 교회성장은 작은 교회를 여럿 만들자는 것인가, 작은 교회를 대형교회를 이루자는 것인가? (작은교회가 성장하여 대형교회가 되는 게 아니라 두 유형은 서로 다른 사목적 내용을 가지고 양립하며 전체 교회 가운데 상호보완하게 된다는 이해가 현실적이다.)

(4) “미자립 교회”는 대개 어떤 이유이며 그것이 누군가의 책임으로 돌릴 문제인가?

(5) 평신도를 잘 조직하여 활용하면 그 결과로 개 교회가 성장하는 것인가?

(6) 사목자의 카리스마나 역량에 따른 결과로 개 교회가 성장하는 것인가?

(7) 평신도, 사목자가 함께 공감하는 “성공회”라는 교단의 매력은 무엇인가?

(8) 교회성장에 유리한 “신앙유형”, “신학적 강조점”이 따로 있는가?

(9) 교회성장은 특정한 “노하우”를 따르기만 하면 대개가 달성되는 그런 목표인가?

(10) 전통을 중시하는 한국성공회의 분위기는 선교와 복음전도에 부적합한가?

(11) 개교회가 각기 지역사회에 맞는 “독특한 신앙적, 신학적 강조점”을 갖는 것이 교회성장에 필수적인가? 그렇다면 어느 선까지 허용될 수 있는 것인가?

(12) 개교회가 성공회의 전통 속에서 “전례적 사목(성사적 사목)”, “관상적 사목(영성적 사목)”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이 교회성장에 도움이 될 수 있는가?

(13) 성공회의 이른바 “국교회 전통”과 “전도구” 제도가 한국의 현실에서 작동하는가?

(14) 한국성공회 안에 성장하는 교회의 모델이 있는가? “한국천주교” 전체를 본보기로 하는 것이 가능한가? 개신교 중,대형교회의 사례를 참고하는 것이 가능한가?

(15) “사회선교”는 교회성장을 위해서 적극 활용되어야 할 선교 방법인가?

(16) 교회성장을 위해서 성직자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고민을 주로 하는가? 이른바 가장 소중한 것과 가장 시급한 것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가?
(“사목신학 정립과 소통”과 “급여나눔과 복지제도마련”이라는 주제가운데 어느 것이 더 주된 성직자들의 관심사인가? 그동안 성직자원에서 “포럼”과 산하 “위원회”들을 통하여 다루어온 주제들은 무엇이었는가? 매번 주교선거를 앞두고 이른바 “정책선거”라는 이름으로 성직자들이 검토하기를 원했던 주제들은 어떤 내용들인가?)

(17) “평신도를 위한 교육”과 “평신도 직제”에 관한 고민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18) 성공회안의 신앙운동(예; 중보기도모임, SDTS, 해외선교사파송, Via Media 등)에 대해서 성공회성직자들의 참여와 지도와 섬김이 충분히 있는가?

(19) 현재 교회의 주축을 이루는 세대 (50대, 60대, 70대 이상)는 한국성공회에 대하여 어떤 내용의 애정과 어떤 수준의 비전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20) 다음 세대 (10대, 20대, 30대, 40대)에 어필하는 요소를 무엇으로 볼 것인가?


3.
<성공회 성장신학> 연구의 필요성

교회의 본질에 대한 이해, 특별히 “성공회가 어떤 교회이고 어떤 교회여야 하는가”에 대해 신학적 정리와 소통과 반성이 우리 공동체에 충분하다고 하기 어렵다. 교회론, 선교신학을 바탕으로 하는 <성공회성장신학>이 필요하고 이를 연구할 전문인력의 조직이 필요하다. 그 결과로 어떤 프로그램이 만들어질 수도 있고, 현재 몇몇 교회에서 새롭게 시도되고 결실되고 있는 교회성장의 여러 가지 방향과 노력들을 평가하고 정리하여 전파할 수도 있겠다. 그 과정에서 전체 성직자들의 사목적 고민이 모아지고 우리 사목신학의 진정성과 타당성이 늘 검토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

성직자원은 교구의회의 한 원(院)으로서 상시적으로 교구의 선교정책을 개발하고 입안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바, 성직자원은 향후 이 성공회 성장신학의 내용을 성직자들이 함께 연구하고 대화하고 정책화해나가는 일에 구체적인 역량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평신도들을 설득하고 교육하고 동참시키는 일에도 성직자 개개인을 넘어서 성직자원 전체가 신뢰와 권위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성직자 모두는 성직자원을 일원으로서 진심을 다해 헌신해야 할 것이다.

어떤 분들은 그동안 그토록 많은 이야기를 해왔는데 뭘 또 이야기하느냐, 성직자원과 교구 당국이 이제는 그 이야기를 반영하여 대안을 세우고 정책화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씀한다. 일리가 있고 공감이 가는 지적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모두가 국외자(局外者)가 아니라 당사자(當事者)라는 점이다. 우리가 느끼는 불만과 의견과 제안을 이야기로 표출하는 일과 그것을 신학적으로 검토하고 교구당국과 교구전체의 현실의 조건들을 실제로 감안하고 반영하여 평신도원, 상임위원회, 교구의회를 거치며 정책화하는 일 사이에는 어머어마한 간격이 있다. 그것이 현실이다.

성직자원은 이름만 있고 조직과 실천은 없는 유명무실한 존재는 아닐 것이다. 성직자원이 스스로 주체가 되어 그 간격을 메우는 일에 나서지 않으면, 그럴 의지와 역량이 없다면 백론이 무효이다. 누가 누구를 탓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내가 이 주제와 관련하여 무엇을 어떻게 봉사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의 진정성이 없다면 차라리 더 이상 모이지도 말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낫다. 공연히 스스로를 속이고 서로를 바보 만드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성공회의 진정한 희망은 끝없이 성령께서 나와 우리를 통해 포기하지 않고 일해 나가신다는 사실에 있음을 고백하게 된다.

이상으로 오늘 주제에 관한 문제제기는 충분하다고 봅니다. 이하의 글은 성공회 정체성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제가 나름 정리해 본 교회와 선교에 대한 한 가지 이해입니다. 시간이 되시는 대로 일독하시고 피드백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4. 정체성 모색의 몇가지 전제

수많은 각론적인 의견과 주장들을 전체적인 구도에서 자리매김하고 구체적인 실천방안으로 정책화하는 일에는 원론적인 신학적 토대가 필요하다. 신학적인 토대는 이론적인 근거 제시의 조건이 됨은 물론 우리 구성원들의 공통의 인식을 보장하는 공동 언어(개념과 해석)와 공동의 방향설정과 실천과 협력을 담보하는 데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한국성공회의 신학적 정체성은 단순히 영어권의 성공회 관련 신학이론을 수입하여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한국성공회가 이 땅에서 스스로 선교의 주체로서 인식하며 행하는 실천과 반성을 통해서 세워지고 드러나야 한다. 한국성공회의 신학적 정체성을 모색할 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전제가 요청된다.

① 한국성공회의 신학적 정체성은 단순히 정태적인 이론적 규정이나 교권적인 제한에 의해 획일화 될 수 없다. 성서, 전통, 이성의 권위 아래 모든 구성원들의 선교적인 노력이 한국 성공회의 신학적 정체성을 구성한다.

② 그러므로 이른바 교회성장과 신학적 정체성은 대립하거나 택일할 성격이 아니다. 도리어 사회선교든 교회성장이든 영성훈련이든 모두 각기 적절한 신학적 정리와 반성을 통해 그 의미와 방향을 전체 공동체 안에서 소통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③ 이러한 신학적 논의의 장에서 성공회의 관용적 태도에 따라 가능한 이론신학의 사상적 자유로움 및 타 교단 신학의 도입은 한국성공회 사목현장에 적합한 신학 정립을 위해 사려 깊고 신중하게 걸러져야 한다.

④ 성공회를 이미 주어진 큰 틀로 보는 영국의 국가교회(제도교회) 입장과 다른 종교(교파)와 경쟁(및 협력)하며 교단(성공회)을 유지해야 하는 한국의 선교현실은 구분되어야 한다.

⑤ 전통과 제도의 틀 안에서 신학적 무관심과 기능적인 사목으로도 충분한 영국 교회 등의 경우와 달리 일선 선교현장에서 성공회의 존재이유와 강점을 신학적으로 설득해야만 하는 한국 성공회의 경우는 오히려 더욱 치밀하고 분명한 신학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

⑥ 세계적인 교회로서 주도권을 가지고 에큐메니컬 운동을 이끄는 세계성공회의 위상과 비주류 진보 소수교단으로 인식되는 한국성공회의 위상의 차이를 인정하되 이로 인한 복합감정(콤플렉스)을 넘어서서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⑦ 단순히 작은 교세로 인한 복합감정 없이 한국성공회의 역동적인 선교사례들(예 ; 빈민사목, 통일사목 등)을 신학적으로 정리하여 한국교회와 세계성공회에 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⑧ 한국성공회의 모든 성원들이 스스로 자신이 성공회의 신자(및 성직자)된 이유와 그 기쁨과 자긍심을 신학적인 표현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5. 교회란 무엇인가?

○ 당연히 성전건물은 교회의 일부이지 교회의 본질일 수 없다.

○ 교회의 본질을 “제도”로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로마가톨릭교회다. 하이어라키(교계제도)를 교회의 본질로 생각하여 이를 관철하는 조직과 교리를 지키고 있다.

○ 교회의 본질을 “개인의 믿음의 집합”으로 보는 이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개신교 일반이 그러하다. 종교개혁은 로마가톨릭의 “제도”로부터 “개인의 믿음”으로 초점을 옮기며 “오직 믿음으로!”라는 구호를 외쳤다. 다양한 개인의 믿음을 통일하고 관리하려면 확정된 교리를 강조해야 하고 단순 단일한 메시지의 전달에 주력해야 한다.

○ 성공회는 교회의 본질을 “(전례와 선교의) 공동체”로 본다. 성직자와 평신도가 함께 공동체를 이룬다. 개인의 믿음들은 선교라는 공동의 지향으로 모아지며 공동체성을 드러낸다.

○ 성공회가 말하는 신앙의 권위에 왜 “이성”이 성서와 전통과 함께 들어갈까? 성서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또는 성서와 전통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성공회가 이성을 신앙의 권위로 요청하는 것은 성서와 전통에 자체에 불완전한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성공회가 교회의 본질을 공동체로 보기 때문이다. 공동체가 성서를 해석하고 전통을 따르거나 고치는 일에는 공동체의 소통능력으로서의 이성이 필요한 것이다.

○ 성공회 교인이 되는 일은 단지 성공회 교회에 교적을 두고 출석하는 일이 아니다. 성공회 교인이 성공회 공동체를 이루는 주체인 것이다. 교회는 “다니는 것”이 아니라 “이루는 것”이다.

○ 성공회 교인이 되는 일은 단순하고 획일적인 믿음을 확인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참된 신앙인으로 성숙하도록 식별을 돕고 알맞은 영적지도를 하는 일과 단순한 규준으로 평가하고 판단하여 편을 가르는 일은 구분되어야 한다. 성공회 교인은 충분한 자유를 보장받으며 자발적인 헌신의 성숙성을 지향해나가는 이들이다.

○ 성공회 교인은 선교공동체로서의 성공회의 신앙과 직제를 존중하며 성공회 교회를 이루는 작은 교회(성령의 전)들이다.


6. 성공회는 명품(名品)교회다.

○ 잘못 설정된 문제제기는 공연히 헛고생 끝에 엉뚱한 대답에 매달리게 한다. 예를 들자면 “성공회는 가톨릭인가, 개신교인가”하는 질문은 무례하고 잘못된 엉터리 질문이다. 성공회는 이미 성공회로 진화했다. 이미 현실의 요구에 맞추어 기존의 장점을 결합하여 창조적으로 진화된 ‘복사기’를 두고 새삼 그것이 ‘인쇄기’인가 ‘사진기’인가를 묻는 것은 바보 같은 질문이 아닌가? 구태여 양자와의 비교를 염두에 두고 답한다면 개혁하는 보편교회(Reforming Catholic Church)라는 정도로 충분할 것이다.

○ 성공회는 이미 세계적으로 인정되는 명품(名品)교회다. 명품(名品)의 조건은 무엇인가? 본질(기능)에 가장 충실하면서도 고전적인 요소와 현대적인 감각을 아우르며 적절한 희소성을 갖기 때문이다. 명품은 알아보는 사람에게 가치가 있다. 성공회가 바로 그러한 명품교회인 것이다. 한국성공회 역시 비록 소수자의 입장 같지만 실은 전세계 기독교와 전세계 국가에 대한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존경받는 세계 성공회의 일원이다.

○ 명품에는 짝퉁이 따라 생기게 마련이다. 명실상부(名實相符)하지 않은 것이 짝퉁이다. 명품을 주문했는데 품질에 이상이 있다면 당연 반품이다. 만일 진품이 품질에 이상이 있다면 회사 존망의 크나큰 위기이다. 속히 사죄하고 바로잡아야한다. 한국 성공회는 명품교회로서 그 내용과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가? 성공회는 복음화와 선교를 수행하는 일에 실질적으로 깊은 신뢰를 받아야 한다. 그저 성공회는 이렇게 저렇게 좋은 교회라고 이론으로 내세우지만 실제가 그렇지 않다면 성공회 교회를 찾아왔다가 실망하고 “사기를 당했다”고 투덜거리는 사람이 생기게 된다.

○ 비슷한 수준의 품질을 가져도 명품은 브랜드의 가치가 중요하고 오리지널한 권위가 중요하다. 명품을 주문했더니 상표가 이름없는 것이 왔다면 그냥 쓰시겠는가? 당장 반품이다. 상표가 붙어있긴 한데 오리지널이 아닌 가짜라면 제값을 다 내시겠는가? 성공회가 추구하는 모든 사역에는 성공회라는 이름이 함께 가야한다. 성공회 교구장과 교구의회가 인준한 것이어야 한다. 함부로 성공회 안에 로마가톨릭적인 것, 개혁교회(장로교)적인 것, 오순절(성령운동)적인 내용과 질서를 임의로 가져와서는 안된다. 그것이 틀리거나 나빠서가 아니다. 제도적인 권위로 획일적인 통제를 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성공회라는 명품교회의 명실상부를 우리가 스스로 함께 지키기 위해서다.

○ 어떤 분들은 말씀한다. “성공회가 중요한 게 아니다. 복음 자체가 중요하다.” 맞는 말씀이다. 그런데 오해하면 곤란하다. 이 말씀은 성공회는 오로지 복음 자체를 추구하는 교회이고 실제로 그렇다고 하는 자부심을 수사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현실에서는 성공회와 복음이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즉 복음의 보편성은 현실에서 성공회라는 특수성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복음적 가치가 성공회를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전해지게 되는 것이다. 가령 “이혼을 해서 지켜야 하는 결혼의 가치”는 말은 되지만 실제는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성공회”를 포기해야 실현되는 “복음적 가치”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관념적인 착각이요 나아가 성공회에 대한 심각한 모독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성공회를 통해서 실현되어야 하는 복음적 가치를 다함께 충실히 지키는 일 뿐이다.

○ 성공회가 자랑하는 교회일치에의 공헌은 무엇인가? 성공회의 “신앙과 직제”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성공회의 신앙이 내용없이 텅 비어서가 아니라, 그 신앙의 폭이 넓고 깊어서 가능한 일이다. 성공회의 직제(질서) 자체가 무시해도 될 만큼 형편없어서가 아니라 도리어 성공회 직제 자체가 공동체적이고 튼튼하기에 교회일치운동을 이끌어 갈 수 있는 것이다.

○ 그러나 성공회는 성공회 자체를 자랑하는 교회가 아니다. 다시금 본래의 오리지날한 <교회론>으로 돌아가자. 교회는 하느님의 선교를 위해 부름 받고 보냄 받는 공동체이다. 하느님의 자녀(백성)이고 그리스도의 몸(지체)이고 성령의 공동체(성령의 전)이다.

○ 교회는 하느님과 세상 사이에서 두 가지 임무를 수행한다. 하나는 전례이고 또 하나는 선교다. (여기서 전례는 가장 넓은 개념으로 예배와 말씀과 성사를 포함한다. 즉 하느님을 향한 교회의 모든 일을 전례라는 개념으로 포괄한다. 선교 역시 가장 넓은 개념으로 전도와 봉사를 포함한다. 즉 세상을 향한 교회의 모든 일을 선교라는 개념으로 포괄한다. )


7. 교회의 존재와 역할; 전례와 선교

○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아 하느님께로 나아온다. 멸망할 세상을 탈출하여 구원의 방주인 교회로 갈아타는 것이 아니다. 기쁨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하느님나라의 잔치 초대에 응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봉헌함으로 우리는 하느님께 영광과 감사와 찬양을 돌린다. 이 때 우리는 세상에서 벗어난 탈 세계, 탈 역사적인 존재인 영혼으로 교회에 오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의 우리 삶, 우리의 기쁨과 슬픔, 고통과 죄악, 절망과 희망을 있는 그대로 모두 가지고 오는 것이다. 그것들은 성삼위일체 하느님의 임재를 통하여 정화되고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성화되어 되돌려진다. 우리가 드린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성체와 보혈로 다시 먹고 마시며 우리는 우리의 존재와 하느님과 세계와의 관계를 재확인하게 된다. 전례를 통하여 우리는, 그리고 전례에 참여하는 우리를 통하여 세계는 다시금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하느님께서 구원하신 그 세계로 확인되고 회복되는 것이다.

○ 이제 우리는 전례를 통하여 정화되고 성화되었다. 그러나 교회에 머물 수 없다. 변화산상의 신비체험에 머물지 않으시고 “산 아래 마을로 내려가자” 하시던 예수님처럼, “나가서 주님의 복음을 전합시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 다짐하듯이 우리는 세상으로 나가서 세상에 하느님의 뜻과 사랑을 증언하고 세상을 사랑과 진리로 섬겨야 한다. 우리가 홀로 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삼위 하느님께서 동행하신다. 세상을 향해 복음의 능력을 가지고 나가는 우리의 움직임이 곧 선교인 것이다. 세상을 향해서 우리가 실천하는 모든 복음적 가치의 구현이 선교의 내용을 이루게 된다. 작게는 가족 간의 화목과 가정의 평화에서부터 사회선교, 해외선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선교의 내용이다. 바울로 사도의 표현을 빌면 우리는 세상에서 우리의 삶을 산 제물로 하느님께 드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는 곧 전례이고 전례는 곧 선교인 것이다. 전례와 선교는 대립시켜 양자택일하거나 우선순위를 정해야 하는 그런 기능이 아니다. 전례와 선교는 교회의 존재양식이고 행동양식이다. 존재와 행동은 나누어 생각해볼 수는 있으나 실제는 나누어질 수 없는 한 주체의 일인 것처럼 교회는 전례공동체인 동시에 선교공동체인 것이다. 교회의 본질이 제도나 개인의 믿음이 아니고 공동체이기에 전례도 선교도 공동체의 사명이다.

○ 전례는 개인의 영적인 만족감을 위해서 드리는 것이 아니다. 예배의 감동은 개인이 스스로 기대한 정서적 영적 욕구를 충족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배의 감동은 자신의 존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공동체의 일원임을 깨닫고 확인하는 감격이다. 그 은총은 예배시간 자체만이 아니라 자신의 세상 속에서의 삶이 얼마나 하느님과 연관되어 있는가에 달려있다. 사제나 전례봉사자의 쇼를 보는 것이 아니다. 전례에의 참여는 모두가 자신들의 삶을 함께 봉헌하고 함께 축성에 참여하고 함께 성화되는 일이다.

○ 성공회기도서의 가치는 단순히 임의로 취사선택할 수 있는 참고문헌 정도가 아니다. 성서와 전통과 이성의 권위 아래 만들어지고 전례공동체로서의 성공회의 일치를 이루어주는 소중한 선물로서 존중되고 사용되어야 한다.

○ 과장하면(축약하면) 로마가톨릭은 전례의 주체가 교계제도(성직자)다. 실체변화를 일으키는 사제의 축성과 신자는 실체변화(화체설)된 성체를 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등의 성체성사에 관한 교리는 그와 관련된다. 성공회가 사제의 독미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전례의 봉헌이 사제 개인이 존재로부터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의 신자의 삶으로부터 드려져야 하고 전례의 축성이 사제와 신자의 공동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 과장하면(축약하면) 개신교의 전례는 말씀의 소비(消費) 장터인 것처럼 보인다. 설교자의 말씀이 그 상품성이 높을수록 청중은 고가의 헌금을 지불한다. 이른바 대형교회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개신교인들이 보여주는 전례와 세상에서의 삶과의 관계는 솔직히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 성공회는 말씀을 성사와 관련지어 선포한다. 성공회의 말씀은 영적 소비자인 개인의 기호에 맞추어 팔아먹는^^ 말씀이 아니라, 영적 생산자(참여자)를 이룬 공동체에게 공급하는 영적인 양식인 것이다.


8. 말씀과 성사

○ 흔히 천주교는 성사 중심, 개신교는 말씀 중심이라고 표현한다. 이 표현은 충분하지 않다. 천주교도 말씀을 존중하고, 개신교도 성사를 인정한다. 이 표현도 천주교는 교계제도를 교회의 본질로 본다는 것, 개신교는 개인의 믿음의 집합을 교회의 본질로 본다는 것으로 더 잘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 성사와 말씀은 전례와 선교가 그렇듯이 대립되어 양자택일하거나 우선순위를 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실상 둘은 같은 것이다. 세례성사는 선교공동체에의 입참의 표지이다. 어떤 개인은 훨씬 이전에 이미 신앙을 갖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례를 통하여 그의 믿음은 비로소 교회공동체의 믿음이 되는 것이고 그 사람은 믿음의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성체성사는 교회공동체의 양생(養生)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 공동체가 세상에서의 삶을 통해 봉헌을 하고 다시 축성을 통해 성화된 봉헌물을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먹고 마심으로 교회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 말씀은 개인이 홀로 성경을 읽고 생각한 깨달음이 아니다. 말씀은 교회공동체가 살아계신 하느님을 통해서 세상 속에서 경험하고 고백하고 증언하는 하느님의 뜻이 말씀이다. 단순히 성서의 문자에서 추출된 의미가 아니라 성사적인 태도로서 깨달아가는 성서 속의 의미가 우리를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말씀은 성사의 참된 의미이고 성사는 말씀의 참된 구현이다.

○ 말씀과 성사는 전례에서만이 아니고 선교에서도 똑같이 요청된다. 전례에서의 말씀과 성사가 사제직의 전통을 잇는 것이라면 선교에서의 말씀과 성사는 예언직의 전통을 잇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선교를 위한 말씀은 예언(預言)이어야 한다. 선교를 위한 성사는 구체적인 실천(實踐)이어야 한다.

○ 그러므로 흔히 성공회가 성사중심에서 말씀중심으로 변화되어야한다거나 반대로 말씀보다 성사중심을 고수해야 한다거나 하는 논의는 본질을 비껴가는 것이다. 말씀과 성사가 모두 전례와 선교의 사역에서 참으로 우리에게 하느님의 뜻과 사랑을 전달하고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실천하며 살게 하는가가 중요하다.


9. 사제직과 사목직

○ 사제가 교회에서 전례를 집전하는 일은 단지 개인의 직업적이거나 조직에 속한 자로서의 기능적인 일이 아니다. 사제는 성공회 교회공동체의 사제직, 전례와 선교에서 우리 모두가 행하는 사제직을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 사제에게 기능적인 사역을 요구하는데 그치지 말고 사제가 교회공동체가 함께 사제직을 이루는 일을 잘 지도할 수 있도록 요청하고 배려해야 한다.

○ 사제가 “교회 안에서 신자를 돌보는 일”을 사목으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좁은 이해다. 물론 그것은 매우 중요한 사목(pastoral care)이고 실제 교회의 영성을 좌우한다. 하지만 넓게 이해하여 선교가 교회(와 신자)가 세상을 향하여 세상 속에서 행사는 모든 일이 선교라고 한다면 사목(司牧)은 바로 그 선교사(교회와 신자)를 양성하고 파송하는 일이다. 신자 개인의 궁극적인 신앙적 책임과 성숙은 전례와 선교를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로 수행하는 일이다. 그것이 참된 성삼위 하느님의 현존체험이고, 은총과 진리의 경험이고, 영원한 생명을 살아가는 길이다. 사제의 사목은 신자들이 그렇게 참 교회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살아가도록, 자라가도록, 일해 가도록 돕고 섬기는 일이다.

○ 제도로서의 교회나 카리스마에 의지하는 교회는 강력한 권위로 신자를 상벌(축복과 저주, 인정과 파문)한다. 대형교회들은 수많은 신자들의 개인적인 영성적인 욕구를 잘 이용하고 채워주고 통합하는 일을 노련한 사목으로 삼기도 한다.

○ 성공회의 사목은 제도나 카리스마를 의지하지 않고 전례와 선교의 공동체로서 함께 하느님의 나라를 향한 길을 서로 신뢰하고 배려하고 기다리며 걸어가는 일이다.


10. 성공회의 정체성- 결론을 대신하여

○ 정체성은 주체성이다. 우리 한국성공회가 이 시대 이 땅에서 어떻게 전례와 선교를 담당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실천하며 우리의 정체성은 드러난다.

○ 성공회는 무신앙, 무직제의 교회가 아니다. 성공회는 교회의 본질을 공동체(Communion)으로 이해하지만 분명한 신앙과 직제의 전통적, 정통적인 교회다.

○ 그렇다고 오리지널(Original)한 성공회의 모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세계의 모든 성공회 교회들은 각자 자신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성서적이고 복음적인 가치를 전례와 선교를 통해 수행할 것인가를 모색하고 있고 그 결과로서의 주체적인 교회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외국의 여러 사례들은 참고할 수 있으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 한국성공회는 전례와 선교의 공동체로서 성서와 전통과 이성의 권위를 존중하며, 이 땅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위한 전례와 선교를 행하는 일에 진실하고 정직하고 충성스럽게 헌신하며 각자의 선교와 전례를 서로 소통하고 일치해 가야 한다. (2009. 7. 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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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주일성수(主日聖守)를 넘어서 교회성수(敎會聖守)로!

“신자는 모든 주일과 의무적 축일 성체성사에 참례하여야 한다.” (대한성공회 법규 제55조)
성공회는 주일성수를 강조하기 보다는 “축일(주일은 축일에 당연 포함됨)과 성체성사”를 강조합니다. 사실 개신교회에서 강조하는 주일성수는 주일아침 예배만이 아니라 주일 저녁예배까지도 드림으로 온전히 주일 하루 전부를 주님의 날로 지킨다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대단히 신실한 충성입니다. 주일에 원하는 때에 한번 성찬례를 드리는 것도 쉽지 않음을 경험하거니와 주일성수의 신앙은 존중되고 본받아야 합니다. 다만 그 주일성수의 참된 의미를 성공회의 입장에서 더 깊이 살피려는 것입니다.

성공회가 주일을 지키는 일은 단순히 일주일의 하루를 다른 엿새보다 더 거룩하게 구별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주일을 지킴으로써 일주일의 모든 시간, 일년 365일의 모든 날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주님의 현존을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이 “기억(기념, 아남네시스)”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빵과 잔을 주시며 “나를 기념하여 이 예를 행하라” 고 당부하셨습니다. (루가 22:19, 1고린11:25). 그래서 제자들은 '안식일 다음날' 곧 주일에 주님의 만찬을 나누기 위해 모였습니다(사도20:7). 성체성사(성찬례)야 말로 우리를 구원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구원사역을 기억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일이기 때문에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에 어울리는 마땅한 예배입니다.

성공회는 주일에 찬양예배나 기타 다른 형식의 예배가 아니라 성찬례(성체성사)를 중심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주일에 성찬례에 참여할 수 없는 교우가 다른 개신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때로 불가피하고 나름 훌륭한 일이지만 실상 충분한 일은 못됩니다. 우리에게는 주일에 “성체성사”로 드리는 예배가 중요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다른 개신교회의 예배를 깍아내리고 전례만을 내세우며 교회일치를 해치는 태도로 오해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의미, 성찬례(성체성사)의 의미를 깊이 살핀다면 법규 제55조 신자의 의무 조항은 느슨하게 지켜도 되는 것으로 양보하기 어렵습니다.

신앙적인 의미의 ‘기억(기념)’은 신자 개개인이 성서의 문자에 대한 인식을 통하여 이천년전 예수님의 구원사건을 저마다의 머리로 회상하는 일이 아닙니다. 교회공동체로 모인 신자들이 성서의 이야기가 전해주는 이천년전 예수님의 구원사건을 오늘 이곳에서 우리가 참여하는 오늘의 구원사건으로 체험하는 일입니다. 우리 성공회의 주일 감사성찬례는 단순히 주일성수의 예배를 넘어섭니다. 세례성사를 통하여 교회공동체를 이룬 우리가 성체성사를 통하여 온전히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룬 교회됨을 확인하는 일 곧 ‘교회됨’을 거룩하게 지키는 교회성수(敎會聖守)의 일인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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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평신도의 입장에서 보는 교회와 선교

                                  
            - 우리가 교회를 이루어 예배하고 선교하는 일이 곧 구원입니다


1. 세 가지 물음

우리는 본교회 교인이고 성공회 신자이며 그리스도교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성공회라는 교파에 속하여, 거주하는 지역의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 가지 물음을 던질 수 있습니다.

첫째, 다른 성공회 본교회에 비해 주교좌성당이 어떤 자랑거리가 있을까요? “성당건물이 아름답다, 전례가 아름답다, 가족적인 분위기다” 등의 답이 가능하겠지요.
둘째, 다른 개신교나 천주교에 비해 성공회가 좋은 점은 무엇인가요? “열린 교회다, 관용적인 교회다, 말씀과 전례가 조화를 이룬다, 간섭이 적고 자유롭다” 등의 답이 있겠습니다.
셋째, 무종교인이나 타종교인에 비해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지는 자부심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 성령, 영원한 생명, 하느님 나라, 구원” 등의 개념이 말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세 가지 물음에 대한 답들이 서로 내용적인 연관을 긴밀히 가지고 있습니까? 복음, 곧 하느님 나라의 소식과 일(사역)을 위해서 성공회는 어떤 특성으로 봉사하며 그 성공회의 장점이 주교좌성당에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물음은 동시에 주교좌성당의 장점이 어떻게 성공회의 특성을 이루며 그 성공회의 장점이 또 어떻게 복음을 실현하는데 쓰임 받는가를 묻는 일이기도 합니다. 주교좌성당교우로서의 자랑과 성공회교인으로서의 긍지와 그리스도교인으로서의 기쁨이 내용적으로 깊이 이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새로운 사람이 성공회 교인이 되고자 대성당을 찾아옵니다. 주교좌성당의 성전건물이나 전례의 아름다움에 반했을 수 있습니다. 성공회 교회가 보여주는 교회다운 건전하고 건강한 이미지가 좋았을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통해 구원받은 삶을 살고자 하는 동기가 분명할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이제 몇 년 동안 주교좌성당에서 생활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게 될 것입니다. 주교좌성당의 성전건물과 전례의 아름다움에 탄복하며 점차 성전과 예전에 익숙하게 될 것입니다. 별로 간섭 없는 교회생활도 편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성공회에 대해 가졌던 이미지를 실제로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과연 이 교회공동체가 새로운 사람들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배려하는가? 정말 다른 생각, 다른 경험, 다른 성향을 가진 이들에 대해 너그럽고 이해하려 하는가? 정말 성경을 열심히 읽는 신자들인가? 정말 영적으로 참되게 전례를 바치는 교우들인가? 공번된 교회의 신자로서 다른 형제교회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깊이 배우며 그 기준으로 자신의 교회, 곧 주교좌성당을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정말 구원의 확신과 기쁨이 말씀과 전례를 통해 표현되고 있는가?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전하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명이 활발한 선교활동을 통해 펼쳐지고 있는가? 세상을 향해 들려져야 하는 예언자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가?

주교좌성당 신자공동체가 복음적인 기준으로 도와주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더 이상 그리스도교 신자로 자라나지 못할 것입니다. 주교좌성당이 성공회교회로서의 특성을 분명히 전해주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또한 성공회 신자로 계속 남을  필요를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처음 느낀 성전건물과 전례가 주는 감동이 지속되는 동안 이 사람은 주교좌성당의 신자로 남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이 참으로 진지한 신앙인이라면 점차 그렇게 단순히 주교좌성당의 신자로 남는 일이 별로 신앙적인 의미가 깊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성공회 신자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계속 성숙하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또 다른 목마름을 안고서 처음 찾아 올 때처럼 조용히 주교좌성당을 떠나버릴 가능성이 큽니다.

새신자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일생을 주교좌성당의 교우로 지내신 분들도 같은 물음을 스스로 던져보시면 유익할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대성당 자랑의 내용은  성공회의 장점을 얼마나 담아내고 실현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내세우는 성공회 자랑의 내용은 복음의 능력, 선교의 사명을 얼마나 담아내고 실현하고 있는 것일까? 성전건물과 예전이 아름답다, 가족적인 분위기이다, 간섭없이 자유롭고 편하다 등의 쉽게 공감되는 이유들이 과연 주교좌성당이 성공회교회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 일에 얼마나 본질적인 요소가 되는 것일까?”


2. 구원 - 교회를 이루는 일

신앙생활을 왜 하는가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답은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입니다. 물론 하느님을 잘 섬기고 기도를 바쳐서 이런저런 축복을 받고, 곤란과 역경을 벗어나 소원을 이루고자 하는 동기는 내세우지 않아도 이미 자명하게 전제되어 있습니다. 많은 이유 가운데 그래도 영적인 것에 가까운 느낌을 주기 때문에 “마음의 평화”라는 답이 선호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에서 “마음의 평안”은 우리가 죄와 죽음과 고통에서 구원받은 결과이지 그 자체가 추구되는 목적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로서 좀 더 좋은 답은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이 “구원”에 관하여 좀 더 깊은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보통 우리는 신앙생활을 “내가 교회에 나가면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로 생각합니다. “교회에 나가면”이라는 말 대신에 “예수님을 믿으면”, “믿음이 좋으면”, “선행을 쌓으면” 등으로 바꿔 표현할 수 있겠지만 좌우간 그것을 조건으로 하여 이른바 “구원”을 전해 받거나 보장 받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때에 교회도 구원도 우리와 거리를 두고 존재하는 객관적인 실체처럼 여겨집니다. 그런데 평범하고 무난해 보이는 이런 이해가 우리 신앙생활에 몇 가지 혼란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지 않나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우선 문제가 되는 것은 믿음의 주체가 “나”인 것처럼 생각되는 일입니다. 결국 “내가 어떻게 되느냐”가 제일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여도, 아니 열심히 할수록 나 중심의 이기적인 마음이 사라지기 어렵습니다. 자칫하면 내 판단에 의해 내가 원하는 구원이 내게 주어질 것 같지 않으면 신앙도 바꾸고 교회도 바꾸고 그리스도교도 떠나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믿음의 주체가 우리가 아니라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이시라고 힘주어 가르치는 것입니다.

다음 문제는 교회에 나가는 일을 무슨 조건을 충족하는 일처럼 생각하는 점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에 나가는 일 또는 예수를 믿는 일을 과연 얼마나 충실히 해야 확실히 구원을 받을 자격을 갖추게 되는가에 관심하게 됩니다. 이것을 확인하여 보장받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 틈을 타서 온갖 사이비, 이단들이 유혹합니다. “그렇게 대충하면 구원이 없어”하고 위협하는 집단도 있고, 반대로 “그렇게 힘들게 안해도 돼” 하며 값싼 조건을 내거는 집단도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구원을 밖에서 주어지는 천국입장권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되면 신앙생활의 목적을 “자신의 변화와 성장과 성숙”에 두지 못합니다. 그저 영험한 종교 지도자를 통해서 가장 확실한 루트로 구원을 보장받는 것이 중요해집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여러분 안에 그리스도가 형성될 때 까지 나는 또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겠습니다.” 이렇게 외치는 바울로 사도의 고백 같은 것을 도통 이해하지 못하는 신자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교우들께 이렇게 제안을 드립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우리가 교회를 이루는 일이 구원이다!”는 의미로 이해하시면 좋겠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교회를 다니면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와 “우리가 교회를 이루는 일이 구원이다”라는 의미의 차이를 이해하신다면 참으로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시게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좀 더 분명한 설명을 위해서 교회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교회는 성전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같은 생각이나 경향을 가진 이들의 동호회 모임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 안에 성직자 및 수도자와 평신도로 구성된 조직이나 제도가 아닙니다. 교회는 저 홀로 독립된 실체가 아닙니다. 교회의 위치는 삼위일체 하느님과 세상 사이에서,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합니다.

교회는 죄악으로 가득하여 멸망할 이 세상으로부터 탈출하여 올라타야 하는 구원의 방주(方舟)가 아닙니다. 구원의 문제를 교회에 다녀야만 죽은 후에 영혼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이해하는 것은 무척 좁은 이해입니다. 구원의 문제는 우리를 포함한 이 세상과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회복되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모시고, 피조물로서 하느님과의 친교를 이루는” 이 올바른 관계가 깨어진 상태를 일컬어 성경은 “죄”라고 합니다. “죄”가 상습적이 되고 구조화 된 것이 “악”입니다. “악”은 세력을 이루어 세상에 대해 “죽음의 권세”를 가지는 바 이것이 이 세상의 온갖 고통과 불행의 원인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죄와 악과 죽음을 이기게 하셨습니다. 십자가 사건과 부활사건이 그 승리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복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이것이 복음이 전하는 구원의 내용입니다. 바울로 사도가 “하느님의 의(義)”(개역성경),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공동번역)”이라고 표현한 이 구원을 마르코복음과 루가복음은 “하느님의 나라”라고 표현합니다. 이 피조된 세상이 창조주 하느님의 다스림 아래로 돌아가고, 구원자 하느님의 완전한 주권적 통치를 받는 상태를 이루는 것이 “하느님 나라”의 의미입니다. 이 하느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땅에 시작되었고 계속 되고 장차 완성되리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마태오복음은 유대인들의 표현법에 따라 “하느님나라” 대신에 “하늘나라”라고 표현합니다. 요한복음은 이것을 “영원한 생명”이라고 표현하는데 우리 마음, 우리 영혼에 이루어진 “하느님나라”라는 의미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 하느님나라를 이 세상에 이루시기 위해, 하느님의 다스림 아래로  이 세상을 이끌어 구원하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택하여 부르시고 세우신 모임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성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살피면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 입니다. 우리 각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느님을 떠나 살던 세상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 응답하여 교회에 속하는 일이 바로 하느님의 자녀,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일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살피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리 각 사람은 그 지체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하느님나라를 위한 그리스도의 남은 사역을 이어가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그것을 “선교”라고 합니다. 우리 각자는 지체를 이루기 때문에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를 귀하게 대해야 합니다. 대체할 수 있는 조직원이 아니라 한 몸을 이룬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협조자 성령님과의 관계에서 살피면 교회는 바로 “성령의 공동체”입니다. 우리 각 사람은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령의 전입니다. 교회건물이 아니라 우리가 성전입니다. 교회는 성령강림을 통해 실체화 되었습니다. 성령의 가장 큰 은사는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교회는 실제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교회는 오늘도 소유와 파벌과 장벽을 뛰어넘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사탄을 거절하고, 믿음을 고백하고, 사랑의 새계명을 약속하며 우리는 세례를 통해 교회에 속하게 됩니다. 조직에 소속되는 차원이 아니라 우리가 교회를 이루는 차원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는 것이 구원을 받는 조건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례를 통하여 교회의 일원이 되는 일, 곧 우리가 교회를 이루는 일이 바로 구원의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가 구원의 성사인 것이고, 세례 받은 이를 구원받았다고 표현하는 것이지요. 세례받은 이는 교회의 지체를 이루며 이미 구원을 받았고 성령을 받았습니다. 다시 “구원의 확신이 있느냐”고 시비하고, 새삼 “성령을 받았냐”고 시비하는 이야기에 현혹될 필요가 없습니다.


3. 교회인 우리가 하는 일 - 예배와 선교

 
세상에서 부름을 받아 교회를 이루는 일이 구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교회 안에서 일생을 살아야 참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교회는 그 자체로 독립된 실체여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세상과의 사이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세상에 드러내는 일 곧 “예배”,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세상에 펼치는 일, 곧 “선교”를 감당함으로 의미를 가집니다. 교우들의 삶의 현장은 세상입니다. 그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아 모인 신자들의 모임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하느님을 부인하는 세상 가운에 살면서도 하느님께서 우리의 창조주요 구원자이심을 깨닫고 응답한 이들이 모인 것입니다. 교회를 뜻하는 “에클레시아”라는 희랍어는 “소집되어 모인 모임”을 뜻합니다. 모이지 않으면 신자가 아니고 교회도 아닙니다.  나 혼자 구원의 도리를 추구하면 충분하지 구태여 불완전한 인간들의 모임인 교회에 참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리스도교 신자일 수 없습니다. 교회공동체로 모이지 않으면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닙니다. 이름만 교적부에 올려놓고 도무지 모이는 일에 관심이 없다면 그는 네모난 동그라미가 있을 수 없듯 신자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일과 모임을 지키라는 강조는 신자에게 따로 부여되는 의무조항이 아닙니다. 신자의 본질 자체에 모이는 일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정상 주일예배나 모임에 결석할 수도 있지요. 그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그 마음이 문제입니다. 내가 참석하지 않고도 교회가 교회로 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은 여전히 교회를 건물이나 제도나 조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른 이해는 “내가 곧 교회”라는 것입니다. 내가 모이지 않으면 교회는 불완전하게 됩니다. 내가 떠나게 되면 교회는 피 흘리며 지체를 잃는 셈입니다. 내가 교회를 포기하면 성령께서 깊이 근심하고 상심하십니다.

교회를 이루어서 우리는 무엇을 합니까? 가장 중요한 일은 “예배”를 드리는 일입니다. 전례(Liturgy)라는 말의 어원은 “전체를 이루도록, 또는 전체를 위해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예배는 교회의 기능이라기보다는 교회의 본질입니다. 예배는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높이고 찬양 드리며 우리를 우리의 본분으로 확인하는 일입니다. 예배는 봉헌을 필요로 합니다. 봉헌은 하느님께서 지으신 이 세상이 마땅히 하느님의 것임을 선포하고 되돌려 드리며 감사하고 찬양하는 일입니다. 그 일은 바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통하여 시작됩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의 우리 삶을 통해서, 우리의 기쁨과 슬픔, 고통과 희망, 성공과 실패, 기원과 실천 모두를 제단으로 가지고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바쳐드리는 것입니다. 그 봉헌을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기쁘게 받으신다는 것, 성령께서 임재하시어 그 봉헌물의 가치를 변화시켜 우리를 위해 내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되게 하시어 다시금 우리에게 내어 주시고 먹여주시는 일이 성체성사의 본래 의미입니다. 화체설, 상징설 운운의 논의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성체성사로 말미암아 우리의 존재와 삶의 차원이 얼마나 “실제로 달라지느냐”가 중요합니다. 그 은총의 능력은 곧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되고, 세상으로 우리가 먼저 맛 본 하느님 나라의 경험을 가지고 가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는 우리가 세상을 하느님의 백성(자녀)으로, 그리스도의 몸(지체)으로, 성령의 공동체(사람)으로 살아감을 감사하고 기뻐하는 구원의 잔치가 됩니다.

그리고 신자들은 예배를 마치고 세상으로 흩어져 삶의 현장으로 돌아갑니다. 예배를 끝낸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예배의 연속이요 실현입니다. 세상 속에서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바쳐 드리는 “산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세상의 누룩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부름 받아 교회로 모이는 일”을 소명(召命)이라 하면 “세상으로 파견되어 보냄 받는 일”은 사명(使命)이라 합니다. 같은 내용이지만 방향의 차이입니다. 소명(召命)을 전하는 일을 전도(傳道)라고 하면, 사명(使命)을 함께 하는 일을 선교(宣敎)라 합니다. 역시 같은 내용을 방향의 차이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의 실질적인 주체는 부름받은 이들, 곧 평신도 교우들입니다. 교회 안에서 성직자, 수도자와의 관계에서 평신도가 숫자가 많고 헌금을 내기 때문에 힘이 있는 존재라는 게 아닙니다. 세상 속에 하느님의 나라를 드러내는 예배, 세상 속에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선교의 사명이 실상 평신도에게 맡겨진 것이기에 평신도의 자각과 헌신이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4.  인사말씀

다소 장황하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마음이 소박한 분들은 여전히 “그런 설명은 너무 복잡해요. 나는 다만 예수님 믿고 우리 교회를 다니며 행복하고 신앙생활 잘해서 복 받고 죽어서 천국 가기를 원하는 것 뿐인데...” 하실 지도 모릅니다. 그런 소망을 깍아내리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런 소망을 참으로 이루기 위해서 역시 신앙생활에 대한 이해를 "내가 교회를 다니면 구원을 받는다“는 내용으로부터 “우리가 교회를 이루는 것이 구원이다”는 내용으로 바꿀 필요가 있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교회를 다니는 식이 아니라 우리가 교회를 이루는 내용이 되면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거리감이나 틈이 없어지게 되고, 사탄이 그 틈을 타서 속이고 이용할 여지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온전한 은총과 축복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살아서부터 죽음 너머까지 풍성히 누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하략) 
(2008. 12. / 임종호신부)


* 지난 2008년 대림절에 주교좌성당에서 행한 신앙강연의 원고입니다. 어쩌면 이 강연이 끼친 영향이 제가 지난 2010년 2월에 주교좌성당의 보좌사제로  인사명령을 받게 된 계기 중의 하나일 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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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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