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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7월 5일 연중 14주일 성서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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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제 2:1-5
1 "너 사람아, 일어서라.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 2 그는 나에게 기운을 불어넣으시어 일으켜 세우시고 말씀을 들려주셨다. 3 "너 사람아! 나에게 반항하는 역적의 무리,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가 너를 보낸다. 그들은 조상 때부터 오늘까지 나를 거역하기만 하였다. 4 그 낯가죽이 두꺼운 자들, 그 고집이 센 자들, 그런 자들에게 내가 너를 보낸다. '주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고 내 말을 전하여라. 5 본래 반항하는 일밖에 모르는 족속이라 듣지도 않겠지만, 듣든 안 듣든 내 말을 전하는 자가 저희 가운데 있다는 것만은 알게 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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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고린 12:2-10

2 내가 잘 아는 그리스도 교인 하나가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까지 붙들려 올라간 일이 있었습니다. -몸째 올라갔는지 몸을 떠나서 올라갔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3 나는 이 사람을 잘 압니다. -몸째 올라갔는지 몸을 떠나서 올라갔는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아십니다.- 4 그는 낙원으로 붙들려 올라가서 사람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말을 들었습니다. 5 나는 이런 사람을 자랑하려고 하며 나 자신에 관해서는 나의 약점밖에 자랑하지 않겠습니다. 6 내가 다른 것도 자랑할 마음이 있어서 자랑한다 하더라도 사실대로만 말할 것이기 때문에 내가 어리석은 사람이 될 까닭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내게서 보고 듣고 한 것 이상으로 나를 평가하게 될까봐 나는 자랑을 그만하겠습니다. 7 내가 굉장한 계시를 받았다 해서 잔뜩 교만해질까봐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병을 하나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나를 줄곧 괴롭혀 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교만에 빠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8 나는 그 고통이 내게서 떠나게 해주시기를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하였습니다. 9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번번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게 머무르도록 하려고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나의 약점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10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약해지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며, 모욕과 빈곤과 박해와 곤궁을 달게 받습니다. 그것은 내가 약해졌을 때 오히려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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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 6:1-13

1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제자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셨다. 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자 많은 사람이 그 말씀을 듣고 놀라며 "저 사람이 어떤 지혜를 받았기에 저런 기적들을 행하는 것일까? 그런 모든 것이 어디서 생겨났을까? 3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 그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다 우리와 같이 여기 살고 있지 않은가?" 하면서 좀처럼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4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디서나 존경을 받는 예언자라도 자기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을 받지 못한다."
5 예수께서는 거기서 병자 몇 사람에게만 손을 얹어 고쳐주셨을 뿐, 다른 기적은 행하실 수 없었다. 6 그리고 그들에게 믿음이 없는 것을 보시고 이상하게 여기셨다.
그 뒤에 예수께서는 여러 촌락으로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다가 7 열두 제자를 불러 더러운 악령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다. 8 그리고 여행하는 데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시며 먹을 것이나 자루도 가지지 말고 전대에 돈도 지니지 말며 9 신발은 신고 있는 것을 그대로 신고 속옷은 두 벌씩 껴입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10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디서 누구의 집에 들어가든지 그 고장을 떠나기까지 그 집에 머물러 있어라. 11 그러나 너희를 환영하지 않거나 너희의 말을 듣지 않는 고장이 있거든 그 곳을 떠나면서 그들에게 경고하는 표시로 너희의 발에서 먼지를 털어버려라." 12 이 말씀을 듣고 열두 제자는 나가서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가르치며 13 마귀들을 많이 쫓아내고 수많은 병자들에게 기름을 발라 병을 고쳐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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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성공회기도서

주 하느님,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좋은 것을 베풀어 주시나이다. 비옵나니, 우리에게 가장 좋은 선물인 성령을 내리시어 항상 주님의 자녀로서 풍성한 삶을 살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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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명을 깨닫고 기적을 사는 인생
(6:1-13)

인생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돈을 많이 버는 것? 권력을 잡는 것? 학식을 갖추는 것? 명예를 얻는 것? 행복하게 사는 것?

신앙적인 답은 물론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는 일이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일까요? 요즘은 세상에서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이룬 소감으로 “하느님께 이 영광을 돌립니다” 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매우 아름다운 일이긴 하지만 “그럼 실패한 사람은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인가” 하고 오해할 위험이 있습니다. 바울로 사도는 하느님께 영광을 돌릴 기회 대신에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가운데서 완전히 드러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은 우리가 하느님께로부터 났음을 깨닫는 일로 시작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지음받은 그대로의 우리로서, 곧 우리 자신이 만들어내는 욕망의 이미지가 아니라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지어진 존재로서 우리의 영적인 본성을 사랑하고 기뻐하고 만족하는 일로 채워집니다. 내가 참 나가 되는 일이 곧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입니다. 이 일을 밖으로 무엇을 이루고 차지하고 소유하는가 와는 관계가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우리가 되어 하느님과 교제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은 고향에서 당대의 예언자로서 충분한 말씀의 권능을 보이셨습니다. 하지만 고향사람들이 관심한 것은 예수님의 외면적인 출신과 출세의 정도일 뿐 예수님의 영적권위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스스로 민망하셨던지 아니면 제자들의 실망을 위로하시려는지 “어디서나 존경받는 예언자도 자기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는 존경받기 어렵다”는 변명의 말씀을 하십니다.

모든 일에는 다양한 측면이 있고 여러 가지 차원(수준)이 있습니다. 인간사의 시시비비는 객관적인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실에 대한 해석으로 이루어집니다.
세상의 눈은 있는 그대로의 인간이 아니라 세상의 성공기준에 맞는 인간인가를 보고 인정합니다. 이에 비해 신앙의 눈은 모든 인간에게서 그 인간의 소명을 보고 인정합니다. 다시 말하면 “있는 그대로의” 그 인간이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태도로 살고 있는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기 전에 열심히 도를 닦아서 신통력을 갖추었다는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세례를 받으실 때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는 은총의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광야의 유혹은 그 이후에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자의식을 가지신 예수님께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라는 조건을 달아 사탄은 이제 네 힘으로 무언가 대단한 역량을 세상에 드러내라고, 그러면 네 뜻대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 거라고 유혹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평범한 인간 이상의 인간이 되기를 거절 하셨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말씀에 의지하고 순종하는 태도를 견지하셨지요. 예수님은 메시아콤플렉스에 걸린 분이 아니셨기에 참된 메시아이셨다는 역설입니다. 

요즘 우리 성공회에 선교의 바람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성령의 바람입니다. 그런데 자칫 공연한 부담감을 가지시거나 이를 역투사해서 냉소적인 태도로 바꾸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믿음을 갖는 것은 내가 그저 온전히 내가 되는 일입니다. 누구의 강요도 아니고 어떤 명분의 유혹도 아니라 자연스레 내가 하느님의 사람인 것을 깨닫고 감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기쁘게 감당하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지는 전도와 선교사업도 하기 싫지만 참고 억지로 해야되는 과업이 아닙니다. 그래서야 제대로 전도가 될 리도 없습니다. 우선 먼저 주님의 은총 안에서 내가 나인 것을 감사하고 만족하는 일이 우리의 믿음으로서 중요합니다. 그러면 그런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주님의 기적이 시작됩니다.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을 세상적인 가치의 잣대로 평가할 수 없듯이 우리도 우리 자신과 우리 이웃을 세상의 가치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전도도 그것의 성공과 실패가 우리에게 달린 것처럼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참되게 경험한 것, 진실로 고백하게 되는 것을 전할 따름입니다.

“...
듣든 안 듣든 내 말을 전하는 자가 저희 가운데 있다는 것만은 알게 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에제키엘이 들은 말씀을 우리도 듣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게 머무르도록 하려고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나의 약점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약해지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며, 모욕과 빈곤과 박해와 곤궁을 달게 받습니다. 그것은 내가 약해졌을 때 오히려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 바울로 사도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살아계시고 그 분의 세계 안에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 우리의 소명을 의식하는 삶 가운데 우리의 약점과 한계는 바로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의 통로라는 것, 이것을 신뢰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고 이 믿음을 삶으로 경험하고 드러내는 일이 우리의 기적입니다.
(2009. 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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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명을 사는 인생, 기적의 주인공 (마르 6:1-13)

모든 일에 하느님만을 의지하기로 결심한 성직자의 마음 속에도 여전히  믿음이 ‘기적’을 부르는 도구가 되기를 바라는 욕심이 있습니다. 답답하고 고통스런 문제들이 기적적으로 해결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로또 복권이 주님의 은총으로 1등에 당첨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그건 은총의 문제라기보다는 어차피 수백만분의 1의 확률 문제입니다.^^


시한부생명의 환자가 주님의 은총으로 당장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정말 주님께 청하고 싶은 기적입니다! 또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는 사례이구요. 저는 정말로 조아무개 목사와 같은 믿음과 능력이 없어서 병으로 고통 받는 교우를 낫게 할 수 없음이 가슴 아픕니다.

하지만 저는 또 다른 기적의 체험이 있고 제게도 참다운 기적의 능력이 허락되었음을 깨닫습니다. 최근의 예를 들자면 우리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교우가 생의 마지막 병상에서 제게 “신부님, 저는 정말 기뻐요. 제 삶의 이유를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 한 인사를 기억합니다. 이 믿음과 고백이야말로 “기적”이 아닙니까? 사실 성서에서 ‘기적’의 본래 의미는 오늘날 과학시대를 사는 우리의 기준으로 본 ‘초과학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당시의 신앙 기준으로 ‘하느님이 함께 하신 일, 하느님이 일으키신 일’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고향 나자렛에서 배척을 당하십니다. 마을 사람들은 자기들이 너무나도 뻔히 잘 아는 인물인 예수가 그토록 위대한 가르침과 사역을 행하는 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맡기신 소명을 깨달은 ‘사람의 아들’ 예수가 아니라 고작 ‘제법 잘나가는 한동네사람’ 예수로 대하려 했던 것이죠. 예수가 애당초 명문가 출신의 랍비나 세도가였다면 상황이 달랐을까요?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 없음을 이상하게, 의아하게, 놀랍게 여기셨다고 성서는 전합니다. 무슨 ‘믿음없음’ 일까요?


예수님께 ‘믿음’이란 하느님께서 우리 인생을 부르시고 우리와 함께 해주신다는 깨달음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믿음이야말로 인간을 구원한다고 아셨기에 그 믿음을 가르치셨고 고난의 십자가의 길을 그 믿음으로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소명을 사셨고 사명을 이루셨습니다.


인생의 타고난 조건들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유로운 결심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일이 우리 생을 결정짓습니다.
세례를 받으시고 하늘의 음성을 들으시며 예수님은 더 이상 목수의 아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세워 세상에 보내십니다. 그들도 마찬가지,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주님의 기적”을 세상에 보여주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도 소명을 깨닫고 사명을 이루어 가며 하느님의 기적을 깨닫고 체험하길 원합니다.(2006. 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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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을 전하는 어려움과 기쁨 (마르6:1-13)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고향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전하는 일에 실패하셨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본질이 하느님과 같은 분이신" 예수님께서 자기 고향에서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나타내 보이는 일에 실패하셨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예수님의 실패가 아니라 고향사람들의 실패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눈에 보이는 것, 자기들이 알고 있는 것에만 집착합니다.  “선입견”을 가지고 새로움을 볼 줄 몰랐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한 사람의 이름과 직함과 관계에만 관심을 두었지 진정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한 사람을 당신의 사랑으로 부르시어 친히 하느님이 되어주시는 그 신비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 인간의 구원은 바로 그러한 신비, 우리의 내면에서 우리를 사랑으로 부르시고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인정해주시고 우리를 사랑의 사도로 세워주시는  그 부르심에서 시작되는 것임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구세주가 "대단한 지위와 권세를 가진 통치자"로 군림하여서 막강한 힘을 과시해서 자기들 삶의 외면적인 조건들을 바꾸어 주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일이 어려운 것은  본래 "복음"이 전하기에 쉽지 않은 일이기에 그렇습니다.
"값싼 복음- 믿기만 하면 만사형통에 사후 천당까지 보장한다"는 복음은 전하기에 쉬울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험난하고 각박한 세상살이 가운데서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진리를 따라 살아야 참으로 복되다고 외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우리가 복음을 전하여 한 사람이라도 얻게 되면 우리는 그야말로 "온 세상보다 더 귀한 한 영혼을 얻었다"고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기쁨을 누리라고 주님은 곧 이어 열 두 제자를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세상을 향해서 그러나 복음은 전해져야 합니다.
하느님을 전하면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살아계심을 새롭게 체험하게 됩니다.
그 귀하고 복된 경험을 위해서 우리는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우리가 경험한 하느님을 전해야 합니다.
실망 낙심하지 말고 우리를 통해서 하느님이 드러나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부담스럽고  두려운 의무가 되기보다는 기꺼운 우리의 기쁨과 보람이 되어야 합니다.(2003.7.6)


 

2009년 6월 28일 연중 13주일 성서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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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1:13-15, 2:23-24*

13 하느님은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자들의 멸망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14 하느님은 모든 것을 살라고 만드셨으며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원래가 살게 마련이다. 그래서 피조물 속에는 멸망의 독소가 없고 지옥은 지상에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다. 덕스러운 자들은 지옥을 모르며 15 의인은 죽지 않는다. 23 그러나 하느님은 인간을 불멸한 것으로 만드셨고 당신의 본성을 본떠서 인간을 만드셨다. 24 죽음이 이 세상에 들어온 것은 악마의 시기 때문이니 악마에게 편드는 자들이 죽음을 맛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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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고린 8:7-15
7 여러분은 모든 일에 뛰어났습니다. 믿음이나, 언변이나, 지식이나, 열성이나, 우리에 대한 사랑에서 여러분을 따를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 은혜로운 모금 사업에 있어서도 뛰어나기를 바랍니다. 8 이것은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이 일에 열성을 보이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여러분의 사랑은 얼마나 진실한가를 알아보려는 것뿐입니다. 9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은혜로우신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부요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가난해지심으로써 여러분은 오히려 부요하게 되었습니다. 10 이 구제 사업에 대해서 내 의견은 이렇습니다. 이 일은 일 년 전에 여러분이 먼저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또 자원해서 한 일이니 여러분이 완성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11 이제 그 일을 마무리하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이 처음에 품었던 의욕을 실천에 옮겨 자기 힘이 자라는 대로 그 일을 완성하라는 말입니다. 12 마음이 내켜서 하는 일이라면 가진 것에서 얼마를 바치든지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받으실 것입니다. 없는 것을 억지로 내라는 말은 아닙니다. 13 내가 지금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해주면서 여러분에게만 괴로운 부담을 주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공평하게 하려는 것뿐입니다. 14 지금 여러분이 넉넉하게 살면서 궁핍한 사람들을 도와준다면 그들이 넉넉하게 살게 될 때에는 또한 여러분의 궁핍을 덜어줄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공평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15 이것은 성서에,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았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고 기록된 대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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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 5:21-43
21 예수께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다시 가시자 많은 사람들이 또 모여들었다. 예수께서 호숫가에 계셨을 때에 22 야이로라 하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를 뵙고 그 발 앞에 엎드려 23 "제 어린 딸이 다 죽게 되었습니다. 제 집에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병을 고쳐 살려주십시오." 하고 애원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를 따라 나서시었다. 24 그 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둘러싸고 밀어대며 따라갔다. 25 그런데 군중 속에는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증으로 앓고 있던 여자가 있었다. 26 그 여자는 여러 의사에게 보이느라고 고생만 하고 가산마저 탕진했는데도 아무 효험도 없이 오히려 병은 점점 더 심해졌다. 27 그러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군중 속에 끼여 따라가다가 뒤에서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다. 28 그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나으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9 손을 대자마자 그 여자는 과연 출혈이 그치고 병이 나은 것을 스스로 알 수 있었다. 30 예수께서는 곧 자기에게서 기적의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돌아서서 군중을 둘러보시며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31 제자들은 "누가 손을 대다니요? 보시다시피 이렇게 군중이 사방에서 밀어대고 있지 않습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32 그러나 예수께서는 둘러보시며 옷에 손을 댄 여자를 찾으셨다. 33 그 여자는 자기 몸에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예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말씀 드렸다. 34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병이 완전히 나았으니 안심하고 가거라." 하고 말씀하셨다.
35 예수의 말씀이 채 끝나기도 전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저 선생님께 더 폐를 끼쳐드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6 예수께서는 이 말을 들은 체도 아니하시고 회당장에게 "걱정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37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따라오지 못하게 하시고 38 회당장의 집으로 가셨다. 예수께서는 거기서 사람들이 울며불며 떠드는 것을 보시고 39 집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왜 떠들며 울고 있느냐?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을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40 그들은 코웃음만 쳤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다 내보내신 다음에 아이의 부모와 세 제자만 데리고 아이가 누워 있는 방에 들어가셨다. 41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고 "탈리다 쿰." 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소녀야, 어서 일어나거라.'라는 뜻이다. 42 그러자 소녀는 곧 일어나서 걸어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놀라 마지않았다. 43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시고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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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성공회기도서
주 그리스도여, 주님은 어려움 중에 있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시나이다. 비옵나니, 어떤 처지에서든 우리가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기도하게 하시어 주님의 도우심을 얻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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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정함을 거룩함으로 바꾸시는 예수님 (마르 5:21-43)

오늘 복음은 우리 모든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질병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는 이천 년 전과 오늘날의 의학의 수준이 비교할 수 없음을 감안해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생명과 건강의 본질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생명과 건강은 면허를 가진 의사에게 의지할 문제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생명과 건강은 신앙의 핵심 내용입니다. 그 차원의 다름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현대의학이 치료 못하는 질병, 못 늘이는 수명도 오직 신앙적 간구에 의해 하느님의 기적적인 능력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식의 메시지를 기대하게 됩니다. 필요할 수는 있지만 충분하다고 하기는 어려운^^ 수준의 믿음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어려움을 다 아시고 도우신다는 것,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어려움을 주님께 간절히 아뢰고 절대적인 신뢰 가운데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놀라운 구원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은 우리 신앙생활의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일들이 단순히 우리의 강력한 기도에 의한 마술적인 결과들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마땅히 우리가 모든 것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주님의 가르침을 순종하는 신앙생활의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것입니다.

하혈증을 포함하여 많은 질병을 율법은 “부정하다”고 규정합니다. 죽은 이에게 손을 대는 것도 “부정”한 일입니다.
오늘 “예수의 옷에 손을 댄 여자”는 실은 “부정한” 상태에서 예수님께도 부정을 끼친 셈입니다. 그런데 아무런 공로없이 그 여인은 그 일로 “치유의 은총”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의 행동으로 부정을 탄 것이 아니라 도리어 여인의 부정을 은총의 기회로 바꾸어 주시는 거룩한 분이셨던 것이지요. 예수님은 금기(禁忌)를 범한 그 여인을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곧 용서요 회복이고 축복입니다. 병을 저주받은 것으로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께 다가가 하느님의 은총을 입는 기회로 삼은 것이 바로 주님께 칭찬받은 여인의 훌륭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죽은”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십니다. 율법에 정통한 회당장인 야이로의 눈에 그것은 부정한 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생명을 살리는 일에 율법의 부정 규정이 문제이겠습니까? 예수님은 부정을 타시는 분이 아니라 도리어 부정함을 거룩함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병을 고치고 생명을 살리는” 일이 특수한 일이어서는 안됩니다. 재물과 권력 또는 어떤 자격이 있어야만 혜택을 보는 일일 수 없습니다. 그 일은 희안하고 드문 기적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기울이는 지혜와 생명존중과 이웃사랑을 통해서 이 땅의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늘 가능한 일이어야 합니다. (2009.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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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 죽음, 기적, 믿음 (마르 5:21-43)

병이 들고 죽음을 맞는 것은 너무도 고통스럽고 냉엄한 인간의 현실입니다. 하느님께 부르짖고 매달리는 우리의 태도는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간혹 병과 죽음에 직면하여 신앙에 의지하는 이를 보고 연약한 인간의 어리석고 기회주의적인 태도라고 냉소적으로 말하는 이들을 보게 됩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신앙인들에게 병고와 죽음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직접 체험하게 되는 기회였습니다.

신앙이 없는 이들에게 병고와 죽음은 그저 팔자일 뿐입니다. 어쩌겠습니까? 과연 “신앙이 필요 없다”는 주장이 병고와 죽음을 해결하는 지혜일까요? 그렇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 병고와 죽음을 통하여 믿음도, 소망도, 사랑도 깊게 하지 못하고 그저 인생은 그러한 것이라는 체념이나  더욱 더 현실의 이해관계에만 집착하는 태도를 기를 뿐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에게 병고와 죽음은 이와는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오늘 지혜서는 “하느님은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자의 멸망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고 말합니다. 현실은 분명히 병과 죽음이 인간을 위압하는 힘이 아니냐고, 왜 이 세상은 병도 죽음도 없는 완전한 세상이 아니냐고 우리가 불평을 한다 해도 그 책임을 하느님께 돌릴 수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성서는 이어서 “죽음이 이 세상에 들어온 것은 악마의 시기 때문이니 악마에게 편드는 자들이 죽음을 맛볼 것이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병에서 병고(病苦)를, 죽음에서 두려움과 슬픔을 먼저 봅니다. 병고에 가려진 생명의 힘을, 죽음에 가려진 영원한 생명의 기쁨과 평화를 우리가 볼 수 있다면, 병고에서 건강의 가치를, 죽음에서 삶과 사랑의 귀함을 본다면 우리는 신앙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병고와 죽음을 원하시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가 병고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거나, 우리가 병을 앓거나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이 믿음이 모자라거나 하느님의 저주 때문이라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건강한 삶을 기뻐하시고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원하십니다. 그런데 생각하면, 병고와 건강은 사실 우리 몸 안에서 하나입니다. 죽음과 삶도 우리 인생에 있어서 하나입니다. 병이란 우리 몸은 내 것인 동시에 내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합니다. 죽음은 우리 인생이 우리의 것인 동시에 우리의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줍니다.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된다는 것은 바로 이 이치, 곧 우리의 몸, 우리의 인생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과 관계있다는 것을 깨닫는 일입니다.

왜 “믿음이 있어야 기적이 가능하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가 하면, 바로 이런 깨달음이 있어야 하느님께서 우리의 건강과 영원한 생명을 원하심을 알고 우리의 모든 삶을 예수님과 성령님께 내맡겨 그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며 병고와 죽음을 초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0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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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의 힘 - 걱정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마르 5:21-43)

"걱정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이것은, 죽어가는 딸을 포기하려는 회당장에게 우리 주님께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병이 완전히 나았으니, 안심하고 가거라." 이것은 혈루병 여인의 병을 고쳐 주신 후에, 그를 돌려보내시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믿음을 분량이나 정도로 재려고 듭니다. 큰 믿음, 적은 믿음, 뜨거운 믿음, 미지근한 믿음, 굳센 믿음, 약한 믿음 등으로 비교하고 말하길 좋아합니다. 하지만 모두 부질없는 일입니다. 믿음의 본질은 우리가 그렇게 분량이나 정도로 측정할 수 있는 외형적인 덕목이 아닙니다.

믿음은 다른 이에게 보여지는 종교적인 행위로 측정될 수 없습니다. 믿음의 본질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믿음은 각자의 삶의 고난과 위기 속에서 하느님 앞에 얼마나 진실할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하느님께 맡기고 하느님의 부르심을 진심으로 따를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믿음보다 더 중요하고 더 먼저인 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믿어주시는 하느님의 믿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결국 우리가 얼마나 선하고 지혜롭고 의지가 굳은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께서 절대적인 선함과 지혜와 의지로 우리를 사랑하고 보호하고 인도해주신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체험하고 신뢰하는가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맹신(盲信)이 아니고, 광신(狂信)일 필요도 없습니다. 믿음은 내 믿음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와 사랑과 능력의 하느님을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믿음을 내세우거나 자랑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고작해야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 산더러 저리로 옮겨져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며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 바다에 심어져라 해도 그대로 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믿음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이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그 위대하신 주님의 능력을 우리가 힘입는 길은 "믿음" 밖에 없기에 우리는 "주님, 믿습니다. 그러나 제 믿음이 부족하다면 도와주십시오(마르9:24)" 하고 예수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2003. 6. 29)

2009년 6월 21일 연중 12주일 성서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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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38:1-11

1 야훼께서 욥에게 폭풍 속에서 대답하셨다. 2 부질없는 말로 나의 뜻을 가리는 자가 누구냐? 3 대장부답게 허리를 묶고 나서라. 나 이제 물을 터이니 알거든 대답해 보아라. 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그렇게 세상물정을 잘 알거든 말해 보아라. 5 누가 이 땅을 설계했느냐? 그 누가 줄을 치고 금을 그었느냐? 6 어디에 땅을 받치는 기둥이 박혀 있느냐? 그 누가 세상의 주춧돌을 놓았느냐? 7 그 때 새벽별들이 떨쳐 나와 노래를 부르고 모든 하늘의 천사들이 나와서 합창을 불렀는데, 8 바다가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 그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 9 바다를 구름으로 싸고 먹구름으로 묶어둔 것은 바로 나였다. 10 바다가 넘지 못하도록 금 그어놓고 문에 빗장을 내려놓은 것은 바로 나였다. 11 그리고 나는 명령을 내렸다. "여기까지는 와도 좋지만 그 이상은 넘어오지 마라. 너의 도도한 물결은 여기에서 멈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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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고린 6:1-13

1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여러분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지 마십시오.2 하느님께서는, "1)너에게 자비를 베풀 만한 때에 네 말을 들어주었고 너를 구원해야 할 날에 너를 도와주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 자비의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이사 49:8. 3 우리가 하는 전도 사업이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사람들의 비위를 상하게 하는 일은 조금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4 우리는 무슨 일에나 하느님의 일꾼으로서 일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난과 궁핍과 역경도 잘 참아냈고 5 매질과 옥살이와 폭동을 잘 겪어냈으며 심한 노동을 하고 잠을 못 자고 굶주리면서도 그 고통을 잘 견디어냈습니다. 6 우리는 순결과 지식과 끈기와 착한 마음을 가지고 성령의 도우심과 꾸밈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느님의 능력으로 살고 있습니다. 두 손에는 정의의 무기를 들고 8 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언제든지 하느님의 일꾼답게 살아갑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진실하고 9 이름 없는 자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것 같으나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또 아무리 심한 벌을 받아도 죽지 않으며 10 슬픔을 당해도 늘 기뻐하고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만들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11 고린토의 교우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숨김없이 다 말하였고 내 마음은 여러분에게 활짝 열려 있습니다. 12 여러분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이 옹색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자기 마음을 스스로 옹색하게 만들었습니다. 13 나는 여러분을 내 자녀처럼 생각하고 말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같이 마음을 활짝 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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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 4:35-41

35 그 날 저녁이 되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36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둔 채 예수께서 타고 계신 배를 저어 가자 다른 배들도 함께 따라갔다. 37 그런데 마침 거센 바람이 일더니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38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뱃고물을 베개삼아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를 깨우며 "선생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돌보시지 않습니까?" 하고 부르짖었다. 39 예수께서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를 향하여 "고요하고 잠잠해져라!" 하고 호령하시자 바람은 그치고 바다는 아주 잔잔해졌다. 40 그렇게 하시고 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왜 그렇게들 겁이 많으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책망하셨다. 41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도대체 이분이 누구인데 바람과 바다까지 복종할까?" 하며 서로 수군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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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주님은 우리를 온갖 유혹과 위험에서 보호하시나이다. 비옵나니, 우리에게 굳센 믿음을 주시어 모든 절망과 두려움에서 지켜주시고 인도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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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대체 이 분이 누구인데 (마르 4:35-41)

신앙생활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사는” 일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것이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을 내가 중심이 되어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함께 더불어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문제는 그 많은 이들이 저마다 모두 자기자신을 제일 중요하게 여긴다는데서 생깁니다. 현실적인 해결책은 가장 무력과 지력이 강한 이들이 권력으로써 피라미드 구조의 사회와 질서를 만드는 일입니다. 중요한 가치들의 서열을 만들고 동시에 사람들도 그 중요성에 따라 위계를 매깁니다. 제일 위에 있는 이들은 스스로 신을 자처하거나 신의 대리자로 처신하곤 합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일”은 “누가 나를 규정하는가” 의 문제와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우리를 규정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사회, 곧 이 세상이 우리를 규정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적으로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일은 이 세상의 상대적인 관계 속에서 규정된 자의식(에고)을 벗어나 하늘로부터 거듭난 스스로의 새로운 자의식(셀프)을 갖는 일이 됩니다. 그것은 절대자 앞에 우리를 상대적인 존재로 세우는 일, 곧 회개로 시작됩니다. 하느님이라는 절대자 앞에서야 비로소 상대적인 나의 존재를 올바로 깨닫게 되므로 신앙은 곧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사는” 일입니다. 이는 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자비 와 권능 앞에서 평등하다는 깨우침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네 모든 것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이 바로 우리 신앙생활을 내용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자가 절대자를 그냥 알 수가 없습니다. 제 멋대로 상상하고 지어내기 쉽습니다. 상대적인 존재의 욕망을 투사한 것은 우상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라는 계시가 필요합니다. 완전한 하느님이시되 우리에게는 완전한 인간으로서 나타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은 인간으로서 상대적인 한계 속에서 사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을 통해서 절대자와 소통하고 일치하는 경지가 드러났습니다.

오늘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이야기는 바로 그 경지를 보여줍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인데 바람과 바다까지 복종할까?” 절대의 하느님을 완전히 신뢰했던 예수님은 풍랑 속에서도 생사를 초월할 수 있었습니다. “참새 한 마리도, 풀 한포기”도 하느님의 주권 아래에 있다고 믿으셨던 예수님은 당신의 생사(生死)가 곧 당신의 사명(使命)과 하나임을 아셨습니다.
성부께 드린 성자의 그 “신뢰”를 보이시며 예수님은 고통과 죽음과 불행의 두려움에 떠는 우리에게도 그러한 “믿음”으로 의연히 살아가기를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2009.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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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두려워합니까?
(마르 4:35-41)

두려움은 인간에게 가장 뿌리 깊은 원초적 본능입니다.
성경은 무수히 반복해서 우리에게 “두려워 하지마라!”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우리는 왜 두려움을 느낄까요? 그건 우리가 살아있기 때문이고, 살아있음은 곧 죽음의 위협아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사실 조심성이기도 합니다. 무대뽀인 사람보다는 신중한 사람이 훨씬 사고 없이 오래 살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두려움은 동물적 삶을 초월하는 인생의 의미차원에서 정신적 상실감, 영적인 허망함 등을 내용으로 포함하기 때문에 사실 두려움은 그냥 회피하려고 해서는 안되는 소중한 인간성의 일부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두려움 자체를 정직하게 인정하면서도, 정말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그 대상의 정체를 분명히 아는 ‘지혜’를 길러야 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두려움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위험한 상황이 일어났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이 상황이 해결되면 두려움이 가실 것이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기도제목은 대부분 우리의 위험한 상황을 해결해 주십사 하는 것이 아니던가요? 그것이 잘못된 태도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어떤 상황일지라도 의연할 수 있는 내적인 능력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능력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과 전능하심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통해 얻어집니다.

오늘 복음의 장면은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 뱃길입니다. 그런데 갑작스런 ‘풍랑’이 배를 위협하자 제자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빠져듭니다. 주무시는 예수님은 하느님을 신뢰하는 평안의 경지를 나타내는 동시에 우리의 고통과 시련에 대한 하느님의 침묵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 부르짖자 예수님께서 바람과 물결을 잔잔케 하시고 제자들의 믿음을 나무라셨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신앙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항로에 위험이 닥칠 때 지혜를 잃고 허둥대지 말고,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기억하고, 주님께 부르짖으면 반드시 주님께서 건져주심을 경험한다는 것이며, 예수님은 그런 사랑과 능력의 주님이라는 내용입니다.

믿음에 대한 예수님의 강조는 우리가 인생의 위기를 넘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우리 인생을 통하여 주님의 현존을 경험하고 신뢰하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인생의 위기는 뜻밖의 형태로 다시 올 수도 있으나 그럴지라도 우리 믿음은 주님의 도우심으로 의연히 잘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06.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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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6월 14일 연중 11주일 성서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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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제 17:22-24
22 주 야훼가 말한다. 나도 그 송백 끝에 돋은 순을 따리라. 그 연한 가지에 돋은 햇순을 따서 높고 우뚝한 산 위에 몸소 심으리라. 23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 그것을 심으면 햇가지가 나서 열매를 맺는 훌륭한 송백이 되고 온갖 새들이 거기에 깃들이며 온갖 날짐승이 그 가지 그늘에 깃들일 것이다. 24 그제야 들의 모든 나무는 알리라. 높은 나무는 쓰러뜨리고 낮은 나무는 키워주며 푸른 나무는 시들게 하고 마른 나무는 다시 푸르게 하는 이가 바로 나 야훼임을 알리라. 나 야훼는 한번 말한 것은 반드시 그대로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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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고린 5:6-17
6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마음이 든든합니다. 그러나 육체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우리가 주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7 사실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8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이 든든하며 오히려 육체를 떠나서 주님과 함께 평안히 살기를 원합니다. 9 그러나 우리가 육체에 머물러 있든지 떠나서 주님 곁에 가 있든지 오직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만이 우리의 소원입니다. 10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가는 날에는 우리가 육체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한 일들이 숨김없이 드러나서 잘한 일은 상을 받고 잘못한 일은 벌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1 우리는 주님이 두려운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이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잘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도 우리를 사실대로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12 그렇다고 여러분에게 또다시 우리 자신을 내세우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를 자랑할 수 있는 근거를 여러분에게 주어 속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으면서도 겉만 가지고 자랑하는 자들의 말을 반박할 수 있게 해주려는 것뿐입니다. 13 우리가 미쳤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위해서 미친 것이고 우리가 온전하다면 그것은 여러분을 위해서 온전한 것입니다. 14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그토록 강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리스도 한 분이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죽으셨으니 결국 모든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15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죽으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해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세속적인 표준으로 판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전에는 우리가 세속적인 표준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였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17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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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 4:26-34
26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느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앗을 뿌려놓았다. 27 하루하루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나지만 그 사람은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지 모른다. 28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인데 처음에는 싹이 돋고 그 다음에는 이삭이 패고 마침내 이삭에 알찬 낟알이 맺힌다. 29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추수 때가 된 줄을 알고 곧 낫을 댄다."
30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느님 나라를 무엇에 견주며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31 그것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더욱 작은 것이지만 32 심어놓으면 어떤 푸성귀보다도 더 크게 자라고 큰 가지가 뻗어서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된다."
33 예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비유로써 말씀을 전하셨다. 34 그들에게는 이렇게 비유로만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에게는 따로 일일이 그 뜻을 풀이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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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성공회기도서

전능하신 하느님,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살지 않으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나이다. 비옵나니, 우리에게 성령을 내리시어 모든 일에서 우리 마음을 이끄시고 다스리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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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혼과 교회는 하느님나라의 씨앗 (마르 4:26-34)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실 때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정보로서의 가르침은 듣고 머리로 판단하고 기억하면 되는 문제입니다. 복음은 결코 단순한 정보가 아닙니다. 가령 “하느님의 마지막 심판이 2009년 9월 9일에 일어나리니, 신실한 이들은 분당 불곡산 위에서 휴거되리라.”는 식의 정보가 구원의 메시지일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런 식의 가르침은 우리의 영혼과 삶에 아무 연관도 없는 헛짓거리입니다. 그런 일에 관심을 가지고 그런 정보를 신봉하는 것을 믿음으로 아는 일은 그냥 단순한 것이 아니라 악하도록 무지한 일입니다. 악은 그런 무지에 뿌리를 내리고 세력을 키워가기 때문입니다.

비유는 “알아들을 귀”가 있어야 알아듣습니다. 비유의 가르침은 듣는 이가 깨우치고 삶으로 수행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정보를 통해 알아내거나 들어갈 수 있는 어떤 기막힌 장소가 아닙니다. 우리가 깨우침과 삶으로 이루어가야 할 구원의 상태입니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는 말씀이 예수님 공생애의 시작입니다. 그 하느님나라를 가르치시며 예수님은 하느님나라를 “저절로 자라나 열매를 맺어가는 씨”에 비유하십니다.

씨앗은 큰 나무로부터 비롯해서 마침내 다시 그 큰 나무와 같아질 것이지만 실제는 싹이 트고 자라나는 과정을 필요로 하기에 둘은 엄연히 다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이 씨앗의 비유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느님과 본성이 같은 분이시지만 분명히  이 세상에서는 자신을 낮추시어 완전한 사람의 아들로서 사셨습니다. 씨앗과 나무와의 관계와 같습니다.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는 일이 은밀하지만 분명하고 끊임없이 이루어지듯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일생을 이끄셨고 지금도 우리들을 예수님의 몸된 교회를 이루어 가도록 이끄시고 계십니다.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지음을 받았습니다. 응애 하고 태어나는 육신의 모습이나 가능성이 하느님을 닮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육신을 수련하여 무슨 불로장생의 신선이 되는 것이 인간의 목표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닮았다는 것은 영이신 하느님과 친교할 수 있는 영적인 요소가 인간에게 있다는 표현입니다. 영적인 인간으로서 영이신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우리가 영이기에 영이신 하느님을 그렇게도 그리워하고 목말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스스로 영적 존재임을 깨닫는 계기를 일컬어 예수님은 “위로부터 태어나는 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는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육신을 중심으로 한 옛 자아를 죽이고 성령을 담아낼 수 있는 영적인 자아로 새로워지는 것이 바로 구원사건입니다. 사춘기를 흔히 정신적인 제2의 탄생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통하여 영적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2고린5:17)
“새 인간은 자기 창조주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된 지식을 가지게 됩니다.(골로3:10)”

이 일들을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에 하느님의 말씀이 씨앗으로 심기운 것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서신성경들은 예수님의 비유를 따라  이렇게 표현합니다.
“여러분은 새로 난 사람들입니다. 그것도 썩어 없어질 씨앗에서 난 것이 아니라 썩지 않을 씨앗 곧 영원히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서 났습니다. 여러분에게 전해진 복음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베드로전 1:24)
“하느님께서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피조물의 첫 열매가 된 것입니다.” (야고보 1:18)

말씀으로 다시 태어난 우리 영혼은 이제 하느님 나라의 씨앗과 같습니다. 이미 우리 안에 하느님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믿으십니까? 기쁨으로 확신하며 그 하느님나라를 누리고 계십니까? 세상 사람들에게 그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고 계십니까?

물론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씨앗에서 싹이 트고 자라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단번에 확실히 보여주는 기적적인 능력이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의 삶 전체가 하느님 나라의 표지입니다.

우리 스스로 얼마나 우리 자신에게 자주 깊이 실망하고 좌절합니까? 아니, 차라리 그것은 좋습니다. 때로는 아예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의 씨앗이 심겨 자라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살기도 하지 않습니까? 분명 아직은 우리가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의심과 두려움은 없습니다. 우리 안에 이미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고 우리에게 그 하느님 나라의 일이 맡겨졌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이끄시어 이미 시작된 우리의 구원을 완전히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필립 2:13)”

우리의 희망은 억지로 지어내는 거짓 희망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가 성령 안에서 자라고 자라서 마침내 온전히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입니다. 그것이 기쁜 소식, 곧 복음의 본질적인 내용입니다.

우리 안에 시작되어 이루어질 하느님의 나라는 일부 뉴에이지 신봉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의 신성(神聖)을 고양시켜 건강과 아울러 신적인 능력을 얻을 수 있게 된다는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의 인격 안에 맺어지는 성령의 9가지 열매가 하느님 나라의 표지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차원이 남아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은 고립된 개체로서의 개인, 요즘 말로 개인주의적인 인간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신자는 당연히 교회 공동체의 일원입니다. 개인적 판단으로 신자가 되고 나중에 교회를 선택하여 나가서 예배를 드리거나 교제를 하는 요즘 식의 신자가 아닙니다. 초대교회에서는 교회공동체를 이루는 일 자체가 바로 신앙의 내용이었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고 성령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야말로 세상에 심겨진 하느님나라의 씨앗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에 시작된 작은 공동체, 그러나 그 교회야말로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드러낼 가장 중요한 표지입니다. 겨자씨처럼 작디 작은 씨앗으로 심어졌지만 아무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싹을 티우고 자라고 자라나서 마침내 온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하느님의 백성이 될 때까지 복음을 전하고 드러내는 일을 맡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말씀과 성사는 바로 우리 안에 시작된 하느님 나라를 축하하는 일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영혼에 시작된 하느님 나라를 감사합니다. 우리들을 교회공동체로 불러 세우시고 하느님나라의 자라나는 씨앗이 되도록 사명을 맡기시고 축복하신 것을 기억하고 기뻐합니다. 그 “큰 나무 하느님나라”가 완성될 소망 안에서 오늘 우리는 “작은 씨앗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2009.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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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절로 자라나는 씨의 비유 (마르 4:26-34)

신약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낱말(키워드)는 무엇일까요? 예수님, 구원, 영원한 생명, 하느님나라... 이 보석 같은 말들은 서로 통하는, 사실은 같은 의미를 전해주는 말들입니다. 그중에서도 저는 ‘하느님나라’라는 말을 제일 좋아합니다. 불교에서 빌린 ‘천당(天堂)’이라는 개념의 성경적인 본래말이기도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의 핵심적인 내용이기도 합니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는 말씀이 예수님 공생애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나라는 요즘 유행하는 이른바 영지주의적인 사고방식으로 그리는 완전한 저 세상도 아니고, 혁명가들이 꿈꾸는  정치적인 이상향도 아닙니다.

물론 그 나라는 한 분 하느님이 다스리시는 절대의 세계이며, 하느님의 통치권은 우리네 삶의 모든 영역을 망라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우리가 경험하는 하느님나라는 놀라울 정도로 소박한 내용을 갖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나라를 “저절로 자라나는 씨”에 비유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나라를 위해 신비한 지식을 알려고 여기저기 자칭 스승들을 쫓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이 땅에 하느님나라를 이루기 위해 정치적인 투쟁의 선봉에 서고 세상적인 술수를 동원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말씀을 가슴에 담아두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성경을 백독하고 성경구절을 줄줄 외우는 것도 물론 좋은 일이겠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단 한마디의 말씀이라도 그것을 진실로 우리의 깊은 마음에 간직하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는 한 말씀에 하느님나라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여전히 급하고 둔하고 자기중심적인 인간들이었던 그들은 주님의 인내와 사랑을 통해 마침내 교회의 든든한 기둥들로 자라납니다.


작은 씨앗이라도 생명력이 살아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분당교회 설립 7주년이 지났고, 제가 섬긴지도 5년이 되어갑니다. 돌이켜보면 그동안 저는 하루하루 자고 일어나고 기다린 일밖에는 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우리 교회가 이만큼 자라났을까 하는 자체가 신비롭고 감사한 일입니다. 주님의 비유 말씀대로 우리교회는 좋은 밭에 뿌려진 씨입니다. 겨자씨 같이 작지만 큰 가지를 드리울 씨앗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든든한 확신이요 소망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이곳에서 하느님나라를 경험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2006. 6. 18)





2009년 6월 7일 성삼위일체주일 성서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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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6:1-9
1 우찌야 왕이 죽던 해에 나는 야훼께서 드높은 보좌에 앉아 계시는 것을 보았다. 그의 옷자락은 성소를 덮고 있었다. 2 날개가 여섯씩 달린 스랍들이 그를 모시고 있었는데, 날개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나머지 둘로 훨훨 날아다녔다. 3 그들이 서로 주고받으며 외쳤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야훼, 그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시다." 4 그 외침으로 문설주들이 흔들렸고 성전은 연기가 자욱하였다. 5 내가 부르짖었다. "큰일났구나. 2)이제 나는 죽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 틈에 끼여 살면서 만군의 야훼, 나의 왕을 눈으로 뵙다니…….""나는 아무 말도 못하게 되었다."라고 옮길 수도 있다. 6 그러자 스랍들 가운데 하나가 제단에서 뜨거운 돌을 불집게로 집어가지고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에 대고 말하였다. "보아라, 이제 너의 입술에 이것이 닿았으니 너의 악은 가시고 너의 죄는 사라졌다."
8 그 때 주의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누구를 보낼 것인가?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하고 내가 여쭈었더니 9    주께서 이르셨다. "너는 가서 이 백성에게 일러라. '듣기는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마라. 보기는 보아라. 그러나 알지는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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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8:12-17
12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과연 빚을 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육체에 빚을 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육체를 따라 살 의무는 없습니다.  13 육체를 따라 살면 여러분은 죽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악한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  14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15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 여러분을 다시 노예로 만들어서 공포에 몰아넣으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16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해 주십니다. 또 우리의 마음속에도 그러한 확신이 있습니다.  17 자녀가 되면 또한 상속자도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을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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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3:1-17
1 바리사이파 사람들 가운데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다인들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는데
2 어느 날 밤에 예수를 찾아와서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고서야 누가 선생님처럼 그런 기적들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 그러자 예수께서는 "정말 잘 들어두어라. 1)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위로부터 나지 아니하면"이라고 옮길 수도 있다. 4 니고데모는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야 없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5 "정말 잘 들어두어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6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 7 새로 나야 된다는 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라. 8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시자 9 니고데모는 다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10 예수께서는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이름난 선생이면서 이런 것들을 모르느냐?  11 정말 잘 들어두어라.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하고, 우리의 눈으로 본 것을 증언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12 너희는 내가 이 세상 일을 말하는데도 믿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늘의 일을 두고 하는 말을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간 일이 없다.  14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15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 
17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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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성공회기도서
찬송받으실 삼위일체 하느님, 주께서는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며 또한 모든 인류의 구세주가 되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지극한 영광과 권능을 경배하며 찬양하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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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 난 사람으로 세상을 새롭게
(요한 3:1-17)

삼위일체 교리는 하느님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한 분이시라는 가르침입니다. 
“삼위일체”는 철학적 공론이 아닙니다. 처음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을 알게 되었고 성령의 지혜와 능력을 힘입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되었다는 증언을 담아내려 했던 신앙고백입니다.

오늘 복음성경은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를 통해서 그리스도교 삼위일체 신앙의 본질을 알려줍니다.
하느님을 아는 일은 원시인들이 천둥번개에 놀라 신을 찬양하는 그런 수준일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당시 랍비들이 성경풀이를 통해 “하느님에 관해서” 알려 주려 했다면,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는 당신의 앎을 삶으로 사심으로써 “하느님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일 역시 예수님에 관한 지적인 인식을 갖는 일이 아니라 그 분의 삶을 뒤따르며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참여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새로 나야, 위로부터 나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주님의 말씀은 세례성사를 암시합니다.
이기적이고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옛자아를 죽이고 성령의 마음과 관점과 소망을 가진 새자아로 새로 나는 일이 신자의 탄생입니다.
새로 나야 한다는 말씀은 얼핏 우리가 이 세상과 관계없이 우리 영혼구원에 관심을 두고 살아야 저 세상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천만에 말씀입니다. 새로 나는 것, 곧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는 일은 “저 세상에 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하느님의 자녀로 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관심은 “예수천당, 불신지옥”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이 땅을 살아가는 자, 다시 말하면 복음적인 가치로 우리 자신과 이 세상을 하느님의 나라로 변화시키고자 헌신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한 신자의 탄생, 교회의 시작이 인간적 지혜나 결심이 아니라 성령의 이끄심으로 가능했다는 고백이 오순절 ‘성령강림’의 이야기로 전해집니다. 이러한 구원의 이야기가 성삼위일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한 분임이시라는 교리에 담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 (요한 3:16)
만일 하느님이 저 세상을 사랑하셔서 우리 영혼을 그리로 옮기는 일을 “영원한 생명”으로 보셨다면 성자 예수님도 협조자 성령님도 별 의미가 없게 됩니다.
성자 예수를 통하여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로서, 성령의 사람으로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살아가게 되는 일이 “영원한 생명”의 의미입니다.
“삼위일체”는 구원의 참뜻을 밝히는 귀한 믿음인 것입니다.
(2009.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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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삼위일체(聖三位一體), 하느님의  살아계심
(요한 3:1-17)

오늘 성삼위일체주일을 맞으며 그동안의 교회력을 돌아봅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던 대림절기,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주님을 기억하고 기뻐하는 성탄절, 그 주님의 공생애 구원사역을 기대하며 동참을 준비하는 사순절기, 그리고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 수난과 운명, 그리고 놀라운 반전인 부활주일, 그리고 이제 다시 하느님의 영으로서 하느님께 돌아가신 승천일,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협조자로 오신 주님의 영을 받는 성령강림주일을 기념한 신앙여정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하느님께서 몸소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제 새로운 대림절기까지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오늘이 성삼위일체주일로 지키는 까닭은 바로 그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기억하자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유일하신 절대자이지만, 그것은 흔히 생각하듯 우리가 머리로써 철학적으로 추상한 하나님, 일자(一者)가 아닙니다. 그 분은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모세의 하느님이요, 다윗의 하느님입니다. 인류를 찾아오시는 하느님이시고, 역사를 이끄시는 하느님이요, 우리의 실존을 기억하시는 하느님이시고, 무엇보다도 오늘도 살아계시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 하느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되 창조주이신 성부로, 구세주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로, 협조자이시며 진리의 영이신 성령으로, 성 삼위의 세 인격으로 경험한다는 것이 삼위일체 교리의 의미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좋은 머리로 알 수 있는 어떤  이론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의 삶을 통해 이 땅에서 체험하고 고백할 수 있는 하느님의 “현존” 자체인 것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진리를 안다는 것은 하느님께 대하여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영성(= 영적인 성격)을 깨닫는 일로 시작됩니다. 우리가 영적인 존재라 함은 바로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깨닫고 누릴 수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려면 “위(하늘)로부터 나야한다”,“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이 뜻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우리와 “창조(자유)와 사랑(나눔)과 도움(섬김)”의 관계를 맺어주시는 하느님을 경험하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 신비는 어려운 이론이 아니라 삶의 기쁨이고 능력인 것입니다.(2006.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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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삼위일체(聖 三位一體),  하느님의  살아계심

“삼위일체” 교리는 옛날 그리이스의 철학개념을 빌어 표현되어있기 때문에 무척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어려운 것은 어려운 대로 그냥 두어도 됩니다. 그렇지만 삼위일체 교리는 분명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위한 것으로서 존중될 필요가 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 위격이 어떻게 해서 한 본체일 수 있는가”등등을 이해해야만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교리가 말하고자하는 것은 도리어 우리의 신앙이란 머리로 지어낸 관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목숨을 건 믿음의 삶 가운데 하느님을 실제로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되 세상을 창조하신 자비로운 성부 하느님, 이 땅에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바람과 숨결로 창조와 구원과 성화의 과정을 이끄시는 협조자 성령님, 이렇게 세 인격을 경험하는 풍성한 체험 가운데 살았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특별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하느님 존재에 대한 하늘의 비밀이론이 아니라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의 삶을 통해 이 땅에서 체험하고 고백할 수 있는 “하느님의 살아계심” 자체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하느님의 살아계심을 머리가 아니라 전 존재로 마주 대하고 체험하게 되면 우리가 놀랍게도 새로운 존재로 변화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을 체험하고도 우리의 인격과 심령에 아무런 변화도 없다면 그 체험은 틀림없이 가짜입니다. 우리의 변화는 우리가 작심하여 더 철저히 윤리적으로 살아간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이제는 우리의 모든 삶을 “하느님과의 하나됨”이라는 기준으로 새로이 판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변화를 “영으로 새로 태어남”이라고 복음서는 표현합니다.


이 삼위일체주일에 우리는 어떤 교리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살아계신 하느님을 드높이고 찬양합니다. 그 드높임과 찬양은 무슨 신학이론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거듭난 삶”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머리로 이해하고 주장할 수 있는 삼위일체의 신비가 아닙니다. “변화된” 우리들의 영혼과 삶과 실천이  삼위일체의 신비, 하느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냅니다.(2003. 6.15)



2009년 5월 31일 성령강림주일 성서말씀 

사도 2:1-21
1 마침내 오순절이 되어 신도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는데 2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3 그러자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 위에 내렸다. 4 그들의 마음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5 그 때 예루살렘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경건한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다. 6 그 소리가 나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사도들이 말하는 것이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자기네 지방 말로 들리므로 모두 어리둥절해졌다. 7 그들은 놀라고 또 한편 신기하게 여기며 "지금 말하고 있는 저 사람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8 그런데 우리는 저 사람들이 하는 말을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의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셈인가? 9 이 가운데는 바르티아 사람, 메대 사람, 엘람 사람이 있는가 하면 메소포타미아, 유다,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도 있고 10 프리기아, 밤필리아, 이집트, 또 키레네에 가까운 리비야의 여러 지방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로마에서 나그네로 온 11 유다인들과 유다교에 개종한 이방인들이 있고 그레데 사람들과 아라비아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저 사람들이 지금 하느님께서 하신 큰 일들을 전하고 있는데 그것을 우리는 저마다 자기네 말로 듣고 있지 않은가?" 하고 말하였다. 12 이렇게 모두 놀라고 어안이 벙벙하여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가?" 하며 웅성거렸는데 13 그 중에는 "저 사람들이 술에 취했군!" 하고 빈정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14 그 때 베드로가 다른 열 한 사도들과 함께 일어서서 군중을 보고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유다 동포와 예루살렘 시민 여러분, 내가 하는 말을 귀담아 듣고 잘 생각해 보십시오. 15 지금 시각이 아침 아홉 시인데 어떻게 술에 취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사람들은 술에 취한 것이 아닙니다. 16 이것은 예언자 요엘이 예언한 대로 된 것입니다. 17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1)나는 모든 사람에게 나의 성령을 부어 주리니 너희 아들 딸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계시의 영상을 보며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요엘 3:1-5) 18 그 때에는 나의 남종에게도 여종에게도 나의 성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도 예언을 하리라. 19 나는 하늘 높은 곳에서 표징을 보이며 땅에서 기적을 행하리니 피와 불과 짙은 연기가 일고 20 해는 빛을 잃어 어두워지고 달은 피와 같이 붉어져 마침내 크고 영광스러운 주의 날이 오리라. 21 그 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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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8:22-27
22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23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하느님의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24 우리는 이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25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참고 기다릴 따름입니다.

26 성령께서도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 27 이렇게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성도들을 대신해서 간구해 주십니다. 그리고 마음속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성령의 생각을 잘 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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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15:26-27, 16:4-15

26 "내가 아버지께 청하여 너희에게 보낼 협조자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나를 증언할 것이다. 27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4 그러한 때가 오면 내가 한 말을 기억하라고 너희에게 이렇게 미리 말해 두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이 말을 너희에게 하지 않은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5 나는 지금 나를 보내신 분에게 돌아간다. 그런데도 너희는 어디로 가느냐고 묻기는커녕 6 오히려 내가 한 말 때문에 모두 슬픔에 잠겨 있다. 7 그러나 사실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더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그 협조자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보내겠다. 8 그분이 오시면 죄와 정의와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잡아 주실 것이다. 9 그분은 나를 믿지 않은 것이 바로 죄라고 지적하실 것이며 10 내가 아버지께 돌아가고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하느님의 정의를 나타내시는 것이라고 가르치실 것이고 11 이 세상의 권력자가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사실로써 정말 심판을 받을 자가 누구인지를 보여주실 것이다."
12 "아직도 나는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너희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주실 것이다. 그분은 자기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들은 대로 일러주실 것이며 앞으로 다가올 일들도 알려주실 것이다. 14 또 그분은 나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전하여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15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다 나의 것이다. 그래서 성령께서 내게 들은 것을 너희에게 알려주시리라고 내가 말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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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성공회기도서

전능하신 하느님, 주께서는 성령을 보내시어 교회의 빛과 생명이 되게 하셨나이다.  비옵나니, 우리 마음을 성령의 한없는 은혜로 채우시고, 성령께서 주시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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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체험을 세상에 전하는 교회
(요한 15:26-27, 16:4-15)

지난 한 주간 고 노무현 전대통령의 국민장 기간이었습니다. 그는 정치인이었고 종교인은 아니었습니다. 자살을 결심할 만큼 고통스러웠던 그 시간 속에서 그가 열심히 기도를 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고인에 대한 추모의 열기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연인이 파렴치한 범죄자로서 수사를 받다가 "쪽팔려서" 자살한 일에 어째서 그리 난리냐고 어이 없어 합니다.
기독교 주류는 그의 죽음에서 자살이라는 사태만을 관심합니다. 자살자는 영적인 범죄자로 지옥에 떨어질 것이요, 공식적인 추모미사(예배)를 드릴 수 없다고 합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일입니다. 모든 교회가 함께 자축하는 교회의 생일입니다.
그런데 성령이란 도대체 누구이십니까?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어떤 사태를 말하는 것일까요?
모든 일을 머리로 판단하곤 하는 저는 신앙생활을 해오는 동안 “성령”에 관하여 콤플렉스가 많았습니다. 지금도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이들 앞에 서면 상대적으로 성령이 부족한(?) 사제로서 이런저런 압박감을 받곤 합니다. 하지만 그래서 그만큼 더 많은 생각과 공부와 경험을 하고자 애써왔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르나 한 빵을 나누며 한 몸을 이룹니다"는 고백을 저는 사랑합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저와 다른 신앙의 양태를 비판하는 일을 조심스럽게 피해왔습니다.
하지만 서로 무슨 생각, 무슨 입장을 가지는 지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겉으로만 하나인 척 하는 것도 실은 한 몸을 이루는 일은 아닙니다.
어쩌면 불편한 논의일지 모르겠으나  저는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핵심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오늘 들으신 성경말씀을 다시 묵상해보십시오. 성경이 말하는 성령, 교회가 경험하고 증언하는 성령체험은 “희망”과 “진리”의 영에 관한 것입니다.
성령은 단순히 초자연적인 능력의 영이 아닙니다. 드러나는 현상만으로는 성령과 악령을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요한 1서 4:1-6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은 자기가 성령을 받았노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다 믿지 말고 그들이 성령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과연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를 시험해 보십시오. 많은 거짓 예언자가 세상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성령을 알아 보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성령을 받은 사람이고 예수께서 그런 분이시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의 적대자로부터 악령을 받은 것입니다. ... 그들은 이 세상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 세상 일을 말하고 세상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왔읍니다.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우리의 말을 듣지만 하느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사람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진리의 성령과 사람을 속이는 악령을 가릴 수 있읍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요 하느님의 영이십니다.
성령을 받으면 기이한 언어로 말하고 장래 일어날 일을 알 수 있으며 병을 고치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일까요? 맞습니다. 성령의 은사(카리스마, 선물)을 받아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치유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깊이 깨우치고 그 일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신자를 교회에 가두어서 종교적인 일에 몰두하게 하시려고 성령께서 교회를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이어가시려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세례성사를 통하여 성령을 받았습니다. 실상 성령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성령체험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라는 고백을 살고 증언하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부활의 의미를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동시에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성육신의 의미를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의 이야기를 하나로 꿰뚫어 이해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신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을 다스리는 악마의 세력을 꺽으시고 이루시려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각자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로서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는가의 이야기입니다. 죽음의 세력에 짓눌려 살아가던 이들이 하느님께서 온전히 다스리시는 나라에 관하여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는가의 이야기입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악한 세력들의 거짓 속임수에 어떻게 진리의 말씀으로 맞설 수 있는가의 이야기입니다.

신앙인은 신앙의 가치, 신앙의 눈으로 모든 일을 분별합니다.
저는 오늘 이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교의 “자살은 죄”라는 주장을 들으며 낯이 뜨겁습니다. 당연히 자살은 옳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지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살의 문제는 생명이 존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생명은 곧 인권의 문제입니다. 최근 인정된 존엄사의 문제도 생명의 고귀함, 인간의 존엄함을 어떻게 이해하고 지킬 것인가가 핵심입니다. 단순히 현상이 아니라 가치를 판단하는 문제입니다.
과연 그동안 한국교회가 이 땅의 생명과 인권에 대해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였을까요? 저 자신부터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 어떤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을까요?

어떤 위대한 목사님은 노무현 전대통령의 소식을 듣고 “청소년들의 모방자살이 걱정이다.  능력이 없으면 지도자가 되지 말아야 하는데...” 하고 걱정하셨다고 합니다.
당연히 자살은 바람직하지 않고, 모방해서도 아니 될 일이지요. 그런데 신앙의 지도자라면 좀 더 깊은 이야기를 해주어야 합니다. 신앙이 깊지 않은 고인도 “삶과 죽음은 자연의 한 조각이다”고 유서에 남겼는데... 
실상 신앙의 본질은 삶과 죽음을 같은 차원의 일로 보는 일입니다. 씁슬한 마음으로 억지로 예를 만들자면 "노무현"의 영향을 받아 자살하려는 학생에는 “노무현처럼 일생을 치열하게 살아서 노무현처럼 대의를 위해 큰 일을 도모한 후에” 하라고 권유하면 될 일이니 그다지 걱정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도리어 수단방법 안가리고 이기적으로 살아서 전과 몇 범이 되더라도 세상은 그저 성공한 사람을 제일로 알아준다고 가르치는 것보다 나은 일이 아닐까요?

이야기가 유치해진 김에 죄송하지만 고전유머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한 유람선이 침몰했습니다. 구명보트에 구조된 사람들은 전부 13명이었는데, 정원은 10명,  3명이 물속으로 뛰어내리지 않는다면 모두 다 죽을 판입니다. 그러자 그 중 한사람이 일어나 외칩니다. "대영제국 만세!!" 그리곤 그 영국인은 물속으로 뛰어내립니다. 그걸 보고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진 프랑스인이 "질 수 없다!!"하며 자신도 뛰어내립니다. 나머지 한 명이 문제입니다. 긴장된 순간에 갑자기 두루마기를 입은 한 사내가 일어나서 "대한민국 만세!"를 크게 외칩니다. 그리고 옆에 있던 일본인을 발로 차서 물 속에 밀어넣습니다. 영국인의 결단이 용서받지 못할 자살입니까? 기지를 발휘한 한국인은 천당에 가게 됩니까? 유치한 이야기에 유치한 질문을 드려 죄송합니다. 저는 지금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가 자살자의 구원문제를 다루는 수준이 이런 유머수준인 것처럼 세상에 보여져서는 안된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참으로 참다운 성령체험이 필요합니다.
흥분된 분위기 속에서 정서적으로 느끼는 고양감이 성령체험이 아닙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참된 의미를 깊이 되새기는 일이 성령체험입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성체성사가 가장 높고 깊고 생생한 성령체험입니다.
세상에 생명을 주시려고 자신의 생명을 바치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일입니다. 그 분의 생명을 먹고 마시며 우리가 참 생명이 되는 일입니다. 그 분이 목숨 바쳐 사랑한 그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욕심과 어리석음으로 죽음과 미움에 사로잡혀 있는 이 세상에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전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희생할 용기와 지혜로 살아가는 일, 그것이 성령체험입니다.

노무현 전대통령은 “유스토”(의인義人이라는 뜻)라는 신명으로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실제 종교인으로서는 “냉담자”였습니다. 제가 걱정하는 것은 그 냉담의 책임이 어쩌면 교회 안에서, 교회만의 기준으로 구원을 관심하며, 정작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이루시려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그리스도는 외면해버리는 교회에게 더 많이 있지 않은가 하는 점입니다.

노무현 전대통령을 향한 추모열기는 실은 정치적인 확신이나 선호라기보다는 “가치”를 추구하는 삶, 이 황폐한 땅에서 참된 삶을 살고 가르치는 “어른”을 모시고 싶은 이들의 갈망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제가 정말 두려워 하는 것은 그 수많은 추모객에게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교가 아무런 “가치”도 제시해주지 못하는 이기적인 종교집단으로만 여겨지는 일입니다.

2000년전 오순절의 성령 강림의 체험을 두고 그 현상 만을 신기하게 본 사람들이 “술에 취해 그런다”고 빈정거리자 베드로는 성경을 인용하여 말씀합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나의 성령을 부어 주리니 너희 아들 딸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계시의 영상을 보며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요엘 3:1-5) 그 때에는 나의 남종에게도 여종에게도 나의 성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도 예언을 하리라. 나는 하늘 높은 곳에서 표징을 보이며 땅에서 기적을 행하리니 피와 불과 짙은 연기가 일고 해는 빛을 잃어 어두워지고 달은 피와 같이 붉어져 마침내 크고 영광스러운 주의 날이 오리라. 그 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저와 우리 모두 성령을 가득히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노래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나라의 참된 희망을 선포해야 합니다.
설사 말로 그친다 해도 “아파트 값이 올라서 돈 많이 버는 세상이 와야 한다”고 노래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설사 말로 그친다 해도 “사람 사는 아름다운 세상, 하느님이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평화의 나라를 이루어야 한다”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우리 자신의 구원을 진실로 진실로 확신하려면 우리의 소원이 참된 희망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사로잡는 것이 우리의 욕망, 우리의 추구가 아니라 성령의 간구, 성령의 능력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2009.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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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께서 이끄시는 신앙생활
(요한 15:26-27, 16:4-15)

사람마다 타고난 기질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참 신비합니다. 어떤 사람은 머리 중심으로, 어떤 이는 가슴 중심으로, 또 어떤 이는 이른바 뱃심으로 살아간다는 것(에니어그램의 설명)을 배운 뒤로 나와 스타일이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기가 훨씬 편해졌습니다.

저는 전형적인 ‘머리형’인데 삶속에서 경험하는 사건이나 관계를  거의 본능적으로 ‘지적인 내용’으로 바꾸어서 파악하고 대처하는 경향입니다. 오랜 동안 신앙생활도 그렇게 해왔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이런 저런 철학적, 경험적 지식들이 머리에 잘 정리되는 만큼 내 신심이 돈독해지는 줄 알았죠. 성격이나 행실에 대해 그다지 나쁜 평이 없었던 것도 제가 믿음이 좋은 때문인 줄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저 소심하고 착한 편인 성격이  사람들의 무난한 평판을 받은 것뿐이고, 제 머리 속의 신(神)인식이란 제 삶과는 한참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제 안의 욕심과 어리석음과 분노가  들끓어 오르는데, 제 머리 속 지식은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함을 깨달으며 저는 내면의 세계가 무너져 내리는 고통스런 경험을 했습니다.

저는 그리고 나서야 신앙생활이란 살아계신 하느님과 저의 인격적인 관계가 속알맹이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서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사는 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이라고 가르칩니다.  그 관계란 바로 살아계신 하느님의 사랑과 요청으로 시작되고 우리의 응답과 순종으로 이루어집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 관계가 우리의 막연한 관념으로 우리 머리 속에서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성령님, 협조자이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나의 삶을 통하여 맺어지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지적’인 이해를 중시하던 저의 경우와는 달리 어떤 분은 자신의 ‘감정적’인 느낌을 신앙생활의 기준으로 삼는 것처럼 보이고, 어떤 분은 자신의 ‘의지’가 관철되는 정도를 신앙생활의 보람으로 여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저의 경우와 본질적인 차이는 아닙니다. 우리의 지성, 감성, 의지가 우리의 신앙생활을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우리의 신앙생활은 성령께서 주도하시는 일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한 우리는 팍팍하고 고단하며 열매 없는 삶을 살게 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의 지성, 감성, 의지는 살아계신 성령께 맡겨져야 합니다. 우리가 특정한 신념이나 지식을 고집하지 않을수록, 우리가 맛보고 싶은 감정적 흥분을 포기할수록, 모든 것을 내 욕심대로 하고픈 마음을 내려놓을수록 성령께서 하늘의 지혜와 평안과 형통함으로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2006.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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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여기 살아계신 진리의 영


우리의 경험은 “말”과 “글자”를 통해 표현됨으로써 오래 기억되고 다른 이와 다음 세대로 전해질 수 있습니다. 말과 글의 힘은 위대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삶의 질이 더 나아지는 것을 “문화(文化)”라고 표현하며 펜의 힘이 칼보다도 강하다고 합니다. 글월(文)로 표현되는 진리가 우리 삶을 지배하는 원리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굳어진 글자, 절대화된 말이 얼마나 사람들을 괴롭히고 진리를 억압하는지를 경험합니다. 그래서 동서양의 모든 깨달은 사람들은 진리란 언어를 초월하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말로 표현되는 도는 항상 그러한 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는 도가의 선언과, “문자로 깨달음을 표현하지 않는다(言語道斷, 不立文字)”는 선가의 선언은 서로 통합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의 말씀과 그것이 기록된 성경을 지극히 귀중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또한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머무는 말씀이 아니라 육신을 취하여 사람이 되시어 이 땅에 오셨다는 성육신의 진리를 통해 하느님께서 문자나 교리에 얽매인 하느님이 아니라 언제나 모든 말씀의 주인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은 우리가 문자에 얽매이지 않도록 자유롭게 해주시는 “진리의 영”이십니다. 모든 문자와 전통은 성령의 비추심을 통해 새롭게 해석되어야 합니다. 바울로 사도가 표현하듯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 우리는 문자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지 않고,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을 깨닫습니다.
과거 속의 예수님을 붙잡고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신앙체험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살아계시는 예수님, 우리의 경험 속에 새롭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따라 살아갑니다.

성령은 추상적인 어떤 원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현실을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게, 뜨겁고 지혜롭게 살아가도록 이끌어주시는 살아계신 우리의 협조자이십니다.
교회의 시작과 현재와 미래도, 우리의 믿음의 시작과 열매도, 우리의 내면적인 평화와 외면적인 실천도 모두 성령님께 달려있습니다. 주님의 약속대로 성령은 강림하셔서 지금 우리의 영과 삶과 우리 교회와 이 세계를 움직여가고 계십니다! (2003. 6.8)



대한성공회 정의평화사제단 노무현 前 대통령 추모글 


                         노무현 前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며
 
이 나라의 모든 국민들과 함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마음 깊이 애도합니다.

지금 우리는 안타까움과 미안함과 분함으로 그분 곁에 머물고 있습니다.
모든 제도가 사람의 사람다움을 위해 존재한다는 그분의 신념과 노고가 무너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고인께서 겪고 있었을 외로움과 아픔을 멀찍이 떨어져 방관해서 미안합니다.
그리고 순수하지 않은 마음으로 한 인간을 몰아가 결국 죽음의 언덕에서 밀어 떨어뜨린 어둡고 거대한 세력들에게 분노를 느낍니다.

언제나 죽음은 남겨질 사람들에게 새로운 몫을 선사합니다. 그렇기에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을 잉태하는 시작이고, 보다 성숙한 세상의 문을 열어주는 출발이라고 믿습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고 추모한다는 것은 순간의 슬픔을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그가 지녔던 바른 신념과 그가 꿈꾸었던 세상을 이어받아 사는 것입니다.

참 세상을 향한 그분의 소망이 남겨진 우리들의 삶에 깊은 흔적으로 남아 이어져가기를 빌며, 고인이 되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혼이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평화 누리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009. 5. 27

                                                                     대한성공회 정의평화사제단

요한 17: 6-19
6 "나는 아버지께서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뽑아 내게 맡겨주신 이 사람들에게 아버지를 분명히 알려주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본래 아버지의 사람들이었지만 내게 맡겨주셨습니다. 이 사람들은 과연 아버지의 말씀을 잘 지키었습니다. 7 지금 이 사람들은 나에게 주신 모든 것이 아버지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8 나는 나에게 주신 말씀을 이 사람들에게 전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 말씀을 받아들였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을 참으로 깨달았으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었습니다.
9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하여 간구합니다. 세상을 위하여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맡기신 이 사람들을 위하여 간구합니다. 이 사람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입니다. 10 나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며 아버지의 것은 다 나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로 말미암아 내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11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돌아가지만 이 사람들은 세상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나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사람들을 지켜주십시오. 그리고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주십시오. 12 내가 이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나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내가 이 사람들을 지켰습니다. 그 동안에 오직 멸망할 운명에 놓인 자를 제외하고는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하나를 잃은 것은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13 지금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아직 세상에 있으면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이 사람들이 내 기쁨을 마음껏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14 나는 이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전해 주었는데 세상은 이 사람들을 미워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은 것처럼 이 사람들도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15 내가 아버지께 원하는 것은 그들을 이 세상에서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마에게서 지켜주시는 일입니다. 16 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 사람들도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17 이 사람들이 진리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이 사람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19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하여 이 몸을 아버지께 바치는 것은 이 사람들도 참으로 아버지께 자기 몸을 바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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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성공회기도서
전능하신 하느님, 복되신 성자 예수께서는 하늘 높이 승천하시고 만물을 다스리시나이다. 비옵나니,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굳세게 하시어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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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24일 부활 7주일(승천 후 주일) 성서말씀 

사도 1:15-17, 21-26
15 그 무렵 어느 날 교우가 백이십 명 가량 모여 있었는데 그 자리에 베드로가 일어나 이렇게 말하였다.
16 "교우 여러분, 예수를 잡은 자들의 앞잡이가 된 유다에 관하여 성령께서 다윗의 입을 빌려 예언하신 말씀은 정녕 이루어져야만 했습니다. 17 그는 본래 우리 열두 사람 중 하나로서 우리와 함께 일하던 사람이었습니다. 21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오시는 동안,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예수께서 우리 곁을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줄곧 우리와 같이 있던 사람 중에서 22 하나를 뽑아 우리와 더불어 주 예수의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해야 하겠습니다."
23 그들은 바르사빠라고도 하고 유스도라고도 하는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천거한 다음 24 이렇게 기도하였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시는 주님, 주님께서 이 두 사람 중 누구를 뽑으셨는지 알려주십시오. 25 유다는 사도직을 버리고 제 갈 곳으로 갔습니다. 그 직분을 누구에게 맡기시렵니까?"
26 그리고 나서 제비를 뽑았더니 마티아가 뽑혀서 열한 사도와 같이 사도직을 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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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요한 5:9-13
9 우리가 사람의 증언을 인정한다면 하느님의 증언은 더욱더 인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하느님께서 친히 당신의 아들에 관해서 하신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10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이 증언을 자기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자는 하느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듭니다. 그런 자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에 관해서 증언하신 것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11 그 증언은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과 그 생명이 당신의 아들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12 하느님의 아들을 모신 사람은 생명을 가진 사람이고 그 아들을 모시지 않은 사람은 생명을 가지지 못한 사람입니다.
13 나는 하느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여러분에게 이 글을 씁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알리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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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 되어 진리를 따라 (요한 17: 6-19)

고(故)노무현 전대통령의 자결(自決) 소식으로 제 정신이 멍합니다. 무슨 말을 꼭 해야 할 것도 같고 동시에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느낌입니다.


그동안 저는 교회공동체 안에서 정치적인 주제를 말하는 걸 의도적으로 조심스럽게 피해왔습니다. 그 이유는 우선 그리 많지 않은 우리 교우들 가운데도 정치적인 견해는 다양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인 입장은 열심히 대화한다고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는 실상 자기가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자기의 경험과 이해관계와 생각의 틀을 통해 이미 결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각을 기꺼이 변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다른 이의 견해에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는 일은 위대하지만 정말 쉽지 않은 일이고 게다가 저는 그렇게 이끌만한 카리스마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 관심은 약간 우회적입니다. 직접적인 언급이 아니라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신앙적 가치, 복음의 가르침을 깊이 찾고 나누는 것이 지혜롭다고 봅니다. 신앙적인 고민이 참되고 깊으면 우리의 세상살이가 참되고 진지할 것이고 그러면 세상살이의 일부인 정치적인 문제도 자연스럽게 참된 분별력으로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얼핏 순진한 태도 같습니다. 하지만 신앙적인 이야기는 단순히 우리의 머리가 아니라 살아계신 성령께서 이끌어주셔서 가능한 일이기에 우리는 겸허히 확신을 가지고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우리는 서로 신앙적인 이야기를  진지하고 진실되고 지혜롭게 나눌 수 있어야 하고 그 이야기를 통해 늘 우리 마음을 열고 생각을 가다듬고 삶을 변화시키며 인격의 열매를 맺어가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혼란스런 현실에 대해 복음이 전하는 가장 깊은 차원의 메시지를 듣습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이 전하는 겟세마니 기도라고 할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우리들을 위해서 마지막으로 간구하시는 내용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주십시오. 아버지께 원하는 것은 그들을 이 세상에서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마에게서 지켜주시는 일입니다. 이 사람들이 진리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주십시오.”

우리의 구원은  “하나”가 되는 일입니다.

하나가 되는 일은 그저 막연한 소속감이 아닙니다. 정치적인 입장이 달라도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다르다”는 이유로 장벽과 차별과 불통(不通)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하나가 되는 일은 강제적인 통합이 아니라 더 큰 가치를 향한 소통(疏通)입니다. 그것은 사랑이요 친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악마의 논리와 지배를 따라 살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살지만 하느님의 말씀, 곧 진리를 위해 살아갑니다.

오늘 말씀과 성사는 그것을 분명히 새롭게 확인시켜줍니다.(2009.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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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천(昇天)- 예수님이 돌아가신 하늘 (요한 17: 6-19)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돌아가지만 이 사람들은 세상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삽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이 세상’에 오셨다고 증언합니다.  이 ‘하늘’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흔히 우리는 이 하늘을 우주공간 어딘가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아니라구요? 그렇게 단순하고 유치하게 생각하지 말라구요? 하늘은 하느님이 계신 곳을 상징하는 이름, 곧 우리의 세상과는 차원과 수준을 달리하는 영적인 세계를 하늘(Heaven)이라 부르는 것이지, 저 하늘공간(Sky)을 말하는 게 아니라구요?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정확한 이해라고 동의합니다.

그래도 조금 더 의심해보면 혹시 우리가 생각하는  영적인 세계로서의 ‘하늘’은 이른바 ‘제 세상’, ‘영계(靈界)’의 다른 이름은 아닐까요? 살아서는 절대 경험할 수 없는, 하지만 우리 모두 예외없이 죽음을 통해서 가지 않으면 안되는 ‘저 세상’ 말이지요. 우리는 하느님이 바로 저 세상에 계시다고 은연중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 생각도 틀린 것이라구요?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세상과 저세상을 분리된 것으로 생각하는 이원론이 아니며, 하느님은 ‘저 세상’에 속하여 계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저 세상을 모두 넘어서서 계신다는 말씀이지요.
좋습니다. 약간 어렵긴 하지만, 그러니까 ‘저 세상’은 ‘이 세상’의 상대개념일 뿐이고, 우리가 관심하는  ‘하늘’의 존재란 이 세상, 저 세상을 망라한 인간들의 상대적이고 유한한 삶에 대하여 절대적인 한 분 하느님의 무한한 뜻과 사랑이 작용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강림(사람되심)은 우주공간에서 지구공간으로 외계인처럼 내려오셨다는 뜻이 아니고,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유령처럼 나타나셨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승천(하느님되심)도 지구공간에서 우주공간 어딘가로 올라가셨다는 뜻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저 세상의  영계(靈界)로 가셨다는 뜻도 아니라고 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승천(昇天)‘은 사람되어 참사람으로 사셨던 예수님이 그 참혹하고 어이없는 십자가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다시 일으켜지셔서, 성자 하느님으로 다시금 높여지신 일입니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우리가 지금  “말씀의 진리로 우리를 세상과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그 거룩함을 통해서 교회 공동체 안에 서로 하나가 되고 있는가” 를 돌아보게 합니다. (2006.5.28)


                   


주교서품 1주년에 즈음하여

주님 안에서 한 가족으로 살아가는 교구 내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의 주교 바우로가 문안을 드립니다.

태백에서 물 걱정을 하던 때가 바로 엊그제인데 촉촉한 비가 대지를 녹색으로 바꾸더니 곳곳에서 모를 내는 데 걱정하지 말라는 듯 흡족한 비를 내려주시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제가 주교로 성품된 지 벌써 1년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지냈는지 모를 정도로 숨 가쁘게 지내왔습니다. 그러나 지난 세월을 잠시 돌이켜보며 그간의 소회를 밝히고 당부를 드리는 것으로 돌잔치를 대신하려 합니다.

우선 교구 내 모든 성직자, 그리고 수도자들께 마음을 다해 감사를 드립니다.

부족한 종이지만 저를 위해 마음을 다해 기도해 주시고 한 호흡으로 같이 해 주셔서 더없는 축복의 시간이 될 수 있었습니다. 연초에 여러 가지로 분주한 중에 어쩔 수 없이 큰 규모의 인사를 단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따라주신 것은 정말로 대단한 경험이었습니다. 이어서 바로 사순절을 지내고 부활절을 준비하느라 고생을 하셨을 것입니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많은 신자들로부터 ‘그 어느 때보다 이번 사순절과 부활절을 통해서 은혜를 많이 받았다’는 고백을 여러 번 들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교구 내 신자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지난 사순절과 부활절을 지내면서 하루도 빠지지 아니하고 성찬례를 바치고 그때마다 저를 기억하여 기도해 주셔서 오늘의 저를 있게 하셨습니다. 더러 마음에 흡족하지 않으셔도 내색하지 않으시고 기도로써 하느님의 뜻으로 안내해 주시는 여러분께 다시 한 번 마음을 다해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의 기도대로 주님 뜻을 담는 그릇이 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지난 1년을 지나오면서 저 나름으로는 마음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첫째는 제가 스스로 기대했던 것보다 별로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무겁고, 둘째는 제가 바라보는 방향과 동료 성직자와 신자들이 향하는 방향이 더러 차이가 나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제가 가리키는 방향은 보지 않고 자꾸 저를 바라만 보고 계셔서 얼마나 불편한지 몰랐습니다. 저를 바라보고 계신 것은 저를 사랑하셔서 그런 것이라 여기고 감사히 생각합니다만, 저를 바라만 보시다가 우리가 가야 하는 아주 중요한 길을 놓치는 것 같아 조바심이 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가장 자랑스럽게 내어놓을 수 있는 것은 우리 성공회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자부심, 그래서 그냥 이대로 있을 수 없다는 결심과 도전입니다. 지금 우리 성공회의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가기 위한 깊은 기도와 전략, 그리고 이를 이룰 수 있도록 하는 자원의 동원과 활용방안들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과 같이 가려고 서둘지 않고, 그러나 멈추지 않고 긴 호흡으로 한 발씩 나아가고 있습니다.

정말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나같이 시급하고 빨리 해결해야 하는 과제들입니다. 귀를 활짝 열고 경청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많은 변화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과제가 있다는 것은 해법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과 함께 마음을 모아, 온 정성을 다해 그 해법을 찾아 갈 것입니다.

감히 말씀드립니다만, 아직까지 우리 성공회 같은 맑고 건강한 교회가 남아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입니다. 그 순수함, 맑음, 넓음, 깊음을 저도 감히 표현하기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신앙의 지순함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아무리 마음이 넓어도 여러분의 가족이, 여러분의 친구가 다른 곳에서 양육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자칫 잘못 길러질 수도 있습니다. 잘못 아는 것보다는 차라리 모르는 것이 더 낫다는 말씀이며, 동시에 성공회는 적어도 못 가르칠망정 잘못 가르치지는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어떻게든 여러 가지 기회를 통해서 바른 가르침을 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교 성품 1년을 지내면서 감히 부탁을 드립니다. 지금 비록 부족하다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바로 여기가 우리 자리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그 한 귀퉁이를 잡고 여러분의 수고를 합하면 우리는 바로 우리가 원하는 자리에, 하느님께서 원하는 자리에 우리 교회가 우뚝 설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기도와 헌신, 한 발자국이라도 앞으로 내딛으려는 열정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가 행복해할 수 있는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우리 하느님 아버지 안에서 한 형제자매 된 여러분 모두에게 저의 인사를 전하며, 더불어 하느님의 축복을 간절히 소망합니다. 건강하십시오.


                                                    주교 성품 1년을 맞이하여
                                                    정동 집무실에서
                                                    교구장 주교 김근상 바우로 
 
2009년 5월 17일 부활 6주일 성서말씀 
 

사도 10:44-48

44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동안에 성령이 모든 청중에게 내려오셨다. 45 신자가 된 유다인으로서 베드로와 함께 왔던 사람들은 성령의 은혜가 이방인들에게까지 내리시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46 그것은 이방인들도 기이한 언어로 말하며 하느님을 높이 찬양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 때 베드로가 47 "이 사람들도 우리처럼 성령을 받았으니 이들이 물로 세례를 받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습니까?" 하며 48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일렀다. 그들은 베드로에게 자기들과 함께 며칠 더 머물러달라고 간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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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요한 5:1-6

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자녀를 사랑합니다. 2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4 하느님의 자녀는 누구나 다 세상을 이겨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5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6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오셔서 물로 세례를 받으시고 수난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신 예수이십니다. 그분은 물로 세례를 받으신 것뿐만 아니라 세례도 받으시고 수난의 피도 흘리셨습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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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15:9-17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듯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11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12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13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15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다 알려주었다.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세상에 나가 언제까지나 썩지 않을 열매를 맺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다 들어주실 것이다. 17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나의 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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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성공회기도서

1) 사랑의 하느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택하시어 벗이라 불러주셨나이다. 비옵나니, 우리가 주님의 새 계명을 따라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썩지 않는 열매를 맺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2) 주 하느님, 모든 근심하는 이들의 참된 위로가 되시나이다. 비옵나니, 우리에게 지치지 않는 용기와 주님의 때를 분별하는 지혜를 주시어 이 세상에서 주님의 뜻과 평화를 이루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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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의 벗이 되어 누리는 기쁨과 감사 (요한 15: 9-17) 

인간의 구원(救援)이란 생각보다 다양한 의미를 갖습니다. 구원에 대한 제일 흔한 설명은 우리가 죄에 물든 존재로서 죽은 후에 영혼이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고통을 받을 운명을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공로를 힘입어 용서받고 천국에 올라가 온갖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신앙의 이야기는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어리석은가 지혜로운가의 문제입니다) 더욱 깊어져야 할, 아직은 유치한 수준인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을 찬찬히 읽어보면 역시 구원의 문제는 하느님과 인간사이의 관계의 문제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깨어져 어긋난 관계가 회복되어 올바른 관계로 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단순히 어떤 일들은 옳지 않다는 규정에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어떤 일이 사랑으로 행해지지 않는다면, 즉 믿음으로 행해지지 않는다면 여전히 죄를 짓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죄가 단순히 어떤 금령을 어기는 일이라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죄를 범하지 않게 되겠지요. 실제로 어떤 이들은 죄를 안 지어 천국을 얻으려는 생각으로 세상과 관계된 어떤 일도 하지않고 모든 욕망을 포기하는 것을 신앙생활의 이상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심각한 착각입니다.

죄의 문제는 잘못이나 실수 자체가 촛점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관계를 살아가는 가가 초점입니다.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란 우리가 완벽해져서 아무런 실수나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도리어 그런 기대나 노력이야말로 여전히 욕심과 어리석음과 분노를 벗어나지 못하는 일이 됩니다. 하느님처럼 완벽해지려는 것은 교만한 의도입니다.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우리의 상대적인 한계를 절감하는 동시에 하느님의 절대적인 은총을 받아들임으로 성립합니다. 우리는 죄를 짓고 그 죄는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야 하고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구원은 없습니다. 그것은 곧 바로 우리는 서로에게 잘못을 저지를 수 밖에 없는 존재이고 따라서 서로를 용서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진실을 받아들이게 합니다. 그래서 정직하게 자신을 살필 수 있는 사람은 모든 사람이 자신과 같은 형제자매요 자신의 벗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이 하느님과 같은 본성을 지니셨다는 표현을 예수님이 하느님처럼 완벽하신 능력을 지니셨다는 의미로 생각하곤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사람이 되어 오신"(성육신) 예수님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해야 합니다. 신적인 능력이 우리의 구원에 가장 중요했다면 예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이루시기 위해 오셨고 가르치셨고 일하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간들에게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르치시기 위해 사람의 몸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하늘에서 성부와 성자가 이루셨던 일치의 신비 보다도 이 땅위에서 사람으로 사셨던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이루셨던 관계의 신비입니다. 

첫 유혹부터 마지막 유혹까지 예수님은 철저히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라는 본분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첫 번째 기적부터 마지막 부활의 기적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은 당신의 능력을 행사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가 당신을 통해 나타나도록 순종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생동안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 기도했고 그 뜻에 순종하기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의 올바른 관계에서 누리는 그 기쁨을 우리들도 누리게 하려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역은 어떤 사업을 일으키고 사람을 조직하여 목적달성을 하는 일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제자로 불러 그 올바른 관계를 경험하고 누리도록 이끄시는 일에 관심을 두셨습니다. 

올바른 관계에 머무는 일이 곧 사랑입니다. 그것은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무슨 징계가 두려워 계율을 지키는 수준이 아니라 그 경청과 순종을 통해 주님과 점점 깊어지는 사귐을 갖는 수준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러한 사귐이야말로 우리를 성장시키고 성숙시킨다는 점입니다. 상과 벌을 의식하여 종처럼 일하는 데 머물면 일은 해낼지 몰라도 우리 자신의 변화와 성숙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주님은 어떤 일의 성취 자체에 관심을 두고 그 일을 위해 우리를 종으로 부리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당신의 벗으로 자라나기를 원하시기에 우리에게 어떤 일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이해하고 주님의 뜻을 기쁘게 순종하는 그런 벗으로 우리와 사귀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교가 전하는 놀라운 구원의 소식입니다. 

천국의 소식은 금은보화, 기화요초(琪花瑤草), 오곡백과가 풍성한 곳에서 슬픔 고통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어 좋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신다는 소식, 예수님이 우리를 벗으로 여겨주신다는 소식이 하늘나라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관심과 사역은 우리를 당신의 추종자로 만드셔서 당신의 교회사업에 우리를 이용하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받으신 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실 뿐입니다. 우리를 완전한 인간, 곧 조건없이 사랑하고 사랑받는 인간으로 변화시켜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관계”란 말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관계란 스스로를 변화시킬 마음이 없는 두 실체가 자기의 이익을 위해 벌이는 거래관계의 의미가 아닙니다. "관계"란 둘의 존재가 별개의 실체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의 그물, 곧 전체성 안에 이어져 있다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도 하느님을 저멀리 두고 우리는 이곳에서 그 분의 마음에 들도록 무언가를 바치고 지키는 삶을 살아서 하느님께 복을 받고 구원을 얻자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우리 모두의 존재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비롯되었고 하느님 안에서 지탱되며 하느님께로 돌아가게 됩니다. 하느님과 우리가 깊은 사랑으로 연결되어있다는 것, 달리 표현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며 성장하고 성숙하여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올바른 관계란 상대의 사랑을 받고 상대를 사랑함으로써 내가 깊은 변화를 경험하게 될 때 붙일 수 있는 표현입니다. 성경에서 “올바른 관계”의 본래 표현인 “하느님의 의(義)”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완벽함을 요구하시고 감시하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존재이므로 우리는 오직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누리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마땅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의 눈길처럼 차별없는 사랑으로 나 자신과 이웃과 세상을 대해야 한다는 깨우침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내가 좋아하는 대상에게 관심과 집착을 보이는 일이 아닙니다. 대상과 내가 하나임을 깨달아서 서로가 서로를 풍성하게 해주는 사귐을 통해 변화하고 성장하는 일입니다. 우리 교우들은 교회공동체를 이루어 서로 경청하고 서로 순종합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일입니다. 이 사람은 내 마음에 들고 저 사람은 공연히 싫다는 것은 신앙이 말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자신의 필요와 욕망을 기원하는 일은 그 자체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돌아볼 일은 우리의 필요와 욕망이 참으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리하며 모든 것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으로 사신 예수님의 경험이요 고백이요 지혜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아니셔서 우리의 연약한 처지와 필요를 모르실까요?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보다 깊은 가난과 고독과 슬픔과 고통과 죽음을 경험하신 예수님께는 우리가 변명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우리의 모든 간구 끝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표현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예수님이 함께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예수님도 원하시고, 나아가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을 우리도 원하는 그런 수준으로 우리의 믿음이 자라나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성찬례를 통하여 우리를 벗으로 여기시는 주님의 사랑을 다시 기억하고 되새기게 됩니다. “벗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주님의 말씀은 저 같은 설교자가 그냥 말로 전하는 수준의 따분한 설교가 아닙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우리를 당신의 목숨,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성사를 통해 우리 모두 주님의 벗으로서 깊은 기쁨을 누리며 그 만큼의 감사와 찬양을 돌려드리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말씀과 성사를 통해 주님의 벗으로 부끄럽지 않게 사랑의 향기를 품고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영혼으로 성숙하게 될 것입니다. (2009.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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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된 신분상승(身分上昇) (요한 15: 9-17)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말은 그래야 한다는, 그랬으면 좋겠다는 말이지 세상이 정말 그렇게 돌아간다는 것은 아닙니다. 21세기인 오늘날은 옛날 같이 귀족-천민, 양반-상놈 같은 신분차별이 없을까요?  물론 법적으론 모두 평등하지만 정직하게 말하면 실제 삶에서는 지금도 사람들은 ‘끼리끼리’ 살아갑니다. 자기들끼리의 수준을 정하고 그 끼리끼리에 함부로 다른 생활수준의 사람들을 끼워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지금도 자신의 신분상승을 위해서 온갖 노력을 기울입니다. 재테크와 자녀교육이 관심사의 전부인 우리들은 결국 마음  으로 끝없는 신분상승을 꿈꾸는 것 아닐까요? 지방선거에 수없이 나서는 후보들의 마음 한구석에 신분상승의 욕망이 없을까요?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차원의 신분상승을 이미 이루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 벗이 되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지존하신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는 것이지요.
그 일이 신화적인 일이 아니라, 그저 상징적이고  종교적인 교양을 갖추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 삶에 가장 큰 기쁨이 된다는 것을 체험하고 고백하는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교 신자입니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교회란 역사상 유일하게 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모임이라고 합니다. 끼리 끼리만으로 닫힌 것이 아니라, 기존 성원의 목숨을 내걸고 새로운 이를 공동체에 받아들이며, 낮고 천한 곳을 향한 사랑을 실천하는 열린 모임입니다.

이는 교회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는 고백 위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는 계명을 지키며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통해 알려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를 온전히 내맡기는 일입니다. 그 내맡김은 곧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일입니다.

그 신뢰는 또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 나가 언제까지나 썩지 않을 열매를 맺어라. 그러면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다 들어주실 것이다.“ 하신 그 사명과 약속을 경험하는 참된 신분상승의 비결입니다.(2006.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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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왔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오늘 복음의 말씀은 지난주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라는 말씀에 이어집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흐르는 생명이 사랑이고, 포도나무인 예수님에게서 그 가지인 우리에게로 흐르는 생명도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들 사이에도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이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예수님에게로, 또 예수님에게서 우리에게로 흐르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1요한 4:10)입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은 죽기까지 스스로를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기적이고 이해 타산적입니다. 우리도 사랑할 때는 관대하지만, 그것은 우리 중심으로 제한되어 있는 관대함입니다. 걸핏하면 철회되는 관대함입니다. 그런 우리의 불완전한 사랑은 하느님의 관대하심이 흘러들어 구원되어야 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자비로운 아버지로 부르시며 사셨고 제자들도 하느님 아버지와의 사랑 안에 살도록 하시려고 애쓰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영, 성령을 통해 예수님께서 그토록 우리들에게 바라셨던 하느님 아버지와의  올바른 관계, 사랑의 관계를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두려워서 하느님을 달래드리려는 동기가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를 온전히 내맡길 뿐입니다.
병고와 재앙과 불행이 닥칠지라도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그 사랑은 결코 우리를 죽음의 운명에 버려두시지 않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계명, 즉 “우리를 위한 사랑”을 위해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복음은 그 순종이 바로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무는"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 사랑 안에 머물 것을 권합니다.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나의 계명이다. (2003. 5.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