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 26일 연중 13주일 성서말씀
예레 28:5-9
5 예언자 예레미야는 사제들과 야훼의 성전에 서 있는 온 백성이 보는 앞에서 예언자 하나니야에게 말하였다. 6 "야훼께서 그렇게만 하여주신다면야 여부가 있겠소? 그대가 예언한 그 말을 야훼께서 이루어주셔서 야훼의 성전 기물과 포로들을 바빌론에서 이 곳으로 되돌려 오신다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소?" 예언자 예레미야는 계속하여 이렇게 말했다.
7 "내가 이제 그대와 온 백성의 귀에 똑똑히 일러줄 터이니 잘 들어두시오. 8 예전부터 우리 선배 예언자들은 많은 지방과 강대한 나라에 전쟁과 기근과 염병이 있겠다고 예언하였소. 9 '잘되어 간다.'고 예언하는 예언자는, 그 말이 맞아야만 참으로 야훼께서 보내신 예언자인 것이 드러날 것이오."
시편 89:1-4, 15-18
1 주여, 내가 당신의 사랑을 영원히 노래하리이다. * 당신의 미쁘심을 대대로 전하리이다.
2 당신께서 다짐하신 사랑, * 그 미쁘심은 하늘처럼 영원히 흔들리지 않습니다.
3 나는 내가 뽑은 자와 계약을 맺고 * 나의 종 다윗에게 맹세하였다.
4 내가 너를 왕위에 앉히고 * 네 후손 대대로 왕노릇하게 하리라.
15 복되어라, 주님께 만세 부르는 백성 * 그들이 걷는 길을 당신의 환한 얼굴이 비춰 주시니 16 날마다 그 이름 높이 기리고 * 당신의 정의로 사기도 드높습니다.
17 그들의 영광과 힘은 다름 아닌 당신이오니 * 당신의 은총으로 우리의 뿔이 자랑스럽습니다. 18 우리의 방패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 참으로 당신은 우리의 임금이시옵니다.
로마 6:12-23
12 그러므로 결국 죽어버릴 육체의 욕망에 굴복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죄의 지배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13 또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기어 악의 도구가 되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으로서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가 하느님을 위한 정의의 도구로 쓰이게 하십시오. 14 여러분은 율법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은총의 지배를 받고 있으므로 죄가 여러분을 지배할 수 없을 것입니다.
15 그렇다면 우리가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고 은총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해서 죄를 지어도 좋다는 말이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16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남에게 내맡겨서 복종하면 곧 자기가 복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 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죄의 종이 되어 죽는 사람도 있고 하느님께 순종하는 종이 되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는 사람도 있다는 말입니다. 17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진실한 가르침을 전해 받고 그것에 성심껏 복종하게 되었으니 하느님께 감사할 일입니다. 18 그리고 여러분은 죄의 권세를 벗어나서 이제는 정의의 종이 되었습니다.
19 여러분의 이해력이 미치지 못할까 하여 이렇게 인간사에 비추어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온몸을 더러운 일과 불법의 종으로 내맡기어 불법을 일삼았지만 이제는 온몸을 정의의 종으로 바쳐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20 여러분이 죄의 종이었을 때는 여러분은 정의에 예속되지 않고 제멋대로 놀아났었습니다.
21 그 때에 여러분이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들밖에는 없지 않았습니까? 그런 생활은 결국 죽음을 안겨줍니다. 22 그러나 이제는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여러분은 거룩한 사람이 되었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23 죄의 대가는 죽음이지만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마태 10:40-42
40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며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사람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며, 옳은 사람을 옳은 사람으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옳은 사람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
42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보잘것없는 사람 중 하나에게 그가 내 제자라고 하여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이다."
<본기도> 주 하느님, 성자께서는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베푼 자선도 주님께 행한 것이라 말씀하셨나이다. 비옵나니, 우리로 하여금 이웃의 어려움을 늘 살피게 하시고, 주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하늘의 상을 얻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 “보잘 것 없는” 서로를 받아들이는 믿음 (마태 10:40-42)
오늘의 복음은 마태오복음 10장의 이른바 <제자파송설교>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저는 좀 외람되고 민망스러운 생각을 했습니다. 이천년 역사 동안에 교회의 명망 높은 신학자, 성직자들이 실은 성경을 제대로 안읽고 신앙생활을 하고 지도자 행세를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입니다. 지나치게 불경한 상상이라구요? 저도 그런 느낌이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누구를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라 저와 우리 자신을 돌아보려는 것임을 믿어주세요. 제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말씀드립니다. 제가 이해하고 있는 구원에 대한 이해를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지옥에 떨어질 죄인이지만 예수를 주님으로 믿고 예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면 죄를 용서받아 이 세상에서는 복을 받고 저 세상에서는 천국에 가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교우님들은 구원에 관해 누구에게 어떤 내용으로 배우셨는지요? 저와 다른 이해를 가지고 계세요? 우리가 과연 어디에서 구원의 진리를 배웠는지 살펴보는 일은 중요합니다. “어디서 배우든 그게 뭐 중요하냐, 그저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면 됐지.” 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그건 아닙니다. “하나이고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통해서 구원의 도리를 배우시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유익합니다. 잘못하면 엉뚱한 사이비종교에 시간과 공력을 낭비할 위험이 있고, 한번 방향을 잘못 잡으면 그 다음에는 열심히 하면 할수록 도리어 참된 구원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는 것이거든요.
지금 저는 우리가 참된 교회, 우리 성공회와 같은 수준의 교회에서 구원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을 전제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정통(正統)으로 배운 구원에 대한 이해조차도 과연 그 이해가 충분한 수준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이해가 충분히 성서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에 대해 의문이 드는 것입니다. 어쩌면 저는 지금 상당히 위험스러운 도전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런 도전이 가능한 것도 실은 우리 “성공회” 가 누리는 가장 중요한 특권의 하나입니다. 끝없이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 초대교회의 뿌리로 돌아가, 래디컬한(근본적인) 고민을 하며 신앙과 실천을 반성하는 일이 우리 성공회에서는 충분히 보장되고 서로에게 권장되는데 이 점이 전세계 교회 안에서, 또 교회사 속에서 인정되는 성공회의 자랑입니다.
다시 논점으로 돌아갑니다. 뭐, 제가 요약한 구원이해가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교리적으로 이단시비에 휘말릴 내용은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 심각한 문제는 제가 성경에서, 특별히 복음서에서 제가 이해하고 있는 구원이해를 뒷받침하는 구절들을 별로 찾을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 이유가 단지 제가 모자라고 게을러서 못 찾는 것이라면 차라리 다행입니다. 그런데 실은 그런 이유보다도 애초에 성경이 전하는 예수님의 구원사건은 훨씬 더 깊고 복잡하고 풍부한 의미인데 그동안 교회가 이것을 너무 단순화하여 쉬운 교리로 가르쳐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제자파견의 말씀들은 제가 요약한 “현세축복 내세천국”과는 거리가 먼 말씀으로 여겨집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용기를 내어 함께 정직하게 물어보십시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세상에 파송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가 세례를 받아 신자가 된 일이 사실은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기로 결단한 일임을 의식하고 있을까요? 그래서 우리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사실은 오늘 주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견하시는 상황과 같음을 느낄 수 있을까요? 세상에서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늘 주님으로부터 파견된 자로서 모든 일을 생각하고 판단하고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그렇지 않다면, 진정 그런 마음이 아니라면, 오늘 이 예배 가운데서 <제자파송설교>의 본문을 가지고 말씀을 나누기는 참 어려운 일이고, 구태여 애를 써도 어쩌면 무의미한 일이 아닐까 깊이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살피기 전에 다시금 믿음에 대한 반성으로 되돌아가보려고 합니다. 먼저 우리 믿음의 동기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부모가 자식의 믿음을 골라 줄 수 없습니다. 아내가 남편의 믿음을 대신 가져 줄 수 없습니다. 각자의 인생이 각자의 인생이듯 우리의 믿음은 각자의 믿음입니다. 나의 믿음을 다른 이에게 강요할 수도 없고 다른 이의 믿음을 억지로 따라 갈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나와 다른 믿음을 선택하게 되면 참 마음이 아픕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믿음은 인생의 악세사리가 아니라 속알맹이 중의 속알맹이, 가장 중요한 본질입니다.
인생을 사는 것은 자신의 믿음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무런 믿음이 없는 사람도 실은 그 믿음 없음을 자신의 인생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실 가끔 저는 그런 믿음 없는 이들이 신기하고 존경스럽습니다. 절대에 대한 믿음이 없이도 과연 삶의 내용을 온전히 채울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저리도 태평하게 유한한 인생을 살아갈까? 무엇이 그들이 죽음 앞에서 후회없는 인생으로 평화롭도록 보장할까? 그들은 자신의 믿음 대신 세상의 평판이나 주장에 관심을 두는지도 모릅니다. 세상은 물론 믿음이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고 선전합니다. 많이 소유하고 많이 소비하면 행복하다고 주장합니다. 과연 그런 것일까요? 그들을 무시하거나 비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저는 내심 그들의 행복을 질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피며 겸허히 물어봅니다. “나는 저 믿음 없이 사는 이들보다 정말 더 인생을 잘 산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무엇을 신앙생활의 기쁨으로, 자랑으로 내세울수 있을까?”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의 복을 받아서 재물을 모으고 명예를 얻는데 성공했다고 하면 합당한 자랑일까요? 제가 그렇게 성공했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런 내용이 과연 믿음의 자랑일 수 있을까요? 믿음을 통해서 나는 교회공동체 안에서 신뢰와 존경을 받고 있다고 내세울까요? 이 역시 제가 남 다른 신뢰와 존경을 받고 있다는 말씀이 아니라^^ 과연 그런 다소 고상한 보상이 믿음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나의 믿음을 통해 나는 죽은 후에 천당에 가게 된다는 것을 확신한다고 말하면 그게 떳떳한 믿음의 자랑일까요? 과연 참으로 그러한 것일까요?
우리가 콤플렉스 없이 말할 수 있을까요? “나는 참 보잘 것 없는 인간입니다.”
그리고 감사와 평화로운 마음으로 고백할 수 있을까요?
“나는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신뢰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시고 하느님 나라의 진리로 나를 가르치시고 부활의 능력으로 나를 돌보십니다. 나는 절대자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요 그 분 나라의 시민입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 이 세상이 자연스레 존재하듯 나의 존재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 이미 충분합니다. 나의 죄와 죽음은 하느님의 용서와 용납으로 늘 깊고 새로운 사랑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입니다.”
저와 교우님들이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의 동기가 밖으로 무엇을 구하고 얻는 일을 넘어서서 하느님의 사랑 그 자체를 바라는 일, 그 사랑 안에서 짧지만 깊고 영원한 차원의 삶을 살아가는 일이 되면 좋겠습니다.
믿음의 동기와 함께 신앙생활의 내용에 대해서도 살펴보고 싶습니다.
예전에 한때 저는 신앙생활을 “신에 관한 설명을 머리로 잘 이해하여 깨우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교리를 따지기 좋아하고, 머리도 나쁘지 않은 편이라고 자부했기에 신학지식을 아는 그만큼 훌륭한 신앙인이 된 것처럼 꽤 오랜 동안 착각 속에 살았습니다. 다행히 그 착각은 깨지기 시작했는데 그러면서 또 한동안은 신앙생활을 “신비하고 신령한” 그 무엇을 경험하고 누리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면 성령세미나등을 통해서 방언을 하고, 은사를 받고, 악령도 분별하고, 기도 응답도 즉시즉시 받을 수 있어야 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좀 더 지내보니 우리의 삶은 그러한 신령한 체험의 연속이기는 어렵다는 것, 그리고 그런 신비 체험이 계속된다 하더라도 더욱 더 중요한 것은 그 체험이 주는 주관적인 느낌이나 외적인 조건의 변화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깊은 곳에서 시작되는 인격의 변화, 삶의 방향과 생활태도의 변화가 신앙생활의 참된 목적이라는 점이 분명해졌습니다. 그 후로는 자연히 신령한 체험을 중시하고 자랑하는 분들을 대하면서도 이제는 그 분들의 체험 자체 보다는 그 체험이후 그 분들의 인격과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가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동안의 교리공부, 신비체험, 사목적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이제 신앙생활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한다면 “하느님을 내 삶에 받아들여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살아가는 일”이라고 정리하겠습니다.
하느님을 우리 삶에 받아들이는 것은 물론 지적인 받아들임을 포함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받아들임은 우리의 가슴을 여는 일로 이어집니다. 우리를 사랑하여 자신을 낮추시고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 하느님의 사랑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울림을 우리 가슴으로 받으면 우리 마음도 깊은 울음을 울게 됩니다. 주님의 보배로운 피는 이천년전 십자가에서 방울져 흘러내려 지금 우리의 성배에 떨어집니다. 오늘 우리는 그것을 한 마음으로 마시지 않습니까? 그것은 완전한 사랑으로 그 사랑에 응답하지 않을 수 없도록 우리를 움직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느님을 받아들임은 그 어떤 닫힘도 없이 우리의 존재를 활짝 여는 일이 됩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임은 우리 안에 하느님의 성령을 모시는 일이고 우리의 관점에 하느님의 눈길을 얻는 일입니다. 그 때 우리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를 우리의 삶에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온갖 희노애락, 아픔과 고통을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는 현실로 받아들이고, 스스로 어떤 처지에 있든지 자기 자신을 귀하게 여깁니다. 서로 서로를 “주님의 사람”으로 인정하고 존경하며 받아들이고, 나아가 이 세상에서 낙오하고 패배한 이들조차 우리의 삶 가운데 더불어 사는 이들로 끌어 안습니다.
이렇게 “가장 보잘 것 없으나” 실은 주님의 사람인 서로를 받아들임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주님과 우리 자신과 우리 서로가 일치를 이루는 기쁨과 행복을 경험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약속이요 우리의 구원입니다.
이제 복음의 본문으로 돌아와 생각을 이어갑니다. 세례를 받은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우리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을 드러내는 성령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 ‘말씀’을 전하도록 보냄을 받은 ‘예언자’들입니다. 세상의 일들을 세상 자체의 기준인 “물량적 성공”과 “편리성”, “효율성”에 비추어서가 아니라, 한 형제자매로서 더불어 정의와 평화를 누리라고 당부하시는 하느님의 뜻과 사랑이라는 기준으로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하느님의 사람으로 존중하고 존경하고 존대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열심히 노력하여 얻은 명망과 학식과 재력을 존중하는 것도 나쁠 것은 없겠으나, 그런 기준에서 볼 때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를 대할 때 우리들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잘 살피는 일이 신앙적으로는 더욱 더 중요합니다.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 그를 예수님의 제자로 존경하는 마음으로 전해준다면 비록 우리가 넉넉지 못한 살림일지라도 “냉수 한 그릇”의 도움과 헌신은 언제나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 대한성공회 주교좌교회의 교우들은 세상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서로를 위해 깊이 기도하고 격려하는 분들입니다. 서로를 사랑의 눈길로 살피며 작은 일일지라도 필요한 도움의 손길을 건네려고 애쓰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됩니다. 어떤 분들은 성공회 교회에 이른바 영혼구원, 구령(救靈)의 열정이 모자란다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 비판은 제가 보기에는 착각이요 오해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주님의 사람으로 인정하고, 함께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이루며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돕는 자체가 분명히 구원받은 영혼임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선언은 훌륭한 통찰이지만 이 때의 “오직 믿음”은 “무작정, 무조건, 독단적 교리적 확신의 의미가 아닙니다.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기준으로 주님의 사람을 받아들이는 믿음인 것입니다. 공연히 이런저런 불필요한 세상적 기준으로 구원의 문제를 시비하지 말고 모든 사람을 한없는 사랑의 눈길로 눈여겨 보시던 주님의 그 크신 사랑을 받아들이는 그 믿음을 갖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주님의 사람들로 하나가 되게 하는 구원의 믿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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