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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초록/2011년도설교초록

2011년 10월 30일 (연중 31주일) 성서정과 및 강론초록

2011년 10월 30일 (연중 31주일) 성서말씀 / 남양주성당 축성
 
미가 3:5-12

5 내 겨레를 그릇된 길로 이끄는 예언자들을 두고 야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언자라는 것들, 입에 먹을 것만 물려주면 만사 잘되어 간다고 떠들다가도 입에 아무것도 넣어주지 않으면 트집을 잡는구나!"
6 그래서 너희 백성은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밤을 맞았다. 내일을 점칠 수 없는 어둠에 싸였다. 예언자들에게는 태양이 사라져 대낮인데도 눈앞이 캄캄해졌다.
7 앞날을 내다본다던 것들이 창피를 당하고 내일을 점친다던 것들이 쥐구멍을 찾으리라. 하느님께서 대답하지 않으시는데 누가 입을 열겠느냐?
8 그러나 나에게는 거역하기만 하는 야곱의 죄상을 밝히고 못할 짓만 하는 이스라엘의 죄를 당당하게 규탄할 힘과 용기가 차 있다.
9 야곱 가문의 어른들이라는 것들아, 이스라엘 가문의 지도자라는 것들아, 정의를 역겨워하고 곧은 것을 구부러뜨리는 것들아, 이 말을 들어라.
10 너희는 백성의 피를 빨아 시온을 세웠고, 백성의 진액을 짜서 예루살렘을 세웠다.
11 예루살렘의 어른이라는 것들은 돈에 팔려 재판을 하고 사제라는 것들은 삯을 받고 판결을 내리며 예언자라는 것들은 돈을 보고야 점을 친다. 그러면서도 야훼께 의지하여, "야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데, 재앙은 무슨 재앙이냐?" 하는구나! 12 시온이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이 돌무더기가 되며, 성전 언덕이 잡초로 뒤덮이게 되거든, 그것이 바로 너희 탓인 줄 알아라.

시편 43

1 하느님이여, 나의 옳음을 판단|하시|고 ∥ 매정하게 나를 무고하는 자들을 거슬러 변|호해|주소|서. # 거짓밖에 모르는 악인들|에게|서 ∥ 이 몸을 |구하|소-|서.

2 나의 요새이신 |하느|님, ∥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옵니|까?
# 이 몸이 원수에게 짓눌려 슬픈 날을 보|내다|니 ∥ 이것이 어찌 된 |일입|니-|까?
3 당신의 빛, 당신의 진실을 길잡이로 보|내시|어 ∥ 당신 계신 거룩한 산으로 이|끌어|주소|서. 4 하느님, 당신의 제단으로 나아가|리이|다. ∥ 나의 기쁨이신 하느님께로 나|아가|리이|다.
# 하느님, 나의 하느님, 수금가락에 |맞추|어 ∥ 당신께 감사 찬양 |올리|리이|다.
5 내 영혼아, 어찌하여 이토록 낙심|하는|가? ∥ 어찌하여 이토록 불|안해|하는|가?
# 나를 구해 주신 분, 하느님을 기다|리리|라.  ∥ 나의 하느님, 그분을 |찬양|하리|라.
# 영광이 |성부|와 ∥ 성|자와|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 ∥ 그리고 영|원히,|아-|멘

1데살 2:9-13

9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노력을 잘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동안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노동을 했습니다.

10 또 교우 여러분에게 대한 우리의 행동이 경건하고 올바르고 흠잡힐 데가 없었다는 것은 여러분도 목격해서 잘 아는 일이고 하느님께서도 증명해 주실 것입니다.
11 아시다시피 우리는 자녀를 대하는 아버지처럼 여러분 하나하나가 12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생활을 하도록 권고하고 격려하고 지도했습니다. 하느님은 여러분을 부르셔서 당신의 나라와 영광을 누리게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13 우리가 늘 하느님께 감사하는 것은 우리가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에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이 하느님의 말씀은 믿는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마태 24:1-14

1 예수께서 성전을 나와 얼마쯤 걸어가셨을 때 제자들이 곁으로 다가와서 성전 건물들을 가리키며 보시라고 하였다. 2 그러자 예수께서는 "저 모든 건물을 잘 보아두어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저 돌들이 어느 하나도 제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3 그리고 예수께서 올리브 산에 올라가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따로 와서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그리고 주님께서 오실 때와 세상이 끝날 때에 어떤 징조가 나타나겠습니까? 저희에게 알려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4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아무에게도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5 장차 많은 사람이 내 이름을 내세우며 나타나서 '내가 그리스도다!' 하고 떠들어대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속일 것이다. 6 또 여러 번 난리가 일어나고 전쟁 소문도 듣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당황하지 마라. 그런 일이 꼭 일어나고야 말 터이지만 그것으로 그치는 것은 아니다. 7 한 민족이 일어나 딴 민족을 치고, 한 나라가 일어나 딴 나라를 칠 것이며, 또 곳곳에서 기근과 지진이 일어날 터인데 8 이런 일들은 다만 고통의 시작일 뿐이다." 9 "그 때에는 사람들이 너희를 잡아 법정에 넘겨 갖은 고통을 겪게 하고 마침내는 사형에 처하게 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온 세상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10 그리고 많은 사람이 떨어져 나가 서로 배반하고 서로 미워할 것이며 11 거짓 예언자가 여기 저기 나타나서 많은 사람들을 속일 것이다. 12 또 세상은 무법 천지가 되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따뜻한 사랑을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
13 그러나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14 이 하늘 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 모든 백성에게 밝히 알려질 것이다. 그리고 나서야 끝이 올 것이다."

<본기도> 창조의 하느님, 주께서 지으신 이 아름다운 세상을 통하여 주님의 은혜로우심을 깨닫게 하시나이다. 비옵나니, 우리가 주께서 지으신 모든 것에 감사하며, 이 세상을 주님의 뜻대로 지켜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1>
 
                             살아있는 성전, 이름없는 성인으로 살자 (마태 24:1-14)

  좋은 소식이 거의 없는 요즘입니다. 물론 그래도 보이지 않게 이 세상을 사랑과 희생으로 섬기는 이들이 많기에 이만큼 평화로이 살 수 있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이고 들리는 일들은 자살소식, 경제위기, 무책임정치 따위이고, 기껏 현실을 잊게 하는 것은 연예와 스포츠 기사 따위입니다.

경제위기 자체의 고통도 견디기 어렵지만 더 마음 아픈 것은 그 와중에도 배우고 가지고 힘있어 권한과 책임을 가진 이들이 맨 먼저 자기 이익을 위해서 판단하고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기회만 되면 “눈먼 돈”, “쉽게 버는 돈”을 찾아 챙기려는 마음이 내게도 뿌리깊다는 사실은 스스로를 비참하게 합니다.

  누가 이 사회에 빛이 되고 기준이 될 생각과 행동을 보여줍니까? 누가 우리 다음 세대에 참된 삶의 가치와 태도를 가르칩니까? 교육자들은 제자들에게 가치와 인격도야를 가르치지 못하고 학생소비자에게 입시와 성공을 위한 지식을 제공하는 일에 급급합니다. 가장 으뜸가는 가르침을 전해야 하는 종교인들은 어떻습니까? 그리스도교만 하더라도 많은 성직자와 신자들이 복음의 말씀이 아니라 추하고 어리석은 세상의 가치와 논리로 세상을 선도(!)합니다. 세상사람들이 도리어 어이없어 하며 한탄하는 손가락질을 받고도 도통 부끄러움을 모르는 지경입니다.
 
  11월 1일은 모든 성인의 날, 11월 2일은 모든 별세자의 날입니다. 모든 성인들은 대단한 신심과 행업으로 알려진 이들이 아니라 이름 없이 신앙을 지키며 순교한 모든 이들을 말합니다. 한번 나서 한번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우리들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믿는 그 믿음으로 우리는 새로운 생명의 차원을 경험합니다. 그것은 죄 많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인정받는다는 것, 연약한 육신의 우리에게 성령의 내주가 이루어진다는 것, 질그릇같은 우리에게 복음의 능력이 담겨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슬프고 단호한 마음으로 지금은 화려하지만 결국 무너져 내리고 말 성전(질서)의 운명을 예언하십니다. AD70년 로마에 의해 무너져내린 예루살렘 성전은 우리 마음 밖에서 이루어지는, 우리 삶과 동떨어진 종교행위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종말의 징조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초자연적인 심판의 때를 알고 그것을 피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위압당하는 세상의 질서가 실상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오래가는 것도 아님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막강해보여도 어떤 나라, 어떤 사회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따뜻한 사랑을 찾기 어려운 상태라면 다시 말해 경쟁과 두려움과 미움과 다툼과 속임수가 가득하다면 그 사회질서는 마침내 종말의 운명, 곧 하느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의 눈으로 이 시대의 우리 사회를 보면 예수님의 경고말씀이 새삼 두렵습니다.

  유일한 참된 희망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하느님을 모시는 성전을 우리 삶과 마음의 밖에서 구하면 안됩니다. 커다란 교회당을 지어놓고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모아 도대체 무슨 가르침을 나눕니까? 어떤 교제를 나눕니까? 어떤 희망을 말합니까? 이름을 높이고 재물을 얻고 소원을 성취하는 일이 축복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구원사역을 통해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우리 이웃이 누구인지,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높고 크고 깊은 지를 깨닫는 것이 축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고 살아가는 우리 각 사람이 성전입니다. 우리 마음에 성령님을 모시는 일이 긴요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믿는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살아 움직이도록 해야 합니다. 그 일이 바로 우리의 기도생활입니다. 이 황폐해가는 시대에 저와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저마다 살아있는 성전이 되고, 이름 없는 성인(聖人)이 되고, 죽음의 위협을 이겨낸 승리자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

<강론초록 2>

                            “말세”를 넘어서 “하느님나라”로  (마태 24:1-14)

  어지러운 세상소식을 전해들은 어르신들이 “쯧쯧, 말세다. 말세야!” 하며 혀를 차시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도무지 어떻게 해볼 도리 없이 썩어버리고 만 세상은 반드시 송두리째 갈아엎는 심판을 피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동서고금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공통적인 두려움이요 또한 희망 섞인 기대인 것 같습니다. 강대국으로 둘러싸인 탓에 참으로 기구한 역사적 수난을 겪어야 했던 유대인들에게는 이러한 세상의 종말에 대한 소망이 더욱 강렬했던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심판이 초자연적으로 임해서 모든 것을 끝장내고 새로운 세상을 펼쳐주시기를 기대하는 생각들은 예수님 당시에는 대부분의 유대인들에게 퍼져 있었던 생각입니다.

  그 종말, 심판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는 대체로 공통점을 가지는데 그런 표현과 양식들을 학자들은 “묵시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묶어 부릅니다. 우리가 아는 바대로 “요한의 묵시록”이 바로 이런 묵시문학적인 내용이고, 복음서에도 군데군데 이런 묵시문학적인 표현들이 나타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AD70년의 예루살렘 멸망과 성전파괴를 내다보시고 지금은 화려하지만 결국 무너져 내리고 말 성전(질서)의 운명을 예언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따로 예수님께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주님께서 오실 때와 세상이 끝날 때에 어떤 징조가 나타나겠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제자들의 간절한 질문에 대하여 당연히 당시의 묵시문학적인 표현양식으로 예수님은 설명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두고 이 세상의 “종말”이 몇 년 몇 월 시작되기에 어딘가로 피하면 살아남거나, 하늘로 들려올라가 휴거될 수 있다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너무나 어리석은 오해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구원의 정보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하느님 외에는 예수님조차도 모르는 일이라 하셨고 도리어 그런 것을 안다는 자칭 메시아들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정보가 차단되어 알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 심판과 구원은 온전히 살아계신 하느님의 사랑과 절대주권에 달린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특정한 어떤 정보를 알아내어 피할 수 있는 “말세”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바로 알고,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나야 할 말세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말세”도 복음의 가치를 끝까지 참으며 살아내는 인내와 그 복음의 능력 곧 사랑의 힘을 이 세상 모든 곳에 펼쳐가는 선교를 요청합니다. 우리의 이러한 인내와 선교가 곧 “하느님나라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일생 몸 바쳐 행하신 모든 일이 바로 이 “하느님나라”의 일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