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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초록/2011년도설교초록

2011년 10월 9일 (연중 28주일) 성서정과 및 강론초록


2011년 10월 9일 연중 28주일 성서말씀

데니스 파리의 주교 순교자 250년경  /  부대동 울산 성당 축성

 
이사 25:1-9

1 당신은 야훼, 나의 하느님, 내가 당신을 우러러 받드옵니다. 내가 당신의 이름을 기리옵니다. 당신은 예전에 정하신 놀라운 뜻을 이루셨습니다. 신실하게 변함없이 그 뜻을 이루셨습니다. 2 거만한 자들의 도시를 돌무더기로 만드셨습니다. 그 요새화된 도읍은 이제 터만 남았습니다. 그들의 성루는 도시라고 할 수도 없이 허물어져 영원히 재건되지 아니할 것입니다. 3 그리하여 강한 백성이 당신께 영광을 돌리고 포악한 민족들의 도시가 당신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4 당신은 영세민에게 도움이 되어주시고 고생하는 빈민에게 힘이 되어주십니다. 소나기를 피할 곳, 더위를 막는 그늘이 되어주십니다. 포악한 자들의 화풀이는 겨울 폭우와 같으나 5 마른 땅을 햇볕이 마구 태우듯이, 그 거만한 자들의 소란을 당신께서는 억누르십니다. 구름이 더위를 가려 스러지게 하듯이, 그 포악한 자들의 노래를 당신께서는 막으십니다. 6 이 산 위에서 만군의 야훼, 모든 민족에게 잔치를 차려주시리라. 살진 고기를 굽고 술을 잘 익히고 연한 살코기를 볶고 술을 맑게 걸러 잔치를 차려주시리라. 7 이 산 위에서 모든 백성들의 얼굴을 가리던 너울을 찢으시리라. 모든 민족들을 덮었던 보자기를 찢으시리라. 8 그리고 죽음을 영원히 없애버리시리라. 야훼, 나의 주께서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주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벗겨주시리라. 이것은 야훼께서 하신 약속이다. 9 그 날 이렇게들 말하리라. "이분이 우리 하느님이시다. 구원해 주시리라 믿고 기다리던 우리 하느님이시다. 이분이 야훼시다. 우리가 믿고 기다리던 야훼시다. 기뻐하고 노래하며 즐거워하자. 그가 우리를 구원하셨다.

시편 23

1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 아쉬|울 것|없어|라.

2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 물가로 이끌어 |쉬게|하시|니
3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그 이름 목자|이시|니 ∥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길이|요,
4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없어|라
당신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없어|라.
5 원수들 보는 앞에서 상을 차려 |주시|고, ∥ 기름 부어 내 머리에 발라주시니, 내 잔이 |넘치|옵니|다.
6 한평생 은총과 복에 겨워 사는 |이-|몸, ∥ 영원히 주님 집에 |거하|리이|다.
영광이 |성부|와 ∥ 성|자와|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 ∥ 그리고 영|원히,|아-|멘

필립 4:1-9

1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을 믿으며 굳세게 살아가십시오.

2 유오디아와 신디케 두 분에게 나는 간청합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한마음이 되십시오. 3 나와 한 멍에를 멘 내 진실한 협력자에게 부탁합니다. 이 여자들을 도와주십시오. 이 여자들은 클레멘스를 비롯하여 다른 협력자들과 더불어 복음을 전하느라고 나와 함께 애쓴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이름은 생명의 책에 올라 있습니다.
4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5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에게 보이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6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7 그러면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하느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8 형제 여러분, 끝으로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이든지 참된 것과 고상한 것과 옳은 것과 순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과 덕스럽고 칭찬할 만한 것들을 마음속에 품으십시오. 9 그리고 나에게서 배운 것과 받은 것과 들은 것과 본 것을 실행하십시오. 그러면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마태 22:1-14

1 예수께서 또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 "하늘 나라는 어느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것에 비길 수 있다. 3 임금이 종들을 보내어 잔치에 초청받은 사람들을 불렀으나 오려 하지 않았다. 4 그래서 다른 종들을 보내면서 '초청을 받은 사람들에게 가서 이제 잔칫상도 차려놓고 소와 살진 짐승도 잡아 모든 준비를 다 갖추었으니 어서 잔치에 오라고 하여라.' 하고 일렀다.
5 그러나 초청받은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가고 6 또 어떤 사람들은 그 종들을 붙잡아 때려주기도 하고 죽이기도 했다. 7 그래서 임금은 몹시 노하여 군대를 풀어서 그 살인자들을 잡아죽이고 그들의 동네를 불살라 버렸다. 8 그리고 나서 종들에게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지만 전에 초청받은 자들은 그만한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다. 9 그러니 너희는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청해 오너라.' 하고 말하였다. 10 그래서 종들은 거리에 나가 나쁜 사람 좋은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다 데려왔다. 그리하여 잔칫집은 손님으로 가득 찼다.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갔더니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를 보고 12 '예복도 입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소?' 하고 물었다. 그는 할 말이 없었다. 13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이 사람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 내쫓아라. 거기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14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

<본기도> 구원의 하느님, 주께서는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셨나이다. 비옵나니, 우리가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오직 사랑으로 주님과 이웃을 섬기며 살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1>


                               주님의 뜻에 대한 두 가지 태도 (마태 22:1-14)

오늘 복음말씀은 일차적으로 어떻게 해서 택함 받은 백성이라던 유다인들이 하느님의 나라에서 배제되고 그리스도인이 대신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입니다.

본문에서 임금이 군대를 풀어 동네를 불태웠다는 말씀은 실제 역사상 기원후 70년경의 예루살렘의 멸망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임금이 아무나 데려오라 하신 덕분에 그저 잔치에 참여하게 된 잔치에라도 예복은 갖추어 입어야 한다는 말씀은 교회 공동체에 속하였다 하더라도 방심하지 말고 착한 행실을 완성하여야 한다는 경고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뜻을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큰 신비이며 난제중의 하나는 바로 “하느님의 뜻과 우리의 의지와의 관계”일 것입니다. 어느 것이 더 먼저이고 중요할까요?

우리는 기도 중에 하느님께서 우리의 상황과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기도 여부에 따라 상황을 변화시켜 주실 것이라면 애초에 그런 상황을 겪게 하시는 것은 우리 믿음에 대한 시험에 불과한 것일까요? 하느님은 우리를 시험하시기 위해 우리의 세상사에 일부러 고난과 아픔의 덫을 교묘하게 설치하시는 분일까요?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니, 우리의 상황은 물론 우리 마음과 의지까지도 변화시켜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우리 자신의 결단과 의지적인 노력은 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이 세상에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어디까지이고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어디부터일까요?  면면한 교회 전통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한 가지 진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이 성숙할수록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태도는 스스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주장하고 시도하는 능동적인 태도로부터, 모든 일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하여 동참하려는 수동적인 태도로 변해간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내가 원하는 대로 바꾸어 내려는 고집과 신념의 태도에서, 이제는 오로지 자기 자신을 하느님의 뜻에 맞추려는 겸손과 헌신의 태도로 변합니다. 이 수동적인 자세는 무사 안일한 현실회피가 아닙니다. 그것은 능동적으로 자신의 구원을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몇 배 더 강하게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자기 자신을 비우고 순종하는 충성을 필요합니다. 이미 벌어진 현실이기에 할 수 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체념이거나 자포자기 수준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주권에  철저히 순복하며,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을 잘 분별하고, 우리의 모든 것을 기꺼이 바쳐서 그 분의 일에 참여하는 것, 그것이 참된 삶이요 영생의 길인 것입니다. *


<강론초록2>

                    은혜로 초청받은 혼인잔치, 예복은 입어야 (마태 22:1-14)

날씨 좋고 결실의 계절인 이 가을에 많은 이들이 결혼식을 올립니다. 혼인잔치는 당사자뿐 아니라 집안과 이웃과 온 마을이 다함께 기뻐하는 “창조하는 사랑”의 복된 잔치입니다.

신랑신부는 청첩장을 돌리면서 되도록 많은 이들이 찾아 와서 축하해주길 바랍니다. 이른바 유력한 집안의 혼인식에는 잘 모르는 이들까지 찾아와 눈도장을 찍으려 하지만 그런 것 말고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함께 기뻐해주고 격려해주는 사람들이 많으면 얼마나 고맙고 힘이 됩니까?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혼인잔치에 즐겨 비유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당신을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한 이스라엘의 운명을 왕자의 혼인잔치에 초대받고도 무시하고 반항하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멸망하고 마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운명에 비유하십니다.


초청을 받았으나 거절한 사람들 대신에 임금은 아무나 누구나 만나는 대로 데려오라고 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 즉 기쁜 소식의 중요한 내용입니다.

즉 이제 하느님의 나라는 인간적인 기준으로 도덕적이고 학식 많고 부유하고 지위가 높은 등의 자격을 갖춘 사람에게만 열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우리의 자격과 무관하게 허락된 것으로서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고맙고 기쁜 소식입니까? 나같이 별 볼일 없고 악하기 까지 한 인간에게도 주님의 사랑과 부르심은 예외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치에 참여하려면 “예복”은 갖추어 입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일단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그에 걸맞게 정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우리의 정결한 삶이란 사람들로부터 단지 “선하다”고 평가받는 것 이상의 중요한 진실이 있습니다. 예복을 입었다는 것은 그 사람이 지금 자기가 있는 자리가 바로 “임금으로부터 초대받은 혼인잔치의 자리”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마찬가지로 정결한 삶이란 우리 모두가 바로 하느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 하느님께 사명을 받은 대로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을 깨닫고 늘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