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615098.html

 

대한성공회 정의평화사제단 시국선언문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아모스 5:24

 

 

지금은 정의와 평화의 사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는 대림절입니다. 대림절은 설렘과 희망의 절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정치 상황은 절망적입니다. 우리 대한성공회 정의평화사제단은 지난 9월에도 국정원 선거개입 사태를 우려하고 조속한 해결을 촉구하는 시국 선언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지난 대통령 선거가 국정원뿐 아니라 정권 전반이 연루된 총체적 부정선거였음이 속속 드러나고 있음에도 그 수혜자인 대통령과 집권여당은 사태 해결을 위한 진정성 있는 자세를 버린 채 검찰수사를 방해하고 언론을 통제하는 등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습니다. 더욱이 사태 해결을 촉구하는 각계의 우려와 정당한 요구를 종북 몰이, 국가 정통성에 대한 도전, 국가원수에 대한 모독으로 호도하며 공안정국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이는 날로 가중되고 있는 경제난과 더불어 국론을 분열시키고 불필요한 정쟁을 양산하며 결국 이 사회를 수 십 년 전으로 후퇴시키는 근원적 뿌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정의와 평화는 모든 종교인들이 지키고 추구해야 할 첫 번째 덕목입니다. 사회가 부패할 때는 소금의 역할을, 진실이 탄압받는 어둠의 시대에는 빛의 역할을 하는 것이 종교인들의 소명입니다. 따라서 천주교, 불교, 개신교의 시국 선언과 그들의 행동에 대해 대한성공회 정의 평화사제단은 전적인 지지와 신뢰를 보내며 그들과 함께 할 것입니다.

 

대한성공회 정의평화사제단은 세계 성공회 일치의 상징인 켄터베리 대주교(저스틴 웰비)의 "정의는 그리스도교의 중심입니다.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과 함께 보다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 정의를 추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정체성의 근본입니다. 정의가 사라지면 희망도 없습니다. 정의가 존중받으면 가난한 사람들이 희망을 가집니다." 라는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의 적극적 행동을 주문하고 있는 이웃 종교 지도자들, 사회 각계의 염원에 대해 깊은 책임감을 느끼며 다음과 같이 우리의 요구를 밝히는 바입니다.

 

하나,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대통령 선거 기간 중에 일어난 국정원과 군 정보기관을 비롯한 정부 기관들의 선거 개입에 대해 공정한 수사를 보장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는 등 그 선거의 최종 수혜자로서 책임 있는 행동을 보여주기 바랍니다.

하나, 대통령과 정부여당은 정의와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각 계 국민들의 정당한 비판과 요구에 대한 마녀사냥식의 종북 몰이와 분열과 갈등을 증폭시키는 선동과 탄압을 즉각 중단하기 바랍니다.

하나, 정치인들과 언론인 여러분에게도 부탁드립니다. 진실, 오직 진실만을 말하십시오! 그것이 민주주의이며 정의이고 평화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만약 대통령과 정부여당이 끝까지 진실을 외면하고 사태를 호도하려 든다면 이 정권은 더 큰 국민적 저항에 맞닥뜨릴 것임을 경고합니다. 우리 대한성공회 정의평화사제단 역시 대통령직 사퇴를 포함한 더 강한 요구로 나서게 될 것임을 천명하는 바입니다.

 

2013년 12월  12일
대한성공회 정의평화사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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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평신도의 입장에서 보는 교회와 선교

                                  
            - 우리가 교회를 이루어 예배하고 선교하는 일이 곧 구원입니다


1. 세 가지 물음

우리는 본교회 교인이고 성공회 신자이며 그리스도교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성공회라는 교파에 속하여, 거주하는 지역의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 가지 물음을 던질 수 있습니다.

첫째, 다른 성공회 본교회에 비해 주교좌성당이 어떤 자랑거리가 있을까요? “성당건물이 아름답다, 전례가 아름답다, 가족적인 분위기다” 등의 답이 가능하겠지요.
둘째, 다른 개신교나 천주교에 비해 성공회가 좋은 점은 무엇인가요? “열린 교회다, 관용적인 교회다, 말씀과 전례가 조화를 이룬다, 간섭이 적고 자유롭다” 등의 답이 있겠습니다.
셋째, 무종교인이나 타종교인에 비해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지는 자부심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 성령, 영원한 생명, 하느님 나라, 구원” 등의 개념이 말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세 가지 물음에 대한 답들이 서로 내용적인 연관을 긴밀히 가지고 있습니까? 복음, 곧 하느님 나라의 소식과 일(사역)을 위해서 성공회는 어떤 특성으로 봉사하며 그 성공회의 장점이 주교좌성당에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물음은 동시에 주교좌성당의 장점이 어떻게 성공회의 특성을 이루며 그 성공회의 장점이 또 어떻게 복음을 실현하는데 쓰임 받는가를 묻는 일이기도 합니다. 주교좌성당교우로서의 자랑과 성공회교인으로서의 긍지와 그리스도교인으로서의 기쁨이 내용적으로 깊이 이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새로운 사람이 성공회 교인이 되고자 대성당을 찾아옵니다. 주교좌성당의 성전건물이나 전례의 아름다움에 반했을 수 있습니다. 성공회 교회가 보여주는 교회다운 건전하고 건강한 이미지가 좋았을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통해 구원받은 삶을 살고자 하는 동기가 분명할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이제 몇 년 동안 주교좌성당에서 생활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게 될 것입니다. 주교좌성당의 성전건물과 전례의 아름다움에 탄복하며 점차 성전과 예전에 익숙하게 될 것입니다. 별로 간섭 없는 교회생활도 편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성공회에 대해 가졌던 이미지를 실제로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과연 이 교회공동체가 새로운 사람들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배려하는가? 정말 다른 생각, 다른 경험, 다른 성향을 가진 이들에 대해 너그럽고 이해하려 하는가? 정말 성경을 열심히 읽는 신자들인가? 정말 영적으로 참되게 전례를 바치는 교우들인가? 공번된 교회의 신자로서 다른 형제교회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깊이 배우며 그 기준으로 자신의 교회, 곧 주교좌성당을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정말 구원의 확신과 기쁨이 말씀과 전례를 통해 표현되고 있는가?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전하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명이 활발한 선교활동을 통해 펼쳐지고 있는가? 세상을 향해 들려져야 하는 예언자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가?

주교좌성당 신자공동체가 복음적인 기준으로 도와주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더 이상 그리스도교 신자로 자라나지 못할 것입니다. 주교좌성당이 성공회교회로서의 특성을 분명히 전해주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또한 성공회 신자로 계속 남을  필요를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처음 느낀 성전건물과 전례가 주는 감동이 지속되는 동안 이 사람은 주교좌성당의 신자로 남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이 참으로 진지한 신앙인이라면 점차 그렇게 단순히 주교좌성당의 신자로 남는 일이 별로 신앙적인 의미가 깊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성공회 신자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계속 성숙하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또 다른 목마름을 안고서 처음 찾아 올 때처럼 조용히 주교좌성당을 떠나버릴 가능성이 큽니다.

새신자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일생을 주교좌성당의 교우로 지내신 분들도 같은 물음을 스스로 던져보시면 유익할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대성당 자랑의 내용은  성공회의 장점을 얼마나 담아내고 실현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내세우는 성공회 자랑의 내용은 복음의 능력, 선교의 사명을 얼마나 담아내고 실현하고 있는 것일까? 성전건물과 예전이 아름답다, 가족적인 분위기이다, 간섭없이 자유롭고 편하다 등의 쉽게 공감되는 이유들이 과연 주교좌성당이 성공회교회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 일에 얼마나 본질적인 요소가 되는 것일까?”


2. 구원 - 교회를 이루는 일

신앙생활을 왜 하는가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답은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입니다. 물론 하느님을 잘 섬기고 기도를 바쳐서 이런저런 축복을 받고, 곤란과 역경을 벗어나 소원을 이루고자 하는 동기는 내세우지 않아도 이미 자명하게 전제되어 있습니다. 많은 이유 가운데 그래도 영적인 것에 가까운 느낌을 주기 때문에 “마음의 평화”라는 답이 선호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에서 “마음의 평안”은 우리가 죄와 죽음과 고통에서 구원받은 결과이지 그 자체가 추구되는 목적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로서 좀 더 좋은 답은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이 “구원”에 관하여 좀 더 깊은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보통 우리는 신앙생활을 “내가 교회에 나가면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로 생각합니다. “교회에 나가면”이라는 말 대신에 “예수님을 믿으면”, “믿음이 좋으면”, “선행을 쌓으면” 등으로 바꿔 표현할 수 있겠지만 좌우간 그것을 조건으로 하여 이른바 “구원”을 전해 받거나 보장 받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때에 교회도 구원도 우리와 거리를 두고 존재하는 객관적인 실체처럼 여겨집니다. 그런데 평범하고 무난해 보이는 이런 이해가 우리 신앙생활에 몇 가지 혼란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지 않나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우선 문제가 되는 것은 믿음의 주체가 “나”인 것처럼 생각되는 일입니다. 결국 “내가 어떻게 되느냐”가 제일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여도, 아니 열심히 할수록 나 중심의 이기적인 마음이 사라지기 어렵습니다. 자칫하면 내 판단에 의해 내가 원하는 구원이 내게 주어질 것 같지 않으면 신앙도 바꾸고 교회도 바꾸고 그리스도교도 떠나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믿음의 주체가 우리가 아니라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이시라고 힘주어 가르치는 것입니다.

다음 문제는 교회에 나가는 일을 무슨 조건을 충족하는 일처럼 생각하는 점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에 나가는 일 또는 예수를 믿는 일을 과연 얼마나 충실히 해야 확실히 구원을 받을 자격을 갖추게 되는가에 관심하게 됩니다. 이것을 확인하여 보장받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 틈을 타서 온갖 사이비, 이단들이 유혹합니다. “그렇게 대충하면 구원이 없어”하고 위협하는 집단도 있고, 반대로 “그렇게 힘들게 안해도 돼” 하며 값싼 조건을 내거는 집단도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구원을 밖에서 주어지는 천국입장권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되면 신앙생활의 목적을 “자신의 변화와 성장과 성숙”에 두지 못합니다. 그저 영험한 종교 지도자를 통해서 가장 확실한 루트로 구원을 보장받는 것이 중요해집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여러분 안에 그리스도가 형성될 때 까지 나는 또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겠습니다.” 이렇게 외치는 바울로 사도의 고백 같은 것을 도통 이해하지 못하는 신자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교우들께 이렇게 제안을 드립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우리가 교회를 이루는 일이 구원이다!”는 의미로 이해하시면 좋겠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교회를 다니면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와 “우리가 교회를 이루는 일이 구원이다”라는 의미의 차이를 이해하신다면 참으로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시게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좀 더 분명한 설명을 위해서 교회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교회는 성전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같은 생각이나 경향을 가진 이들의 동호회 모임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 안에 성직자 및 수도자와 평신도로 구성된 조직이나 제도가 아닙니다. 교회는 저 홀로 독립된 실체가 아닙니다. 교회의 위치는 삼위일체 하느님과 세상 사이에서,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합니다.

교회는 죄악으로 가득하여 멸망할 이 세상으로부터 탈출하여 올라타야 하는 구원의 방주(方舟)가 아닙니다. 구원의 문제를 교회에 다녀야만 죽은 후에 영혼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이해하는 것은 무척 좁은 이해입니다. 구원의 문제는 우리를 포함한 이 세상과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회복되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모시고, 피조물로서 하느님과의 친교를 이루는” 이 올바른 관계가 깨어진 상태를 일컬어 성경은 “죄”라고 합니다. “죄”가 상습적이 되고 구조화 된 것이 “악”입니다. “악”은 세력을 이루어 세상에 대해 “죽음의 권세”를 가지는 바 이것이 이 세상의 온갖 고통과 불행의 원인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죄와 악과 죽음을 이기게 하셨습니다. 십자가 사건과 부활사건이 그 승리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복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이것이 복음이 전하는 구원의 내용입니다. 바울로 사도가 “하느님의 의(義)”(개역성경),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공동번역)”이라고 표현한 이 구원을 마르코복음과 루가복음은 “하느님의 나라”라고 표현합니다. 이 피조된 세상이 창조주 하느님의 다스림 아래로 돌아가고, 구원자 하느님의 완전한 주권적 통치를 받는 상태를 이루는 것이 “하느님 나라”의 의미입니다. 이 하느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땅에 시작되었고 계속 되고 장차 완성되리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마태오복음은 유대인들의 표현법에 따라 “하느님나라” 대신에 “하늘나라”라고 표현합니다. 요한복음은 이것을 “영원한 생명”이라고 표현하는데 우리 마음, 우리 영혼에 이루어진 “하느님나라”라는 의미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 하느님나라를 이 세상에 이루시기 위해, 하느님의 다스림 아래로  이 세상을 이끌어 구원하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택하여 부르시고 세우신 모임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성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살피면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 입니다. 우리 각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느님을 떠나 살던 세상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 응답하여 교회에 속하는 일이 바로 하느님의 자녀,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일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살피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리 각 사람은 그 지체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하느님나라를 위한 그리스도의 남은 사역을 이어가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그것을 “선교”라고 합니다. 우리 각자는 지체를 이루기 때문에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를 귀하게 대해야 합니다. 대체할 수 있는 조직원이 아니라 한 몸을 이룬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협조자 성령님과의 관계에서 살피면 교회는 바로 “성령의 공동체”입니다. 우리 각 사람은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령의 전입니다. 교회건물이 아니라 우리가 성전입니다. 교회는 성령강림을 통해 실체화 되었습니다. 성령의 가장 큰 은사는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교회는 실제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교회는 오늘도 소유와 파벌과 장벽을 뛰어넘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사탄을 거절하고, 믿음을 고백하고, 사랑의 새계명을 약속하며 우리는 세례를 통해 교회에 속하게 됩니다. 조직에 소속되는 차원이 아니라 우리가 교회를 이루는 차원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는 것이 구원을 받는 조건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례를 통하여 교회의 일원이 되는 일, 곧 우리가 교회를 이루는 일이 바로 구원의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가 구원의 성사인 것이고, 세례 받은 이를 구원받았다고 표현하는 것이지요. 세례받은 이는 교회의 지체를 이루며 이미 구원을 받았고 성령을 받았습니다. 다시 “구원의 확신이 있느냐”고 시비하고, 새삼 “성령을 받았냐”고 시비하는 이야기에 현혹될 필요가 없습니다.


3. 교회인 우리가 하는 일 - 예배와 선교

 
세상에서 부름을 받아 교회를 이루는 일이 구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교회 안에서 일생을 살아야 참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교회는 그 자체로 독립된 실체여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세상과의 사이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세상에 드러내는 일 곧 “예배”,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세상에 펼치는 일, 곧 “선교”를 감당함으로 의미를 가집니다. 교우들의 삶의 현장은 세상입니다. 그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아 모인 신자들의 모임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하느님을 부인하는 세상 가운에 살면서도 하느님께서 우리의 창조주요 구원자이심을 깨닫고 응답한 이들이 모인 것입니다. 교회를 뜻하는 “에클레시아”라는 희랍어는 “소집되어 모인 모임”을 뜻합니다. 모이지 않으면 신자가 아니고 교회도 아닙니다.  나 혼자 구원의 도리를 추구하면 충분하지 구태여 불완전한 인간들의 모임인 교회에 참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리스도교 신자일 수 없습니다. 교회공동체로 모이지 않으면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닙니다. 이름만 교적부에 올려놓고 도무지 모이는 일에 관심이 없다면 그는 네모난 동그라미가 있을 수 없듯 신자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일과 모임을 지키라는 강조는 신자에게 따로 부여되는 의무조항이 아닙니다. 신자의 본질 자체에 모이는 일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정상 주일예배나 모임에 결석할 수도 있지요. 그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그 마음이 문제입니다. 내가 참석하지 않고도 교회가 교회로 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은 여전히 교회를 건물이나 제도나 조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른 이해는 “내가 곧 교회”라는 것입니다. 내가 모이지 않으면 교회는 불완전하게 됩니다. 내가 떠나게 되면 교회는 피 흘리며 지체를 잃는 셈입니다. 내가 교회를 포기하면 성령께서 깊이 근심하고 상심하십니다.

교회를 이루어서 우리는 무엇을 합니까? 가장 중요한 일은 “예배”를 드리는 일입니다. 전례(Liturgy)라는 말의 어원은 “전체를 이루도록, 또는 전체를 위해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예배는 교회의 기능이라기보다는 교회의 본질입니다. 예배는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높이고 찬양 드리며 우리를 우리의 본분으로 확인하는 일입니다. 예배는 봉헌을 필요로 합니다. 봉헌은 하느님께서 지으신 이 세상이 마땅히 하느님의 것임을 선포하고 되돌려 드리며 감사하고 찬양하는 일입니다. 그 일은 바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통하여 시작됩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의 우리 삶을 통해서, 우리의 기쁨과 슬픔, 고통과 희망, 성공과 실패, 기원과 실천 모두를 제단으로 가지고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바쳐드리는 것입니다. 그 봉헌을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기쁘게 받으신다는 것, 성령께서 임재하시어 그 봉헌물의 가치를 변화시켜 우리를 위해 내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되게 하시어 다시금 우리에게 내어 주시고 먹여주시는 일이 성체성사의 본래 의미입니다. 화체설, 상징설 운운의 논의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성체성사로 말미암아 우리의 존재와 삶의 차원이 얼마나 “실제로 달라지느냐”가 중요합니다. 그 은총의 능력은 곧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되고, 세상으로 우리가 먼저 맛 본 하느님 나라의 경험을 가지고 가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는 우리가 세상을 하느님의 백성(자녀)으로, 그리스도의 몸(지체)으로, 성령의 공동체(사람)으로 살아감을 감사하고 기뻐하는 구원의 잔치가 됩니다.

그리고 신자들은 예배를 마치고 세상으로 흩어져 삶의 현장으로 돌아갑니다. 예배를 끝낸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예배의 연속이요 실현입니다. 세상 속에서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바쳐 드리는 “산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세상의 누룩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부름 받아 교회로 모이는 일”을 소명(召命)이라 하면 “세상으로 파견되어 보냄 받는 일”은 사명(使命)이라 합니다. 같은 내용이지만 방향의 차이입니다. 소명(召命)을 전하는 일을 전도(傳道)라고 하면, 사명(使命)을 함께 하는 일을 선교(宣敎)라 합니다. 역시 같은 내용을 방향의 차이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의 실질적인 주체는 부름받은 이들, 곧 평신도 교우들입니다. 교회 안에서 성직자, 수도자와의 관계에서 평신도가 숫자가 많고 헌금을 내기 때문에 힘이 있는 존재라는 게 아닙니다. 세상 속에 하느님의 나라를 드러내는 예배, 세상 속에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선교의 사명이 실상 평신도에게 맡겨진 것이기에 평신도의 자각과 헌신이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4.  인사말씀

다소 장황하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마음이 소박한 분들은 여전히 “그런 설명은 너무 복잡해요. 나는 다만 예수님 믿고 우리 교회를 다니며 행복하고 신앙생활 잘해서 복 받고 죽어서 천국 가기를 원하는 것 뿐인데...” 하실 지도 모릅니다. 그런 소망을 깍아내리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런 소망을 참으로 이루기 위해서 역시 신앙생활에 대한 이해를 "내가 교회를 다니면 구원을 받는다“는 내용으로부터 “우리가 교회를 이루는 것이 구원이다”는 내용으로 바꿀 필요가 있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교회를 다니는 식이 아니라 우리가 교회를 이루는 내용이 되면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거리감이나 틈이 없어지게 되고, 사탄이 그 틈을 타서 속이고 이용할 여지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온전한 은총과 축복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살아서부터 죽음 너머까지 풍성히 누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하략) 
(2008. 12. / 임종호신부)


* 지난 2008년 대림절에 주교좌성당에서 행한 신앙강연의 원고입니다. 어쩌면 이 강연이 끼친 영향이 제가 지난 2010년 2월에 주교좌성당의 보좌사제로  인사명령을 받게 된 계기 중의 하나일 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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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옮김) 성공회? 가톨릭과의 관계, 교단특징  (KCRP 한국종교인평화회의 <종교와 평화> 기고문)

한국내의 다종교사회는 그 구조상 아주 복합적이고 미묘한 여러 상황등으로 갈등의 소지를 내포한 채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런 갈등 구조를 종교간 대화를 통해 이해하고 해결해나가는 지혜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이에 그동안 가슴속으로만 품고 있었던 이웃 종단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궁금증을 묻고 이를 KCRP(한국종교인 평화회의) 종교간 대화 위원회에서 활동하고 계신 위원님들과 종단 관계자분들을 통해 속 시원한 답을 듣는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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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요즘 성공회에 대한 관심이 사회적으로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개신교단으로 분류하지만 실은 가톨릭과 유사하다는 말을 많이 듣는데 사실인가요?

A. 성공회는 기독교의 한 교파입니다. 영국 국교회인 영국 성공회와 서로 상통관계에 있는 모든 교회들을 말합니다. (영국)성공회가 16세기 종교개혁기에 로마가톨릭교회로부터 분리되었다는 점에서 보면 분명 “개신교단”으로 분류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실상 많은 성공회 사람들은 자신을 “가톨릭 신자”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현상은 영국 종교개혁의 독특한 성격에 기인합니다.

중세교회의 부패와 타락이 극심했던 유럽대륙에서 루터교나 개혁교회(장로교)는 로마가톨릭 교회의 전통과 제도를 모조리 부정하고 대항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섬나라인 영국에서는 교회의 부패와 타락이 상대적으로 심각하지 않았고 종교개혁의 초점도 교회 자체를 바로 잡아야 할 필요가 아니었습니다. “민족국가로 성장하는 잉글랜드의 왕권을 강화하고, 천주교 추종세력과 개신교 추종세력을 하나로 통합하는 국민 교회(National Church)를 만들어 내려는” 정치적 동기가 강했습니다. 따라서 영국 성공회는 로마가톨릭 교회의 전통을 존중하고 이어가면서 루터와 칼빈의 개혁적 입장을 결합하는 포용적이고 관용적인 태도를 지니게 됩니다. 이는 엘리자베스 여왕 이후 성공회의 중요한 신앙적, 신학적 전통이자 특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공회 신자들은 성공회가 단지 개신교(프로테스탄트)의 일파이기보다 “개혁하는 가톨릭교회 (Reforming Catholic Church)”라고 주장합니다.
교파적 입장을 벗어나 생각해보면 실상 “개혁”과 “가톨릭(전통)”은 전혀 상반될 필요가 없고 도리어 서로 보완해야 마땅한 개념들입니다. 어떤 교회이든 개혁적인 동시에 가톨릭적인 교회일 수 있고 실은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Q. 성공회는 사회적으로 훌륭한 일을 많이 하지만 교인 수자는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회선교를 성공회교단의 특징으로 이해해도 될는지요?

A. 한국성공회는 작은 교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합대학교를 운영하고 활발한 사회선교를 실천하며 교회일치운동과 종교평화운동에 참여합니다. 한국성공회의 사회적 영향력이나 건강한 교단으로서의 이미지는 활발한 사회선교에 힘입은 바 큽니다.

하지만 성공회 교단의 특징을 사회선교로 보는 것은 매우 좁은 이해가 될 것입니다. 성공회가 실천하는 사회선교는 단지 대상이나 영역이 “사회적”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사회과학적 인식이나 인본주의(휴머니즘)적 가치를 강조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공회는 이른바 성육신(成肉身) 사상, 즉 신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내려와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일하셨다고 하는 믿음을 소중히 여깁니다. 이 세상과 삶의 의미를 죽은 후에 타계의 낙원에 들어가기 위한 목적과 과정으로 축소하지 않고 이 세상이야말로 신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선교의 현장임을 긍정하는 태도입니다. 또한 교리나 제도보다는 “전례적인 영성”을 중시하는 교회라는 점이 성공회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성공회의 사회선교는 실상 성공회가 중시하는 이러한 성육신 신학과 전례적인 영성에서 비롯한 실천입니다.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여 당신을 바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례를 통해 경험하고 이를 세상에서 실천하는 일이 사회선교로 이어진 것입니다.
성공회는 사회선교를 중요시하지만 무엇보다 교회로서의 본분을 지키고 세상을 향해 영적인 지도력을 지키고 발휘하고자 합니다.


Q. 성공회는 여성사제, 수녀사제, 동성애 주교 등 세계적인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성공회 신학에서는 그런 제도나 현상들을 어떻게 설명하나요?

A. 성공회는 “개혁하는 가톨릭교회(Reforming Catholic Church)”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교회의 오랜 “전통과 제도”를 존중하고 이어가지만 늘 “지금 이곳에서” 실현되는 복음의 현실성을 고민하여 개혁의 내용으로 삼습니다.

여성사제 서품 문제는 세계 성공회 안에도 적지 않은 갈등과 분열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결국 “여성 성직을 반대할 신학적인 이유는 없다...”는 결의가 합의되어 많은 여성사제들이 배출되었고 긍정적인 사목적 결과를 얻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성공회가 신적인 계시를 바탕으로 사회의 변화를 선도했다기보다는 실은 사회적인 변화 속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는 신의 뜻을 발견하고 수용했다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이미 여성의 역할이 사회 곳곳에서 전통적인 차별과 장벽을 넘어서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동성애자 성직서품 문제는 여성성직 문제보다 더 심각합니다. 성경이 동성애를 분명히 문자적으로 죄악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현안이 되는 동성애의 문제는 “성적인 취향”이 아니라 “성적인 지향”의 문제입니다. 한국 사회로서는 아직 받아들이기 어려운 간극이 있습니다만 동성애자의 존재는 서구사회의 현실입니다. 미국 성공회는 말하길 “동성애자들도 신의 사랑과 자비를 구하는 이들이며 그들에게도 신의 영(성령)이 함께 함을 경험하고 인정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물론 성공회 안에 동성애자 주교서품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높습니다.
성공회의 신학은 성경의 문자적인 해석에 머물지 않고 성경이 전하는 세계와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뜻을 통전적으로 살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느님의 사랑이 인간이 세운 모든 경계와 장벽을 초월함을 알려주신 것으로 이해합니다. 교리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일보다도 실제 사람들의 삶이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평화를 이루도록 돕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 성공회 신학의 관심이고 전통이라 하겠습니다. 전통이든 개혁이든 모두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큰 뜻에 부합해야 할 것입니다.  (답변: 임종호신부/성공회 분당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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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한국성공회 관구게시판에서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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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워싱턴국립대성당"(Washington National Cathedral)에 대하여
글쓴이 : 성공회교우 (2009.1.13 - 17:39)

뭐,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궁금합니다. 

왜 "워싱턴국립대성당"(Washington National Cathedral) 이 미국 성공회의 대성당인데 왜 워싱턴국립대성당으로 불리고 여기서 대통령 취임축하 국가조찬 기도회가 열리는 등 국가행사가 이루어지는 것인가요? 미국은 영국처럼 성공회가 국교도 아닌데 말이죠. 

보통 사람들은 물론 기자들까지도 "워싱턴국립대성당" (http://www.nationalcathedral.org)을
역시 워싱턴에 있는 대성당인 로마가톨릭의 바실리카 국립성당(The Basilica of the National Shrine) (http://www.nationalshrine.com
)과 혼동하는 것 같아요. 

저는 여행중에 두 군데를 다 들러보았기 때문에 둘을 구분 할 수는 있는데
유감스럽게 자세한 내막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아시는 분이 있으시면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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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질문: "워싱턴국립대성당"(Washington National Cathedral)에 대하여 
글쓴이 : 이 다니엘 (2009.1.13 - 20:56)
...................................................................................................................... 

워싱톤 국가 대성당은 워싱톤 교구에 소속된 성당입니다.
대통령이 사망하면 이 곳에서
장례식을 합니다.
저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마침 수원의 천주교 신자들 여러명이 방문
하여
신부복을 입고 있는 나에게 이 성당이 천주교 성당이냐고 질문하길래
성공회 성당
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이 성당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한 성규 신부님이 성공회 성 십
자가 교회에서 묵묵히 사목하고 계십니다. 

뉴욕 멘하탄에 200년간 건축 중인 성 요한 대성당도 성공회라는 표시가 간판으로 부착되지 않았습니다. 이 성당은 세계에서 오직 하나인 비잔틴 공법과 로마네스크 공법을 혼용했습니다. 규모로는 로마의 천주교 성 베트로 성당과 비슷하다고 하기도 하고 좀 크다고도 말들 합니다. 

다른 곳에 산재한 대성당들도 거의 같은 상황입니다. 천주교도 비슷한 양상인데 모두가 영국의 국교, 로마의 국교라는 역사적 배경에 상당한 영향을 받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또한 연방국 상황에서 교파에 대한 인식이 한국 처럼 그렇게 강하지 않은 배경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주 안에서 평화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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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2009-01-19 21:18 )

워싱턴 국립 대성당(Washington National Cathedral)  

(사진1)워싱턴 국립 대성당의 서쪽 입구. 영국 브리스톨 대성당을 본떠서 만들어졌다.
(사진2)실내 소성당 벽을 장식한 스테인드글라스.
(사진3)2004년 국립 대성당에서 치러진 로널드 레이건 장례식에서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추모를 올리고 있다.
(사진4)국립 대성당에서 성공회 미사가 봉헌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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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 양식의 웅장한 건축물인 워싱턴 국립 대성당은 미국 성공회 워싱턴 교구 성당으로, 국가적 차원의 범종교적 행사가 치러지는 장소로 사용되기 때문에 '국립 대성당'으로 불리고 있다. 대통령 취임 기도회와 장례식 등이 이곳에서 치러졌다.  

워싱턴 국립 대성당의 정식 명칭은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워싱턴 교구 대성당(Cathedral Church of Saint Peter and Saint Paul in the City and Diocese of Washington)'으로 성공회 워싱턴 주교좌 성당이며, 평소에는 성공회 미사가 봉헌된다.  

국립 대성당 건설은 1700년대 후반 피에르 랑팡이 유럽 도시들을 본떠 워싱턴을 설계할 때부터 포함되어 있던 계획이다. 이후 1891년 의회에서 '종교와 관계없이 누구나 기도할 수고, 국가 차원의 행사를 개최할 장소'를 만든다는 취지로 대성당 건립이 결정됐으며, 1893년은 당시 워싱턴 성공회 교구에 국립 대성당 설립 인가가 내려졌다.  

성공회는 영국의 성공회 건축가인 프레데릭 보들리(Frederick Bodley)의 설계에 기초해서, 1907년 국립 대성당을 공사를 시작했으며, 93년만인 1990년 완공했다. 워싱턴 국립 대성당은 정부 지원 없이, 개인이나 기업의 후원만으로 건설 기금을 충당했다.  

국립 대성당은 기본적으로 고딕 양식을 채용해서 지어진 건축물이다. 첨탑과 아치형 천장과, 스테인드글래스, 석조 장식물, 세 개의 유사한 탑 등은 다양한 중세 고딕 양식을 보여준다. 대성당의 서쪽 입구는 12세기에 건설된 영국 브리스톨 대성당을 그대로 본떴다. 국립 대성당 첨탑은 지상으로부터 301 피트(91 미터) 높이까지 솟아올라 있다.  

국립 대성당은 특히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 장식으로 유명하며, 가을에는 스테인드글라스 투어를 개최하기도 한다. 특히 이 투어 때는 방문객들이 첨탑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허용하는데, 워싱턴 D.C.를 조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주소: Massachusetts & Wisconsin Ave. NW, Washington DC 20016-5098
전화: 202-537-6200
웹사이트: www.cathedral.org/cathedral
[출처] 워싱턴 국립 대성당(Washington National Cathedral) |작성자 탑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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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2 ( 2009-01-19 21:23 )

참고하세요: http://blog.cbkmc.com/blog/index.php?blog_code=sunghwa&article_id=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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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원본출처: http://user.chol.com/smarty/bbs/bbs.php?page=&id=jakob&db=mainbbs&s_category=&s_type=&s_keyword=&p=view&uid=8

삿포로에서 듣보고 생각하며
김 동소(대구가톨릭대 교수, 국어학)


■일본 성공회 성당
온 세계 인구의 반 이상이 똑같은 하느님을 믿고 있다. 20억 이상의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12억 이상의 이슬람교 신자들, 그리고 2천만 명 정도의 유대교 신자들. 그들은 각각 부르는 이름은 달라도―그리스도교와 유대교 신자들은 '야훼' 또는 '여호와', 이슬람교 신자들은 '알라'라고 부른다지―동일한 유일신을 믿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유일신은 무엇보다도 '서로 사랑할 것'을 가장 큰 계명으로 주신 분이다. 그런데 그 '사랑'을 가장 큰 계명으로 주신 분을 믿는 사람들은 왜 이렇게 서로를 미워하며 싸우는 것일까? 더군다나 그들이 믿는 종교 때문에 서로를 무자비하게 죽이고 하고 있는 것은 왜일까?

세계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절반은 하느님을 주로 '야훼'라고 부르는 로마 가톨릭교(동양식으로는 천주교) 신자들이고, 나머지는 주로 '여호와'로 부르는 프로테스탄트(한국식으로는 개신교) 신자들이다. '야훼(Jahveh)'나 '여호와(Jehovah)'나 똑같은 대상의 명칭이고, 이것은 어떤 이름의 모음(母音)을 바꿔 넣는 히브리어의 언어적 기교에서 비롯되어 달라진 이름일 뿐인데, 이 이름 때문에 또 얼마나 많은 반목과 미움이 있어 왔던가!

각설하고, 나는 할아버지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 온 집안에서 자랐다. 어른이 될 때까지만 해도 천주교 아니고는 구원도 희망도 없는 것으로 교육받았고, 또 그렇게 믿어 왔다. 천주교 신자 수가 전세계에서 단일 종교 교파로는 가장 많은 것을 알고서 나의 종교에 대한 긍지는 더욱 커졌고,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 대해 연민의 정까지 가졌었다.

그랬는데, 이 곳 삿포로에 와서부터 나는 성공회 성당에 나가 미사(이곳 말로는 聖餐式)와 기도회(이곳 말로는 禮拜會)에 참례하고 있다. 한국에 있을 때도 몇 번 성공회 성당을 찾은 적이 있긴 했지만, 여기 와서 이렇게 본격적으로 성공회로 가는 이유는 사실 특별한 것이 아니라, 내가 숙소로 머물고 있는 홋카이도 대학 게스트 하우스인 포푸라 관(Poplar House) 바로 옆에 성공회 성당이 있기 때문이다. 이 곳 삿포로에 와서 천주교 성당엘 세 군데 가 봤는데, 두 군데는 너무 멀어서 지하철을 타도 시간이 많이 걸리고, 걸어서 20분쯤 걸리는 프란치스코회 성당은 일본에서는 드물게 미사 참례자가 많아 정이 붙지 않았다. 천 명이 넘는 신자들이 몰려 미사를 하는 한국 천주교 성당 같은 분위기보다 좀 소박한 곳을 찾고 있었는데, 이곳 성공회 성당이 딱 마음에 들었던 것이라 할까…….

이 곳 성공회 성당의 정식 이름은 '삿포로 그리스도 교회(札幌キリスト敎會)'. 주교좌(主敎座) 성당인데도, 주일 미사 참례자는 가장 많았던 지난 부활절 날(4월 11일) 180명, 평소 주일 미사는 30명 정도. 그리고 미사는 평일은 물론 주일날도 한 번(아침 10시 반)밖에 없고, 상주하는 성직자도 주교님 한 분과 곧 사제가 될 성직 후보생 한 사람뿐이다. 기도회가 토요일과 일요일 오후 5시 반에 있는데, 여기 참석자도 늘 서너 명뿐. 이래 가지고 교회가 유지될까 염려스럽기도 했는데, 그래도 지난 부활절 날 헌금 들어온 것을 보니까 이것 저것 합해서 210만 엔 정도 되었고, 보통 주일날도 20만 엔 정도가 되어서 좀 놀라웠다. 대구의 내가 나가던 성당은 신자가 8천 명이나 되는데도 주일 헌금과 교무금(개신교의 십일조)을 합해 매주 8백만 원 정도였으니까……. 일본 성공회 신자들이 헌금에 적극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공회 성당의 분위기와 예식은 천주교의 그것과 크게 다른 바 없다. 다르다면 우선 성당 안 중앙에 십자가(그것도 예수의 몸이 없는 개신교식 십자가)가 한 개 있는 것 외에는 아무런 성상도 성화도 없다는 점. 천주교 성당이라면 필수적으로 있을 14처(예수의 고난과 죽음 과정의 14개 사건) 그림도, 성모상을 안치해 둔 곳도 없다. 그러나 성체를 모셔 둔 감실과 제단은 천주교와 같아서 나에게는 친숙했고, 또 한국 성공회 성당과는 달리 제단의 방향이 신자들 쪽으로 향해 있어서 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이후의 방식으로 되어 있는 점이 특이했다. 로마 교회의 바티칸 공의회 결정이 성공회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말이 된다. 10년 전, 중국의 애국 교회 성당에 갔을 때에도 제단이 신자 쪽으로 돌려져 있음을 보고 감명을 받은 일이 생각났다.

성체 분배 역시 바티칸 공의회 이후 방식으로 사제가 신자들의 손에 얹어 주는데, 전신자가 성혈과 함께 배령하는 양형 영성체를 하고 있었다. 나는 성공회 신자도 아니고 해서 영성체는 안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신자 회장 되는 분이 상관없으니까 영성체를 하라고 자꾸만 권하기에 나도 성체와 성혈 모두를 배령했다. 성혈 배령은 사제가 성작을 신자 입에 대어 주어 마시게도 하고, 신자가 먼저 받은 성체를 자기 손으로 성혈에 찍어 배령하기도 했다. 성공회 교리서에는 로마 교회의 일곱 가지 성사를 모두 지키고 있다고 되어 있는데, 아무리 둘러 봐도 성당 안에는 고해소가 보이지 않고 고해 성사를 보는 사람도 없었다.

성공회라고 하면 고등학교 때 세계사 시간에 배운 대로 영국 헨리 8세(1509∼1547)의 이혼 문제로 로마 교황과 결별을 고한 후 만들어진 교회로 모두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나도 그랬고, 많은 한국인들이 이 성공회에 관해서 다소 부정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더군다나 성공회 사제들이 결혼도 하고, 결혼한 사제가 주교도 될 수 있게 된 데다가, 최근에는 동성애자 신부가 주교로 서품되었다는 보도도 있어서, 보수적인 천주교 신자들은 성공회를 마치 타락한 교회처럼 바라보는 면도 없지 않았다. 그랬는데, 얼마 전부터 나는 이 성공회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헨리 8세의 이혼 문제로 영국 교회가 로마와 분리된 것은 사실이지만, 영국은 이미 그 전부터 반 로마적인 분위기가 팽배해 있던 나라였다. 14세기에 옥스퍼드 대학의 석학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는 로마 교회의 명령을 무시한 채, 성서를 영어로 번역하여 유포시켰고, 이로 인해 그는 그 추종자들과 함께 체포·처형되었다. 그 후 위클리프의 후계자였던 윌렴 틴들(William Tyndale, 1492∼1536)은 독일에서 성서를 영역하여 영국으로 밀수해 들여왔고, 영어 성서는 로마의 엄명에도 불구하고 널리 읽혀 영국민의 성서에 대한 지식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의 국왕 헨리 8세는 틴들을 체포해 처형하고 마르틴 루터를 격렬히 비판했기 때문에 로마로부터 '신앙의 옹호자'라는 칭호를 얻기까지 했으나, 이 시기 영국에 널리 퍼져 있던 로마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파악하고, 자신의 이혼 문제도 생겼기 때문에, 로마를 등진 후 스스로 영국 교회의 수장이 되었으며 마침내 틴들이 번역한 영어 성서를 공인하게 된다. 그리고 영국민 사이에 퍼진 '성서로 돌아가자.'는 이념과, 이 무렵 등장한 캘비니즘(Calvinism)과 퓨리터니즘(Puritanism)의 도입으로 영국 교회는 소박하고 경건한 생활, 평등주의와 인권의 존중, 신앙의 자유와 노동의 신성함 등을 표방하는 윤리적 종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 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어쨌든 영국 교회는 성공회(Anglican Church)라는 이름으로, 영국의 국내 종교가 아니라 전세계적인 종교로 성장했다. 이 '성공회'라는 이름은 이 종교에서 신앙 신조로 삼고 있는 니케아(Nic aea) 신경(信經)의 'Credo in unam sanctam catholicam Ecclesiam(하나이요,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를 나는 믿습니다.)'에서 따온 말이다. 현재 영국민의 60%가 성공회의 세례를 받고 있고, 전세계에 38개의 관구, 1만2천 개의 교구와 1만7천 명의 성직자, 4천5백만 명의 신자를 갖고 있다고 한다. 일본에는 1859년 미국으로부터 선교사가 와서 포교를 시작하였고, 1908년 현 릿쿄[立敎] 대학의 전신인 릿쿄 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세를 확장해 와서 현재 11개 교구와 5만6천 명의 신자를 갖게 되었는데, 일본의 개신교 신자가 58만 명, 천주교 신자가 42만 명, 그리스 정교가 3만 명인 것과 비교해서 결코 작은 그리스도 교회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내가 무엇보다도 이 성공회를 마음에 들어 하는 이유는 이 교회의 시노드(Synod) 제도 때문이다. 과거에는 영국 교회도 모든 의사 결정을 'Convocation'이라고 부르는 성직자 회의에서 행했지만, 현재는 성직자와 같은 수의 평신자들이 참여하는 시노드에서 모든 의사 결정을 하고 있다. 교구의 모든 일, 교구장, 즉 주교를 선출하는 일에까지 평신자들이 참여하여 한다는 말이다. 또 여성 성직자를 임명하여 로마 교회의 심기를 건드리기는 했지만, 이런 사고의 전환이 바로 현대 민주주의의 발상지이며, 인간 존중의 온상인 영국다운 발상임을 알게 된 것이다.

얼마 전 부산의 어떤 수녀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 수녀원의 원장 수녀님이 하신 말씀이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 교회는 왜 여성 사제가 나오면 안 되나요? 우리 수녀원에서는 4년에 한 번씩 모든 수녀들이 모여 수녀원장을 선출하고 있습니다. 선거가 끝나면 모든 수녀들이 새 원장 수녀 앞에서 절대 순종을 서약합니다. 우리 교회도 전 신자들이 모여 성직자를 선출하고, 이렇게 하여 여성 사제도 나오게 된다면, 얼마나 역동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있겠습니까!"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느냐 할지 모르나, 성공회가 체질 변환을 하고 난 후 훨씬 많은 신자를 얻게 되었고, 전에 없는 교회 발전을 이룩한 것을 생각한다면 헛소리만도 아닐 것이다. 서울의 성공회 대학이 최근 신학 대학에서 일반 대학으로 전환한 후 급상승하고 있는 것도 우연한 일만은 아니라고 본다.

4월 29일은 일본에서는 '녹색의 날'이라 부르는 공휴일인데, 이 날부터 일본은 한 주일에 걸친 황금 연휴가 시작된다. 이 '녹색의 날'은 지금은 식목일처럼 되어 있으나, 이전의 덴초세쓰[天長節]라는 전 일본 국왕 쇼와[昭和]의 생일을 이름만 바꾼 것이다. 윤 봉길 의사가 의거를 행한 것이 바로 이 기념식장에서였다. 그런데 이 날 내가 나가는 성공회 성당에서 두 분의 새 사제 서품식이 있었다. 홋카이도[北海道] 교구의 모든 성공회 사제 19분이 모여 서품식을 공동 집전하는 보기 드문 행사에 참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제단 중에는 말로만 듣던 성공회 여사제가 두 분이 있어서 또 한 번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정식 신자도 아닌 나보고 영성체를 하라고 권하는 것은 신자 회장의 일시적인 과잉 친절에서 나온 것이 절대로 아니었다. 신자든 아니든, 죄인이든 선인이든, 적어도 교회를 찾아온 사람이면 누구나 하느님의 한 백성으로 보는 평등주의의 발로였던 것이다. 아마도 유대교 식의 선민 의식을 철저히 깨뜨리려는 것으로 생각된다. 마찬가지로, 남자든 여자든 모두 하느님의 사랑 받는 피조물이니까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을 여자가 못 한다는 법이 없다는 생각도 그들은 가지고 있는 듯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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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TAG 성공회

성공회신문(2008년 6월 1일자) 논단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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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성찰로 “대오각성(大悟覺醒)”을!  

지난 5월 22일 서울교구 제5대 김근상 주교의 서품식을 보도한 기사 가운데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 이날 서울교구 초대 교구장을 역임한 이천환 주교(84)는 "한국성공회의 지난 수년간 상황은 잘못된 이념에 휩쓸려 우리 교회의 이미지가 심히 손상됐다"며 "무지한 세속의 평자들로부터 좌파사관학교로 지칭되는 수치를 두 번 다시 당하는 일이 없도록 대오각성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조선일보 2008. 5. 22)>
 

이 시대와 교회에 대한 사랑이 가슴 아프도록 깊이 느껴지는 말씀이다.
다소 당혹스런 느낌도 없지 않으나 연로하신 주교님의 사심 없고 용기 있는 말씀은 통쾌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문제는 간절히 당부하신 “대오각성”의 방향과 내용이다. 설교 중에 짧게 언급된 탓에 아쉽게도 그 방향과 내용에 관하여 신학적인 권면이 자세히 제시되기는 어려웠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일체의 대사회적인 관심을 끊고 “영혼구원”에만 매진해야 하는 것일까? “교회성장”을 제일의 과제로 삼고 이른바 “뉴라이트”의 입장을 가져야 할까? 지금까지 이어 내려온, 그리고 다음 세대에 전해야 할 성공회의 이미지는 과연 어떤 것일까? 성경의 정신과 성공회 전통 속에서는 어떤 원칙과 교훈을 찾을 수 있을까? 향후 더 깊은 논의가 치열하고 정직하고 겸손하게 신학적 성찰과 대화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이러한 논란에 공연히 마음 상할 필요는 없다. 성공회는 무슨 정치단체가 아니라 성서적 신앙과 사도적 계승을 자부하는 정통교회다. 성공회의 정치색을 시비하는 이들에게 성공회가 당연히 정치적으로 특정한 입장이 아님을 해명하는 것은 사실 이미 어이없고 소용없는 일이다. 신앙적 추구가 아닌 부적절한 논의에 휘말려 불필요한 변명을 요구당하는 셈인 것이다.  

그리스도교 복음의 대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에 전해진 하느님의 절대적 주권적 사랑이다. 교회의 본분은 이 세상에서 그 복음을 살고 전함으로서 하느님나라를 증언하고 선취(先取)하는 일이다. 한 분 하느님의 사랑의 통치에 모든 인간적 아집과 장벽을 허물고 일치와 평화를 이루는 “하느님나라”와 이를 위한 교회의 사명을 인간들의 정치적 수사에 불과한 좌파, 우파의 기준으로 설명해야 하겠는가? 이주교님의 표현대로 “무지한 세속의 평자”들은 자유로이 성공회를 비평할 수도 있겠다. 자신의 세속적 정치성향을 기준으로 성공회 신자가 되거나 말거나 결정하겠다는 태도는 매우 유감스럽지만 근본적으로 신앙인의 자세가 아니다.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는 “거룩한 교회의 책임있는 주체”인 우리 성직자, 수도자, 신학자와 신자들이 스스로 성공회공동체에 관하여 어떤 신학적인 정체성과 비전을 가지고 세상을 향하여 어떤 선교사목을 하고 있는가를 분명히 정리하고 반성하는 일이다. 이 땅의 양심적 지성인들과 충분히 소통할 수 있는 수준으로 우리 교회의 구원론, 교회론, 선교신학이 제시되어야 한다. 종종 애매모호한 태도가 성공회의 특징으로 거론되지만 그것이 신학 없고, 원칙 없고, 입장 없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솔직한 고민은 이것이다. 오늘 우리 성공회는 과연 복음의 빛으로 우리의 현실과 시대정신을 비추고 있는가? 향후 50년, 100년 후에 우리 성공회는 이 시대 이 사회를 위하여 어떻게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고 실천하였다고 평가될 것인가? 세속의 눈치를 보며 꿀먹은 벙어리로 지낼 때가 아니다. 다함께 깊은 기도와 신학적 성찰로 “대오각성(大悟覺醒)”할 때이다. (임종호 신부/분당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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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I(Church Identity)가 필요하다

 성공회(聖公會)는 명품교회(名品敎會)다. 따로 논증이 필요할까?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공감하는 인식이다.

 성공회는 극단에 치우치거나 독선적이거나 배타적이지 않으며 균형 잡힌 태도로 복음의 가치를 충실히 살고 전한다. 초대교회로부터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종교개혁의 정신을 수용하는 “개혁하는 보편교회”(reforming catholic church)이다. 말씀과 성사의 균형을 이룬 아름다운 전례를 지킨다. 역사적 주교직과 함께 평신도가 참여하는 의회제도를 통하여 신권(神權)과 민주(民主)의 조화를 이룬다. 1억 신자수의 세계교회이면서도 획일도 분열도 아닌 일치의 공동체(Anglican Communion)를 이룬다. 성공회는 관념적이고 교리적인 구원을 전하는 일에 머물지 않고 당대 현실의 인간 삶과 사회구조의 변화를 위해 헌신하는 교회다. 사실 영어권에 토대를 두고 발전한 성공회이기 때문에 전 세계에 전파된 대부분의 그리스도교 교회는 직접 간접적으로 성공회와 무관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와 한국교회 내에서 대한성공회는 현실적으로 소수그룹, 마이너리티다.
비그리스도인들이 상공회의소나 성서공회와 혼동하는 것은 그렇다 해도, 명색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들마저 “혹시 이단(異端)아니냐?”고 되묻기 일쑤다. 좀 유식하다는 사람이 “아, 성공회 알지. 거 헨리 8세가 이혼하려고 만든 교회잖아?” 하는 반응이다. 물론 한국사회와 교회 전반의 교양과 신학 수준이 천박함을 한탄하며 탓할 수 있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바로 그 한국사회가 우리가 복음을 전할 대상이고 그 한국교회가 우리가 협력할 형제교회들이라는 것이다. 이 땅의 사람들이 성공회를 잘 모르는 일은 당연하거나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라, 한국사회와 교회를 위하여 극복되어야 할 문제다. 교파로서의 성공회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다. 이 땅을 복음화하는 과업에 성공회적인 고민과 태도를 이해하는 일은 매우 소중한 자원이 되기 때문이다. 앉아서 푸념하고 남을 탓하기 이전에 우리가 우리 성공회의 존재와 매력을 알리려고 어떠한 노력을 기울였는가를 돌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반성을 전제로 관구와 교구차원에서 대한성공회의 CI 작업을 추진할 것을 강력히 제안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CI란 “Corporate Identity”의 약자로서, 통일된 기업(조직,단체)의 이미지, 문화, 미래의 모습과 전략 등을 일컫는 용어이다. 우리가 이미 여러 기업들의 사례를 경험하며 인지하고 있거니와 CI는 그 기업의 사회에 대한 사명, 역할, 비전 등을 명확히 하여 기업 이미지나 행동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역할을 한다. 대외적으로는 좋은 이미지의 인지도를 높이고 대내적으로 스스로의 존재의의를 인식시키는 것이다. CI는 여러가지 시각적인 요인(Visual Identity)을 기본으로 하지만, 기본이념이나 윤리(Mind Identity), 구체적 활동(Behavior Identity) 등도 복합적으로 포함한다. 

 
이러한 “Corporate Identity”(“Church Identity”)가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하다. 오늘 우리 성공회의 낮은 인지도를 걱정하는 우리에게 대외적으로 성공회를 알리는 통일된 이미지가 있는가? 오늘 선교에 나서는 우리에게 성공회의 정체성에 기반을 둔 신학이나 교회문화나 선교전략이 있는가? 우리 성공회 사람들 스스로 한국 성공회의 정체성에 관하여 분명하게 정리된 이해가 있는가? 성공회 신자로 살아가는 자부심에 대하여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전문회사에 CI작업을 의뢰하면 적어도 반년 이상의 기간과 1억원 상당의 비용이 필요하다고 한다. 만만치 않은 부담이다. 하지만 참으로 필요한 일이라면, 우리 성공회 내에서 관심과 열정 있는 이들이 함께 힘을 모아 CI 작업에 달려들어 끝까지 이루어낼 수는 없는 것일까? ✠ (임종호 사제/ 성공회신문 2008년 2월 3일자 논단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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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CI, 성공회

서울교구 성직자원의 활동 - 책임과 과제 -이재복 신부(2005.3.6.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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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교구 성직자원의 활동 - 책임과 과제

이재복 신부(멜기세덱∙서울교구 성직자원 총무/산본교회)

1.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세 주체

세계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고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며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끄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의 진정한 주인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한 분뿐이시다.

그런데 현실의 교회, ‘눈에 보이는 교회’는 사람(하느님의 백성들)과 건물(성당과 부속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잘 가꾸어진 건물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그래도 역시 우리 교회에서는 ‘사람의 소중함’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의 백성들이 모두 함께 한 분이신 하느님을 참된 태도로 따르며 그 분과 일치하는 것이야말로 구원에 이르는 바른 길일 것이다.

하느님의 백성들, 교회의 사람들은 크게 보아 성직자들과 교우(평신도)들로 구성된다. 그리고 성직자들은 다시 주교들과 일반 사제 · 부제들로 나뉜다. 그러므로 교회는 주교들과 사제 · 부제들과 평신도, 이렇게 세 주체로 이루어져 있다. 이에 따라 전국의회는 교구장 주교들과 성직자 대의원과 평신도 대의원으로 구성되어 있고(대한성공회 관구 헌장 제20조), 예를 들어 서울교구의회 역시 교구장주교와 보좌주교로 구성하는 주교원, 사제와 부제로 구성하는 성직자원, 평신도 대의원으로 구성하는 평신도원으로 이루어져 있음(서울교구 법규 제19조)을 우리가 알고 있다.

현실교회의 성숙과 변화와 개혁은 결국 이 세 주체 곧 주교(주교원)와 평신도(평신도원)와 일반 성직자(성직자원)가 자기 역할을 다 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는 셈이다.

2. 성직자원은 무엇인가?

성직자원(院)은 글자 그대로 ‘사제와 부제들의 모임’이다. 교회의 사부이시며 일치의 상징인 주교들(주교원)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하는 평신도들(평신도원)이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것처럼, 성직자들(성직자원)도 소중한 하나의 주체이다. 그리스도께서 몸소 보여 주신 사도적 실천을 함께 수행함으로써 하느님의 백성들을 섬기며 이끌어야 하는 사목자들인 성직자들과 그 모임인 성직자원의 역할을 새롭게 살펴보고, 스스로의 책임과 사명을 거듭 다짐하는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성직자원은 전국성직자원과 각 교구성직자원 두 가지가 있다. 여기에서는 교구성직자원 그것도 서울교구의 성직자원에 대한 내용으로만 한정하여 말하고자 한다.)

성직자원은 교구의회나 교무국 등을 대신하는 조직은 아니다. 성직자원이 다른 공식적인 기구들을 함부로 대신해서는 안 된다. 다만 성직자들이 공동연구와 토론 등을 통하여 ‘성직자들의 전체적인 합의’를 도모해나가는 하나의 ‘선한 도구’이고자 한다.

서울교구 성우회는 성직자들의 임의적인 친목모임이다. 이에 비하여 성직자원은 교구 법규에 근거하여 있는 공식적인 기구로서 성직자들의 사목활동과 선교정책 등을 연구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조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 서울교구 성직자원은 왜 ‘상설적인 활동’을 하고자 하는가?

대한성공회 관구 헌장 제52조(원별 회의)에 따르면 “전국의회 폐회 기간 중 주교원, 성직자원, 평신도원 회의를 따로 개최할 수 있”고, 예를 들어 서울교구 법규 제20조(원별 회의)에 의하면 “각 원은 필요에 따라 원별 회의를 개최할 수 있다.” 이 조항들은 성직자원의 활동을 상시적(常時的)으로 할 수 있음을 알려 준다. (당연히 주교원과 평신도원의 활동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동안 서울교구의 성직자원은 교구의회가 열린 때, 그것도 성직자원 의장과 교구상임위원들을 선출하는 때 정도만 극히 한시적(限時的)으로 기능해 왔다.

성직자원 모임을 상시적으로 했는가 하는 점만이 중요한 것은 물론 아니다. 모임을 자주 여는 것만이 능사도 아니다. 문제는 ‘성직자원이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하나의 중요한 주체로서 책임과 역할과 기능을 바르게 해 왔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성직자원이 그 책임과 역할을 다하기 위하여 사목활동과 선교정책 등에 관한 공동의 연구와 토론이 필요하고, 교회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의견과 주장들을 합리적이고 민주적으로 수렴하여 건강한 대안을 마련하는 일이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면, 성직자원은 상설적(常設的)으로 움직여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상설적인 활동을 하지도 않고 또 활발하고 건전한 의사소통을 하지도 않은 채 그러한 과제를 수행하는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4. 상설적인 활동의 시작 - 성직자원 제1차 총회

우리 서울교구 성직자원은 지난 2004년 10월 12일에 많은 성직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제1차 총회를 개최함으로써 상설적인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이것은 지난 2년 동안 서울교구의 성직자들이 자발적으로 ‘성직자포럼’을 꾸준히 진행하여 온 자연스런 결과였다.

‘오늘의 교회와 사제직의 위기 - 사제의 리더쉽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선교적 관점에서 바라본 성소 개발’, ‘성직자원의 역할과 위상’, ‘우리는 어떤 교회를 지향하는가?’, ‘농촌교회 현실과 교회론’, ‘나눔의집 선교론’, ‘현재 우리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 관하여’, ‘현 단계 우리 서울교구가 처한 상황과 제언’, ‘주교 선출에 즈음한 서울교구 성직자 정책포럼’, ‘서울교구 성직자원 총회 준비를 위한 발제’, ‘바람직한 성직자 인사제도에 대하여’ 등을 주제로 했던 성직자포럼은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교훈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첫째, 우리 교회(교구)가 당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과제들을 바르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성직자들이 각성하고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둘째, 성직자들의 분명한 사목철학 정립과 활력 있는 사목활동 그리고 교회(교구)의 미래지향적인 선교정책 수립을 위하여 공동의 연구와 토론이 필요하고 아울러 다양한 의견들을 합리적이고 민주적으로 수렴하는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셋째, 교회의 한 주체인 성직자들이 보다 책임 있는 활동을 하기 위하여 성직자원을 상설화해야 한다.

현재 서울교구 성직자원은 의장(전삼광 신부∙수원교회)과 각 그룹을 대표하는 성직자 등 모두 11명의 운영위원들이 ‘성직자원 운영위원회’를 구성하여 다달이 정기적으로 회의를 열고 있고, 또 성직자포럼도 계속 진행하고 있다.

5. 성직자원의 활동 목적

서울교구 성직자원의 활동 목적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모든 성직자들이 늘 스스로를 갱신하고 활력 있는 사목활동을 할 수 있도록 이끎으로써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바른 성직자상을 확립해 나간다. 둘째, 모든 성직자들이 공동으로 참여하여 연구하고 토론하며 실천하는 문화를 진작시킨다. 셋째, 성직자들이 솔선하여 선교정책의 대안을 책임 있게 마련하고 실천함으로써 교회(교구)의 성숙과 변화와 발전에 기여한다.

이러한 목적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하여 지금 성직자원은 성직자포럼을 운영하는 특별위원회, 미자립교회 지원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특별위원회, 바람직한 성직자 인사제도를 연구하는 특별위원회 등 세 개의 특별위원회를 두어 활동하고 있다. 앞으로는 더 다양한 특별위원회의 활동을 펼쳐나갈 것이다.

6. 성직자원의 전망

지난 시기를 되돌아볼 때 우리 성직자들이 자발적으로 모여서 공동으로 연구하고 토론하면서 선교정책의 대안을 내놓고 그것을 책임 있게 실현해 본 경험이 그다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성직자들의 자발성과 창의성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고, 또 한편으로는 성직자들의 공동책임성을 담보하는 데 부정적으로 기능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성직자들 스스로가 감당해야 할 책임을 교회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전가했던 측면도 더러는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우리들의 과거를 또 다시 답습할 필요는 없다. 성직자들이 책임져야 할 일은 성직자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 성직자들이 뼈저리게 각성하고 자신을 먼저 복음화하면서 교회와 세상을 복음화해야 할 것이다.

성직자원은 성직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교회의 중요한 한 주체임을 더욱 확신하도록 이끌면서 그 주체로서의 책임과 역할과 사명을 일깨우는 기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으로써 성직자원은 앞으로 주교원, 평신도원과 함께 나란히 서서 교회공동체를 떠받치는 하나의 주춧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성직자원의 이러한 자각과 활동은 우리 교회 전체가 선교지향적인 공동체로 탈바꿈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하리라고 믿는다.

7. 소중한 보물들을 찾고 가꾸기

서울교구 성직자원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것이 아니다. 성직자원은 우리 안에 이미 있어 온 조직이다. 전혀 새로운 또 하나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었지만 그동안 유용하게 활용되어 오지 못했던 것을 새롭게 발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 교회공동체 안에는 성직자원 말고도 ‘숨어 있는 소중한 보물들’이 더 많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다만 아직도 우리가 발견하지 못하고 있고 활용하지 못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다른 교회와 다른 교단과 다른 종단의 좋은 점들을 배우고 익히는 것은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우리가 이미 보듬고 있는 우리 교단의 보물들을 애써 외면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우리 성공회라는 깊고 맑은 우물을 놓아둔 채 왜 다른 우물들을 찾아 헤매야 하나?

우리 성공회공동체가 지니고 있는 아주 귀한 보물 가운데 하나는 민주적인 대의제도라고 배웠다. 그런데 민주적인 대의제도는 말 그대로 의사결정과정이 민주적이어야 하고 순수한 의미에서의 대의(代議)가 실현되어야 한다. 주교들은 주교원에서, 평신도들은 평신도원에서, 성직자들은 성직자원에서 각각 민주적인 의견 수렴과 공개적인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주교원은 주교들의 의사를, 평신도원은 평신도들의 의사를, 성직자원은 성직자들의 의사를 교구의회나 전국의회에서 대의(代議)해야 한다.

주교원과 평신도원과 성직자원이 제각각 따로따로 자기주장만을 고집하자는 말이 절대로 아니다. 세 개의 각 원(院)이 저마다 민주적으로 수렴된 자기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가지고 있을 때 오히려 우리의 교구의회나 전국의회는 훨씬 더 활발한 토론의 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화원(花園)은 다양한 꽃을 가지고 있어야 화려하고 눈부시다. 한두 가지의 꽃만으로는 결코 아름다운 정원을 가꿀 수 없다. 우리 성공회교회는 예쁘고 소중한 꽃들을 많이 지니고 있는 공동체라고 믿는다. 이제는 그 숨어 있는 보물들을 조심스레 길어 올려 마음껏 피어나게 하자. 주교원과 평신도원과 성직자원이 함께 손 맞잡고.

8. 성직자원의 과제

성직자원이 상설적으로 활동한다는 것 하나만으로 우리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과제들이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성직자원의 활발한 활동은 교회공동체가 선교적인 공동체로 변화해가는 데 분명히 기여하리라고 믿는다.(주교원과 평신도원의 활동도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직자원은 성직자들 스스로가 책임을 져야 하는 집이요 마을(院)이다. 성직자들 외에는 아무도 성직자원을 책임질 수 없다. 각자의 현장에서 열심히 사목활동을 하는 가운데 틈틈이 따로 모여서 부지런히 연구하고 토론하며 각자의 사목철학을 더 깊게 다지고 교회의 생산적인 선교정책을 풍성하게 다듬고 실천해야 한다.

이제 서울교구는 새로운 변화의 시기를 앞두고 있다. 성직자원은 그 ‘변화’가 더 복음적이고 더 선교지향적인 것이 될 수 있도록 힘쓰고자 한다. 주님께서 일러 주신 진리의 길을 따라 교회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과 함께 걸어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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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희망의 주체, 평신도 -임종호 신부(2005.4.17.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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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희망의 주체, 평신도

임종호 신부(프란시스.분당교회)

성공회사람들의 성공회 사랑은 참으로 지극합니다. 이제 그 지극한 사랑의 내용을 한편으로는 자랑하고 한편으로는 반성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희망으로 21세기를

우리 성공회는 희망으로 21세기를 맞이하였습니다. 한인주교시대이후 40년간을 돌이켜보면 정말 많은 성장과 변화가 있었습니다. 성직자도 많이 양성되었고 교회도 많이 개척되었습니다. 성공회대학교도 놀라운 발전을 거듭 하였고 나눔의집, 샬롬의집, 푸드뱅크 등 사회선교도 활발합니다. 알파코스, 113복음화운동, 제자훈련, 성령운동, 성공회영성센터 활동 등 여러 가지 새로운 신앙운동들이 교회 내에서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주교직은 권위적으로 다스리는 역할보다도 선교활동에서 구심점이 되는 일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성직자 청빙제도가 채택되어 본교회들이 나름대로 특성에 맞는 성장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서적인 교회, 성사적인 교회, 열린 교회, 치우침 없는 교회, 합리적이고 깨끗한 교회로서의 성공회의 특징은 앞으로 선교에 더욱 더 강점으로 발휘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한국교회 내에서만 아니라 한국사회전체에서 성공회의 인지도와 영향력이 날로 높아져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한가닥 불안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인적, 물적 교세로 보면 그다지 성장했다고 자부하기 어렵습니다. 인력이 부족하고 재정이 부족하여 감당하지 못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변화하는 사회에 비추어보면 그리고 다른 교단이나 교파의 발전에 비교해보면 우리의 자기만족은 좀 쑥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분명 예전의 모습보다는 대단히 나아진 모습들을 스스로 대견해 할 수 있기는 하지만, 정직하게 말해서 우리 성공회가 사회변화를 따라 잡으면서 선교에 매진할 수 있는 내적인 역량을 갖추고 있다고 하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성직자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참된 권위, 곧 복음과 교회에 관해 합의된 “성공회정신”을 공유할 수 있는가 하는 점

사회가 전반적으로 노령화되는 탓도 있겠지만 교회 공동체 안에서 젊은이들의 활발한 움직임을 보기가 어렵고 많은 교회학교가 쇠퇴하고 있다고 듣습니다. 교회개척도 점점 어려워지고, 이미 개척된 교회도 자립교회가 되기까지 성장하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성직자가 많아지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그로인해 성직자공동체가 하나 되기는 점점 어려워집니다. 서열중심의 권위의식이 점차 사라지는 것은 한편 좋은 일이고 막을 수도 없는 추세이지만 진짜 문제는 늘어나는 성직자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참된 권위, 곧 복음과 교회에 관해 합의된 “성공회정신”을 공유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성직자들 간에도 선의의 경쟁이 도입되는 것이 선교에 도움이 되리라는 의견도 있지만 성공회의 공교회성이 심각하게 위협받으리라는 의견이 더 많습니다. 교회성장을 위해서 성공회의 중요한 전통이나 신학 등의 “정체성”을 포기해야 한다면 그것이 어떤 의미일지도 생각해보게 됩니다. 다양한 신앙운동들도 매우 기뻐할 일이지만,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독단적인 운동이 되면 장차 교회공동체에 “쓴 뿌리”가 될 우려가 있습니다. 성직자 청빙제도가 교회성장의 동력이 되리라는 기대는 청빙제 이외의 여러 가지 조건들은 얼마만큼 성숙되어 있고 준비되어있는가를 묻는 물음 앞에 그 소박함을 드러냅니다. 우리 모두가 성공회에 대하여 강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과연 그 자부심을 자신 있게 전할 수 있을 만큼 그 내용을 정리하고 있고 공유하고 있고 실제로 전파하고 있는가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 전체가 성장이 둔화되고 있는 즈음에 우리가 교회성장을 기대할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일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부심인 사회선교는 어떤 방향으로 지속될지, 그리고 일반교회공동체와는 어떤 관계 속에서 발전할지도 아직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문제들이 억지로 지어낸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좀 더 정직하게 논의하고 대안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가장 깊이 통찰하시는 주교들께서 우리 교회의 사부이시며 책임자로서 불철주야로 애쓰시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성직자원에서도 이런 문제들을 깊이 공감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각자 담당하는 선교현장에서 소명에 최선을 다함은 물론이요, 공동으로 대안을 세우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연구하고 길을 찾고 있습니다. 평신도 교우들도 우리 성공회가 진정으로 교회다운 교회로서 성장 발전하기를 눈물로 기도하는 줄 압니다. 그러므로 분명 이 문제들은 우리 교회에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들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해볼 일이 있습니다. 수많은 교우들이 우리 성공회를 위하여 기도하실 때 혹시라도 그 기도의 주된 내용이 주교와 성직자가 각성하여 교회를 위해 무슨 일을 더 열심히 하도록 해주십사하는 것은 아닐까요? 주교와 성직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절대로 필요하고 유익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내용을 살펴볼 때 우리 교회의 현실을 타개해나가는 일이 주교나 성직자가 전담해야할 몫인 것처럼 여기고 있다면 이는 교회를 생각하는 진실한 충정에도 불구하고 바람직한 일은 아님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살아계신 하느님과 우리가 맺는 “올바른 관계”가 곧 신앙의 핵심

약간 현학적으로 말하자면, 이 세계의 실상은 존재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우리 존재 따로, 하느님의 존재 따로 살피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느님과 우리가 맺는 “올바른 관계”가 곧 신앙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완전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속에 있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 됩니다. 갑자기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이처럼 “관계”라는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어야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살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은 존재의 구분이 아니라 관계의 구분입니다. 성공회는 주교의 교회라고 흔히 말하지만 주교는 홀로 주교가 아닙니다. 성직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교우들과의 관계 속에서 주교의 역할이 의미를 갖게 있습니다. 성직자도 홀로 성직자일 수 없습니다. 주교와 교우들과의 관계 속에서 성직자입니다. 평신도도, “평(平)”신도란 말 자체가 나타내듯, 주교와 성직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상대적인 의미를 갖는 평신도입니다.

모든 관계의 근원은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은 이차적입니다. 일차적인 관계는 성직자, 평신도 모두 구분 없이 하느님의 자녀요 하느님나라의 백성이라는 점입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도 성직자, 평신도의 구분은 이차적입니다. 일차적으로는 모두가 함께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있는 제자요, 복음선포의 증인이요, 사도입니다. 예수께서 성령을 통하여 세우신 교회와의 관계 속에서도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은 이차적입니다. 일차적으로는 모두가 함께 하느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령의 공동체인 교회의 일원인 것입니다.

물론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의미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교회공동체가 주님의 이름으로 신자 가운데 지도자를 세우고 성직을 서품하였습니다. 그 권위는 교회의 이름으로, 나아가 주님의 이름으로 존중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구분은 존재론적인 구분이 아니라 관계의 구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성직자, 교우 우리 모두가 함께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있는 제자요, 복음선포의 증인이요, 사도로 교회의 모든 선교 사역에서 평신도는 성직자와 똑같이 주체적인 존재

그러므로 교회가 주교와 성직자(사제,부제)와 평신도로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은 부족한 이해입니다. 주님이 주인이신 교회 안에 주교와 성직자와 평신도가 서로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에 대한 관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그 관계의 근원이 되는 하느님과 세상에 대한 관계가 더 중요합니다.

모든 사람은 다 함께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있고,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할 소명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대 교회에서 “평신도 사제직(만인사제직)”, “평신도 사도직”, “평신도 사목직”이 중요하게 논의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선교 사역에서 평신도는 성직자와 똑같이 주체적인 존재가 되어야합니다.

사제직은 근원은 더 이상 구약제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사랑의 희생으로 바치신 구속의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곧 구원을 회복시켜주는 사제직은 서품 받은 사제를 통하여 “전례”에서 재현될 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가 “평신도 사제”로서 살아가는 세상의 삶 속에서 화해와 일치로 실현되는 것입니다.

사도직의 본질은 주교라는 개인이 독점적으로 물려받은 권리승계가 아닙니다. 복음의 증인으로서 땅 끝까지 그리스도의 사역, 하느님 나라의 일을 펼쳐야하는 사명은 모든 신자가 주님으로부터 이어받고 있는 사도직입니다. 주교가 계승하는 사도직은 모든 신자의 사도직을 포함하고 있고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직자만이 아니라 모든 교우들이 “평신도 사도”로서 세상에서 전도하고 선교할 사명이 있습니다.

사목직은 단순히 교회 구성원인 교우들을 성직자가 돌보는 일에 그치지 않습니다. 사목직의 본질은 모든 교우를 장성한 분량의 신자로 세워나가는데 있습니다. 어린 신앙은 자상한 보살핌이 필요하지만 장성한 신앙은 세상으로의 파송이 필요합니다. 모든 교우들은 “평신도 사목자”로서 서로를 세워가는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전례의 가치도 성직자가 교우들을 위해 행하는 종교적 서비스가 아니라, 교회공동체가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과 감사와 기도가 본질입니다. 집전자와 회중은 구별되지만, 분리되거나 차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교우가 전례에 있어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능동적이어야 합니다. 신학도 성직자나 신학자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모든 신자는 스스로의 신앙경험을 정리하고 반성하는 신학을 이미 하고 있습니다. 신앙인의 대화는 신앙적인 동시에 신학적입니다. 신자들을 신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로 여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태도입니다. 필요한대로 신학적인 교육기회를 자주 마련하고 대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소 딱딱한 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만, 우리 성공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해나가며 교회다운 교회로서 이 땅에서 성장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우리 전통과 거리가 있는 타 교단의 지엽적인 제도나 특정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비전은 우리 가운데서 생겨납니다. 바로 우리 평신도 교우들이 교회와 선교에서 스스로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인가를 깨닫고, 그에 걸맞는 신앙과 신학과 헌신과 교육과 훈련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성공회의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평신도의 중요성은 신학적으로나, 교회 전통 속에서나 이미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평신도는 성직자에게 단순히 전통적인 사목의 대상이 아닙니다. 성직자와 함께 보다 더 근원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사도직과 사목직을 나누어질 파트너입니다. 천주교처럼 일사불란한 교회조직에 의지하기도 어렵고, 개신교처럼 담임목회자의 개인적인 카리스마가 통하기도 어려운 우리 성공회로서는 평신도의 역할이 참되게 교회 안팎에서 가능하도록 의식의 변화, 제도의 개선, 교육의 강화를 꾀하는 길이 교회성장의 가장 중요한 길이라고 사료됩니다. 실제 현실로도 “성직자 청빙제도”가 이미 관구 법규에 규정이 된 것도 교회의 주체로서의 평신도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인식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교우들 모두가 신앙의 기본에 충실할 때 그 속에서 진실한 현실성, 참다운 성공회 교회의 비전이 생겨날 것

하지만 과연 우리의 평신도들은 우리 성공회의 비전을 세우고 이루어내는 주체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을까요? 자칫하면 모든 이야기가 현실성 없는 공허한 이야기가 되고 마는 것 아닐까요? 저는 확신합니다. 현실성은 어디서 생겨날까요? 우리 교우들 모두가 신앙의 기본에 충실할 때 그 속에서 진실한 현실성, 참다운 성공회 교회의 비전이 생겨날 것입니다.

“부제님, 렉시오 디비나(거룩한 독서, 성서묵상)를 하면서 이런 말씀이 와 닿았습니다.” “신부님, 관상기도를 삼년 째하고 있는데 살아계신 하느님과 함께 하는 기쁨이 놀랍습니다.” “주교님, 교구 행정을 위해서 이런 봉사를 하고 싶습니다.” “교회위원님, 이제 해도 되고 안하면 그만인 식으로 일하지 말고, 해서 좋고 해야 되는 일은 꼭 함께 힘 모아 실천해봅시다.” 교우들 가운데 자연스럽게 이런 말씀들이 나누어질 때, 바로 이 가운데 우리 교회의 희망은 숨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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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성공회 관구 게시판에서 필명 바우로님의 글을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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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해야 할 것들...

글쓴이 : 바우로 (2007.8.08 - 17:40)


저는 개인적으로 개신교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성공회를 알게되어 성공회교인이 된 사람입니다.

성공회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모습과 성공회대학의 진보적인 신학적 관점등등 제 자신의 소견으로는 이런 모습이야말로  교회의 바른 모습이고 한국교회의 궁극적 대안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성공회 교인이 되니 제가 알던 성공회와는 다른 목소리가 교회안에 상당히 많고 어떤 때는 개신교에서도 굉장히 위험한 근본주의적 목소리도 들려오는 것에 깜짝 놀라기도 했었습니다.

왜 성공회에서 저런 목소리가 나올까라는 의문도 들었고 이해 못해서 혼란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성공회 신자로서 5~6년이 지나는 동안 성공회 신자들의 '외로움'이랄까...? 뭐 그런 아픔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개신교와 천주교로 양분해서 생각하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성공회를 일일이 설명하는 것도 힘들고... 다른 교단의 사람들과는 용어나 호칭도 다르고... 항상 교세가 미약해서 성공회를 모르는 약간은 무지한 열정적인 다른교단 신자에게는 이단의 의혹을 받기도 하는 상황들을 듣고 또 겪어 보면서 "아! 이분들이 정말 힘들게 신앙을 지켜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성공회교인들의 "마이너리티 콤플렉스"-그냥 저만의 표현입니다 - 가 성공회를 너무 사랑하시는 몇 몇분들에 의해서 개신교의 성장제일주의로 표출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봤습니다.

그런 분들은 그저 말끝마다 부흥!부흥!을 외치는데 그 부흥의 가시적인 현상은 교회성장입니다. 그렇게 성공회가 교세가 확장되면 성공회에 대해서 일일이 설명해야하는 어려움도 없고 심할경우 이단으로 오해받는 일같은 것은 없을테니까요.

하지만 성공회를 사랑하시는 그분들의 애정과 작은 교단인 성공회교인으로서 살아오신 그분들의 '힘들었음'에 이해가 가긴 하지만 그분들의 선택은 결코 동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공회가 역사적으로 지켜온 가장 큰 장점중의 하나가 치우침없는 중용과 포용성 아닙니까?
그런데 대다수 부흥을 주장하시는 분들의 주장은 맹목적인 신앙의 강화입니다. 그것만이 진정한 신앙이고, 성령의 역사이며, 성서문자주의적인 해석을 해야만 올바른 성서이해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들은 바로 근본주의의 전형적 특성이지요. 한국교회에 파고들어온 가장 잘못된 신앙의 변종입니다. 이것이 이제 성공회에 들어오려고... 아니 이미 들어와서 조금씩 힘을 얻고 있습니다.

성공회 교인들의 회개는 이부분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렵게 힘들게 올바른 신앙을 지켜가는 것이 힘들어 신앙을 편하고 안락하게 하고자 했다는 것에 대해서... 하느님이 성공회에 주신 축복인 청빈에 대해서 불평하고 세상적인 성장과 풍요를 교회안에 끌어들이려 했다는 것에 대해서...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힘들게 묵묵히 신앙생활을 하는 교우들을 열정도 신앙도 없는 사람으로 매도한 것에 대해서...

성공회는 작은 교회로서의 모습을 지켜내는 것으로 크게 쓰임받을 것입니다. 물질만능주의의 홍수속에서도 꿋꿋하게 하느님의 말씀에 근거한 교회의 모습으로 남는 것에 하느님께서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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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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