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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초록/2012년도설교초록

2012년 11월 18일 (연중 33주일) 성서정과 및 강론초록

 

 

2012년 11월 18일 (연중 33주일) 녹 / 추수감사주일 성서말씀 

 
사무상 1:4-20

4 제삿날이 되면 엘카나는 아내 브닌나와 그의 모든 아들딸들에게 제물을 몫몫이 나누어주었다.
5 그러나 엘카나는 한나를 사랑하면서도 그에게는 한몫밖에 줄 수가 없었다. 야훼께서 한나로 하여금 잉태하게 해주지 않으셨기 때문이었다.
6 게다가 적수 브닌나는, 야훼께서 잉태하게 해주시지 않아 속을 태우고 있는 한나를 더욱 괴롭혔다.
7 엘카나가 매년 야훼의 신전에 올라갈 적마다 그렇게 하였으므로 브닌나는 한나를 괴롭혔고 한나는 목이 메어 먹지를 못했다.
8 남편 엘카나는 한나를 보고 "왜 울기만 하오? 왜 먹지도 않고 슬퍼만 하오? 내가 당신한테는 아들 열보다도 낫지 않소?" 하며 위로해 주었다.
9 실로에서 제사 상을 물리고 나자 한나는 일어나 야훼 앞에 나아갔다. 그 때 마침 사제 엘리가 야훼의 성전 문 뒤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10 한나는 마음이 아파 흐느껴 울며 야훼께 애원하였다.
11 그는 서원을 하며 빌었다. "이 계집종의 가련한 모습을 굽어살펴 주십시오. 이 계집종을 저버리지 마시고 사내 아이 하나만 점지해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그 아이를 야훼께 바치겠습니다. 평생 그의 머리를 깎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12 한나가 야훼께 오래 기도를 드리고 있는 동안 엘리는 한나의 입술을 지켜보고 있었다.
13 한나는 속으로 기도하고 있었으므로 입술만 움직일 뿐,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엘리가 한나를 술취한 여자로 알고,
14 "언제까지 이렇게 주정을 하고 있을 참이냐? 어서 술에서 깨어나지 못하겠느냐?" 하고 꾸짖자
15 한나가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사제님! 저는 정신이 말짱합니다. 포도주도 소주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저는 야훼께 제 속을 털어놓고 있습니다.
16 사제님, 이 계집종을 좋지 못한 여자로 생각지 마십시오. 저는 너무 서럽고 괴로워서 이제껏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17 "그럼, 안심하고 돌아가거라. 이스라엘을 보살피시는 하느님께서 네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다." 엘리가 이렇게 말하자,
18 한나는 "그렇게까지 보아주시니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하면서 물러나와 음식을 먹었다. 그 얼굴에는 어느덧 수심이 걷히었다.
19 엘카나는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식구들과 함께 야훼께 예배를 드리고, 라마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엘카나가 아내 한나와 한자리에 들자, 야훼께서 한나를 마음에 두시어
20 임신하게 해주셨다. 한나는 달이 차서 아들을 낳자 '야훼께 빌어서 얻은 아기' 라고 하여 이름을 사무엘이라 지었다.

 

시편 16

1 하느님, 나를 지켜 주소서. ◯ 이 몸은 당신께로 피합니다.
2 주님께 아뢰옵니다. ◯ 당신은 나의 주님, 당신만이 나의 행복이십니다.
3 이 땅에 있는 거룩하다는 신들, ◯ 그런 것들을 좋아하는 자들에게 저주를 내리소서.
4 거짓 신을 따르는 자들은 ◯ 실컷 고생이나 시키소서.
✤ 나는 그 우상들에게 피를 쏟아 받치거나, ◯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겠습니다.
5 주여! 당신은 내가 받을 분깃이며 축복이시니 ◯ 나의 미래는 당신이 책임지십니다.
6 당신께서 나에게 떼어 주신 그 땅은 기름진 곳이니 ◯ 나의 마음이 흡족합니다.
7 좋은 생각 주시는 주님, 찬미하오니 ◯ 밤에도 좋은 생각 반짝입니다.
8 주여, 언제나 내 앞에 모시오니 ◯ 내 옆에 당신 계시면 흔들릴 것 없습니다.
9 그러므로 이 마음 이 넋이 기쁘고 즐거워 ◯ 내 육신마저 걱정없이 사오리다.
10 어찌 이 목숨을 지하에 버려두시며 ◯ 당신만 사모하는 이 몸 썩게 버려두시리이까?
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몸소 가리켜 주시니: 당신을 모시는 흡족한 기꺼움이, ◯ 당신 오른편에서 누릴 즐거움이 영원합니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히브 10:11-25

11. 사제가 날마다 성전에서 예배의식을 거행하며 같은 희생제물을 자주 드리더라도 그 제물들이 결코 죄를 없애버릴 수는 없습니다. 12.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오직 한 번 희생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죄를 없애주셨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효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으셔서 13. 당신의 원수들이 당신의 발 아래 굴복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14. 그분은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심으로써 거룩하게 만드신 사람들을 영원히 완전하게 해주셨습니다.
15. 그리고 성령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시며 증언해 주셨습니다. 16. "'그 날 이후, 내가 그들과 맺을 계약은 이것이다.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마음에 심어주고 그들의 생각에 새겨줄 것이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이다." 17. 그리고 나서 "나는 이제 결코 그들의 죄와 잘못을 마음에 두지 않으리라." 하고 덧붙여 말씀하셨습니다.  18. 죄를 용서받았으므로 이제는 죄 때문에 봉헌물을 바칠 필요는 없게 되었습니다.19.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예수께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우리는 마음놓고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20. 예수께서는 휘장을 뚫고 새로운 살길을 우리에게 열어주셨습니다. 그 휘장은 곧 그분의 육체입니다. 21. 그리고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최고의 사제가 계십니다. 22. 우리의 마음에는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서 나쁜 마음씨가 없어지고 우리의 몸은 맑은 물로 씻겨 깨끗해졌으니 이제는 확고한 믿음과 진실한 마음가짐으로 하느님께로 가까이 나아갑시다. 23. 또 우리에게 약속을 주신 분은 진실한 분이시니 우리가 고백하는 그 희망을 굳게 간직하고 24. 서로 격려해서 사랑과 좋은 일을 하도록 마음을 씁시다. 25. 그리고 어떤 사람들처럼 같이 모이는 일을 폐지하지 말고 서로 격려해서 자주 모입시다. 더구나 그 날이 가까이 오는 것을 아는 이상 더욱 열심히 모이도록 합시다.

 

마르 13:1-8

1. 예수께서 성전을 떠나 나오실 때에 제자 한 사람이 "선생님, 저것 보십시오. 저 돌이며 건물이며 얼마나 웅장하고 볼 만합니까?" 하고 말하였다.
2. 예수께서는 "지금은 저 웅장한 건물들이 보이겠지만 그러나 저 돌들이 어느 하나도 제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3. 예수께서 성전 건너편 올리브 산에 앉아 성전을 바라보고 계실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아가 따로 찾아와서 4.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일이 다 이루어질 무렵에는 어떤 징조가 나타나겠습니까? 저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5.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도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6. 장차 많은 사람이 내 이름을 내세우며 나타나서 '내가 그리스도다!' 하고 떠들어대면서 많은 사람들을 속일 것이다.
7. 또 여러 번 난리도 겪고 전쟁 소문도 듣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당황하지 마라. 그런 일은 반드시 일어날 터이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8. 한 민족이 일어나 딴 민족을 치고 한 나라가 일어나 딴 나라를 칠 것이며 또 곳곳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흉년이 들 터인데 이런 일들은 다만 고통의 시작일 뿐이다."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소외된 이들을 사랑으로 감싸주시며 억눌린 이들을 해방시켜 주시나이다. 비옵나니, 우리로 하여금 고난 속에 있는 이들과 아픔을 함께 나누며, 하느님의 나라를 소망하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1>

                             종말 구원의 이야기 (마르 13:1-8)

 

시간이 참 빨리도 흐릅니다. 2012년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교회력으로는 이제 한 해를 거의 마무리하는 시점입니다. 우리들도 세월의 흐름을 따라 변해갑니다. 옛 사람들도 비슷한 심경을 노래했지만 현대인은 더 심각한 현실을 경험합니다. 그것은 세상 자체의 변화입니다. 우리가 몸담아 살고 있는 세상은 정말 눈부신 속도로 변해갑니다. 자본주의와 과학기술이 맞물린 물질문명은 인류역사 수천년의 변화보다도 이 시대 이삼십년의 변화폭을 더 크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현실입니다. 이런 변화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향한 바람직한 진보(進步)일까요? 아니면 인간다움과 여유로움을 잃어버린 정신없는 질주일까요?

오늘 복음 성경은 종말의 이야기입니다. 종말에 대한 성경의 관심은 요즘 일각에서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는 지구 종말설과는 전혀 다릅니다. 지구종말설은 무슨 마야의 달력을 이야기하던 소행성충돌을 말하던 가치 없는 사기성 이야기입니다. 도대체 뭐가 걱정이지요? 삶의 터전인 지구가 완전히 멸망하는데 구태여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은 당위일까요? 욕심일까요? 쓸데 없는 논의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종말론은 심판과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철저히 신앙적인 세계관을 전제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종말론은 언제 어떻게 심판이 있다고 하는 시간상의 문제가 아닙니다. 무엇이 우리를 구원하는가, 곧 우리에게 무엇이 궁극적인 가치인가를 인식하는 문제입니다. 절대로 시한부종말론 따위에 속지말라는 것이 예수님의 당부입니다.

성전에서 제물을 바치는 제사를 통한 죄사함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유대인들은 믿었습니다. 화려한 성전은 가난한 과부가 마지막 동전 두 닢까지도 기꺼이 바치게 하는 내면화된 가치체계의 총화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웅장한 성전이 돌 하나도  제 자리에 남지 않게 무너지고 말리라고 말씀합니다.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새로운 성전으로서 예수님 당신의 현존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들 신자의 몸이 곧 주님의 성령을 담지하는 성전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운 실존이 가능하고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이 알파요 오메가, 시작과 끝입니다. 종말론은 바로 시작과 끝에 대한 한 차원 깊어진 깨달음입니다.

신앙을 통해, 말씀과 성사를 통해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현존을 경험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현존경험은 우리의 모든 가치판단과 실천을 하느님과의 관계라는 절대적인 기준에 비추며 세상을 살아가도록 합니다.

여러 가지 전쟁과 재난의 이야기는 우리의 현실인 동시에 묵시문학이라는 표현양식입니다. 본질적인 강조점은 심판이 곧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심판이란 우리의 모든 가치는 궁극적 가치 앞에 상대적이라는 의미입니다. 살아계신 하느님 앞에 인간의 모든 가치와 질서는 상대적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상대성은 바로 하느님 사랑의 절대성을 경험하는 전제가 됩니다.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고 참여한다는 것은 이 세상을 상대화하고 보다 더 높고 깊은 하느님의 차원을 우리 삶에 맡기는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완성, 그것이 종말론의 핵심내용입니다. 하느님을 신뢰하여 세상의 변화와 고난을 견디는 것, 쉽게 엉뚱한 종말론에 속지 않는 일, 그것이 우리의 오늘의 신앙입니다. , 마침내 하느님의 다스림과 하느님의 질서가 이 세상과 우리를 변화시키고 완성시킬 것입니다. 순간순간 변하고 결국은 끝장날 수 밖에 없는 삶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께만 희망을 두는 이들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바벨탑을 쌓아올리고 권력을 가진 인간을 신으로 떠받들며 인간들끼리의 질서를 만들어 내려는 노력은 문명의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다스림과 그 다스림을 받아들이는 인류의 삶이야말로 인류의 성장,발전,진화의 정점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 하느님나라를 위해서 인간의 바벨탑은 무너져야 하고, 인간의 우상 맘몬은 힘을 제거해야 하고, 죽음의 권세는 꺾여야 하고, 성전조차도 본분을 다하지 못하면 해체되어야 합니다. 받아들이기 힘든 고통이지만 실은 그 과정이 구원입니다. 그 하느님의 나라를 소망하고 그 하느님 나라의 초대에 응답하고 그 하느님 나라의 일에 헌신하는 것이 우리들의 믿음입니다. 그 하느님 나라를 경험하고 그 하느님 나라를 찬양하며 그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는 일이 우리 교회의 예배와 선교입니다.

인간들의 질서가 화려한 물질문명을 내세우며 우리를 "영적인 노예상태"로 몰아갈 때, 하느님을 바라보며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진리를 절대로 신뢰하며 지금 이곳을 살아가는 일, 그 “내어맡김”이 바로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

 

<강론초록2>

                           놀랍고 두려운  “하느님의 나라” (마르 13:1-8)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른바 묵시문학적인 표현을 빌려 세상의 종말(마지막)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사실 해석하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종말이 온다는 이야기는 어쩌면 이천년 내내 반복해오는 일이기도 하고, 어쩌면 이천년 동안 이루어지지 않은 빗나간 예언인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의 나라”는 도무지 우리가 머리를 굴려 해석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닙니다. 우리가 온 몸으로 그 나라의 다가옴을 체험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입니다. 저의 해석으로 하느님 나라를 파악하고 설명하려는 노력이 실패하는 것은 단지 저의 노력부족 때문이 아닙니다. 본래 “하느님 나라”가 신비 그 자체로서 당연히 해석불가한 일인 것이지요.

하느님나라의 도래는 경제성장에 바탕을 두고 10년 계획에 따라 복지사회가 차차 이루어지는 그런 차원의 일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경험하는 일도 기분좋은 황홀경에 빠지나 어떤 신통력을 얻게 되는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나라” 앞에서 “인간의 나라”는 끝장나야 하고, “하느님의 현존” 앞에 우리는 “죽음”을 기꺼이 각오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신실한 이들도 종종 그런 오해에 빠지곤 하거니와, 종말과 죽음은 그것이 언제 어떻게 일어나느냐의 정보 차원의 문제로 다룰 일이 아닙니다. 종말에 관한 신앙의 이야기는 인간의 질서는 시간의 흐름 속에 절대적일 수 없고 인간의 운명은 하느님 앞에서 독립적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영원할 수 없이 변하고, 끝장날 수 밖에 없는 삶의 현실 속에서, 우리가 모든 순간 하느님을 절대로 신뢰할 수 있는가가 바로 구원의 본질이요, 그 “내어맡김”이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