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27일 (나해 대림 1주일) 성서말씀 / 평택성당 축성
이사 63:19-64:8
19 당신께서 우리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므로 당신의 백성이라는 이름을 잃은 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2)아, 하늘을 쪼개시고 내려오십시오. 산들이 당신 앞에서 떨 것입니다. 2)라틴어 성서는 여기서부터 64장이 시작된다.
1 나뭇가지가 불에 활활 타듯, 물이 펄펄 끓듯, 당신의 원수들은 당신의 이름을 알게 되고 민족들은 당신 앞에서 떨 것입니다. 2 당신께서 하신 놀라운 일들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입니다. 3 일찍이 아무도 들어보지 못한 일, 일찍이 아무도 보지 못한 일, 당신밖에 그 어느 신이 자기를 바라보는 자에게 이런 일들을 하였습니까?
4 정의를 실천하고 당신의 길을 잊지 않는 사람이 당신 눈에 띄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당신께서 이렇듯이 화를 내신 것은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고 처음부터 당신께 반역하였기 때문입니다. 5 우리는 모두 부정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기껏 잘했다는 것도 개짐처럼 더럽습니다. 우리는 모두 나뭇잎처럼 시들었고 우리의 죄가 바람이 되어 우리를 휩쓸어갔습니다. 6 당신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는 자도 없고 당신께 의지하려고 마음을 쓰는 자도 없습니다. 당신께서 우리를 외면하시므로 우리는 각자 자기의 죄에 깔려 스러져가고 있습니다. 7 그래도 야훼여, 당신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진흙, 당신은 우리를 빚으신 이, 우리는 모두 당신의 작품입니다.
8 야훼여, 너무 노여워 마십시오. 우리 죄를 영원히 기억하지는 마십시오. 굽어살펴 주십시오. 우리는 모두 당신의 백성입니다.
시편 80:1-7[17-19]
1 이스라엘의 목자여, 요셉 가문을 양떼처럼 인도하시는 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 거룹 위에 좌정|하신|분이|여,
2 에브라임과 베냐민, 므나쎄 가문 앞에, 햇빛처럼 나타|나소|서. ∥ 힘을 떨치고 오시어, 우리를 |도와|주소|서.
3 만군의 하느님, 우리를 다시 일으|키소|서. ∥ 당신의 밝은 얼굴 보여 주시면, 우리가 살아 |나리|이-|다.
4 만군의 주, 하느님, 당신 백성의 기도|소리|를 ∥ 언제까지 노엽게 들|으시|렵니|까?
5 당신 백성에게 눈물의 빵을 먹|이시|고 ∥ 싫도록 눈물을 마시게 |하셨|습니|다.
6 이웃들에게는 시빗거리가 되게 |하셨|고 ∥ 원수들은 우리를 |비웃|습니|다.
7 만군의 하느님, 우리를 다시 일으|키소|서. ∥ 당신의 밝은 얼굴 보여 주시면, 우리가 살아 |나리|이-|다.
17 당신 오른편에 계|시는|분, ∥ 몸소 굳건히 세워 주신 그분을 붙|들어|주소|서.
18 다시는 당신을 떠나지 않으리니 우리를 살려 |주소|서. ∥ 당신의 이름을 불러 예배 |하리|이-|다.
19 만군의 하느님, 우리를 다시 일으|키소|서. ∥ 당신의 밝은 얼굴 보여 주시면, 우리가 살아 |나리|이-|다.
○ 영광이 |성부|와 ∥ 성|자와|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 ∥ 그리고 영|원히,|아-|멘
1고린 1:3-9
3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총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내려주시기를 빕니다. 4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이 받은 하느님의 은총을 생각하면서 나는 언제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5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면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갖추게 되었고 특히 언변과 지식에 뛰어나게 되었습니다. 6 여러분은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에 깊은 확신을 가졌으며 7 모든 은총의 선물을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받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실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8 주께서도 여러분이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날을 맞이할 수 있도록 끝까지 굳게 지켜주실 것입니다. 9 하느님은 진실하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부르셔서 당신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게 해주셨습니다.
마르 13:24-37
24 "그 재난이 다 지나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잃고 25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며 모든 천체가 흔들릴 것이다. 26 그러면 사람들은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27 그 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으로부터 뽑힌 사람들을 모을 것이다."
28 "무화과나무를 보고 배워라.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워진 것을 알게 된다. 29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앞에 다가온 줄을 알아라. 30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 31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32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33 그 때가 언제 올는지 모르니 조심해서 항상 깨어 있어라. 34 그것은 마치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이 종들에게 자기 권한을 주며 각각 일을 맡기고 특히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하는 것과 같다. 35 집 주인이 돌아올 시간이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혹은 이른 아침일지 알 수 없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36 주인이 갑자기 돌아와서 너희가 잠자고 있는 것을 보게 되면 큰일이다. 37 늘 깨어 있어라.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또한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성령으로 우리를 인도하시어 주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게 하시나이다. 구하오니, 우리로 하여금 항상 깨어 그리스도를 맞이하도록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새롭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1>
종말이 열어보이는 하느님나라의 차원 (마르 13:24-37)
달력은 한 장을 남기고 올 한 해가 저물어갑니다. 이제 바람도 차가운 칼바람이 되어 갑니다. 낙엽도 거의 떨어져 나무들도 가난한 몸이 되어갑니다. 이제 우리는 추운 겨울을 지내며 따스한 봄을 소망할 것입니다.
교회력은 오늘 대림절기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복음은 인생과 세계의 종말을 경고하는 주님의 말씀을 들려줍니다.
오늘 복음말씀에 대해 저는 두 가지 난처한 느낌을 갖습니다. 하나는 주님이 말씀하시는 종말이 과연 초자연적인 성격의 것인가 하는 의문입니다. 또 하나는 주님이 임박한 것으로 말씀하셨던 종말은 지금껏 오지 않았다는 생각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하면 과연 주님의 이 땅에 오심을 기억하고 주님의 다시오심을 기다린다는 것이 내게 무슨 의미인가를 깊이 생각해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해마다 성탄절은 오게 마련이고 백화점은 또 화려한 장식 속에 성탄선물을 진열할 것입니다. 방송국은 성탄과 연말 특집으로 각종 오락프로그램을 마련할 터이고 아이들은 잠시 들뜬 기분으로, 어른들은 무덤덤히 그렇게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을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의 거룩한 탄생이 우리와 이 세상에 참된 기쁨을 전해주고 있다고 진실로 믿는 것일까요? 관습적으로가 아니라 진정으로 말입니다.
종말은 그것이 개인의 죽음과 심판을 의미하기도 하고, 역사의 파국과 완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초자연적으로 일어나리라는 것은 중요한 초점이 아닙니다. 강조해서 기억할 일은 개인의 삶이든 민족과 세계의 역사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만 그 궁극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종말이 초자연적으로 묘사되는 까닭은 우리 삶의 차원이 그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지내는 일이 전부가 아니라 하늘나라를 이 땅에서 살아가는 차원임을 강조하기 위한 까닭으로 생각됩니다.
인간의 구원이란 단순히 인간적인 윤리지향, 인격도야 또는 이념에 의한 유토피아 건설, 복지사회 추구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이 세상 온 우주에 하느님의 하느님 되심을 선포하고 찬양하고 감사하는 존재로 회복되는 차원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종말은 인간에게 맡겨진 그러한 소명의 차원이 확인되는 일인 것입니다.
따라서 종말의 지연도 시간의 좌표위에서 따져야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천 년동안 이루어지지 않은 일이 아니라 도리어 모든 사람, 모든 시대에 이미 이루어진 일이고 이루어지는 일이고 이루어질 일입니다. 하느님이 살아계시고 우리가 살아가는 한 종말은 도리어 언제나 영원한 현재의 문제인 것입니다.
“항상 깨어있으라”는 말씀은 언제 죽을 지, 언제 망할지 모르니 초조함과 두려움 가운데 긴장하며 살라는 뜻일 리 없습니다. 도리어 그 말씀은 “네 삶 속에서 늘 주님을 바라보라, 주님을 기억하며 기쁘게 살라”는 뜻일 것입니다. 깨어있는 종에게 주인의 급작스런 귀환이 도리어 기쁨이 되듯이, 주님을 바라는 이에게 종말은 구원을 확증하는 기쁨의 순간일 것입니다.
주님의 성탄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모든 연약한 아기들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죄악의 이 땅이 하느님의 나라가 되는 놀라운 소망의 빛이 비추어진 사건입니다. 이 세상이 하느님의 진노로 멸망할 세계가 아니라 도리어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기뻐하시며 극진히 사랑하시는 세계, 곧 외아들을 보내시어 목숨을 바치게 하실 만큼 귀하게 여기시는 곳임을 알려주신 사건입니다.
종말이란 이 땅의 우리에게 그렇게 하느님나라의 새로운 차원이 열렸음과 마침내 우리 모두를 통하여 그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임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오늘 그 차원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구원받은 삶으로 살아가게 되고, 그 차원을 거절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삶으로 죽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이 곧 심판이자 구원이 됩니다.
주님의 강생을 기억하고 재림을 기다리는 대림 첫주를 복음서가 종말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까닭은 우리 삶의 참된 구원은 “하느님 나라”의 차원을 받아들이는 일, 곧 하느님의 사랑의 다스림이 우리 삶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깨어있는” 일임을 깨우치기 위해서 입니다. *
<강론초록2>
종말을 기억하고 주님나라를 기다리며 (마르 13:24-37)
이제 대림 첫 주일입니다. 교회력으로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다시 오실 예수님을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으로 우리의 신앙을 가다듬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오셨던 사랑의 예수님을 기억하고, 장차 다시 오실 심판의 예수님을 기다리며, 또한 우리 마음속에 늘 함께 하시는 주님을 모시고 살아갑니다. 대림절은 이런 점들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반성하고 정리하는 시기입니다.
우리가 종말, 즉 구원의 완성과 심판을 대비하는 것은 시간의 연대표상 언제 어떻게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날 것7인가, 그리고 무슨 수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를 관심하는 일이 절대 아닙니다. “그날과 그 시간”은 이미 확정된 어떤 정보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느님의 사랑어린 의지에 달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종말의 위기를 말씀하며 “깨어있으라”고 하는 것은 무슨 소행성과의 충돌로 지구가 멸망한다든지 하는 따위의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종말의 위기는 인간질서의 위기가 본질입니다. 그 위기는 역시 인간의 죄의 본성에서 비롯합니다.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벗어나서, 이기적인 탐욕과 경쟁심에 근거한 세상 질서를 당연시하고 고집하며 그 안에 갇혀 사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인간의 질서는 결코 영원할 수 없고 아무리 강고해보여도 결국 무너지고 스러지고 맙니다. 참으로 불행한 것은 유한하고 상대적인 인간의 질서를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처럼 고집하고 숭배하며 그 안에 안주하려는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천천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모두는 마침내 인생의 죽음에 직면합니다. 우리가 이룩하고 추종하는 인간질서도 결국 흥망성쇠의 흐름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는 모두 죽음으로 하느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우리의 역사도 하느님 앞에서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말썽부린 아이가 부모님의 찾는 소리를 무서워하고, 범죄를 꾀하는 자가 사람들의 접근을 두려워하듯, 생각하면 우리가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회피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에 대한 자신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항상 깨어있으라”는 말씀이 고통스러운 요구처럼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항상 깨어있으라는 말씀은 항상 주님을 기억하며 살라는 말씀이고, 그러면 참된 기쁨과 보람으로 살 것이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욕망, 어리석음, 분노와 두려움을 고스란히 가지고 하느님 앞에 선다는 것은 두렵고 피하고 싶은 견딜 수 없는 고통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참으로 신뢰하면 우리는 두려움 없이 기쁘고 복된 인생을 살게 될 터입니다. 매일매일 설레는 가슴을 안고 말입니다. *
<강론초록3>
“종말의 희망”으로 깨어 있기
이제 대림 첫 주일입니다. 교회력으로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다시 오실 예수님을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으로 우리의 신앙을 가다듬습니다. 그리고 이 천년 전 아기 예수로 오신 주님의 탄생을 기억하고 우리 마음이 베들레헴 구유처럼 낮아지고 비워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날마다 우리 마음에 새로이 임재하시길 기원합니다. 이렇게 대림절 동안 우리는 오셨던 예수님을 기억하고, 장차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또한 우리 마음속에 늘 함께 하시는 주님을 모시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시간 속에 살기에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을 하지만 시간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는 과거, 현재, 미래가 당신의 주권과 사랑아래 하나인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이 대림절에 우리가 종말을 기억하고, 구원의 완성을 기다리며, 심판을 대비하는 것은 시간의 연대표상 언제 어떻게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관심을 두자는 것이 아닙니다. 이 대림절에 우리는 우리의 현실이 과연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가, 우리에게 세상을 돌보도록 맡기신 그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 그리고 유한한 우리의 삶을 참되고 보람 있게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 돌아봄은 곧 우리의 마지막 질문으로 연결됩니다. 그것은 바로 "과연 우리에게 희망은 있는가? 그 희망의 근거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흉악한 탐욕과 불의와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세상이 참으로 비참한 종말을 향해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하는 것처럼 보일 지라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희망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 자비와 인내로 인해 허락되는 은총입니다. 우리는 그 희망으로 인해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선택인 회개를 결단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우리에게 파멸이 아니라 구원의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뉘우치고 돌이키고 감사할 때 우리는 암담하고 두려운 이 현실 가운데서 도리어 진정한 구원의 빛을 봅니다. 구름사이로 영광에 싸여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믿음의 눈을 뜨고 희망으로 깨어있는 사람은 보게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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