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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초록/2012년도설교초록

2012년 7월 8일 (연중 14주일) 성서정과 및 강론초록

 

2012년 7월 8일 (연중 14주일) 녹 성서말씀 / 성남성당 축성

 

사무하 5:1-5, 9-10

1 1)이스라엘 여러 족속이 모두 헤브론으로 다윗을 찾아와 아뢰었다. "우리는 임금님과 한 골육입니다.   1)5:1-3, 6-10에 대해서는 1역대 11:1-9 참조.
2 전에 사울이 우리의 왕이었을 때에도 우리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출전하신 것은 임금님이었습니다. 야훼께서도 임금님께 '너는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로서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되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3 이리하여 다윗 왕은 헤브론으로 찾아온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을 맞아 야훼 앞에서 조약을 맺었고, 그들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았다.
4 다윗은 나이 삼십에 왕위에 올라 사십 년을 다스렸다.
5 헤브론에서 칠 년 육 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는 삼십삼 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다.
9 다윗은 그 견고한 성에서 살며 그 성을 다윗의 도성이라고 불렀다. 그는 밀로의 안쪽으로 다시 성곽을 둘러 쌓았다.
10 만군의 하느님 야훼께서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그의 세력은 날로 뻗어갔다.

 

시편 48

1 하느님의 거룩한 산, 그 도성 안에서 ◯ 그지없이 찬미받으실 주님, 크시고 크시어라.
2 아름다운 봉우리는 온 세상의 즐거움이며 ◯ 북녘 끝 시온산은 대왕의 도성이니,
3 하느님께서 몸소 그 성에 계시며, ◯ 스스로 그 성채이심을 밝히셨다.
4, 5 왕들이 무리지어 밀려 왔다가도 ◯ 보자마자 겁에 질려 혼비백산 뿔뿔이 도망쳤다.
6, 7 해산하는 여인처럼 떨리는 몸 걷잡지를 못하였고, ◯ 동풍에 휘말리어 깨지는 다르싯의 배와도 같았다.
8 우리 하느님의 도성, 만군의 주 하느님의 도성에 와 보니 ◯ 과연 듣던대로 이 성을 영원토록 굳게 세우셨다.
9 하느님, 우리가 당신의 성전에서 ◯ 당신의 사랑을 되새깁니다.
10 주여, 당신의 이름에 어울리게: 주님을 찬양하는 소리 땅 끝까지 들립니다. ◯ 당신의 하시는 일은 오로지 옳사오니,
11 당신의 공정하신 심판을 시온산은 기뻐하고 ◯ 유다의 성읍들은 즐거워합니다.
12 시온성을 돌고 돌며 ◯ 성의 망대들을 헤아려 보아라.
13 그 성벽 익히 보고, 그 성루 유심히 보았다가 ◯ 후손들에게 일러 주어라.
14 “이렇듯이 하느님은 영원히 우리의 하느님이시며, ◯ 영원히 우리를 인도하시리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고린 12:2-10

2 내가 잘 아는 그리스도 교인 하나가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까지 붙들려 올라간 일이 있었습니다. -몸째 올라갔는지 몸을 떠나서 올라갔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3 나는 이 사람을 잘 압니다. -몸째 올라갔는지 몸을 떠나서 올라갔는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아십니다.- 4 그는 낙원으로 붙들려 올라가서 사람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말을 들었습니다. 5 나는 이런 사람을 자랑하려고 하며 나 자신에 관해서는 나의 약점밖에 자랑하지 않겠습니다. 6 내가 다른 것도 자랑할 마음이 있어서 자랑한다 하더라도 사실대로만 말할 것이기 때문에 내가 어리석은 사람이 될 까닭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내게서 보고 듣고 한 것 이상으로 나를 평가하게 될까봐 나는 자랑을 그만하겠습니다. 7 내가 굉장한 계시를 받았다 해서 잔뜩 교만해질까봐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병을 하나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나를 줄곧 괴롭혀 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교만에 빠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8 나는 그 고통이 내게서 떠나게 해주시기를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하였습니다. 9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번번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게 머무르도록 하려고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나의 약점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10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약해지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며, 모욕과 빈곤과 박해와 곤궁을 달게 받습니다. 그것은 내가 약해졌을 때 오히려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

 

마르 6:1-13

1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제자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셨다. 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자 많은 사람이 그 말씀을 듣고 놀라며 "저 사람이 어떤 지혜를 받았기에 저런 기적들을 행하는 것일까? 그런 모든 것이 어디서 생겨났을까? 3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 그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다 우리와 같이 여기 살고 있지 않은가?" 하면서 좀처럼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4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디서나 존경을 받는 예언자라도 자기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을 받지 못한다." 75 예수께서는 거기서 병자 몇 사람에게만 손을 얹어 고쳐주셨을 뿐, 다른 기적은 행하실 수 없었다. 6 그리고 그들에게 믿음이 없는 것을 보시고 이상하게 여기셨다.
그 뒤에 예수께서는 여러 촌락으로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다가 7 열두 제자를 불러 더러운 악령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다. 8 그리고 여행하는 데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시며 먹을 것이나 자루도 가지지 말고 전대에 돈도 지니지 말며 9 신발은 신고 있는 것을 그대로 신고 속옷은 두 벌씩 껴입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10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디서 누구의 집에 들어가든지 그 고장을 떠나기까지 그 집에 머물러 있어라. 11 그러나 너희를 환영하지 않거나 너희의 말을 듣지 않는 고장이 있거든 그 곳을 떠나면서 그들에게 경고하는 표시로 너희의 발에서 먼지를 털어버려라." 12 이 말씀을 듣고 열두 제자는 나가서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가르치며 13 마귀들을 많이 쫓아내고 수많은 병자들에게 기름을 발라 병을 고쳐주었다.

 

<본기도> 주 하느님,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좋은 것을 베풀어 주시나이다. 비옵나니, 우리에게 가장 좋은 선물인 성령을 내리시어 항상 주님의 자녀로서 풍성한 삶을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1>

                     소명을 깨닫고 기적을 사는 인생 (6:1-13)

인생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돈을 많이 버는 것? 권력을 잡는 것? 학식을 갖추는 것? 명예를 얻는 것? 행복하게 사는 것?
신앙적인 답은 물론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는 일이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일까요? 요즘은 세상에서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이룬 소감으로 “하느님께 이 영광을 돌립니다” 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매우 아름다운 일이긴 하지만  “그럼 실패한 사람은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인가” 하고 오해하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바울로 사도는 하느님께 영광을 돌릴 기회 대신에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가운데서 완전히 드러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은 우리가 하느님께로부터 났음을 깨닫는 일로 시작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지음받은 그대로의 우리로서, 곧 우리 자신이 만들어내는 욕망의 이미지가 아니라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지어진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영적인 본성을 사랑하고 기뻐하고 만족하는 일로 채워져야 합니다. 이렇게 내가 참 나가 되는 일이 곧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입니다. 이 일은 밖으로 무엇을 이루고 차지하고 소유하는가 와는 관계가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우리가 되어 하느님과 교제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은 고향에서 당대의 예언자로서 충분한 말씀의 권능을 보이셨습니다. 하지만 고향사람들이 관심을 두는 것은 예수님의 외면적인 출신과 출세의 정도일 뿐 예수님의 영적권위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스스로 민망하셨던지 아니면 제자들의 실망을 위로하시려는지 “어디서나 존경받는 예언자도 자기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는 존경받기 어렵다”는 변명의 말씀을 하십니다.

모든 일에는 다양한 측면이 있고 여러 가지 차원(수준)이 얽혀 있습니다. 인간사의 시시비비는 객관적인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실에 대한 해석으로 이루어집니다. 세상의 눈은 있는 그대로의 인간이 아니라 세상의 성공기준에 맞는 인간인가를 보고 인정합니다. 이에 비해 신앙의 눈은 모든 인간에게서 그 인간의 소명을 보고 인정합니다. 다시 말하면 “있는 그대로의” 그 인간이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태도로 살고 있는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기 전에 열심히 도를 닦아서 신통력을 갖추었다는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세례를 받으실 때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는 은총의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광야의 유혹은 그 이후에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자의식을 가지신 예수님께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라는 조건을 달아 사탄은 이제 네 힘으로 무언가 대단한 역량을 세상에 드러내라고, 그러면 네 뜻대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 거라고 유혹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평범한 인간 이상의 인간이 되기를 거절 하셨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말씀에 의지하고 순종하는 태도를 견지하셨지요. 예수님은 이른바 "메시아콤플렉스"에 걸린 분이 아니셨기에 참된 메시아이셨다는 역설입니다.

요즘 우리 성공회에 새로운 선교의 바람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성령의 바람입니다. 그런데 자칫 공연한 부담감을 가지시거나 이를 역투사해서 냉소적인 태도로 바꾸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믿음을 갖는 것은 내가 그저 온전히 내가 되는 일입니다. 누구의 강요도 아니고 어떤 명분의 유혹도 아니라 자연스레 내가 하느님의 사람인 것을 깨닫고 감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기쁘게 감당하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지는 전도와 선교사업도 하기 싫지만 참고 억지로 해야되는 과업이 아닙니다. 그래서야 제대로 전도가 될 리도 없습니다. 우선 먼저 주님의 은총 안에서 내가 나인 것을 감사하고 만족하는 일이 우리의 믿음으로서 중요합니다. 그러면 그런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주님의 기적이 시작됩니다.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을 세상적인 가치의 잣대로 평가할 수 없듯이 우리도 우리 자신과 우리 이웃을  세상의 가치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전도도 그것의 성공과 실패가 우리에게 달린 것처럼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참되게 경험한 것, 진실로 고백하게 되는 것을 전할 따름입니다.
“... 듣든 안 듣든 내 말을 전하는 자가 저희 가운데 있다는 것만은 알게 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에제키엘이 들은 말씀을 우리도 듣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게 머무르도록 하려고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나의 약점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약해지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며, 모욕과 빈곤과 박해와 곤궁을 달게 받습니다. 그것은 내가 약해졌을 때 오히려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 바울로 사도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살아계시고 그 분의 세계 안에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 우리의 소명을 의식하는 삶 가운데 우리의 약점과 한계는 바로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의 통로라는 것, 이것을 신뢰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고 이 믿음을 삶으로 경험하고 드러내는 일이 우리의 기적입니다.✠

 

<강론초록2>

                        소명을 사는 인생, 기적의 주인공 (6:1-13)

 

모든 일에 하느님만을 의지하기로 결심한 성직자의 마음 속에도 여전히  믿음이 ‘기적’을 부르는 도구가 되기를 바라는 욕심이 있습니다. 답답하고 고통스런 문제들이 기적적으로 해결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로또 복권이 주님의 은총으로 1등에 당첨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그건 은총의 문제라기보다는 어차피 수백만분의 1의 확률 문제입니다.^^

시한부생명의 환자가 주님의 은총으로 당장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정말 주님께 청하고 싶은 기적입니다! 또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는 사례이구요. 저는 정말로 조아무개 목사와 같은 믿음과 능력이 없어서 병으로 고통 받는 교우를 낫게 할 수 없음이 가슴 아픕니다. 하지만 저는 또 다른 기적의 체험이 있고 제게도 참다운 기적의 능력이 허락되었음을 깨닫습니다. 최근의 예를 들자면 우리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교우가 생의 마지막 병상에서 제게 “신부님, 저는 정말 기뻐요. 제 삶의 이유를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 한 인사를 기억합니다. 이 믿음과 고백이야말로 “기적”이 아닙니까? 사실 성서에서 ‘기적’의 본래 의미는 오늘날 과학시대를 사는 우리의 기준으로 본 ‘초과학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당시의 신앙 기준으로 ‘하느님이 함께 하신 일, 하느님이 일으키신 일’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고향 나자렛에서 배척을 당하십니다. 마을 사람들은 자기들이 너무나도 뻔히 잘 아는 인물인 예수가 그토록 위대한 가르침과 사역을 행하는 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맡기신 소명을 깨달은 ‘사람의 아들’ 예수가 아니라 고작 ‘제법 잘나가는 한 동네사람’ 예수로 대하려 했던 것이죠. 예수가 애당초 명문가 출신의 랍비나 세도가였다면 상황이 달랐을까요?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 없음을 이상하게, 의아하게, 놀랍게 여기셨다고 성서는 전합니다. 무슨 ‘믿음없음’ 일까요?

예수님께 ‘믿음’이란 하느님께서 우리 인생을 부르시고 우리와 함께 해주신다는 깨달음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믿음이야말로 인간을 구원한다고 아셨기에 그 믿음을 가르치셨고 고난의 십자가의 길을 그 믿음으로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소명을 사셨고 사명을 이루셨습니다.

인생의 타고난 조건들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유로운 결심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일이 우리 생을 결정짓습니다. 세례를 받으시고 하늘의 음성을 들으시며 예수님은 더 이상 목수의 아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세워 세상에 보내십니다. 그들도 마찬가지,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주님의 기적”을 세상에 보여주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도 소명을 깨닫고 사명을 이루어 가며 하느님의 기적을 깨닫고 체험하길 원합니다.✠