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8/20 23:55

2008년 8월 24일 (연중 21주일) 강론초 (마태 16:13-20 베드로의 고백)

마태 16:13-20

13 예수께서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 이르렀을 때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더냐?" 하고 물으셨다. 14 "어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라 하고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대답하자
15 예수께서 이번에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6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자
17 예수께서는 "시몬 바르요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 18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20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셨다.

<본기도> -성공회기도서

영원하신 하느님, 사도 베드로의 고백을 우리 믿음의 반석으로 삼으셨나이다. 비옵나니, 성령의 빛을 비추시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보게 하시고, 거룩한 교회에서 귀중히 쓰임 받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한 분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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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고백, 곧 우리의 고백 

오늘 복음은 이른바 ‘베드로의 고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종교개혁 때에 로마교회에서는 이 말씀을 두고 주님께서 베드로의 위대한 고백에 대한 상급으로 베드로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천국 문을 열고 닫는 권한을 주셨고, 로마 교황이 바로 이 베드로의 후계자이므로 로마교회만이 구원을 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종교개혁자들은 반석은 베드로라는 인물이 아니라 그가 고백한 믿음이므로 참 교회에는 믿음만이 중요할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참으로 중요한 이 ‘베드로의 고백’에서 베드로라는 인물이 중요할까요, 아니면 고백의 내용이 중요할까요?

당연히 고백의 내용이 중요합니다. 같은 내용을 야고보가 말했다면 필시 야고보의 고백이라고 전해졌을 것입니다. 우리는 은연중에 ‘베드로’였기 때문에 이런 고백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같으면 어림도 없을 텐데 베드로는 참 대단한 인물이어서...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잠시 후에 베드로는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하고 예수님의 꾸중을 듣습니다. 이 고백에 대하여도 “그것을 너에게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 고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믿음은 우리의 노력으로 캐낸 신비한 정보가 아니고, 추론을 통해 갖게 된 확신도 아닙니다. 믿음은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부르심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예”라고 대답하며 예수라는 분의 인격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성령을 따라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으며 마침내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는 일입니다. 믿음은 그 자체가 은총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늘에 기적을 요구하는 유대인”들과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예고” 사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는 고백은 기적을 요구하는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적을 행하고 권세를 떨치는 그리스도를 기대하는 머리로는 십자가에서 스스로 수난하는 그리스도를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고백은 아직 완전한 것이 아니었고, 상급을 받기에는 때 이른 것이었습니다. 시간을 두고 주님을 따르며 삶으로 깨닫고 완성해야 할 고백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으뜸제자 그 인물 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모든 신앙인의 대표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곧 우리 모두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우리 힘이 아니라 은총의 힘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고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완전하게 그 의미를 모두 깨닫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생을 통하여 우리는 그 고백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2005. 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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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믿음은 구원에 관해 더 정확한 정보를 골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정보차원에서의 “사실”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의 근거가 되는 예수의 그리스도이심은 어떤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검증으로 입증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대중들 사이에서 이러쿵저러쿵 전해지는 말을 통해 형성되는 “여론”으로써 판단될 문제도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가끔 특별한 방법으로 깨달은 하늘의 비밀을 “당신에게만 말해준다”는 식의 무슨 “천기누설”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전하는 성육신의 신비,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는 그런 정보차원의 사실문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예수라는 “인격”과의 만남입니다. 그것은 생각(뜻)과 생각(뜻)의 만남이요, 가슴과 가슴의 만남이요, 우리 영과 성령과의 만남입니다. 그 만남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알려주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오신 분이셨습니다. 주님은 늘 기도하시고 성령에 충분 충만하여 사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늘 일치해 계셨고 아버지의 그 사랑과 의로움으로 가슴이 불타셨습니다.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순종의 삶을 사셨습니다.

믿음은 그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받아들여서, 그 분을 주님으로 모시고 삶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 분의 사랑과 지혜에 의지하여 우리는 희노애락 가운데 생활인으로, 또한 기도하는 한 영혼으로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은 어쩌다 맞추게 된 퀴즈의 정답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전부를 걸고 말하는 고백이요 증언일 때에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내 머리로 추측하고 판단한 결론이 아닙니다. 나를 부르신 하느님이 내게 알려주신, 내 영혼에 새겨놓으신 확실한 체험인 것입니다. (2002.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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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13 23:45

2008년 8월 17일 (연중 20주일) 강론초 (마태 15:21-28 가나안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심)

마태 15:21-28

2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띠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22 이 때 그 지방에 와 사는 가나안 여자 하나가 나서서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제 딸이 마귀가 들려 몹시 시달리고 있습니다." 하고 계속 간청하였다.
23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 때에 제자들이 가까이 와서 "저 여자가 소리를 지르며 따라오고 있으니 돌려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씀 드렸다. 24 예수께서는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다." 하고 말씀하셨다.
25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께 다가와서 꿇어 엎드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26 예수께서는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며 거절하셨다. 27 그러자 그 여자는 "주님, 그렇긴 합니다마는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28 그제야 예수께서는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 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본기도> -성공회기도서

전능하신 하느님, 성령을 보내시어 죄의 억압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나이다. 비옵나니, 우리가 하느님의 참 자녀로서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주님이 주시는 영광과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한 분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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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하느님의 차별이 아니라 자비를 믿는다! >

오늘 복음말씀은 매우 생동감 있는 매력적인 대목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절대적으로 옳은 진리의 말씀”만을 들려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그렇다”고 하는 말씀들은 곧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고 따라야 하는 규준이 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성경의 말씀들을 두고 그것이 전하는 진리성에 대하여 “과연 그러한가”를 더 숙고하고 의논하여 결정해야 하는 것일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전자가 강조되는 입장은 대단히 신실한 믿음을 자랑하긴 하지만 이른바 “문자주의, 근본주의”로 비판을 받습니다. 후자가 강조되는 입장은 폭넓은 인간이성과 다양한 경험을 존중하긴 하지만 이른바 “인본주의”로 비판을 받습니다. 물론 비판을 받는다고 꼭 나쁜 입장인 것은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문제는 교우 여러분이 정직하고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함께 의견을 나누는 일입니다. 이른바 신앙의 권위 문제, 곧 분별의 문제, 곧 어떤 일이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는가를 판단하는 기준의 문제가 바로 이러한 내용들입니다. 이에 대한 성공회의 모색은 이른바, “성서, 전통, 이성”이라고 하는 삼중적인 종합을 결론으로 합니다.  

성경은 종종 틀린 표현과 제한된 인식과 잘못된 판단을 포함합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성경은 특정하게 규정된 옳고 그름을 만고불변의 진리로 전하는데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옳고 그름은 구체적인 인간들의 삶의 현실 속에서 벌어진 사태를 두고 살아계신 하느님의 뜻을 물을 때 그 상황 속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성경이 진리라고 진리의 성경이 말하기 때문에 성경은 진리"라는 순환논리를 내세우는 일이 성경의 권위를 높이는 일이 아닙니다. 성경의 “진리”는 우리가 머리 속에 달달 외워서 그 때 그 때 적용하기만 하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그런 “주문”이나 “법칙”이 아닙니다. 성경의 진리는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실"을 비추며 우리의 문제를 살아계신 하느님 앞에 가져가게 합니다. 우리의 “실존”과 우리들의 “역사”를 살아계신 하느님 앞에 세웁니다. 말씀과 기도와 삶을 통하여 우리는 살아계신 하느님을 경험합니다. 신앙공동체의 수준에서 우리는 성서와 전통과 이성의 권위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게 됩니다.
  성경 말씀이 깨우치는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교회공동체의 경험과 고백이 성경의 진리성을 증언합니다.  


이제 복음말씀으로 돌아가 살펴봅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는 예수님의 거절은 주님의 말씀이기에 확고 불변한 “진리의 말씀”일까요? 여전히 하느님께는 자녀들에 속하는 이들이 따로 있고 강아지 같은 부류의 인간들이 따로 있는 것일까요?

“주님, 그렇긴 합니다마는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는 가나안 여인의 대답은 귀하고 아름답고 위대합니다. 

오늘 복음의 장면에서 예수님은 분명 “제한된 생각”, “좋지 못한 판단”을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사람을 차별하던 생각과 태도를 당신의 말씀에 반영하셨습니다. 이를 받아치며 이 비천한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을 깨우치는 벗이 되었습니다.  

자, 이런 해석은 예수님께 대한 불경이라구요? 아닙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복음성경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들을 전혀 감추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마치 신화적인 절대자로 묘사하려면 얼마든지 가능했겠지만 실상 그것은 복음서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이 되신 “사람의 아들”이 어떻게 “하느님 나라”를 전하셨는가, 그리고 그 분의 가르침과 삶과 죽음을 통해 어떻게 그 분이 제자들의 고백 속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주님이신 그리스도”가 되셨는가를 전하는 것이 복음서의 관심입니다.  

제가 지금 예수님을 비난하려는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으시겠지요. 제가 드리려는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이라 하더라도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은 이상하게 느낀 대로 정직하게 여쭈어보고 숙고해보는 것은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성경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의 미덕이라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마치 주인에 대한 두려움으로 행동하는 종과 같은 수준의 믿음에 머무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과 같은 수준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가르치시는 일에 지치지 아니하십니다. 우리를 불신하거나 실망하지도 아니 하십니다. 걱정없이 우리는 예수님께 묻고 듣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이 하느님의 뜻을 깨닫는 일에 예수님과 같은 차원에 올랐다는 일이 결코 불경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도리어 칭찬받을 일이고 실제로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 이방인 여인이 용감하고 지혜롭게 예수님께 한 방 멋진 말씀의 펀치를 날린 것은 통쾌한 일이었습니다. 여인이 못다한 표현을 추론하여 보태봅니다. “우리가 강아지라구요? 그것이 주님의 판단이라해도 내겐 전혀 관계없습니다. 저는 다만 하느님의 차별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를 구할 따름입니다. 진정한 하느님의 자비 앞에는 차별이 무의미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방인 여인의 대답에 경탄하며 칭찬하시고, 하느님께 자비를 간구하는 여인의 소원을 들어주시어 그녀의 딸을 낫게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유대인 남자이시고 마태오는 유대인 중심의 공동체의 복음사가입니다. 유대인은 자신들이 선택받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정체성으로 삼는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런 전제 속에서 가나안 여인의 고백을 통하여 참된 믿음과 살아계신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약간 이상해 보이는!^^) 예수님의 태도와 말씀은 이방인 여인을 시험하시려는 것이기 보다는 제자들을 깨우치기 위한 방편인 것으로 보면 더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저 여자가 소리를 지르며 따라오고 있으니 돌려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는 제자들은 이미 하느님의 구원은 유다인들에게만 국한된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다." 고 하신 말씀은 제자들에게 “너희들도 지금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 하시는 반문과도 같습니다.

가나안 여인의 멋진 응수는 예수님께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는 경탄어린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 이방인 여인 덕분에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하실 수 있었습니다. 

“자, 너희가 강아지 취급하는 이 이방인 여인의 믿음과 신뢰와 사랑이 이러하다. 하느님의 자녀임을 자부하는 너희는 과연 이만한 믿음과 신뢰와 사랑이 있느냐? 그리고 과연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자녀와 강아지로 따로 구분하신다고 생각하느냐?” 

예수님의 이 말없이 깊은 가르침은 훗날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이방인출신의 교우들을 율법준수의 조건없이 교회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일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대인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모시는 “하느님의 백성”으로 이해하는 유대인 중심의 마태오 공동체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이 세상 땅 끝까지의 선교를 당부하시는 이른바 대위임령의 말씀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8-20)에서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나라는 혈통과 율법준수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로 성립되는 새로운 질서입니다. 그런데 그 하느님나라의 소망이 어마어마한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매우 사소하고 구체적인 일상의 사건을 계기로 드러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평소 “자연스럽게” 멸시 당함에 익숙해 있던 이방인 여인이 예수님의 짐짓 멸시 섞인 거절에 대하여 “과연 하느님의 자비는 인간적인 조건으로 제한되는 성격의 것인가?”를 정곡으로 찔러 질문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경탄하시며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머리 속에 흔들림 없는 어떤 관점이나 규정을 가지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모든 사건과 사태 속에서 하느님께 그 깊은 연관과 의미를 묻는 태도이고 그 생생한 의미를 나의 것으로 소화하여 살아가는 일입니다. 말씀은 단지 전해들은 소문일 수 없습니다. 이제 말씀에는 나의 고백, 우리의 간증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삶은 오늘 나의 기도 속에 살아있는 나의 진정한 물음과 경청과 순종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신앙의 삶에는 분별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 분별력은 시시비비의 큼직한 잣대를 머릿속에 가져서 생기는 능력이 아닙니다. 참된 분별력은 사랑의 힘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 하느님의 사랑이 나와 이웃에게 은총으로 작용하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의 마음으로 매사를 전제없이 하느님께 여쭈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를 매사에 대하여 가장 적절한 분별을 하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신 주님의 칭찬을 우리의 것으로 삼게 해주실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우리가 사랑으로 요청하는 것을 거절하실 리가 없고 가장 좋은 것 곧 성령을 통해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2008. 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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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은 인간적 차별을 넘어 하느님의 사랑을 본다 

우리 믿음이 가장 위험한 경우는 고난 속에서 두려움이나 회의에 빠져드는 때가 아닙니다. 도리어 진짜 믿음의 위기는 하느님의 이미지를 우리의 생각과 욕망의 투사(投射)로써 마음대로 지어낼 때 생겨납니다.

우리 모두가 각자 하느님을 경험하고, 이렇게 저렇게 하느님께 대한 이미지를 갖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절대로 위험한 것은 우리가 우리 각자의 하느님께 대한 체험과 견해를 고정시키고 절대화시키는 일입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살아계신 영이셔서 우리의 영과 교제하시고 우리의 삶을 이끌어주십니다. 하느님 편에서 사랑의 주권을 가지고 계셔서 하느님의 뜻을 펼쳐 가십니다. 우주를 어떤 법칙에 맡겨놓고 저 편에서 바라만 보시는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폭군같은 하느님도 아니시고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노려보시는 재판관도 아니십니다.  

성경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과 가르침을 통해서, 성자와 성부와 성령의 성삼위의 신비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깨달아갑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아버지와 같으시고,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자녀에게 차별이 없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개가 사랑받는 이유, 간혹 대단히 칭찬을 받는 까닭은 바로 주인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충성 때문입니다. 종종 우리 믿음은 개만도 못한 때가 많습니다. 모든 것을 내 중심으로, 욕망하고 판단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자기 자신을 내세우고, 자기의 경험이나 가치를 절대적으로 주장하는 일이 아닙니다. 믿음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지어낸 욕망의 투사(投射)로서 “요술방망이 하느님”을 꿈꾸는 것이 아니고, 인간적 차별과 장벽을 정당화시키는 “우리 편 하느님”을 고집하는 것 아닙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고난의 십자가를 통하여 차별 없고 장벽 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필요하고 마땅하고 옳은 탄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간절히 간구할 때, 여전히 현실의 변화는 더디 느껴지고, 주님의 응답이 의심스러울 때, 우리는 얼마나 더욱 고통스럽습니까? 자녀가 아니라 강아지만도 못한 기분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본래 “버러지”만도 못한 존재가 아닙니까? 다만 주님의 사랑에 힘입어, 성령을 통하여, 거룩하신 분의 자녀가 된 것 아닙니까?

우리의 옛 처지와 주님의 사랑을 다시 기억하면 우리는 다시금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고 하느님의 은총의 손길에 우리 삶을 내맡길 수 있습니다.
스스로 지어낸 알량한 자존심을 내려놓으면 우리는 진정 자유롭고 평안합니다.
우리 모두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될 것이다!”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2005. 8.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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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원에 이르는 장한 믿음 

믿음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요? 믿음은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을 하느님께로부터 받는 일이고 우리의 귀하고 복된 삶을 방해하는 것들로부터 풀려나는 일입니다.

믿음은 “욕심”을 채우기 위해 무엇을 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절박한 “필요”를 위해서 간구할 뿐인데, 간절한 사랑으로 딸의 치유를 청하는 가나안 여인은 이런 믿음을 보여줍니다.

믿음은 우리 현실을 그저 합리화해서 평안함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떠난 나의 현실은 정말 비참한 것임을 깨닫는 민감함으로 하느님께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은 내 에고를 만족시키는 나의 덕성이 아닙니다. 더 이상 내가 나를 고집할 필요 없고, 혈연, 지연, 학벌, 재산, 직업, 지위, 업적 등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고 애쓸 필요 없이, 그저 하느님 앞에서 내가 귀함을 깊이 아는 일입니다.  

믿음은 나를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대개 성공이 아니라 실패와 고통이 오히려 우리를 믿음의 길로 참되게 가게 합니다. 다른 것을 내세우지 않고 그 고통의 해결을 위해 곧바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의 길에서 우리는 주님을 붙잡습니다.
그래서 참된 주님의 뜻과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유대인의 차별이 지어낸 이름 “강아지(개새끼)”로 멸시받은 이 가나안 이방여인은 그러나 개의치 않았습니다.

“제게 중요한 것은 인간의 차별을 넘어선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저는 그것을 믿습니다.”
이 여인의 이런 장한 믿음을 통해서 믿음의 본질이 드러나고, 이방인을 차별하던 유대인들이야말로 “강아지만도 못한 인간”들임이 드러납니다.(2002.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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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05 13:38

2008년 8월 10일 (연중 19주일) 강론초 (마태 14:22-33)

마태 14:22-33

22 예수께서 곧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태워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 동안에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23 군중을 보내신 뒤에 조용히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올라가셔서 날이 이미 저물었는데도 거기에 혼자 계셨다. 24 그 동안에 배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역풍을 만나 풍랑에 시달리고 있었다. 25 새벽 네 시쯤 되어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다. 26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본 제자들은 겁에 질려 엉겁결에 "유령이다!" 하며 소리를 질렀다.
27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28 베드로가 예수께 "주님이십니까? 그러시다면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하십시오." 하고 소리쳤다. 29 예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밟고 그에게로 걸어갔다. 30 그러다가 거센 바람을 보자 그만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물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는 "주님, 살려주십시오!" 하고 비명을 질렀다. 31 예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32 그리고 함께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다. 33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주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본기도> -성공회기도서

전능하신 하느님, 우리에게 힘을 주시어 어떤 처지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게 하시나이다. 비옵나니, 우리가 인생의 풍파 속에서도 주님이 함께 하심을 깨달아, 모든 시련을 이기게 하시고 마침내 영원한 평화에 이르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한 분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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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랑 속의 의심과 믿음 (마태 14:22-33)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의심 없이 굳센 믿음으로 살아가십니까?

‘아멘!’ 하신 분들은 복되십니다. 하지만 ‘아멘!’ 하지 못하신 분도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직접 뵈온 베드로 사도보다 믿음이 좋기는 당연히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상 예수님의 관심은 우리의 믿음이 약한 것을 꾸짖고 나무라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 믿음이 약한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의심과 믿음의 내용을 깊이 살피도록 해주십니다.

내 믿음이 강하다는 자부심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은 나의 의심이 어떤 의심이고 나의 믿음이 어떤 믿음인가에 대한 차분한 분별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하여 그것을 깨우치시면 족합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믿으십니까? 우리는 이 사실을 굳게 믿고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멘 하십니까? 사실 이것으로 오늘 복음의 메시지는 충분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오늘 우리는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주님께서 역경에서 우리를 도우시고 건지신다는 믿음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하느님을 기도로 문지르면 밖으로 나오는 램프속의 거인같이 여기는 일이 아닙니다. 이 믿음은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과 일치하는 것을 최선의 목표로 합니다. 이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믿음의 여정을 통하여 우리는 통통하고 제일 윗자리를 차지한 만족스런 애벌레로 남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넘어 나비로 변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베드로가 오늘 복음의 사건 이후로 물 위를 자유로이 걸어다니는 신통력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그 자신이나 인류사에 무슨 대단한 일이겠습니까? “주님 살려주십시오” 외치며 예수님 손에 이끌려 생명을 부지한 평범한 인간이지만 그는 배우고 경험하고 깨우쳐서 마침내 “호숫가 어부”에서 “하느님나라의 문지기”가 되었습니다. 

다시금 찬찬히 복음서에서 주님의 모습을 살펴보십시다. 주님은 막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는 낌새가 있을 정도로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제자들도 내심 얼씨구나 동조했을지 모르죠^^) 그래서 제자들을 먼저 배에 태워 보내고 예수님께서 몸소 군중들을 돌려보내십니다. 예수님은 군중을 얻는 일이 아니라,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일에 관심을 깊이 두십니다. 그리고 산으로 가셔서 날이 저물도록 기도에 잠기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소명을 다시금 깊이 깊이 분별하셨을 것입니다. 세상 권좌의 왕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의 왕이 되시는 길을 말이지요. 하느님 아버지의 음성을 통해 예수님의 마음은 이제 역풍을 잠재우고 고요한 바다입니다. 

그동안 제자들은 역풍을 만나 풍랑에 시달립니다. 예수님은 새벽녘에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작은 배를 타고서 였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터인데^^ 그만 풍랑 위를 걸어서 오십니다. 놀라운 일이어서 제자들마저 겁에 질려 “유령이다!”고 소리쳤습니다. 하지만 “물 위를 걷는 일이 대단한 기적이라”고 여기며 그 일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확증하는 것처럼 이해하는 일은 이 시대의 우리에겐 그 감동이 반감됩니다. 누구 말대로 “소금쟁이도 물 위를 걷는데”, 물위를 걷는 일 자체가 우리 인간의 삶에 무슨 필요이고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지금은 인간의 능력만으로도 이미 심해를 조사하고 태양계 너머로 탐사선을 쏘아올리는 시대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찾아오셔서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고 말씀해주신 일입니다. 마치 부활하신 뒤에 닫힌 문을 통과하여 제자들을 찾아오신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손에 이끌려 함께 배에 오르니 바람이 그칩니다. 바람과 풍랑은 결국 베드로의 의심과 믿음의 깨우침을 위한 계기로서 한바탕 휘몰아쳤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 복음서의 말씀은 믿지 않는 이에게 보여주는 보도기사가 아니라 믿는 이의 귀, 알아들을 만한 귀에 전하는 신비한 이야기입니다.) 

풍랑 위를 걸어오신 주님의 기적은 물론 놀라운 일이었지만 정작 핵심은 믿음 안에서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와 만남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은 물 위를 걸어 우리에게 오시고,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은 닫힌 문을 뚫고 우리에게 오시고, 예수님의 살아계신 영은 우리 육신을 뚫고 우리 마음에 들어오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삶속에서 예수님과의 관계와 만남에 종종 한계와 좌절을 경험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주님께 나아가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계를 경험합니다. 거센 바람이 두려워 도리어 풍랑에 휘말립니다. 그것이 우리의 실존이고 우리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추구하고 주님의 사랑의 손길을 의지합니다.

베드로는 주님 편에서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의 절대성과 우리 편에서 맞이하는 하느님 나라의 상대성을 함께 깊이 경험하였습니다. 그 긴장과 역설이 우리 신앙생활의 내용을 이룹니다.  

예수님이 물위를 걸으신 일에 경탄하는 것보다도 풍랑 가운데의 제자들에게 오신 일을 찬미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베드로는 너무 성급히 물 위를 걷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서 낭패를 보았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와 함께 해주시는 예수님의 현존을 통해서 우리의 곤란을 해소하고 우리의 소원을 이루자는 것이 본령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신뢰하여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경지는 아름답습니다.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셨다면 나도 걸을 수 있다고 확신하는 일도 귀합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제자들도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매우 중요한 믿음이고 복음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란 군중을 모아 기적을 보여 스스로 권위를 세우고 왕 노릇을 하신 게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심에도 도리어 사랑과 진리로 섬기는 삶, 자신을 비우고 자기를 세상의 죄와 고통 위에 못 박는 삶을 보여주십니다. 우리의 의심과 믿음은 물 위를 걷는 등의 기적 따위가 아니라 주님의 가르침과 삶과 죽음에 관하여 결정적으로 시험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2008.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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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랑 위를 걸어오신 주님께로 풍랑 위를 걸어서

-현실을 기도로 살아가는 것이 믿음의 삶 

인생살이가 고통의 바다와 같다는 것은 모든 이가 깊이 공감하는 바입니다.
우리들의 인생은 어떻습니까? 이미 풍랑에 시달리며 비명을 지르게 되는 인생은 아닙니까? 지금은 순풍에 돛을 단 것 같아도 언제 역풍을 만날지 몰라 조마조마 불안한 인생은 아닙니까?
 

사실 우리 믿음이란 이런 인생의 고해(苦海)를 이미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 이 고통의 바다가 풍랑 없이 잔잔하고 많은 고기를 잡게 되는, 풍요의 바다가 되었으면 하고 원하는 마음이야 너무도 당연한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믿음”은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확실하게 얻어낼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댓가나 수단이나 방법이 아닙니다.  

믿음의 정도나 분량에 따라서 우리 소원이 성취되고 안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동화속의 이야기이지 성경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마술은 신기하고 즐거운 것이지만 그것으로 실제 현실을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면 그것은 곧 사기(詐欺)가 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체험하는 기적은 마술도, 사기도 아닙니다. 기적은 하느님이 함께 해주시는 삶의 신비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음은 “예수”라는 인격을 만나고 신뢰하고 의지하는 태도입니다. 우리 고통의 바다 가운데서 우리를 향해 걸어오시는 그 분을 “유령”으로 여기지 않고 “나다, 안심하여라” 말씀하시는 주님으로 알아보는 일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래서 인생고해(人生苦海)를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우리들 편의 노력이나 헌신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의 처지를 아시고, 먼저 우리를 향해 오시며, 몸소 우리와 함께 해주시는 주님의 사랑과 현존을 깨닫고 그 분의 말씀과 인도를 따르는 것이 믿음입니다.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 믿음의 성장과 성숙을 기원해봅니다.

우리 믿음은 두 가지 힘으로 성장합니다.
하나는 기도요, 또 하나는 고통의 바다인 우리네 삶의 현실 자체입니다.
현실을 기도로 살아가는 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주님께서 물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오신 것은 짐짓 놀라운 이적을 보여주시고, 제자들을 시험하시려는 것 아닙니다. 주님은 완전한 인생으로 이 땅에 사시되, 온전히 기도의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조용히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올라가셔서”, “새벽 네 시경에 물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오셨다”고 복음서는 전합니다.  

풍랑 위를 걷는 힘은 기도의 힘, 하느님께 대한 완전한 신뢰의 힘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다가도 세상의 풍랑이 두려워 믿음을 잃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늘 바라보며 용기를 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처럼 많이 기도해서 사랑이신 주님의 현존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200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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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난의 풍랑 속에 다가오시는 주님 

산은 고요하고 구름에 덮여 하느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도 조용히 혼자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십니다. 그런데 물은 생명의 근원이기도 하지만 또한 홍수나 풍랑같이 파괴와 죽음의 위협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물위에서 풍랑을 만나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때 그들을 위해 주님은 새벽에 물 위를 걸어 찾아주시며 말씀하십니다.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

  인생은 고통의 바다(苦海)라고 하고 세상살이는 세파(世波)에 시달리는 것으로 비유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고난과 불안과 공포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불안과 공포에 마냥 떨고 위축되어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또한 하느님의 기적적 개입으로 모든 불안과 공포에서 해방되어 사는 사람도 아닙니다. 신앙인은 세상의 풍랑 속에 살아가되 하느님의 함께 하심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내게 베풀어 주신 이 세상, 나의 존재, 내 주변에 사랑하는 사람들, 이 모든 것에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이 감사를 가슴에 안고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하셨듯이 세파에 시달리는 사람들, 불안에 허덕이는 사람들, 한 치 앞을 보지 못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을 찾아가고, 그들의 손을 잡아주면서 "힘내세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라고 위로하는 사람들입니다.

  때로 우리도 베드로처럼 어느 때는 믿음이 약해져서 세파의 풍랑에 빠져 소리 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풍랑 가운데 함께 계시며 손을 내밀어주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그 주님의 사랑과 능력을 의지하여 우리는 살고, 또 이웃을 도울 수 있습니다.* (2002.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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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01 11:46

2008년 8월 3일 (연중 18주일) 강론초 (마태 14:13-21 오천명을 먹이신 일)


마태 14:13-21

13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거기를 떠나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 그러나 여러 동네에서 사람들이 이 소문을 듣고 육로로 따라왔다. 14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 거기 모여든 많은 군중을 보시자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들이 데리고 온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15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군중들을 헤쳐 제각기 음식을 사먹도록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보낼 것 없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셨다.
17 제자들이 "우리에게 지금 있는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 하고 말하자 18 예수께서는 "그것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시고는 19 군중을 풀 위에 앉게 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 제자들은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20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주워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21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 가량 되었다.

  <본기도> -성공회기도서
생명의 하느님, 성자께서는 우리를 부르시어 새 힘과 용기를 주시나이다. 비옵나니, 우리의 부족함을 채우시는 주님을 신뢰하며, 우리가 가진 작은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어 하느님의 축복을 누리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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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이어의 기적? (마태 14:13-21) 

오늘 복음서는 이른바 오병이어의 기적이야기, 즉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넘게 먹이신 이야기를 전합니다. 네 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실은 무척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지금 이 이야기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않습니다.
일단 생각해봅시다.
오병이어로 오천명이 배불리 먹고도 남았다는 이 이야기의 사실성은 경험적으로 대단히 의심스럽습니다. 이 의심은 제가 믿음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아무런 의심없이 사실로 믿어지시나요? “아멘!” 하시는 분은 깊이 자신이 받은 믿음의 은사에 감사할 일입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성경에 대한 문자적 신뢰와 성자이신 예수님께 대한 절대적 믿음을 전제하는 한 이러한 기적의 이야기는 그리 문제 될 게 없겠습니다.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분에게 이 정도의 기적이야 도리어 사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합리적인 머리로는 기적의 가능성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는 점이 문제의 본질이 아닙니다. 진정한 신앙의 문제는 우리의 세상, 우리의 삶이 과연 이른바 초자연적인 기적에 의존하여 운영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성경이 전하고자 하는 복음의 뜻, 곧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신뢰하며 하느님의 자녀, 예수님의 제자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가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기적을 힘입어 살아야 한다는 뜻일까요? 하느님 나라의 의미가 하느님의 기적에 의하여 가능한 나라라는 뜻일까요?

기적을 받아들이며 하느님을 의지하는 믿음도 귀하지만 실은 기적적인 일 없이 하느님을 신뢰하여 삶을 지탱하는 믿음이 더욱 소중합니다. 아니 가장 귀한 믿음은 우리의 평범한 삶이 하느님이 베푸시는 은총과 기적 그 자체임을 깨닫는 믿음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오늘의 복음을 생각해봅시다. 이 이야기는 무슨 뜻을 전하는 것일까요?

“적은 분량”으로 “많은 인원”을 먹이신 주님의 놀라운 능력일까요?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해결되지 않을 때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주님을 믿고 의지하라. 그러면 문제가 해결되고 풍족해질 것이다.” 이런 위로의 메시지일까요?
“서로 함께 나누면 적은 것으로도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 이런 지혜의 말씀일까요? “작은 것이라도 주님께 사랑으로 바치면 그 일을 통해 놀라운 결과가 일어난다.” 이렇게 헌신에 대하여 가르치는 이야기일까요?

저의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오늘의 이야기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위에 열거한 “가능한 해석”들은 말하자면 음식의 메뉴 같은 것입니다. 실제로 음식을 먹어야 맛을 알고 배가 부르고 영양을 얻듯 오늘의 이야기는 위의 해석의 가능성들을 열어두고 우리가 직접 삶에서 경험해야 깨달을 수 있는 사건입니다.

먹는 문제는 생존의 기본조건입니다. 먹는 일은 가장 동물적인 문제이고 가장 사회적인 문제이며 가장 영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의 이 이야기에서 어떤 차원의 문제에 관심을 두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판단에 따라 우리는 각자의 “오병이어 기적”을 이미 경험했거나 앞으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성찬을 받으며 깊이 묵상하시고 오늘 애찬을 나누며 여러분 자신의 생각과 간증들을 서로 나누어보시기 바랍니다. (2008. 8.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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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나라에서 먹고 사는 일 (마태 14:13-21) 

오늘 복음은 이른바 오병이어의 기적,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를 남기신 기적 이야기입니다. 너무나 유명한 기적입니다만, 오늘 우리는 잠시 우리 믿음의 초점(焦點)을 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칫 우리의 시선은 아주 적은 분량의 식량으로 어마어마한 군중을 먹이신 “사실”에 놀라며 그 “능력”자체 만을 신적인 것으로 부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세도 메추라기와 만나로 백성을 먹였고, 엘리사도 보리떡 20개로 백 명을 먹였기에, 주님이신 예수께서 더욱 강력한 기적을 행하신 것이 이상할 것은 없고 어쩌면 이것이 성서기자들의 의도였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돌로 빵을 만들라”는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셨고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지금 나를 찾아온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요한6:26-27,35)

복음서 전체를 살펴볼 때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것은 당신의 신적인 능력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 드러내시고자 함임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오병이어 기적”도 우리들에게 하느님나라에서 먹고 사는 일이 어떻게 해결되는가를 보여주신, 하느님 나라의 표징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땅위에서 먹고 사는 일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각기 저마다 자기 노력으로 자기 것을 챙김으로 보장됩니다. 냉정하고 예외 없는 원칙입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은 새로이 깨닫게 해주십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살려면 먹고 사는 일을 달리 생각해야 합니다.

우선 먹고 사는 일은 우리 노력 이전에 하느님의 은총으로 되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이 은총을 깊이 깨달으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에 감사하며, 내어놓고, 봉헌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바쳐진 것은 반드시 모든 이에게 되돌려 나누어지게 됩니다. 비록 작고 적은 것이라도 감사의 기도로 바쳐지고 자비롭게 나누어지면 이 세상의 먹고 사는 문제는 넉넉히 원만히 해결됩니다.

모으고 쌓아두고 독점하려는 이들과 원망하고 질시하고 훔쳐내려는 이들이 뒤엉키면 세상은 지옥입니다. “하느님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14:17)” 하느님나라는 무한정한 공급 때문에 풍요로운 것이 아니라, 사랑과 나눔으로 굶주림이 없고 풍요로습니다.

이 하느님나라, 천국이 과연 현실에서 가능할까요?

우리로는 불가능합니다만 주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병이어의 기적”은 단지 “물량의 기적”이 아니라 “사랑과 나눔의 기적”, 진정한 “예수님의 기적”입니다. (2005.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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